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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명 제국의 황혼(4) ─ 담천(曇天)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5.20|조회수1,274 목록 댓글 11





극적인 타협이 벌어지기에는 이미 상황은 벼랑 끝까지 몰린 뒤였고,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상황은 누구도 용납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중화제국의 적법한 주인이라고 자처한 사람이 두 명이 있었고, 도주한 이자성까지 치자면 셋이나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르곤의 동생 도도는 군사를 이끌고 양주에 도착하면서, 한번 투항을 권유하며 기회를 주었습니다. 한발 앞서 만주족에게 투항한 명나라 장수 이우춘(李遇春)을 보내 투항을 권유했습니다.


"황제는 장군을 믿지 않고 있소이다. 그럼에도 왜 만주족과 힘을 합쳐 이름을 구하고, 공훈을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오이까?"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도는 그 후에도 친필로 설득을 해보는 등 사가법을 달래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오히려 사가법은 부하들을 시켜 양주 성곽을 따라 나무 받침대를 설치한 뒤, 그 위에 대포를 배치했습니다. 북경에 있을 시절, 그는 아담 샬을 기용하여 화포를 제조하자는 계획에 찬성했던 인물로 화포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 명나라의 총병 유조기(劉肇基)는 계책을 하나 내었습니다.

"성 안은 지세가 높고 성 밖은 지세가 낮습니다. 회하의 둑을 터뜨려 적군 진지에 물을 몰아 넣는다면 저들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듯한 소리지만 사가법은 거절했습니다.


"백성을 귀히 여겨야 하오. 사직은 그 다음이라오."


청군은 물에 휩쓸리겠지만, 회양 백성들도 대량으로 익사하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직이 백성 다음이라는것은 맹자에 있는 말입니다.



사가법의 대포는 과연 효과가 있어 청군은 예상 이상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상자가 수천 단위에 이르자 군대를 이끌던 도도도 격분하기 시작했는데, 7일간 전투가 벌어지며 몰아부치자 결국 양주성도 한계에 다다르고 맙니다. 청군은 시체를 밞고 올라가 성내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성 수비대 병사들이 투구를 벗어던지고 창을 내팽개친 채 성벽 아래 가옥으로 뛰어내려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놀라 집 밖으로 뛰쳐 나온 주민들이 도망치는 수비대 병사들을 목격하면서, 거리는 순식간에 피난민으로 넘쳐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달아날 곳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도성 남문을 열어놓았으나, 그 최후의 탈출로 마저 더욱 수가 많은 만주족에 의하여 차단되기에 이르고 맙니다. 사가법은 성문을 연 자를 처단하라고 하였지만 제 목숨을 걸고 그 명령을 시행할 부하는 없었습니다. 유조기 등도 전사했고, 만주족이 도성을 점령하고는 사가법은 도도 앞으로 끌려나오고 맙니다. 도도는 그의 충성심이 자신에게도 큰 인상을 주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항전은 참으로 놀라웠소. 이제 그대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하였으니, 내 그대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는 것이 기쁠 따름이라오."


하지만 사가법은 거부 의사를 단호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답했습니다.


"죽음 이외에 더 바랄 것은 없소이다."


며칠동안 사가법을 회유하던 도도는 시간이 지나서 약이 올라 사가법을 참수하고 맙니다. 그리고, 사가법에 대한 처우와는 별개로 도도는 양주을 공략하는데 든 상상 이상의 시간과 인적 손실에 대해 격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휘하 군사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격전끝에 약이 오를데로 오른 야수같은 병사들이 성안으로 진입하였고, 이때가 4월 25일이었습니다. 악몽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벌어진 일에 관해서, 성무기에서는


"우리 병(청병)이 머물기를 10일, 그리고 이를 도(屠) 했다."


하여 그저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10일 동안 청나라 병사들은 야만의 극치를 달리며 수없이 많은 주민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빼앗고, 망가뜨렸습니다. 남자들은 학살당하고 부녀자들은 겁탈당했으며, 이전까지 만주족이 북쪽에서 항복한 도성에서 보인 자비심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건물들은 불에 탔습니다. 도성내 사방에 올라온 불꽃은 폭우가 내리면서 가까스로 진정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처참하게 도륙당한 양주 백성들의 숫자만 무려 80만명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삼국시대 촉나라 인구 전체에 가까운 인구가 살육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항이 심했다? 그리하여 아군의 피해가 커졌다? 사가법의 대포로 인해 청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허나 어떤 이유로도 80만명을 대학살하는데 적법한 이유가 되진 못합니다. 이 지옥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왕수초(王秀楚)라는 사람은 은밀하게 이때의 모습을 적어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를 만들었습니다. 문자의 옥 등의 탄압이 심하던 청나라 시대에는 당연히 이 책은 금서로 분류되어 지하 출판물로 몰래 나오거나 불에 태워져 일반인은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주십일기는 역으로 일본에 전해졌고, 메이지 시대 청나라 유학생들은 이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침 반청에 대한 열망이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을때, 이러한 책은 그들의 가슴을 격동시켰고 결국 반청혁명이 일어나 청은 패망하게 됩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대문호 루쉰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또한 (유학생의) 일부 중에는 명나라 말기 유민의 저작이나 만인(蠻人)의 잔학 기록을 모으는데 전심(全心)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도쿄와 그 밖의 도서관에 들어앉아 글을 베껴 와서는 인쇄하여 중국에 들여와, 잊혀진 옛 원한을 부활시켜 혁명 성공에 일조하려 했다. 이렇게 해서 양주십일기, 가정도성기략(嘉定都城紀略), 주순수집(朱舜水集), 장창수집(張蒼水集) 등이 번역, 인쇄 되었다.
 
 
 
사가법은 백성들이 상할까봐 수공(水攻)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수많은 백성이 그의 투항 거부 때문에 도륙당했습니다. 만주군의 잔학함이 상상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남정군의 이와 같은 만행은 본보기 목적도 있었으나, 어떤 이유건 간에 양주에서 벌어진 10일은 저항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자들에게 벌어진 비열한 폭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양주를 쓸어버린 청군은 거칠 것 없이 대운하를 따라 양자강으로 진격했습니다. 전겸익은 홍광제에게 남경보다 남쪽으로 피신할 시기가 되었다고 조언했지만 간단히 무시되었습니다.
 
 
남명군의 다음 후방 진지는 진강(鎭江)이었는데, 양자강 남안의 중무장한 도성으로 남경 동쪽 인근에 위치에 있었습니다. 양주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맞은편의 장대한 양자강과 만나는 곳으로, 필연적으로 진강은 만주족의 다음 공격 목표가 될 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인물은 정성공의 숙부, 정지룡의 동생, 홍광제로부터 관작을 하사받은 인물인 정지봉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정채와 같이 말입니다. 부대는 참호를 파고, 남중국해의 유럽 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화기를 배치하여 청군을 맞을 채비를 했습니다.
 
 
정지봉은 고걸이 죽은 뒤 혼란에 빠져 도적군대로 돌아간 이전의 남명군대와 교전하여 1만여명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승리는 근본적으로 아무 의미없는 승리였습니다. 패잔병들은 변발을 하고 만주족에게 투항하여 그들의 충실한 새 부하가 되었던 것입니다. 도도의 군대는 투항한 한족들의 가담으로 더욱더 수가 불어 양자강 북안에 이루어고는 정지봉의 군대와 대치했습니다.
 
 
몇일간의 대치가 벌어지고 난 후, 어느날 밤에 청군 진영에서 뗏목들 위에 등불을 놓아 반대편으로 보내게 됩니다. 정지봉은 그 땟목들이 적군이라고 판단하여 소총과 대포를 발사하게 했는데, 실상 청군의 주력은 어둠 속에서 상류쪽으로 지나가 도강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속은것을 판단한 정지봉은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퇴각했습니다. 이 퇴각은 자기 전력을 이런 싸움에 소모시키기 싫은 정지룡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남명 조정에서도 정지봉이 당초부터 오래 지키고 있을 생각이 없지 않았느냐고 쑥덕거리는 판이었던 것입니다. 정지봉을 제외한 나머지 정씨 집안들은 이미 그들의 본거지인 복건으로 철수한 뒤였습니다.
 
 
즉, 정지봉이 진강을 떠난것은 이제 정지룡의 군대가 남경 방어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청의 도강 소식이 전해졌을떄, 홍광제는 연회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원(왕실 가무단)에는 예술이 능한 자가 없단 말이지! 어떻게든 찾아내서 데려오고 싶구만……"
 
 
이는 제정신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홍광제는 술에 취한채로 말에 걸터앉아 달아났습니다. 전겸익은 이제 상황이 다 틀렸다는것을 알았고, 그의 젊은 부인이자 애첩이며 시인이며 정성공에게 서예를 가르치기도 했던 류시(柳如是)는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전겸익이 존경받는 유가인 만큼 자살할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강물에 빠져죽으려고 하자, 전겸익은 이렇게 말하면서 마음을 바꾸고는 만주족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합니다.
 
 
"물이 차가울 것 같다."
 
 
류시는 정색하면서 '이게 옳은 것인가' 하고 따졌지만, 전겸익은 한평생 곧은 유학자로 권신들과 부딫히는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 이때는 무엇인가 홀린듯이 만주족에게 항복하는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홍광제에 대한 진저리가 그 탓인지도 모릅니다. 홍광제가 그토록 형편없기에, 수십년 후의 만주족은 더욱 편하게 자신들을 명의 후계자로 자처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형편없는 인물이 어찌 중화제국의 주인이 될 법하겠느냐면서 명사(明史)의 마무리를 지으면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전겸익은 양주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침략군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면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런 사이에 백성들은 감옥에 있는 가짜 황태자, 왕지명에게 곤룡포를 입히면서 그를 새 황제로 삼겠다고 열성이었습니다. 마침내 도도의 군대가 폭우를 뚫고 성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별다른 문제없이 인수인계가 이루어졌고, 도도는 문제의 가짜 황태자 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의견을 내었습니다.
 
 
"진위 여부는 지금 파악할 순 없겠군. 북경으로 돌아가야 모든것이 밝혀질 것이다."
 
 
남경의 한 구역이 만주족 거주지로 정해지고, 한족 주민들은 쫒겨나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격리시킨것은 막대한 희생을 치른 양주의 전례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남경은 비교적 평화롭게 만주족의 수중으로 돌아갔습니다. 전겸익은 변절자가 되었지만 수만의 목숨을 살릴 수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쯤엔 도망친 홍광제도 붙들려 남경으로 압송된 후였습니다. 백성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졌으며, 비참한 꼴로 도도에게 끌려갔습니다. ─ 조너선 클레멘츠의 '해적왕 정성공' 에서는 ─ 도도는 가짜 황태자를 등을 참석시키고 연회를 하고 있었는데, 홍광제가 이 자리에 도착하자 그를 자리에 앉히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숭정제의 아들이 도성에 나타났음에도 어째서 황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는가?"
 
"만약 홍광제가 그 자신의 주장대로 중화제국의 진정한 황제라면, 왜 이자성의 잔당을 청나라 군사들이 뒤쫒아 소탕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홍광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을 몰랐지만 도도는 그를 더욱 몰아부쳤습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떠했기에 청군이 진군해 오자마자 황제가 남경에서 비겁하게 도주했는가?"
 
"진정 홍광제가 천명을 받은 황제라면, 마땅히 두려울 것이 없는것이 아닌가?"
 
 
마침내 도도는 홍광제가 무능력한 겁쟁이 주제에 황위를 찬탈했다고 비난하며 추궁을 마무리하고는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만주족은 본래 남경까지 내려올 계획은 없었지만, 저항이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족들이 기꺼이 투항해 왔기 때문에 계속 남진 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홍광제가 양자강 북쪽에 군대를 주둔시켜 막았다면, 만주족은 수많은 한족 투항자들을 확보를 못했을테고 지금같은 사단이 일어나기 전에 격퇴할 수 있지 않았겠나는 소리입니다.
 
 
홍광제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도도는 지루해져서 그를 끌고 가라고 명령했고, 만주족은 다른 정보를 얻기 위해 홍광제를 강도 높게 심문한 다음 처형해버렸습니다. 북경으로 압송된 가짜 황태자도 도르곤에 의해서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첫번째 남명 정부가 무너질때, 손에 피를 전혀 안 묻히고 그쪽을 포기하고 떠난 정지룡은 본거지 복건에서 새로운 황제를 세울 궁리를 했습니다. 정지룡이 자신의 세력을 수차례 해산시키려고 했던 명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정지룡의 진정한 계획은 더욱 소름끼치는 종류였습니다.
 
 
정지룡의 진짜 목적, 그것은 황제를 새로 세우고 그 조정을 좌지우지 할만한 사람이 되어서, 그토록 강력한 세력으로 청 왕조에 투항하는 것이었습니다. 투항 할때 자신의 위치가 높은만큼 그만큼 보답과 대우도 클 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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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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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종필 | 작성시간 12.05.20 정지룡이 황소의 난에서(?) 정부에 투항한 후 권세를 얻은 누구(?)를 닮고자 했군요.

    ? 좀 가르쳐 주십시요. 십팔사략을 읽어서 대충은 아는데 기억이...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5.20 주전충 말씀하십니까?
  • 답댓글 작성자종필 | 작성시간 12.05.21 네 맞습니다. 주씨 까지는 기억이 낮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해서
    검색해보니 황제까지 했네요.
  • 답댓글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21 주전충은 당대 세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이던 [장안]을 아예 날려버린 것으로도 유명하죠...-_-; 모든 건물을 헐어버리고 목재마저 추려서 가져갑니다. 참고로 장안이라는 도시가 사학계에서 얼마나 인지도가 있냐면, 역사학에서 따로 '장안학'이라는 개념이 나올 정도죠. 역대 중국도성의 모범이었고...

    주전충이 이후로 장안은 다시는 예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합니다...-_-;
  • 작성자자우림 | 작성시간 12.05.2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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