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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명 제국의 황혼(3) ─ 남벌(南伐)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5.19|조회수988 목록 댓글 7

Nanjing is located in China


이자성의 반란군을 물리치고 지리멸렬해질때까지 그들을 짓밞은 청왕조와 오삼계는 이제 사천의 장헌충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장헌충 군은 상당히 선전을 하긴 했지만 결국은 패망했으며, 청 왕조는 적의 구분이 어렵다 하여 사람을 모조리 학살하여 문제를 없애는등 잔혹하고 야만스러운 탄압을 가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는건 본래 목적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개될듯 하기에 넘어가고, 최종적으로 모든 싸움이 끝난것은 무려 13년뒤의 일이었습니다.



본래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남경은 본래 명나라의 수도였고 주원장이 그 지역을 장악하여 거점을 불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영락제 시절에 북경으로 수도가 바뀌었고, 홍희제 시절에 남경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홍희제가 일찍 사망하여 그리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남경은 제법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고 토목보의 변때는 남경으로 천도하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남경에는 형식적이나마 작은 정부가 있었고, 이제 북경이 떨어진 이상 남경이 명나라의 남은 세력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명나라의 멸망과 숭정제의 자살, 이자성의 패망과 오삼계와 청의 연합 등 너무나 급박하게 상황이 바뀌는 순간이라 남경에 도착하는 장계들은 제때 도착하지도 않았고, 순서가 뒤바뀌어지는 일도 흔해서 이로 인한 혼란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자성이 수도를 장악하고, 명 황제가 죽고 새 황제가 즉위했다고 하는데, 새로 즉위한 황제가 이자성인가? 명 황실의 계승자인가? 그도 아니면 오삼계인가? 오삼계는 누구 편인가? 오삼계와 새로 동맹을 맺었다는 '낮선'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어린 만주족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섭정왕 도르곤, 그자는 또 대체 어떤 인물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렷품이 이 사실의 조각을 맞추어 현실을 바라볼수 있게 되자, 남경은 곧바로 전시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전겸익(錢謙益 : 나중에 말하겠지만, 정성공의 학문 스승) 등의 인물들이 남경 조정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새 황제를 즉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황족을 찾는 일은 대수로울게 아닙니다. 명 제국 전체에 황족은 8만명이 넘게 흩어져있었는데, 남경 지역만 해도 존경받을만한 황족들이 여러명 있었지만 이 시점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숭정제와 가까운 혈족의 황족을 즉위시켜야만 했던 것입니다. 곧 두명의 후보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복왕(福王) 주유승(朱由崧)은 이자성에게 살해당한 만력제의 아들의 아들이었고, 아버지가 살해당했을때 알몸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습니다. 노왕(潞王) 주상방(朱常淓)은 융경제의 손자였습니다.



황통으로 따지자면 복왕이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복왕은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고, 전겸익등은 복왕에게 "일곱 가지의 옳지 않음(七不可)"가 있다고 하여 반대했습니다.


"복왕은 탐욕, 음란, 주란(酒亂 : 술주정),불효, 학하(虐下 : 아랫사람을 학대), 부독서(不讀書), 관리에 간섭하는 악덕이 있소이다. 이는 옳지 않은 일이오."


반면에 노왕은 말끔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두사람을 두고 다시 한번 당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갈라진 당파가 동림당과 환관당이었습니다. 환관당은 환관은 아니었지만, 위충현등의 환관에게 빌붙어 승진하려 하다가 숭정제의 즉위로 일이 실패하여 남경으로 쫒겨난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고, 처음에 복왕의 즉위를 반대하던 남경의 병부상서 사가법(史可法)은 결국 위급시에 국론이 분열되는것을 막기 위해 복왕의 즉위에 찬성했습니다. 사가법은 남경의 병부상서로 숭정제를 도우러 갔다가 일이 이미 늦어버리자 돌아왔던 인물입니다. 환관당의 마사영(馬士英)이 봉양 총독을 겸해 군대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던것도 원인이었습니다.



사가법. 이 시점의 남명 정권에서는 유능한 인물이 틀림없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람 때문에 대학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리하여 복왕이 남명 정권의 황제가 되고 홍광제(弘光帝)가 되었습니다. 강남의 경제력이 중국의 중심인건 불변의 사실이었기에 청군의 공세만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과거 남송과 금나라같은 상황을 기대해볼수도 있었으나, 홍광제는 기대 이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직계 황족으로서 일체의 근로가 금지된 그는 거처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오로지 주지육림에만 빠져 지내왔던 것입니다.



청군이 언제 남쪽으로 말을 향할지 모를 그 위급한 시기에 홍광제가 처음으로 행한 조치는 놀랍게도 '숙녀 고르기' 였습니다. 홍광제는 항주 출신의 여자가 좋다고 고집하여 그 위급한 시기에 남명 조정에서는 결혼 적령기 여성을 찾아 민간의 혼인을 금지하여 여자를 뽑아갔습니다. 강남의 민심이 진동한건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이 채홍사(採紅使)들은 여러 도성들은 물론 먼 지방의 유곽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녔고, 홍광제가 처녀들과 과연 무엇을 하고 노는지 알 도리야 없지만 홍광제의 침소에서 하룻밤에 2명의 꽃따운 소녀가 죽어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남명 정부는 어찌되었건 많은 귀족과 장수들을 새로 임명했습니다. 재정 조달이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남명 조정은 관직을 마구 팔았고, 60여개가 넘는 작위를 지방의 유력한 재력가에게 내리고는 충성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인물 중에 희대의 풍운아 정지룡도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그에게 남안백(南安伯)의 작위를 내리고 남경 방어를 지원할것을 부탁했습니다.



정지룡의 입장에서 이것은 자신의 위상을 높일 기회였습니다. 정지룡은 곧바로 동생 정지봉이 이끄는 병력을 파견하였고 나중에 증명이 되지만 정지룡의 형제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그는 장강 유역의 한 거점을 막게 됩니다. 정지봉 외에 다른 남명의 부대 중 한쪽은 사가법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남명 정부의 무능한 모습에 진저리가 나서 적과 대치하는 변경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 외에는 고걸(高杰)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본래 이자성 반란군의 일파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자성의 부인인 형(刑) 씨를 건드려 명나라 조정에 투항해 온 것입니다.


본래 조정의 군대였던 자들과 반란군이었던 자들,해적이었던 자들이 엉키게 되니 서로간의 융합이 잘 될리가 없었습니다. 남명의 장수들은 서로 으르렁거렸고, 홍광제가 한심한 행보를 계속하는동안, 청나라가 움직이게 됩니다.




도르곤



천하의 도르곤 조차도 당초에는 과연 강남 지방 원정이 가능할까 의심스러웠던 모양으로, 당초에 북경의 도르곤과 남경의 남명 정권사이에서는 몇가지 문서가 오갔습니다. 그러나 남명 정권은 상상 이상으로 부패와 무능을 가지고 있었고, 도르곤은 움직이기로 결심합니다. 도르곤은 남명 정권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청은 명나라를 위해 숭정제의 원수를 잡고 간적 이자성의 뒤를 쫒고 있는데, 과연 남명의 정부라는것은 병사를 한명도 내지 않다니 이는 어찌된 일인가. 복왕 주유숭이라는 자가 즉위했다고 들었는데 그와 같은 유조가 과연 있었는가, 하고 따진 것입니다. 자살한 숭정제는 자신과 무능한 대신들에 대한 책망, 백성들의 원망에 관한 이야기만 적었지 후계자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만일 기록이 남아있었다손 쳐도 청나라에서 조작질을 해서 지워버렸을 것입니다. 여하간에 유조가 없으니 '명을 공식적으로 이어 받은 청'은 남명 정부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리하여 청나라 남벌군이 조직되었습니다. 정국대장군(定國大將軍) 도도의 군대가 남하를 시작했고, 남경은 강북에 4개의 진을 치고 회북(淮北)에 유택청, 사수(泗水)에 고걸, 임회(臨淮)에 유랑좌, 여주(廬州)에 황득공(黃得功) 등 네 총병을 주둔시켰는데 이 총병들은 엄청나게 분쟁을 일으키고 맙니다. 사가법은 황득공을 의진(儀眞)으로 옮기려도 시도했지만 고걸이 복병을 배치하여 300명의 병사를 죽이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황득공은 대노하여 고걸과 사투를 벌이겠다고 하는것을 사가법이 간신히 무마시켰지만 이게 당시 남명 군대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남 총병인 허정국(許定國)은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 청나라 쪽에 투항한 상황이었습니다. 허정국은 고걸을 연회에 초청하여 간단하게 대취하게 만들고는 그를 제거해버리고 맙니다.



남명 군대의 상황이 이런 모습이니, 청나라 남정군의 상대가 될리가 만무했습니다. 청사고 순치 2년 3월 항의 기록에서는


─ 지나는 곳마다 나와서 항복하여, 하남 땅 모두를 평정했다.


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남명 조정에는 이변이 일어나게 되는데, 자신이 진정한 황위 계승자라고 하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숭정제의 아들을 자처하며, 북경이 함락될 때 탈출하였다는 것입니다.




헌민태자(獻愍太子) 주자랑(朱慈烺)은 논란의 인물이었습니다.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남명 조정에 올라오는 보고는 모두 내용이 제각각이라, 어떤 장계에서는 주자랑이 이자성의 편에 들어갔다고 하면, 살해당했다고 했고, 오삼계의 보호 아래에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1644년 겨울의 무렵 전겸익 등 남명 조정 관료들은 느닷없이 자신을 황태자로 자처하는 사람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그 신분을 알 수 없는 젊은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해대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색을 일삼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황실의 법도대로 오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수께끼의 인물은 남경에 도착하자 스스로 주자랑을 자처했으며, 북경이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서 감시자들을 따돌리고 탈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자랑' 의 말대로라면 그는 도성을 떠나 피신 길에 오르면서 첫째 날은 도랑에 숨어서 밤을 보냈고, 이후 7일간 행인과 피난민들을 피해서 남쪽으로 걸어가다 허기에 지쳐 결국 신분을 드러냈고 신하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어찌해야 할지 감도 못잡고 있는 판국에 주자랑은 자신을 맞이하는 여러 대신들 중에 북경에서 탈출한 환관 한명을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때에 이르자 남경 백성들의 흥분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자신들은 숭정제의 황태자와 함께 있다. 저 오만불손하고 무례하기짝이 없는 홍광제는 가짜 황제며,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황제가 될법하다는 것입니다.



홍광제는 별볼일 없는 인물이었지만 오직 숭정제와 피가 더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지금 숭정제의 아들이 나타난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남명 조정의 신료들은 고심을 했고, 지금 같이 중대시한 상황에서 더 이상 퇴진이나 조정의 개편은 무리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반대하는 쪽에서도는 만약 이 주자랑이 진짜 주자랑이라면, 그를 홍광제의 양자로 받아들이는 편이 가장 좋지 않겠나, 하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노발대발한것은 홍광제였습니다. 그는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 면서 이에 대한 모든 논의를 일소에 붙였고, 신하들은 예의를 갖추어서, 그러니 명백한 심문을 벌여 시시콜콜한것을 주자랑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의문은 증폭되었습니다. 이 주자랑은 분명 북경의 황실 생활에 관한 질문에는 시원스레 대답을 했지만, 정작 주자랑의 학업에 대한 일등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어물쩌물 두리뭉실했던 것입니다. 북경에서 탈출한 환관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혹사시켜 기억을 짜냈고, 아무리 따져봐도 자신들이 먼 발치에서 본 헌민태자의\모습과 저 자칭 주자랑의 모습이 다르다는데 의견을 합쳤습니다. 심지어 숭정제의 후궁으로서 주자랑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등을 알고 있다는 여인의 주장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내가 알던 그 분의 외모와는 탈출하는 도중에 충격으로 달라진것 같고, 태어나면서 있던 다리의 반점도 사라진것 같아요."



너무 중대한 일이기에 아무도 대놓고 그를 '가짜' 라고 매도하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어느정도 마음에 결정을 내리고 있을때 전혀 뜻밖의 곳에서 사실이 전달되었습니다. 북경의 만주족들, 그들이 명의 옛 신호들에게 보낸 전갈 중에 이미 황태자는 죽었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일이 밝혀져 가짜 주자랑의 정체는 왕지명(王之明)이라는 사람인것이 탄로가 났으며, 1645년 4월 왕지명은 구금되었고 황실 근위대 소속이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몇몇 환관과 사기꾼들 때문에 이 일에 말려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경 주민들은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그가 왕지명이라는 이름을 말한것은 홍광제의 협박때문이라고 여겼고, 왕지명은 명지왕(明之王)을 거꾸로 바꾼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홍광제는 민심을 잃을까 두려워 왕지명을 죽이지는 못하고 그를 감금하는 대신 풍족하게 생활 할 수 있게 조치했습니다.  




이제 만주족의 공격은 눈 앞까지 다가왔고,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 저항은 미미했습니다. 만주족 본대는 교활하게도 최전방에 투항자들로 조직된 부대를 배치하여 숫자적으로 소수이자 이 이상 줄어들면 중국 통치에 문제가 생길 그들은 직접적인 위험에 처하는것을 막게 했고, 여러 한족들을 투항시키고 변발을 시켜 자신들의 병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만주족의 목표는 북경에서 시작된 대운하가 양자강의 지류와 맞나는 지점인 양주에 이르렀습니다. 양주에 이르는 두 갈래 주요 길목은 모두 함락된 상태로, 그곳의 명나라 장수들은 만주족에게 투항하여 변발을 하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성들과는 달리 양주는 항복할 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44세의 사가법, 그는 명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장수였는데, 홍광제를 수차례 군사 문제로 수위 높게 비판할 정도로 꼿꼿한 무인이었습니다.


도르곤은 이 기골 있는 인물에게 그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명 왕조' 가 아니라 '부패하고 무능한 군주' 일 뿐이라고 환기시켰고, 어떻게든 그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꿈쩍도 하지 않은 사가법이지만, 만주족 부대보다도 괴로운것은 그들이 말한 '무능한 군주'라는 이야기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무능한 군주 밑에는 무능한 인물들이 모이기 마련이라, 고걸이 죽은 뒤 허공에 뜬 고걸 휘하 10만의 부대는 당초에 사가법의 지휘 아래 있기로 되어있었지만 사가법을 시기한 마사영이 ─ 聖武記에 따르면 ─ 헛소문을 퍼뜨려 여러 곳으로 흩어져 버리는 바람에 사가법의 휘하로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청나라 군대. 나라가 곧 망할지도 모르는데, 오직 경쟁자를 시기하는데에만 열중하는 정부. 남명 정부의 종말은 바야흐로 목전 앞까지 다가왔고, 이 양주에서 청나라 군대가 중원에서 행한 만행 중에 가장 잔혹하고 비참한 대학살이 벌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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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20 강남의 저항이 극심했던 것은 그들이 아직 청군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또한 한가지 이유가 됩니다...^^; 입관전 청은 북직례, 산동, 산서, 하남북부, 심지어는 남직례(안휘-강소) 북부까지 휩쓸면서 인축과 재부를 약탈해 갑니다. 때문이 적어도 회수 이북지역은 청군의 작전능력과 잔혹함을 아주 잘 알고 있었죠. 수시로 털렸기 때문에...-_-; 그러나 청의 공격을 받지 않은 강남의 경우는 그걸 몰랐습니다. 때문에 결사항전하다 대학살을 당하고 말죠.
  •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20 청국군의 신속한 대규모 남하작전의 성공은 비단 "남명정권의 무능"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청의 점령행정이 효율적으로 먹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기본적으로 점령행정이 잘 되어야 팔기군 및 한병을 동원하여 작전이 가능한 거니까...

    사실 북직례와 산동, 하남동부 등지는 이미 명말부터 헬게이트였습니다. 특히 왜란을 지원하면서 조선과 인접한 이 지역의 재부는 모조리 징발되었고, 심지어 인민들까지 징발하여 수송 및 병사로 동원했기에 오죽하면 "왜가 몰려오기도 전에 산동과 북직례가 거덜났다"는 얘기가 나오죠. 심각한 수탈과 징발-징병(원래는 소모召募 즉 모집이 원칙이었음)은 민의 저항을 불렀고,
  • 답댓글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20 북직례와 산동-하남은 유리하던 인민들이 대거 '토적'으로 전환하여 종국에는 조정의 행정이 먹혀들지 않게 됩니다. 예컨대 천계연간이 되면 산동 지방관의 2/3가 결원이 될 정도였는데, 이는 지방관이 부임도중 살해당하거나 위험하다며 부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 조정에서 대규모 토벌군을 이끌고 나옵니다만, 사실 얘들도 토적이나 매한가지라 심지어 현지 향신층이 관군의 약탈을 막기 위해 성문을 걸어잠그고 관군과 사투를 벌이는 지경이었죠...-_-; 화북지역 대부분의 치안-행정이 이따위였습니다. 때문에 이자성군이 오자 추풍낙엽으로 항복... 근데 이자성이 보낸 애들도 그놈이 그놈인 절망적인 상황...
  • 답댓글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20 근데 이 동네에 청군이 들어오면서 놀랍게도 치안히 회복되고 토적들이 토벌되면서 점차 '안정'이 옵니다. 또한 청은 영악하게도 입관 전부터 청에 협력하던 요동지방의 한인관료들을 점령지 행정관으로 파견했고, 이들이 현지 향신층을 회유하면서 행정이 회복되고요. 또한 만주족이 지방관으로 부임한 지역이 한인들이 부임한 지역보다 오히려 더 공명정대한 정사로 살만해지는 경우도 생겼기 때문에 백성들도 점차 청의 점령행정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뭐 간간히 남명정권과 연결된 '복명세력'이 설치기도 했지만, 걔들이 토적이었던 경우도 있었고 남명이 알아서 망해주니 점차 가라앉고 말죠...ㅎㅎ;;
  • 답댓글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20 이렇게 점령행정이 먹혀들고 안정되자, 청군은 꼭 필요한 수비병력을 남기고 대부분의 병력을 차출하여 신속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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