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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제국의 황혼(3) ─ 남벌(南伐)

작성자신불해| 작성시간12.05.19| 조회수955|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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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종필 작성시간12.05.20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 작성자 차로아침을 작성시간12.05.20 저 학살은 양주십일이라는 거인가 보군화.중국역사를 공부하려면 역시 녹정기로 해야한다니까.따라서 삼번의 난을 제압하고 러시아를 저지한건 사실은 강희제가 아니라 전부 위소보군화(응?)
  • 답댓글 작성자 ★海東天子☆ 작성시간12.05.20 강남의 저항이 극심했던 것은 그들이 아직 청군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또한 한가지 이유가 됩니다...^^; 입관전 청은 북직례, 산동, 산서, 하남북부, 심지어는 남직례(안휘-강소) 북부까지 휩쓸면서 인축과 재부를 약탈해 갑니다. 때문이 적어도 회수 이북지역은 청군의 작전능력과 잔혹함을 아주 잘 알고 있었죠. 수시로 털렸기 때문에...-_-; 그러나 청의 공격을 받지 않은 강남의 경우는 그걸 몰랐습니다. 때문에 결사항전하다 대학살을 당하고 말죠.
  • 작성자 ★海東天子☆ 작성시간12.05.20 청국군의 신속한 대규모 남하작전의 성공은 비단 "남명정권의 무능"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청의 점령행정이 효율적으로 먹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기본적으로 점령행정이 잘 되어야 팔기군 및 한병을 동원하여 작전이 가능한 거니까...

    사실 북직례와 산동, 하남동부 등지는 이미 명말부터 헬게이트였습니다. 특히 왜란을 지원하면서 조선과 인접한 이 지역의 재부는 모조리 징발되었고, 심지어 인민들까지 징발하여 수송 및 병사로 동원했기에 오죽하면 "왜가 몰려오기도 전에 산동과 북직례가 거덜났다"는 얘기가 나오죠. 심각한 수탈과 징발-징병(원래는 소모召募 즉 모집이 원칙이었음)은 민의 저항을 불렀고,
  • 답댓글 작성자 ★海東天子☆ 작성시간12.05.20 북직례와 산동-하남은 유리하던 인민들이 대거 '토적'으로 전환하여 종국에는 조정의 행정이 먹혀들지 않게 됩니다. 예컨대 천계연간이 되면 산동 지방관의 2/3가 결원이 될 정도였는데, 이는 지방관이 부임도중 살해당하거나 위험하다며 부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 조정에서 대규모 토벌군을 이끌고 나옵니다만, 사실 얘들도 토적이나 매한가지라 심지어 현지 향신층이 관군의 약탈을 막기 위해 성문을 걸어잠그고 관군과 사투를 벌이는 지경이었죠...-_-; 화북지역 대부분의 치안-행정이 이따위였습니다. 때문에 이자성군이 오자 추풍낙엽으로 항복... 근데 이자성이 보낸 애들도 그놈이 그놈인 절망적인 상황...
  • 답댓글 작성자 ★海東天子☆ 작성시간12.05.20 근데 이 동네에 청군이 들어오면서 놀랍게도 치안히 회복되고 토적들이 토벌되면서 점차 '안정'이 옵니다. 또한 청은 영악하게도 입관 전부터 청에 협력하던 요동지방의 한인관료들을 점령지 행정관으로 파견했고, 이들이 현지 향신층을 회유하면서 행정이 회복되고요. 또한 만주족이 지방관으로 부임한 지역이 한인들이 부임한 지역보다 오히려 더 공명정대한 정사로 살만해지는 경우도 생겼기 때문에 백성들도 점차 청의 점령행정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뭐 간간히 남명정권과 연결된 '복명세력'이 설치기도 했지만, 걔들이 토적이었던 경우도 있었고 남명이 알아서 망해주니 점차 가라앉고 말죠...ㅎㅎ;;
  • 답댓글 작성자 ★海東天子☆ 작성시간12.05.20 이렇게 점령행정이 먹혀들고 안정되자, 청군은 꼭 필요한 수비병력을 남기고 대부분의 병력을 차출하여 신속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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