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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9) ─ 창룡출두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6.02|조회수466 목록 댓글 6



 어스름이 진 중국 대륙에서 혁명의 꿈이 그 불씨를 조용히 태우는 시기. 마치 들판을 모조리 불살라버리듯이 승천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원세개 였습니다.


 절대권력의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의 참담한 실패와 열강에 당한 수모로 체면이 꺾였습니다.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토록 이를 갈던 '유신' 을 자신으로 손으로 실행해야 할 지경에 놓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 원세개는 의화단 운동에서 그야말로 완벽한 판단을 내리면서 그 능력을 인정 받았고, 특히나 그런 평가를 내린 주체는 서양의 열강이었습니다. 이 당시 그는 열강으로부터도 상당한 평가를 받았고, 심지어 놀랍게도 원세개 때문에 변법을 실패한 양계초 마저도 이런 평가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홍장의 유산을 지금까지 계승한 사람은 원세개 뿐이다. 원세개는 이홍장이 길러낸 인물이다. 그가 장년이 되어 처음 큰 임무를 맡았을 때만 해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지금과 많이 달랐다. 그러나 깊은 공명심과 용감한 기백을 바탕으로 파격적인 행동을 한 점은 오히려 이홍장보다 낫다. 앞으로 그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할지, 그의 의지력이 어떠할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료들 중에서 자력과 명망, 재능 면에서 이홍장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인물은 원세개 밖에 없다."


 '이홍장의 유산을 계승한 사람은 원세개 뿐이다.' 실로 그 말대로, 지난 반백년간 청나라를 지켜온 이홍장이 사망한 바로 그날, 원세개는 서태후로부터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의 직무를 이행 받았습니다. 이 직함이 가지는 무게는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원세개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던 이유는 영록의 유력한 추천이 있기도 했고, 열강들의 비호 역시 그에게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련한 정치 고수가 된 원세개는 과거 조선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당장의 상황으로 인해 눈이 멀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자리가 높아지면 소위 "붕 뜨는" 일이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과정에서 현실감각을 상실해 버릴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겁니다.


 서태후는 지난 번의 사건으로 엄청난 굴욕을 당했지만, 그녀의 권세가 완전히 끝장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세개는 이런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홍장이 사망하고 그의 직함을 원세개가 이어 받은 것이 11월 7일의 일이었고, 피난을 떠난 서태후가 11월 30일 이었습니다. 원세개는 서태후와 광서제가 직례 땅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벌써 성 경계에 나가 기다리다, 그들이 오자 곧바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엎으려 맞았습니다. 일행이 행궁 가까이 오자 길에는 깨끗한 물을 뿌렸으며, 황토로 땅을 덮었고 초롱불, 횃불, 깃발, 부채 등이 줄을 지어 그야말로 눈부시게 아름다고 화려하며 웅장한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서태후는 원세개의 주도면밀함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당시 원세개의 나이는 마흔 넷. 정치인으로서는 되려 이제 풋내기에서 막 벗어나려는 정도의 나이대였지만 이미 그의 이름 석자 앞에는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참여정무대신 회판연병대신, 판리경기연병대신, 독판전정대신, 독판산해관내외철로대신, 독판진진철로대신, 독판경한철로대신, 회의상약대신 등 수많은 직함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8개국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베이징을 지키는 무위군의 전 · 후  · 좌  · 중 각 군은 모조리 섬멸되었지만, 원세개의 근대화된 무위우군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0여세의 나이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나이로 떠오른 원세개는, 그러나 여전히 서태후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베이징에 돌아온 서태후는 명목상으로 광서제와 함께 정사를 의논 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독재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원세개는 그런 서태후에게 힘을 다해 아부했는데,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는 일은 사치스러운 선물을 바치는 일 만큼 효과적인 수단도 없는 법입니다.


 어느 날, 서태후는 국고가 텅 비었으니 원세개에게 특별 기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원세개는 곧바로 마련해 놓겠다고 즉답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었던 것입니다. 원세개는 직례의 관리들을 모아 성대한 연회를 베풀면서, 넌지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돈을 빌리고 싶다는 요구에 대한 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법입니다. 관리들은 자신들도 녹봉이 제한되어 있어 형편이 어렵다고 하면서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습니다. 답답한 지경에 놓인 원세개는 무슨 수단이 없을까 궁리하다, 묘한 꾀를 떠올렸습니다.


 우선 원세개는 천진의 울장후(蔚長厚) 표호(票號) 집사를 불러들였습니다. 표호는 청나라 시기 환전 업무를 담당하던 상업 금융기관 입니다. 원세개는 집사에게 자신이 지금 공금을 저금하려고 하는데, 이자를 3푼으로 하면 안되겠느냐고 먼저 운을 떼었습니다. 집사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으리, 저희 은행에 저축하면 이자가 많아야 8리 입니다. 3푼을 요구한다면야 저희는 감당을 할 방법이 없지요."


 원세개는 정색하면서 말했습니다.


 "이건 공금이니 다른 돈과 똑같이 이야기해선 안 되는 일이외다."


 "저희 표호는 늘 관과 거래를 해 왔고 예치된 공금도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나으리는 30만 원, 또 다른 나으리는 20만 원, 일부 도원, 총재, 통령들도 모두 저금이 있는데 합하면 100만원 정도 됩니다. 이자는 대부분 5리, 6리, 7리, 8리 등으로 다양하지만 1푼을 넘어간 적이 없습니다."


 원세개는 머리를 가로저었습니다.


 "나는 못 믿겠는데."


 "나으리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제가 장부를 가져 올 테니, 한번 이를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집사는 장부를 가지고 왔는데, 원세개가 막 장부를 살펴보려는 순간 부하가 갑자기 들어와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습니다. 그러자 원세개는 집사에게 말했습니다.


 "장부는 여기 두고 당신은 먼저 돌아가는게 좋겠군. 내가 다 본 다음 돌려 주겠소."


 집사는 별 의심없이 알았다고 하며 돌아갔습니다. 집사는 다음 날 총독 관저에 와서 장부를 달라 하였지만, 수위는 총독께서 아직 다 보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일개 집사가 총독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고, 총독일도 바쁠 테니 볼 시간이 안날 수도 있어 집사는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몇 번 오가는 사이에 한 해가 지났습니다.


 새 해가 밝자 관리들은 늘 하던 대로 총독에게 와서 신년 인사를 올렸습니다. 원세개는 게중 장부에서 이름을 본 관리들이 다 온 것을 보고 연회를 베풀었고, 이때 다시 한번 넌지시 돈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관리들은 이전 처럼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 했습니다. 그러자 원세개는 안색이 흐려지면서 분연히 말했습니다.


 "내 듣건데, 당신들은 모두 거금을 울장후 표호에 저금하고 있다고 들었소. 그런데 왜 나에게는 자꾸 우는 소리를 하시오?"


 관헌들은 당연히 자신들은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면서 변명했습니다. 이에 원세개는 소매 속에서 장부를 꺼내 들이밀며 따졌는데,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놀랍고 당혹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사실 저금 한 돈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전에 거짓말을 한 죄를 추궁 받을 테니 말입니다. 


 원세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긴, 내 생각에도 여러 분들에게 이런 더러운 돈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이 돈은 나쁜 상인들이 여러분들의 이름을 빌려 저금한 것일 테지요." 


 그러고는 울장후 표호의 집사를 불러들여 무섭게 질책했습니다. 


 "내가 지금 여러 어르신들에게 일일히 물어보았는데, 모두 다 그런 거액을 저금한 일이 없다 하시더군. 아마 네가 마음대로 이분들 이름을 차용한 것 같은데, 마땅히 법에 따라 엄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집사는 대략 돌아가는 모양새를 눈치채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원세개는 쉴 틈도 없이 선언했습니다. 


 "이 저금들은 다른 사람의 것처럼 가장한 돈이니, 당연히 관에서 몰수해야 하는 돈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변명할 사이도 없이 집사에게 사람을 딸려 돈을 가져오게 했는데, 그 금액이 백만 원이나 되었습니다. 관리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원세개는 이 돈을 한푼도 자신이 떼어먹지 않고 모두 서태후에게 바쳤습니다. 그는 서태후는 물론 영록에게도 거금을 바쳤고, 영록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경친왕 혁광에게도 양사기를 시켜 10만원 짜리 수표를 뇌물로 바쳤습니다. 이후 영록이 죽고 그 후임으로 혁광이 군기처의 수장이 되자, 원세개의 권세도 더욱 높아졌습니다.


 원세개는 혁광과 그 부인의 생일잔치 비용, 아들딸의 결혼 비용, 손자들의 생일, 돌잔치 비용 등을 모두 북양에서 대었습니다. 혁광은 어마어마한 뇌물을 받고 완전히 녹아내려 원세개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단순히 윗선에 뇌물을 바치는 일에 멈추지 않고, 원세개는 상비군을 훈련시키며 군대의 힘을 키웠습니다. 1902년, 그는 외국의 징병제도를 본받아 훈련 규칙과 신병 모집 요강을 수정했고, 신병 6천명을 모집하여 스스로 총책임자를 겸했습니다. 원세개의 신식 기관은 각 성 군사 기관의 표본이 되었는데, 이와 동시에 상비군의 각종 제도를 제정하고 군대를 사입병, 예비 부대인 속비병과 지금의 예비군 격인 후비병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즉 군인을 현역과 예비역으로 구분하고 군대를 여러 단계로 구성하여 새로운 근대 군대 제도의 규범으로 개혁한 것입니다.


 그 이듬해 원세개는 조정에 기존의 병부 외에 연병처를 설치하자고 건의 했습니다. 원세개의 뇌물은 먹은 혁광은 이 일을 책임지고 추진했는데, 표면상으로는 연병처의 대권은 만주족의 손에 있는 듯 했지만 실질적인 요직들은 서세창, 단기서, 유영경, 왕사진, 풍국장, 육건장 등 원세계의 직계 심복들이 가득했습니다. 연병처가 설치된 후, 원세개의 북양군의 훈련 방법을 참조하여 세부적인 규정이 제정되었고, 이때부터 새로운 군대 훈련 제도가 전국적으로 통일되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북양 신군의 열병식때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왕사진, 풍국장, 원세개, 철량, 조곤, 언돈원에 둘째줄 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는 단기서입니다.


1905년까지 원세개는 북양 상비군 6개 진, 즉 육군 제1진에서 6진까지의 편성과 훈련 계획을 완성했습니다. 여기에는 병사 8, 9만명이 있었는데 이들의 자질은 이전의 군대에 비해 월등했습니다. 게다가 각종 군사학당을 설립해 최고 군권을 장악했고, 고급 장령들은 모두 원세개의 직계 심복들이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배치되었습니다.


 군대에 손을 대면서 그는 경제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평소에 원세개는 기업을 일으켜야만 백성들의 생황은 부강해지고, 재정 수입이 증가하여 나라도 강해지며, 외래품에 대항 할 수 있어야만이 나라 돈이 외국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조정에서 지시한 기업 진흥 정책은 적극적으로 집행했습니다. 원세개는 직례 공예총국을 창설하고 각급 관리들에게 지방 유지들이 공업과 농사 기술을 연구하게 권하도록 했으며, 이는 효과를 발휘해 직례의 상공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무엇보다 원세개가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교육 제도 입니다. 본래 과거 출신이 아니었던 원세개는 과거 출신 관리들의 모멸을 받았고, 이때문에 과거제 자체를 증오했습니다. 그리고 원세개가 살펴보니 ─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신을 비롯해 ─ 과거를 통하지 않은 인물들이 오히려 뛰어나기도 하고, 과거 급제를 한 관리들이 무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거 시험에서 필요하는 학문들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점은 둘째치더라도, 기본적으로 과거 제도는 '몇몇을 위한' 제도 입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과거 공부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세개는 한 나라의 부강은 인재에 달렸는데, 인재는 학교에서 길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청나라 학교 제도의 발전이 더딘 것은 과거제 탓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장지동

 인재를 배양하는 곳이 학교인데 인재 선발은 과거에 의지하니 입신양명을 꾀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몰려 학교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기에, 원세개는 조정에서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장지동의 협조를 얻어 1903년 3월 10일, 과거제가 나라에 미친 해악을 진술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해마다 줄여 폐지할 것으 주장하면서, 이전에 향시를 통과한 사람들이나 학생들은 형편에 따라 출로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1906년부터 과거를 세 번만 더 치루고 폐지하겠다고 결정했는데, 원세개는 조이손, 장지동 등과 함꼐 1905냔 8월 31일 다시 상소를 올려 지금의 형세는 대단히 위급하므로 즉시 과거제를 폐지하고 학교를 보급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이에 명을 내려 병오과거부터 모든 과거를 폐지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지난 천여 년 동안 관료를 선발하던 큰 줄기 하나가 사라졌고, 신식 학교 교육이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원세개는 자신의 공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마다 항상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과거제를 폐지한 것이 내 일생 중에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다."


 원세개는 학무처를 설치하고 전 성의 교육을 감독 관리하는 행정지도기관을 만들었으며, 명령을 내려 각지에 권학소, 선전처, 독보소 등을 세워 국민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하고 각 지방에서는 유지들이 여러 조로 나누어 일본에 가서 교육현장을 참관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장학관을 파견하여 관청과 유지들이 만든 학교의 정황을 파악 하여, 중앙과 지방이 서로 호응하는 학교 운영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학교를 만든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는 동시에, 가장 부족한 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양학을 공부한 교원들을 물색하고 사범학교를 세웠으며, 일본의 사범학교에도 학생들을 파견했습니다. 원세개의 적극적인 정책의 효과를 가장 잘 보는 곳은 물론 직례였습니다. 1907년의 통계에 의하면 직례의 학교는 8,723개였고 재학생은 16만 명이었는데 전국에서 두번 째인 동시에 교육의 기반 설비는 1위를 차지했습니다.


 원세개는 새로운 정책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이를 민첩하게 밀고 나가 조정에서 여러 번 표창을 받았고, 각 성에서도 직례의 성과를 배우기 위해 관원을 파견하여 정책 조사를 하였습니다. 또한 의화단 운동 이후로 열강(특히 영국)으로부터 효과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이유로 호감을 받았으며, 유능한 행정가이자 심지어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공적을 세운것처럼 보이는 당대 중국의 (미래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게도)가장 유명한 근대화론자로 여겨졌습니다. 원세개의 야망은 점차 무르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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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 작성시간 13.06.02 분명 자기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만 살아온 거지만, 그래도 원세개가 나름 괜찮긴 하군요.
  •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3.06.02 나중에 황제노릇 하지않고 중화민국 만들어서 이 사람이 쭉 지도했으면 결과가 어땠을지 궁금하네? 근데 그래도 힘들었을듯. 몇십년동안 계속 삽질했겠지
  • 답댓글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 작성시간 13.06.03 황제노릇이 정말 뻘짓의 최고봉인듯;;
  • 작성자▶◀ 치우승천 | 작성시간 13.06.03 그 황제노릇만 하겠다고 안 했어도 말년에 그렇게 욕을 먹진 않았으 텐데...
  • 작성자튜어니즘. | 작성시간 13.06.03 청나라 사람들의 변발은 언제 없어졌나요?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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