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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중국판 예송논쟁, 대례(大禮)의 의(議)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5.06|조회수712 목록 댓글 5

대체로, 지금 현대의 기준으로는 잘 이해가 안가는 일을 가지고 오랜 시간 논쟁을 하고 벌이는 일들이 과거에 종종 있는데, 실상을 살펴보면 그 이해가 안가는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의견이 나뉘면서 대립이 벌어지고 서로간의 이해득실이 부딫히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중세 수도사들이 "웃음이 죄악인가, 아닌가"를 가지고 현란한 랩배틀 수준의 대립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진짜 중요한건 웃음이 어쨌다는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치 싸움이 웃음이 어쩐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나타는것이죠.


조선시대 예송논쟁도 뭘 그런걸 가지고 저렇게 싸우나, 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대립하면서 벌어지는 정치싸움이 주가 되는데, 논쟁이 벌어지는동안 대기근이 발생할때는 서로 싸우지 않고 피폐해진 민생을 되살리는데 힘쓰기도 하는등, 예송논쟁 시기를 오히려 붕당정치의 원칙이 가장 잘 지켜진 시기로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일단 대립이 길게 벌어지는건 그만큼 한쪽이 다 해먹고 하는건 없다는 소리니.



중국 명나라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쪽은 부정적인 늬앙스가 더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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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보의 변이라는 대사건을 겪어 유명한 영종 정통제의 아들이 성화제(成化帝) 입니다. 묘한 방술에 심취하고 이민족들이 침입하게 만드는등 결코 좋은 황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만은 명나라 말기에 워낙 화려한 암군들이 연달아 즉위하면서 상대적으로 비난을 덜 합니다. 아들 탓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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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성화제의 아들이 홍치제(弘治帝) 입니다. 명나라 마지막 명군으로, 이 홍치제의 시세는 15세기가 다 하면 끝나고 그 후부터 명은 내리막을 탑니다. 사치와 방종을 부리는 사람도 아니었고 여진이나 타타르와의 문제도 잘 해결하여 홍치 중흥(弘治中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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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제의 아들이 정덕제(正德帝)로 환관 유근(劉瑾)을 초래하여 문제를 일으키거나, 너무 방종하게 노는등 좋은 소리 못들을 짓을 해 암군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만력제 등이 등장하는 뒤의 황제들 보다는, 너무 노는걸 좋아하는게 문제였지 상주문도 다 읽고 황권도 별 문제 없는등 상대적으로 덜하기는 합니다.

홍치제는 평생동안 단 한명의 여자하고만 결혼해서 - 후궁도 없었습니다 - 정덕제가 유일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정덕제는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자식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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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제(嘉靖帝) 즉위하게 되었는데, 정덕제로부터 따지면 사촌동생이 됩니다. 실 그가 즉위하게 된 것도 단지 정덕제의 직계친족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15살 밖에 안됬지만요.

바로 이 때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특별한 환관의 발호가 없었으나, 정통성 문제로 사건이 생겼습니다.




우선 앞서 말한 황제들의 계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화제
                                     │
                     홍치제  ─ ─ 흥헌왕
                         │                 │
                      정덕제         가정제



본래대로라면 가정제는 본가의 대를 이어 상속했기 때문에 정덕제의 아버지이자 가정제의 큰아버지인 홍치제의 뒤를 이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홍치제를 황고(皇考), 즉 돌아가신 아버지로 삼고, 친아버지를 숙부로 삼아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지만 가정제는 그 황고(皇考) 칭호를 친아버지인 흥헌왕에게 주는것으로 올리기를 바랬고, 홍치제는 황백부((皇伯父)로 부르기를 우너했습니다.


그렇다면 본가를 흥헌왕 쪽으로 옮긴것이 되어, 극단적으로 볼 경우 이것은 호칭상의 찬탈까지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에 양정화(楊廷和) 등의 대신들은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홍치제를 황고로, 친아버지를 황숙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가정제의 결정대로 된다면, 황통은 성화제에서 흥헌왕으로 간 셈이 되고, 효종 홍치제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 문제로 대립하던 3년동안 신하들은 궁문에 앉아서 통곡을 하면서 효종 황제의 이름을 연달아 불렀습니다. 대체로 당파싸움을 떠나서 이때 조정 대신들의 의견은 일치했는데, 꼭 이럴 때 자신의 이득을 보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있습니다.


진사 장총(桂萼), 남경 형주부사 계악(桂萼)같은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황제에게 아첨하는것을 목표로 가정제의 견해에 찬성하는 소를 올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서 양정화는 실각하고 장총과 계악이 한림학사가 되었습니다. 190여명이 옥에 들어가버렸고 주모자들은 변경으로 유배되었습니다. 4품관들은 녹봉을 빼앗기고 5품관 이하는 장형을 맞았습니다. 장형을 맞고 16명이 죽었습니다.



본래 대신들은 지난 정덕제의 정치가 좋았다고는 말 할수 없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일신하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선 황제는 사사로운 문제를 떠나 대의에 동조할 필요가 있었으며 대신들은 이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근현대 이전에는 군주의 권력이 강한 경우가 신하들이 강한 경우보다 좋은 상황이 많았지만, 명은 군주의 권한이 "너무" 쎄던 나라입니다. 심해지면 명이라는 나라 자체가, 황제를 위한 수단으로 떨어져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서 가정제의 옆에는 오직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무리들 밖에 남지 않게 됬는데, 가정제나 그들이나 영리하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가정제는 스스로 신선이라고 말하면서 아침 이슬과 궁녀의 생리혈이나 모으는 짓을 하는가 하면, 가정제 시기의 재상 엄숭(嚴嵩)등은 악랄하게 뇌물을 모았는데, 가진 재주라고는 신령에게 기도하는 표문인 청사(靑詞)를 잘 짓는 재주밖에 없어 청사 재상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서 견제를 하거나 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고, 명나라에서는 북로남왜가 발흥하며 가정제의 동갑내기인 알탄 칸등이 명의 북방을 위협하기 시작하지만은, 적절하게 대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층부는 부패하여 심지어 조정의 대장군이 알탄 칸에게 매수가 되기까지 하는데, 본래 이념이 있어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아니었음으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대단한 큰 뜻이 아니라 사사로운 감정으로 조정 대신들을 물리쳐 아무도 견제 못할 절대 권력을 손에 넣은 가정제는 조정에선 뇌물이 횡횡하고 알탄 칸이 명의 북방을 위협하고 심지어 북경까지 포위할 동안  자금성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불로장생만을 빌고 있었습니다. 가정제의 치세는 무려 45년을 이어졌습니다.


조선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의 의례(議禮)는 본래 결정짓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부자(父子)의 윤리란 천자(天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제왕가(帝王家)의 예는 서민과 같지 않다.”고 하나 이는 잘못이다. 뭇 신하로서 임금을 우러러볼 때는 마땅히 이례(異例)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왕가에 있어서 다 같이 높은 지위로서는 그 중에 친소(親疎)와 맏과 지차를 특수하게 따지지 않았다는 것은 상복(喪服 《의례(儀禮)》의 편명) 한 편을 보아도 징험할 수 있다. 무종(武宗)이 아들이 없자 세종(世宗)은 바로 그의 종제(從弟)로서 그 대통(大統)을 이었다. 이는 마치 지금 종자(宗子)가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그의 종제가 뒤를 잇게 되면 그 소목(昭穆) 차례에 따라 그 자리를 계승할 뿐이고, 일찍이 그 종형(從兄)으로써 아비를 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뭐가 이와 다르겠는가?

그런즉 세종은 효종(孝宗)에게 입후(入後)하게 되었으나 흥헌(興獻)이 그의 본생부(本生父)였다. 만약 흥헌을 생부라 해서 추존(追尊)하여 황제로 삼는다면, 이는 무종을 아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인해 드디어 효종도 함께 버리게 되는 것이다. 당초에 무종(武宗)이 없고, 효종(孝宗)이 아들이 없었다면 세종이 대통을 이은 데에 대해서 감히 딴 이론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알기 어려운 이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예를 의논한 모든 신하는 이미 형을 아비로 삼을 수 없는 것을 모두 몰랐고, 총악(璁萼 장총(張璁)ㆍ계악(桂萼)을 말함) 같은 모든 사람은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 하다가 도리어 지나치게 되어 남에게 비난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어떤 이는 흘겨보면서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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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06 이런 논의는 송나라 영종 때도 있었습니다...^^; [복의]라고 하죠.
  • 작성자오로쿠트 | 작성시간 12.05.06 조선에서도 예송논쟁이 아니라 대례의와 똑같은 구조의 논쟁이 인조때 있었습니다. 원종 추숭논쟁이라고 하여 이 경우에도 예기의 '위인후 예설爲人後 禮說'에 기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승계한 인조의 친부 정원군을 백부로, 할아버지인 선조를 아버지로 고쳐야 하는가, 아니면 역시 정원군을 친부로 하여 임금으로 추승해야 하는가, 의 논쟁이었죠. 이 사건의 경우에도 임금과 백성의 예가 같아야 하는가(천하동례설), 아니면 왕의 예법은 달라야 하는가(왕자례부동사서)의 충돌이라 볼 수 있는데, 이런 기본적인 골조는 1, 2차 예송논쟁의 시초적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인조는 이 추승논쟁을 10년 가까히 끌며 결국 의지를 관철, 왕권강화에
  • 작성자오로쿠트 | 작성시간 12.05.06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만 가정제 시기의 대례의와 달리 상당히 고생하면서 뜻을 관철하는 모습을 보이니 조선은 명의 전제황권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공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중국사에선 송나라 영종때 뿐 아니라 전한 애제때도 비슷한 추숭 논쟁이 있었습니다.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2.05.07 역시 이 카페의 내공이란 ㅎㄷㄷ
  • 작성자papepo | 작성시간 12.05.08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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