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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하위키 글인데 거의 대부분 제가 써서 어차피 쓴 김에 그냥 이렇게 올립니다.
1 개요
霍去病
(BC 140 ~ BC 117)
(BC 140 ~ BC 117)
중국 전한 시대의 명장. 중국 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나, 그 활동 시기는 고작 18세부터 24세까지. 즉 단 6년간의 활약으로 고대 가장 위대한 지휘관 중 한명으로 꼽힌다는 이야기다.
2 집안 내력
사실 곽거병의 본래 가문은 그렇게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다. 곽거병의 어머니는 위소아(衛少兒)이고, 위소아의 어머니는 위온(衛媼)이었는데 이 여자는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에 불과했다. 거기다 위온은 정청(鄭季)이라는 하급관리와 사통하여 자식까지 낳은 상태였던 것이다.[1]
그런데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무제는 부인인 아교(阿嬌)[2]와 본래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문제는 아교가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아교는 질투심이 심했고 심지어 의부증 증세까지 보여 한무제는 아교에게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지고 만다.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는 이런 상황을 난감하게 여겼는데, 그녀와 한무제의 어머니인 왕부인은 자식을 네명 낳았지만 아들은 하나, 한무제 밖에 없었다. 황제를 떠나서 가까운 핏줄에 아들이 하나 밖에 없는데 그 아들이 또 자식이 없으니 걱정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괜찮은 여자들을 계속 소개시켜 주지만 한무제는 영 뚱한 태도만 보였다.
그렇게 평양공주 집을 들락거리다가 눈에 들어온것이 평양공주의 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하찮은 여가수 위자부였던 것이다. 마음에 든 한무제는 그녀를 궁정으로 데려왔고, 위자부가 곧 존귀해지면서 위소아도 자연히 위치가 높아졌다. 곽거병이 어느정도 철이 들 무렵에는 이미 고귀한 신분이 되어있었던것.
그런데 그런 곽거병의 출생이 또 묘한데, 곽거병의 아버지는 곽중유(霍仲孺)라는 사람으로 천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아들과는 다르게 별거 없는 하급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 위소아와의 관계도 정상적인것이 아니라, 일보러 왔던길에 둘이 눈이 맞아서 이렇고 저런일을 벌이며 엔조이를 하다가, 임무를 마치자 돌아가서는 그냥 장가들고 그렇게 살았다.[3]
어머니 위소아도 진장(陳掌)[4]이라는 새 남자랑 잘 놀게 되고, 그러다가 위자부의 일 때문에 위소아와 진장 모두 높은 대접을 받고 살아 나이가 찰 때까지 곽거병은 곽중유가 친아버지인것도 모르고 살았다. 장성 하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됬는데, 딱히 일부러 곽중유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흉노를 정벌하러 가는길에 곽중유가 일하는곳을 지나치게 되었고, 그때 아버지를 불러서 처음으로 친아버지와 조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곽거병은 무릎을 꿇고[5] 절을 했다고 한다.
| "거병은 지금껏 당신의 아들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
이러자 곽중유도 옷을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 "장군에게 이 늙은이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이 가호해 준 때문이오." |
곽거병은 곽중유에게 많은 땅을 사주고 재물을 주고 노비를 사주고 떠났다. 이때, 배다른 동생인 곽광도 장안으로 데려왔는데 곽광의 나이는 10살이었다.
3 전공
3.1 풋내기 장군
어렸을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한다.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한무제의 총애를 얻어 시중이 되었는데, BC 123년 위청은 한무제의 조서를 받고 곽거병을 표요교위(剽姚校尉)[6]에 삼고 흉노 공격에 동행을 시켰다. 여기까지 모습을 보면 한무제가 아끼는 처조카에게 적당히 공을 세운 기회를 준 느낌이 든다.
이때의 전투에서 곽거병은 기병 800여명을 거느리고 본대를 떠나 수백리를 진격 하는 폭주를 보여주었다. 그런데……보통 이러면 각개격파 당하고 포위 당하는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오히려 곽거병은 2천여명 이상의 흉노를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흉노 선우의 할아버지 뻘 되는 자약후 산(藉若侯)을 죽이고 선우의 막내 숙부 나고비(羅姑比)를 사로잡는 공을 세우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가 18살, 처음 출정때의 일이다.
이 공격이 곽거병 본인의 폭주인지, 총사령관인 위청의 지시인지는 불분명하다. 사기의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이나 한서의 위청곽거병전(衛靑霍去病傳) 모두 그저 곽거병이 대군에서 벗어나 수백리를 진군해서 적을 물리쳤다고만 나온 일이다. 일단 그 후 곽거병의 행적을 보면 이런 식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기도 했고, 위청이 보통 장수도 아닌데, 이렇게 위험부담이 큰 작전을 18살 애송이에게 맡겼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또, 위청은 간신배는 결코 아니지만 윗사람 눈치는 많이 살피는 사람이었다. 무제가 아끼는 처조카를 사지로 보냈을까?
여하간 이 싸움의 공이 전해지자 무제는 기다렸다는듯이 곽거병을 관군후(冠軍侯)에 삼았고, 군에서 으뜸의 공이라고 치켜세워주며 1,600호를 내려주었다. 반면에 위청은 공이 적다해서 별 상을 못 받았는데, 위청의 안타까운 사연은 계속 이어진다……
3.2 원수(元狩) 2년, 곽거병 날아오르다
한무제 원수 2년인 BC 121년은 곽거병에게 있어 한없이 빛나던 시기였다. 이해 봄에 무제는 곽거병을 표기장군(驃騎将軍)[7]에 임명했는데, 초대 표기장군이 바로 곽거병이다. 이때가 표기장군이라는 처음 이름에 나온걸 감안하다쳐도, 이게 대장군 바로 다음 자리 라는걸 생각하면 정말 흠좀무. 이때 곽거병은 21살이었다. 군부에 몸을 담은지도 고작 3년이고 말이다. 더 무서운건 2년뒤에는 아예 대장군과 같은 녹봉이 된다.
그러나 곽거병에 대한 이런 파격저인 대우는, 그 후에 그가 벌이는 막대한 공을 생각하면 오히려 타당할 지경이었다. 표기장군이 되가가 무섭게 농서(陇西)에서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출정한 곽거병은 오려산(烏戾山)을 넘고 호노하(狐奴河)를 건너며, 엿새동안 다섯부족을 지나며 무려 1천리를 나아가 백병전을 벌이며 이를 모두 격퇴, 흉노의 절란왕과 노호왕을 참수했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무리가 무려 8천여명이 넘었다. 또한 흉노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쓰던 금인(金人)까지 탈취해왔다.
인상적인 기록으로 이 당시 기록으로 우리 군은 갑옷 하나 잃지 않고라는 식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장일 수 있으나, 대체로 흉노 원정에 대한 기록이 우리가 흉노놈 10명을 족쳤다. 그런데 우리 병사 3명이 죽음. 이런식의 연속이라는것을 생각하면 특이하다. 그만큼 완벽한 승리였을 수 있다는 말. 곽거병은 2,000호를 더 받고 3,600호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해 여름, 한무제는 표기장군 곽거병과 합기후(合騎侯) 공손오(公孫敖)를 북지[8]에서 출발시키고, 다른 쪽으로는 장건과 이광을 파견하여 흉노를 공략코자 하였다. 이광은 4천여명, 장건은 1만여명으로 도합 1만 4천의 병력은 흉노 수만대군의 포위를 받았는데, 이광은 홀로 분전해서 4천여명 가운데 2천여명이 전사했지만 버티게 되고 장건이 도착하자 간신히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장건은 늦게 도착한 탓에 참형을 받을 처지가 되지만 속죄하는 돈을 내서 서민이 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양상은 북지에서 출발한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곽거병은 이미 흉노 땅 깊숙히 진격을 하였지만 뒤따르던 공손오가 길을 잃어 한참을 지체하게 된다.
연락이 끊겨 언제 도착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곽거병은 그야말로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데, 공손오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흉노 땅 한복판으로 진격을 했던 것이다!
- 5,547m의 기련산(祁連山 치롄산)
그 뿐만이 아니다. 흉노의 왕 중 다섯명과, 그 다섯명의 어머니, 선우에 연지, 왕자, 상국에 장군, 당호, 도위 등을 수백여명을 붙잡고 맞붙었던 흉노군의 7할을 분쇄하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렸다. 이에 곽거병은 5000호를 더 받게 되었고 8,600호가 되었다. 곽거병을 따라왔던 조파노(趙破奴) 같은 장수들도 짭짤한 보상을 받았다. 반면에 공손오는 참형을 당할뻔한걸 속죄금을 내어 간신히 목숨만을 건지게 된다.

이 전투의 결과는 흉노에게 있어서도 매우 뼈아픈 패배였다. 사기의‘흉노전 색은(索隱)’조에는 ‘서하구사(西河舊事)’란 흉노 민요 한 수가 실려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 기련산 잃으니 육축이 번식할 수 없게 되고(失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육축(六畜)은 유목기마민족인 흉노인들에게 중요한 여섯 가지 가축, 즉 말·소·양·닭·개·돼지를 말한다. 유목민들에게 이런 동물들, 특히 말을 대규모로 키울 곳을 잃어버렸다는건 정말 어마어마한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흉노의 선우는 혼야왕이 서쪽에서 계속 한나라의 군대에게 부서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곽거병 때문이라는것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혼야왕을 죽이려 했다. 혼야왕은 휴도왕과 논의를 하고, 곽거병을 이길 자신도 없고 선우도 무섭고 하니 차라리 한나라에 투항해버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무제는 이 소식을 들었지만, 만약 항복하는척 하면서 공격을 하면 큰 피해가 우려되었기에 이 일을 곽거병에게 맡겼다.
곽거병은 군대를 이끌고 혼야왕의 부대와 대치했는데, 혼야왕의 비장들 중에 항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해서 8천여명을 죽이고 수만여명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공에 한무제는 근심거리가 없어졌다.면서 크게 치하하고 1,700호를 더해주었다.
이 모든 전투가 단 1년만에 벌어진 전공이다.
3.3 기린아의 마지막 불꽃, 막북 대전투

|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 ─ 전자는 산서의 북방에 이는 후흐호트 지역을 출발하였고, 후자는 북경 북서쪽에 있는 현재 선화 근처의 상곡을 출발하였다. 위청은 고비를 가로질러서 현재 외몽골에 있는 흉노의 본거지에 도착하였는데, 헤르만은 위청이 옹긴 강의 하류까지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 곽거병은 대담하게 외몽골 툴라 강과 오르콘 강 상류까지 1천 킬로미터를 쳐들어갔다. 그는 80명 이상의 흉노 수령을 잡았고, 그들의 땅에 있는 산에서 신성한 희생의식을 거행했다. 곽거병은 귀환 직후인 기원전 117년에 죽었다. 섬서의 함양에 있는 이 위대한 장군의 무덤에는 흉노를 짓밞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을 표현한 커다란 조각상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中 |
원수 4년이었던 BC 119년 한무제는 장수들을 불러 의논을 했는데, 흉노 쪽에서는 한군이 보급 등 여러가지 문제로 사막을 건너서는 오래 싸우지 못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 합의를 두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크게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취한다면 큰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해 봄, 한나라는 에이스였던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병을 동원하게 하는 동시에, 수십만이나 되는 보병과 치중병으로 이를 지원했으며 이광, 공손하 등 흉노 전쟁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무장들은 모조리 참전했다. 근 10만이 넘는 원정대가 사막을 넘기 시작했는데, 이 병력들이 원정군이라는 점, 그리고 사막과 계곡을 넘는 극히 힘든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다.
출발하는데 있어서, 본래 곽거병은 정양(定襄)[9]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출발 직전에 포로를 문초해본 결과 선우는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대군(代郡)에서 출발하여 진격하기로 하였다.
흉노 쪽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한나라 군대가 사막을 건너면 매우 피로에 지칠 것으로 판단, 군수물자를 전부 먼 북쪽에 두고 정예병을 북쪽에 두어 천천히 기다리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런 흉노 선우의 군대가 곽거병도 아닌 위청의 군대에게 포착되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전투가 벌어지고, 위청은 압도적인 병력의 숫자와 힘으로 흉노 선우의 좌우익을 둘러싸 완벽하게 격파를 해냈다.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될 수순이었으나 날이 저물 무렵 흉노 선우는 수백명의 기마대와 함께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포로를 통해서 선우의 탈출을 알아챈 위청은 200여리를 추격하였으나 선우를 잡는데 실패한다.
그 시기 곽거병은,
우주를 뚫을 기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장장 1천여리를 행군한 곽거병은 고비 사막을 그대로 넘어가며 흉노의 영역을 완전히 가로질러 진군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따르면, 곽거병의 진격은 북경 북서쪽 선화 부근에서 무려 오르콘 강 상류 바이칼 호 부근까지 이른다. 환빠들의 이상을 현실로[10]
그 자체만으로도 위업이라 할만한데, 그렇게 사막의 모랫폭풍을 뚫고 제대로 보급도 못하면서도 전투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흉노 선우의 근신인 장거(章渠)를 사로잡고 왕호 비거기(比耆)를 참살했다. 흉노 좌대장의 군대와 싸워 물리치고 그들이 쓰는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산과 강을 건너 흉노의 왕 3명을 죽이고 장군, 상국, 당호, 도위 등을 83명 이상 주살하였다. 그렇게 죽이고 사로잡은 흉노의 숫자가 무려 7만 4천 4백 30여명에 이르렀다.[11]
그리하여 흉노 땅 한복판에서 거창하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흉노는 이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본국에서의 보급은 요원하고, 흉노 땅에 딱히 거두어서 쓸만한 논과 밭 등이 있는것도 아닌데 보급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의문증이 들 수가 있는데……
이 해결법이라는것이 정말 어이가 없는 수준이다. 흉노 적군을 때려부수고 흉노 군사가 먹는것을 빼앗아서보급을 해결했다고 한다. 말이야 쉽지 전투력이 저들보다 떨어지면 오히려 시도하다 패배하고, 결국 사막 한가운데서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무모하면서도 대단한 싸움이었다. 그 후 20년간 흉노와 한은 큰 전쟁을 벌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렇게 힘든 싸움이었던 만큼, 곽거병의 밑에 있던 부하 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많은 상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가 않았다. 곽거병 또한 한번에 5,800호를 증봉받았다. 그런데 위청은 흉노 선우를 패배시켬음에도 불구, 절호의 기회에서 사로잡지 못했다는 점때문에 아무런 증보도 받지 못했고, 수하중에 단 한명도 후작을 받거나 한 인물이 없었다.
한나라 군대가 이번 싸움에 동원한 말이 무려 14만 필이 되었는데, 일이 끝나고 돌와았을때는 3만필도 되지 못하였다. 그만큼 힘든 싸움이었는데 위청은 그 대가를 인정 받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대사마의 직위를 새로 두어 표기장군과 대장군을 모두 대사마로 일컫었고, 둘의 녹봉이 똑같아 지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곽거병과 위청의 입지가 대놓고 차이가 나게 되자, 야속한 사람들도 모두 바람처럼 움직여 버렸다. 위청의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 모두가 곽거병에게로 가버린 것이다. 위청의 주변에 계속 남아있던 사람은 임안(任安)이라는 사람 딱 한명이었다.
이렇게 24살이라는 너무나 젊은 나이로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한 곽거병이지만, 하늘이 기린아를 시기한 탓인지 어이없이 급사해버리고 만다.[12] 한무제는 이 위대한 장군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검은 철갑을 입은 군대를 장안에서부터 무릉까지 벌여 세우고는 무릉에 기련산을 본뜬 곽거병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산시 곽거병 묘다. 그리고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무용을 뜻하는 ‘경(景)’과, 땅을 넓혔다는 ‘환(桓)’을 합친것이다. 장수로서 이보다 명예로운 시호가 또 있을까.
4 평가
곽거병의 전공은 그 당시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중국이 조 무령왕의 시기부터 기병전술을 확립하긴 했지만 기마대는 유목민족의 전매특허였고, 중원의 군사가 성을 쌓거나 혹은 평원에서 방진을 펼쳐 기마대를 상대해서 이기는 경우는 많아도 기병전력을 중심으로 하여 이긴적은 많지가 못했다. 더구나 유목민족이 자신들의 땅 깊숙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여 포위하여 승리하는것은 그들의 주특기였다. 당장 유방이 묵특에게 패배했던 백등산의 싸움이나,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가 스키타이계 유목민인 마사게타이(Massagetae)와의 싸움에서 죽었을때의 상황을 연상해보자.
하지만 한무제 때부터 정예기병을 육성한 한나라는 곽거병의 지휘 아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는데, 정주민족의 군대가 오히려 자진해서 흉노 땅 깊숙히 들어가, 완전히 휩쓸어버리고 격파해 놓은 것이다. 이는 특기할만한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곽거병의 부대전술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는데, 혹자는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런 식으로 계속 싸우다간 언젠가 큰 패배를 당할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확실히, 본대를 이탈하는 모습이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싸우는 형태, 위험천만한 보급은 정석적인 용병술에서 한참을 벗어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곽거병은 병법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무제가 곽거병에게 병법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 "지금 쓸 전략이 무엇인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옛 병법을 체득할 필요는 없습니다."[13] |
라고 말할 정도였다. 즉 정상적인 범주의 용병술 보다는 임기응변에 능했다고 할만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전략가로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돌발상황이 닥쳤을 때 임기응변과 재치로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보면서 좀 까는 사람들이 있는데,[14] 이런 비슷한 평가는 곽거병에게도 할 수도 있다. 확실히 그의 전술은 너무 위험하고 또 모험적이었다. 사마천 조차도 군대에 천행이 따라주어 곤경에 처한 일이 없다.고 쓸 정도다. 성공했으니 전설이 되었지만.
곽거병이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것은 물론 본인이 뛰어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한무제가 밀어준 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진순신이 이런 주장을 했는데, 이미 한나라의 국력은 몇배로 튼실해졌고 흉노는 쇠퇴기였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죽을 쓰고 위청과 곽거병만 공을 세운것은, 무제가 황후의 동생과 조카를 열후로 만들기 위해서 공을 세울 기회를 팍팍 밀어주었다는 것이다. 최고의 장비와 최강의 정예병을 팍팍 밀어주었으니 군사적 천재라는것은 과장이라는 이야기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것이, 위청은 처음 출전했을때를 보면 양이나 치던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거기장군에 임명시켜서 보냈던 것이다. 또한 곽거병에 대해서는 항상 따로 정예병을 선발하였는데, 그 군사와 말과 병기가 다른 장수들이 거느린 수준에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무나 밀어준다고 해서 팍팍 성공하는것도 아니다. 위청은 처음 출전했을때의 상황은 볼것도 없이 뺵을 써서 들어간 수준이지만, 다른 장수들이 모조리 패배했을때 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한무제는 훗날 이광리를 곽거병처럼 밀어주었지만 그 결과는 곽거병에 비할 바가 못된다.
곽거병의 전공은 한무제의 밀어주기 + 본인의 넘치는 재능 + 타고난 운등이 결합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이광 같은 경우는 본인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한무제의 지원이나 본인의 운에 관해서는……
5 성격
태어났을때부터 고귀한 신분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어주고, 심지어 제국의 황제마저 "우리 처조카 우쭈주♥" 하는 판국에 고작 18살때부터 무지막지한 전공을 세우는 형편이라,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고 행동에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행동에는 기백이 넘쳤는데 속내에 있는 말을 숨기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독설가 타입? 말수는 적은 편이었다고 하지만.
거기다가 너무 높은 위치에 있다보니 일반 병사들의 심정이나 상황은 전혀 알지 못했다. 황제가 수십 승의 수레에 음식을 꽉꽉 채워서 보냈는데, 먹고 남으니까 그냥 버렸다. 그런데 그때 병사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번은 변경에 있을때 병사들이 너무 굶어서 쓰러지는 사람까지 나왔지만, 곽거병은 그런 상황에서 땅에 줄을 긋고 답국(蹋鞠)[15]을 하며 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곽거병의 진영에선 비일 비재 했다.
그러나 의외로 인기는 곽거병이 더 많았다고 한다.아무래도 장군으로서 오만한 카리스마가 있었던 듯……반면에 위청은 아부를 떤다고 보는 시선이 있었다고 하고, 무제도 적극적인 성격의 곽거병을 더 아꼈다고 전해진다. 나쁜남자는 예나 지금이나 인기 캐릭터(...). 전설에 따르면 곽거병이 한무제에게 술을 받았는데, 이것을 강물에 뿌려버리고 "황제가 하사는 술이다. 모두 같이 마시자!" 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주취안(酒泉) 시의 이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6 가족 관계
곽거병 부모의 복잡한 관계는 집안 내력 참조. 곽거병의 아들 곽선은 자가 자후(子侯)였는데, 아버지가 24살 밖에 안됬으니 곽거병이 죽었을땐 아직 어렸다. 하지만 한무제는 곽자후를 아끼고 귀여워했고, 태산(泰山)에 봉선할때도 오직 곽자후 한명만을 대동하였다. 한무제는 곽선을 장수로 삼을 계획이었지만, BC 110년 곽선은 죽고 만다. 그에겐 애후의 시호가 내려졌는데, 곽선의 자식이 없었기에 대가 끊어져 봉국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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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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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2.04.30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못참지 않을까요????? 저때는 신분질서가 명확했던 시대라, 귀족계층이 어쩌든간에 아무말도 못하던 시절이었으니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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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惡賭鬼 작성시간 12.04.30 현대사회보다 우발적인 행동들이 많았던 사회여서 그렇진 않다고 봅니다. 핍박이 직접적인만큼 반발도 직접적이었고... 권위가 무너진 상황이 아니라도 굶거나 힘든 상황에서 병사들이 탈주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게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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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el5311 작성시간 12.04.30 위청 안습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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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papepo 작성시간 12.04.30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저런 상관은 짜증나겠지만. 인간적이기는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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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흑풍 작성시간 12.04.30 따라하면, 조 to the 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