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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11) ─ 우연과 우연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6.23|조회수519 목록 댓글 3



의화단 운동이 전개되고 나서 시행된 일련의 개혁 조치들은 분명히 수치상의 향상과 통계적 안정을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무의미한 계획' 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정도였지만, 급격한 개혁과 발전이 늘 그렇듯이 이는 양극화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대적이고 도시화된 신사들에 의해 추진된 개혁의 방안은 주로 부유하면서 힘 있는 자들의 편으로 기울어졌습니다. 해외 유학생을 배출하였던 교육개혁 역시 주로 신사나 명망 있는 가문의 아이들에게 영합하고 있었으며, 도시 거주자들에게 편리했던 새로운 학교는 농촌의 대중에게는 너무 비쌌습니다. 지방자치기구는 지방신사에 의해 장악되었고 근대적 경찰과 군대는 엘리트의 이익을 지키기에 바빴습니다. 


중국은 분명히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촌의 상황 역시 계속해서 악화되고만 있었습니다. 유교의 도덕적 관습과 중앙관료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지주와 고리대금업자의 약탈관습은 전혀 제어할 수가 없었으며, 상업적 기회가 신사층을 도시로 유인하자 부재지주(不在地主) 제도는 농촌의 소작 조건을 악화시켰습니다. '경제적 발전' 은 농민의 복지까지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농촌의 빈곤은 점점 가속화 되고 있었습니다. 근대적 국내기업과 외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은 전통적으로 농촌에 보완적이었던 지방 수공업을 재기 불능의 불구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공업은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지만 농촌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도시로 쏟아져 온 피난민들을 모두 흡수 할 수는 없었습니다. 실업과 비참한 노동조건 ─ 이러한 사태를 한발 먼저 겪은 유럽 산업혁명의 초창기처럼 ─ 은 불행과 무질서를 전염병처럼 확산시켰습니다. 구식 장인과 육체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앗아간 기계에 분노하였으며, 동시에 그 기계를 중국에 가져온 외국인들에게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농촌은 붕괴되어 화적의 노략질과 폭동이 일어나며, 근대적 노동계급은 불만에 가득차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에 신속하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 이는 바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에는 충분한 조건입니다. '혁명가' 와 '개화파' 들은 점점 다가오는 그때를 위하여 끝없는 논쟁을 되풀이 했습니다.




그동안 쑨원은 끝없는 시도와 실패를 되풀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정보장교를 설득해 자신의 일을 돕도록 유도했지만, 중국 정부의 항의로 이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쑨원은 끝없이 외국자본가들에게 호소를 계속했지만 전통적인 제국주의가 과연 중국의 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쑨원은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중국이 조금이라도 산업적으로 진보한다는 표징이 있기만 한다면, 서양자본가들은 소위 '공업황화론'으로 비명을 지르게 될 것' 이라고 확신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쑨원을 계속해서 도와주었던 사람들은 바로 화교들이었습니다. 게중에서도 부유한 화교들은 쑨원을 실망시키기만 했지만 점원, 작은 가게의 주인, 행상인, 그리고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노동자들은 선뜻 그를 위해 헌금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습니다. 1905년을 지나는 시점부터 일본 역시 중국의 학생활동가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국주의의 후발 주자인 일본으로서는 그동안 조선이나 중국의 혁명가들을 지원하여 기존의 체제를 흔들어버리려는 것이 일종의 대전략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남부 만주에서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이권을 차지하고, 한국에서 일본이 가지는 지위에 대해 다른 열강들이 암묵적으로 인정을 하게 되자 더 이상 혁명가들을 지원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황흥


안좋은 분위기가 이어지며 쑨원은 혁명파 내부에서도 논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장병린은 쑨원의 외국 편향적인 태도에 공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쑨원이 혁명자금을 일본과 거래하여 횡령했다고 비난했으며, 인기 있던 호남 출신의 혁명가 황흥도 혁명 깃발의 도안에 대한 논쟁때문에 쑨원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송교인은 쑨원이 중국의 남쪽을 주로 타켓으로 삼는데 미심쩍어야하며 만주로 떠나 만주 지역의 토비와 마적들을 중심으로 폭동을 조직하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분열은 막아야 한다' 는 분위기 때문에 결국 이들의 갈등은 봉합되었습니다. 쑨원과 황흥은 이후 여러 차례 청조에 대한 봉기를 계획하고 실현되었으나, 그때마다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들 동맹회의 활동은 남부 각 성의 관료들에게 커다란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어떤 자는 몇 주일 동안이나 집 밖으로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 하게 만들었지만, 어찌되었건 목표로 하던 '청조의 전복' 에는 아직 턱없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의 전복이라는 목표를 실제로 달성한 것은 동맹회와는 거의 연계가 없었으며, 쑨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군대였습니다. 이들이야 말로 쑨원이 항상 바랬으며 결국은 그가 통제할 수도 없었던 연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11년 10월 10일 밤, 우창에서 일어난 봉기는 혁명파 인사들의 사전 계획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사병들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반란 자체가 우연성이 다분했고, 이런 우연을 실제 봉기로 이어지게 한 것 역시 우연성이 다분했습니다. 역사의 필연성을 강조할 수도 있겠으나, 이 봉기의 발생을 우연이라고 말하는것은 이미 그 전에도 비슷한 일이 같은 부대에서 발생했다가 조용히 묻혀버린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9월 24일 밤, 우창 신군의 난후 포병대에서도 사병들의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는 그저 한발의 총성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당시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되었던 다툼은 격투로 번졌고, 흥분한 사병들이 무기고에서 카빈총 십여 자루를 꺼내 사관실을 향해 난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은 곧 기병대에 포위되어 진압되었습니다.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도 주동자만 추방되고, 나머지는 "모두 형제나 마찬가지다." 라는 말로 문제 없이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불과 보름뒤 같은 우창 신군의 공정영 ─ 건설, 측량, 폭파 등의 임무를 맡은 부대 ─ 에서 벌어진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지만 후자는 다른 사병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호응한 반면, 전자는 다들 팔짱 끼고 구경하는것으로 끝났습니다. 어처구니 없을 수도 있지만 두 사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라는 이 정도입니다. 가히 "일의 형세가 사람보다 강하다" 는 말 그대로 였습니다.


역사적인 신해혁명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10월 9일, 혁명파 인사들은 한커우(漢口)의 러시아 조계지에서 폭탄 제조 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폭발을 일으켜 거점이 탄로나는 사건을 겪었습니다. 관군은 혁명파 인사들의 이름이 담긴 명부와 서류, 깃발과 자금을 모조리 빼앗았으며, 호광총독 루이청(瑞消)은 이를 바탕으로 여러 거점을 기습해 혁명파 인사를 스무 명 넘게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혁명파 인사들은 세 사람들이 사형당하고 목이 잘려 걸어졌으며, 루이청이 곧 대대적인 수색을 실시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문제는 신군 내에서도 혁명파 인사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전날의 일로 긴장감은 갑자기 높아지자, 혁명파 인사들, 그리고 이들과 관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혁명파의 명부는 혁명파 내부에서 만든 만큼, 그 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10월 10일 저녁 7시, 마침내 수십여명의 봉사들이 소리 높여 반청을 외치고 무기고를 습격하자, 마침내 지난 수십여년간 수없이 무위로 돌아갔던 혁명의 불꽃이 터져올랐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 통에 많은 사람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소리를 질러대었고, 수십여명은 눈깜짝 할 사이에 수천여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는 순전히 한번의 분위기 때문에 이루어진 인파였고 일이 이렇게 풀리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신해혁명 성공 후, 한 혁명 주도자는 사건을 일으키기 전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신군 병사들 가운데 대다수가 심적으로는 혁명을 지지하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주저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궁여지책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폭탄을 터뜨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그들을 위협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여기에 봉기를 진압해야 할 청나라의 인사들이 줄행랑을 놓는 바람에 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싱겁게 진행 되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우창 봉기 이전, 혁명파 인사들은 우한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점입니다. 설사 봉기가 성공한다 해도 정부군이 사방에서 포위한다면, 지형이 평탄안 우한으로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게 그 이유 였습니다.


그러나 "정성 들여 심은 나무에선 꽃이 피지 않고, 무심코 심은 버들가지가 자라 그늘을 드리운다" 는 말처럼 일은 황당할 정도로 수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약 보름 동안 관군의 반격이나 포위공격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북양군은 뒤늦게 반란 진압에 나섰지만, 이미 각지에서는 우창의 봉기에 호응하여 잇달아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보름의 시간동안 우창의 군사들도 충분히 무장을 갖췄습니다. 우창에 있던 만주족들은 대부분 달아났기에 그들의 집을 털어보았더니, 엄청난 재물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무기도 충분히 갖춰져 있어 몇개 사단을 무장시키고도 남을 정도였기에, 수천여명에 불과하던 봉기군은 며칠 만에 2만 5천여명을 넘는 대군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숫자가 불어나자 실제에 부풀려진 정보들이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고, 우창 봉기군의 과장된 전력에 겁을 먹은 순무들은 진압군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지방의 관리로 있었던 천쿠이룽이라는 관리는 그때의 기세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초기에 서둘러 군대를 보내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간을 끄는 바람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쑨원은 콜로라도주의 덴버의 레스토랑에 있었습니다. 10월 중순으로 계획된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쑨원은, 아침 식사를 기다리며 신문을 읽고 나서야 우창 봉기에 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누구도 예측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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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3.06.23 흠... 이제 정말로 거대한 늙은 용의 숨통이 끊어지려 하는군요. 언제나 그렇듯이 잘 보고 갑니다^^
  • 작성자별사랑3 | 작성시간 13.06.24 좋은 글 늘 감사 드립니다. 중국 현대사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1편부터 111편까지..정말 한편의 서사시로군요.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6.24 아 이제야 그 영화의 장면이 이해가 가는 군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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