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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3) ─ 입을 앙다물고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4.21|조회수439 목록 댓글 4



 강유위



 강유위는 광저우 출신의 인물로, 주차기(朱次琦)라는 인물의 제자가 되어 불교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주차기는 '춘추공양전'의 공양삼세설(公羊三世說)에 조예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쇠란(衰亂)의 시기를 맞아, 승평(昇平)의 시대를 거쳐, 태평(太平)의 시대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공양삼세설입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위험하게 들릴 수 이는 이야기였습니다.


 단일 인물로 그 어떤 존재보다 청제국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홍수전은, 도광 16년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육용사(六榕寺)라는 곳에서 주차기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강유위가 주차기를 만났을때는 이미 주차기는 일흔이 넘었습니다. 고령 때문인지, 혹은 강유위 자체가 그때부터 과격한 편이었는지 주차기는 강유위에게 별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강유위를 가장 자극한것은 바로 홍콩 여행이었습니다.


 비록 중국이 지금 서양 열강에게 굴욕을 당하고 있지만, 물질의 힘에서 우위에 있다고 그것이 절대적인 우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힘이 강한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중국이 힘은 서양에 미치지 못하지만, 정신만은 더 낫다. 이것이 바로 그때까지 전통적인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이었지만, 강유위는 홍콩에서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양의 것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강유위는 유럽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번역서를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3년간 홍콩에서 시간을 보낸 강유위는 잠시 상하이에 들러 열강의 조계를 살펴보고, 베이징으로 떠났습니다. 1888년, 30세의 강유위는 정치 개혁에 관한 상서를 올렸습니다.


 중국이 변하려면, 서양의 용(用)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마땅히 체(體)의 우수한 면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물론 몽땅 받아들이는것은 아니고, 제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상과 같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게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보인 것이 바로 정치제도 입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정치제도만은 서양이 중국보다 합리적으로 보였고, 이를 바꾸려고 하는것이 바로 변법이었습니다.


 1888년, 30세의 강유위는 정치 개혁에 관한 상소를 올렸습니다. 물론 진사도 합격하지 못했던 상황이었기에 강유위의 상소는 간단히 묵살되어버렸고, 강유위은 자신의 논지가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했다며서 더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변법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변법을 실행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것은 무엇인가? 강유위는 이것이 유학때문이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유학은 잘못된 학문인가? 강유위은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유학은, 공자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한 것이 아니다."


 즉, 공자가 말한 유학의 본질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대는 이를 올바르게 계승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해서 왜곡되었단 말인가? 강유위는 이 책임을 전한을 멸망시킨 왕망에게 돌렸습니다. 왕망은 자신의 찬탈을 그럴듯하게 꾸미려고 불리한 내용을 왜곡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강유위는 사기, 한서, 후한서를 인용하여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라는 저작을 작성했습니다.


 당연히 이는 엄청난 논란을 불어일으켰습니다. 왕망이 전한 왕조를 찬탈한것은 강유위의 시대로부터 1,900년 전의 일입니다. 지난 1,900년간 쌓아온 유학의 보루가 사기꾼의 손에 위조된 발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것입니다. 반대파들은 이 책을 불태우고 강유위의 사상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면에 강유위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앞에 나서서 강유위를 변호했습니다. 논란 끝에 강유위가 직접 신학위경고를 불태우는것으로 소동은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종이 위의 글을 지운다고 머리 속에 들어있는 사상까지 불태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강유위는 다시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라는 저서를 작성했습니다. 공자는 인류의 스승이자 위대한 성인이며,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현대에도 많지 않고, 당대 중국에서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어째서 성인으로 불리울까? 물론 공자가 뛰어난 가르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공자의 가르침은 뛰어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공자가 성인임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여겼고, 또 태어나서면서 공자는 성인이었다고 여겼습니다. 본래부터 성인이었던 공자가 했던 말이기에, 그 말은 좋은 말이고 공자는 성인입니다. 하지만 강유위는 공자는 태어나서부터 성인은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공자는 그때까지의 나쁜 정치, 그리고 그 뼈대가 된 불합리한 제도 등을 고치고, 또 고치고, 또 고쳐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제대로를 만들고, 인간의 생활을 위대한 인륜의 기초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때문에 공자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강유위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공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격화를 부정했을 뿐이며, 더 나아가 퇴폐한 제도를 고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그리고 그 강유위의 제자인 양계초는 1873년 생으로, 강유위 보다 15세 연하였습니다. 그는 고작 17세의 나이에 향사에 급제하여 거인이 된 인물로, 말하자면 처음부터 천재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숙한 천재는 자신이 있던 명문 학교인 학해당의 낡은 교육에 실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1890년 무렵, 강유위는 만목초당(万牧草堂)이라는 이름의 서당을 광저우에 열고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양계초의 친구였던 진천추(陈千秋)는 양계초가 강유위의 강의를 듣게 했습니다. 양계초는 강유위의 강의를 처음 듣고 온몸을 감싸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한꺼번에, 옛 보루를 모두 잃다."


 양계초는 그 순간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양계초는 그동안 자신이 익히던 학문을 보루로 비유하였는데, 강유위는 그것을 모두 부정했던 것입니다. 양계초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17세의 나이에 진사가 되게 만들어준 자신의 학문을 전부 버려 버리고 강유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문제의 신학위경고는 바로 이 무렵에 쓰여졌으며,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에서 양계초는 이것이 순전히 강유위 혼자만의 저작이 아닌, 자신과 진천추가 도와서 완성 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굳이 따지자면 요절한 진천추가 더 공헌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진천추가 빨리 죽어버렸기 때문에, 양계초는 이후 강유위의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라고 해서 둘이 같은 개성의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격적인 면에서 둘은 차이점이 많았습니다.


 강유위는 자신이 관심이 있는 한가지 분야에만 깊게 파고들었고, 때로는 신들린 사람처럼 굴었습니다. 그는 대부분 사색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이에 비해 양계초는 모든 일에 관심이 많았고, 이때문에 하나를 깊게 파고들진 못했으며, 변덕이 심했습니다. 강유위에 비하면 양계초는 대단히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도 이를 인정해서 딸에게 '나는 참을성이 없는데 이것은 배우면 안된다.' 고 충고했습니다. 


 강유위에 골방 속의 학자에 가깝다면, 양계초는 세상에 달려드는 저널리스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양계초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저서 중에 하나는 이홍장 평전등이 있습니다. 양계초는 여기서 이홍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퍼부었지만, 그러나 총탄을 맞으면서도 나라를 위하는 이홍장의 모습이나 소인배들에게 몰리면서 비난받는 이홍장의 모습에 깊은 연민을 표시하면서, 이홍장에 대해 터무니없이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훗날 이홍장이 양계초와 같은 변법파 중에 몇명의 가족을 죽이기도 했는데도 말입니다. 



 이 두명이 다시 상경했을때는, 청나라가 청일전쟁 패배와 이후 대만 등을 할양하는 문제때문에 시국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여기서 양계초는 수완을 발휘해서 수백명의 서명을 모았고, 강유위는 이를 바탕으로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거상서(公車上書) 입니다.


 공거상서의 내용 자체는 교육을 보급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라는 온건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신학위경고 때와 같은 난리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서명자들이 수험생이어서 상소를 올릴 자격이 없다고 하여 중간에서 수리가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수백명의 서명을 받은 상소가 올라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공거상서는 세간의 화재가 되었고, 얼마 안 있어 회시 합격자 발표에서 강유위는 자신이 진사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양계초는 여기서는 낙방했습니다.


 강유위가 진사에 합격한것이 음력 3월입니다. 강유위는 이것을 위해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는듯이, 4월이 되자마자 광서제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5월 달에도 그는 상소를 내었고, 보다 내용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더욱 사색과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강유위가 공부를 하다보니, 딱히 서양이라고 처음부터 뛰어난 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열심히 노력해서 '변법'을 하다보니 뛰어난 제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본을 보자 약체라고 생각했던 일본의 대약진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일본 역시 노력해서 '메이지 유신' 이라는 변법을 시행했기 때문에 강한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중국도 노력하면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습니다.


 강유위는 1897년, 보다 내용을 매끄럽게 가다듬어 다섯 번째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막연한 내용이 아니라 러시아와 일본을 견본으로 삼아, 헌법을 만들고 국회를 설치하자는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상소는 중신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어 찬반양론의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논의라는것이, 일단 화제가 되어야 하는것이 첫번째 선제조건이라는것을 생각하면 강유위의 상소는 성공한 셈입니다.


 강유위를 황제와 먼저 만나게 하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공친왕은 우선 대신들이 강유위를 먼저 만나보자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옹동화(翁同화), 이홍장, 영록(榮祿) 등이 총리아문에서 강유위와 대면했습니다. 영록은 강유위의 제안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


 "조종(祖宗)의 뜻은 바꿀 수 없다."


 이것이 영록의 생각이었지만, 반면에 옹동화는 강유위의 제안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그는 이후로 강유위의 은근한 후원자가 되었는데, 이홍장의 경우는 변법 자체에는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1898년 광서제는 이홍장이 강유위의 변법을 방해했다면서 총리아문의 직책에서 파면했습니다. 이것은 이홍장이 서태후와 연줄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홍장 본인은 변법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를 해도, 너무 과격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반대하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홍장과 미국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그랜트. 그랜트에 천진에 한번 왔을때,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이홍장은 그랜트를 후하게 대접하면서 친구처럼 생각했습니다. 이홍장은 이후로도 미국 공사에게 그랜트의 안부를 여러번 물었습니다.


 쑨원이 머나먼 런던에서 기자들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강유위가 자신의 방에서 상소문의 내용을 가다듬고 있었을때, 전대의 호걸이었던 이홍장은 청일전쟁 이후 한동안 평범한 중신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알렉산드르 3세가 죽고 니콜라이 2세가 즉위했습니다. 청나라느 전대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조문사절을 파견했는데, 조문사절은 이후 프랑스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곧이어 벌어진 대관식에 다시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공사 카시니는 난색을 표시했습니다. 조문 사절을 다시 축하 사절로 보낸다는것은 유럽의 외교에서는 실례에 가까운 행위였고, 무엇보다 직책이 낮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친왕과 군부의 최고 원로가 그 자리에 참석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균형을 맞출만한 급의 외교가라면, 마땅히 이홍장 밖에 없었습니다. 일생 처음으로 갔던 외국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총알을 맞았던 이홍장은 이제 다시 러시아로 떠났습니다. 이홍장의 나이는 74세였고, 그는 어디서 자신이 죽던 상관없도록 관을 하나 챙겨서 떠났습니다. 이홍장 수준의 인물이 러시아에 왔는데, 그를 그냥 보내는것은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이홍장과 협상을 맺기를 원했고, 이홍장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카시니 공사는 밀약에 대한 이야기를 이홍장에게 전했고, 이홍장은 서태후를 만나 훈령을 듣고 양해를 얻고 나서 떠났습니다. 이홍장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유효기간 15년의 비밀동맹조약을 맺게 하였는데, 이것은 군사적인 동맹이었습니다. 조약 내용 중에는 일본이 러시아나 청나라, 조선을 공격한다면 서로가 일체의 병력으로 지원할 것 등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러시아가 흑룡강과 길림을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철도를 개설할 수 있도록 허가했습니닫.


 하지만 나중에 러일전쟁에서 보듯이, 러시아가 전쟁을 벌일때 청나라는 조약을 지키는 대신 중립으로 남았습니다. 러시아가 노골적으로 침투해왔기 때문에 조약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하간 철저하게 비밀이었던 이 조약은 상하이의 한 언론이 뜻밖에도 내용을 입수해 신문에 게재하여 알려졌습니다. 러시아 궁전의 내부인을 거금으로 매수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내용이 공개적인 내용이 된것은 1910년 이홍장의 아들이 델리 텔레그래프에 전문을 폭로하였을때입니다. 이홍장은 이후 다른 사람들이 밀약에 대해 물어보면 그저 둘러대었습니다.


 큰일을 하게 끝낸 이홍장은, 그대로 귀환하지 않고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74세의 나이로 세계일주에 나선 것입니다.  


File

 이홍장과 영국의 솔즈베리 수상, 그리고 외무장관 커존(Lord Curzon)



이홍장은 독일에서 황제가 연 초대연에 참석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육군, 킬에서는 해군의 훈련을 참관했으며, 크루프 회사의 병기창을 견학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여왕과 황태후에게 초대받아 궁에서 발레를 감상했으며, 벨기에로 가서는 국왕을 만났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대통령에게 삼국간섭으로 인한 요동반도 반환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홍장은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을 만난 이홍장은 포츠머스 군항에서 열린 영국의 해상 훈련을 참가했습니다. 이홍장은 평생에 거쳐 북양군을 키웠고, 그 핵심은 해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홍장이 일생을 바쳐 키운 북양군은 청일전쟁에서 전멸했습니다. 그리고 이홍장은 영국에서 107척의 군함이 참가한, 어마어마한 위풍의 장관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았을때, 이홍장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리고 이홍장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상륙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노구를 이끌고 일본에서 굴욕을 당하고, 지금 세계를 순방하고 있는 이홍장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면서 열광적으로 환호 했습니다. 이홍장은 미국 대톨령을 만났고, 캐나다의 벤쿠버에서 미국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중간에 일본 요코하마에 잠시 들렸을때 일본 역시 환영 행사를 준비했지만, 이홍장은 일본 땅은 한걸음도 밞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습니다. 청나라 내로 돌아온 이홍장은 회의에 나가도 거의 발언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이홍장이 유럽을 여행한 목적 중에 하나는 수입 관세 인상안 문제였습니다. 독일 및 프랑스는 영국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영국의 솔즈베리 수상은 '상의하고 알려주겠다.' 고 하면서 완곡한 거절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마침 이홍장은 런던에서 글래드스턴을 만났는데, 글래드스턴은 이홍장을 만나자 기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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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이 만난 유명인사 중에는 다름 아닌 비스마르크도 있었습니다. 비스마르크도 이홍장을 환영했는데, 이홍장은 비스마르크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신이라는 자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고자 하는데, 조정의 모든 신료들이 그의 의견에 반대하고, 힘을 합쳐 그가 하고 하는 일을 방해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신이 자신의 뜻대로 일을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의 지지를 얻는 일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권력을 독차지 할 수 있는데,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대답을 들은 이홍장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현재 대신이 한 명 있는데, 군주는 누구의 말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 다 듣는 사람이라 요직에 있거나,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자들이 늘 군주의 권위를 빌려 큰일을 못하게 협박한다면, 대신은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비스마르크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습니다.


 "만약, 대신이 진실로 나라를 걱정했다면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단, 군주가 여성이라면 어떠할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만."


 이홍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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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4.21 이홍장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나보네요. 그당시 중국 황제 대리 같은 느낌.
  • 작성자신격카이사르 | 작성시간 13.04.21 이홍장이 생각보다 존재감이 매우 컸군요...
  •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3.04.22 근데 왜 나는 이홍장하고 비스마르크 사진을 보고 글을 읽으니까 푹푹푹푹 생각이 나는거냐
  •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3.04.23 양이들 앞에서도 덩치가 안꿀리는 리홍장 동지...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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