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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중국의 역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대시인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18|조회수971 목록 댓글 8

 



굴원

고양 임금님의 후예, 내 아버지는 백용이라 한다.
호랑이의 해, 호랑이의 달, 호랑의 날에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는 위로는 전설과 역사, 아래로는 천문과 지리를 넘나들며 이소는 낭만적이면서도 특이한 비유와 풍부한 상상력, 진지하면서도 웅위로운 기백이 어우러진 뛰어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굴원의 시가 후대의 형식에 준 영향이야 이루 말할것도 없고, 더구나 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후대 시인들의 사상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초사(楚辭)의 시조이자 시인들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을듯 합니다. 


조식

콩을 삶기 위하여 콩대를 태우나니
콩이 가마 속에서 소리 없이 우노라
본디 한 뿌리에서 같이 태어났거늘
서로 괴롭히기가 어찌 이리 심한고 
 
진사왕(陳思王)이라고 불리는 조식은 조조의 아들로 유명한데, 이 조식은 시에 대단한 재능이 있어 여러 뛰어난 작품을을 많이 만들어 내었습니다. 무엇보다 문학사적으로 그 영향력이 지대한것은 당시 현실과 비교적 분리되었던 시의 오언시의 영역을 아버지 조조 등과 함께 서정적인 영역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조조와 조식을 비롯한 이들은 당대의 세력가였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던 인물들도 당대 문학적 중심을 이루는 인물들이었기에 이러한 형식은 자연스럽게 대세가 되서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래 언급하는 사령운은 조식을 일컫어 "천하에 시에 대한 재능이 1말이라면, 조식은 그 중 8두를 차지할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도연명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네


동진 시대 말기의 시인인 도연명의 삶은 소박했고, 동진과 남조 시대 오랫동안 내려져왔던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문학이 아니라 민간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사랑이 부담스럽게 않게 느껴집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담백함 때문에 도연명의 생전에는 무시와 깔보임을 당하였지만, 당나라 이후 도연명에 대한 재평가가 벌어지면서 그는 육조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귀거래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에 하나입니다.

 

사령운

물속에 잠겨있는 구룡은 숨어있는 자세가 아름답고
높이나는 기러기는 맑고 고운 소리를 멀리까지 보내준다.
기러기처럼 구름위로 높이올라 화를 피할 수 없음이 유감스럽다
도덕적 수양을 강화하지만 지력이 부족하여 이룰 수 없으며
벼슬을 버리고 농사를 지으려 체력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
봉록을 추구하여 멀리 떨어진 해변에 와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병상에 누워서 바짝마른 수림을 바라본다.
 


남북조 시대의 시인으로 시의 대상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삼은 산수시인이라는것에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아름다운 언어와는 달리 그는 권력욕이 있었고, 또 그것이 충족되지 않아 늘 타오르는 분노를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결국 추방과 피살로 끝나버린 그의 삶에서 대단히 아름답고 화려한 시는 일종의 정치적 좌절을 자연으로 풀어보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너무 아름다움에 치중해 내용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시의 주제가 아니었던 자연을 시의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문학사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백

꽃나무 아래에서 술을 놓고 앉아
아무도 없이 홀로 마시고 있네
잔을 들고 밝은 달에게 권했더니
그림자까지 이제 셋이 되었다네

이른바 검선(劍仙), 그리고 시선(詩仙)이라고 불리는 이백, 이태백은 중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중에 한사람입니다. 당나라 현종때의 시인인 그의 삶은 많은 부분이 실제와 환상으로 덧칠되어 있는데, 평생동안 거의 한곳에 정착하는 일 없이 떠돌다녔고 언제는 도교에 심취하여 산에서 지내다가도, 언제는 칼을 들고 협기에 가득차서 싸움을 벌이는 일생이었습니다. 술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음주 팔선인'이라고 무리를 지어 다니고,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환관 앞에서 신발을 던져 보이며 자기에게 신겨보라고 하는등 그의 인생은 거칠것이 없었습니다. 



이백은 항상 시를 쓰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만들어냈으며, 그가 말하는것이 곧바로 시가 되는 시풍이었습니다. 이백이 평생동안 가장 사랑했던건 저 하늘 위에 달이었고, 일생을 두고 같이 한 친구는 바로 술이었습니다. 이태백의 삶에 짙게 배여있는 도교적 삶의 방식에도 불구하여 그의 호방한 인생은 유불선을 넘나들며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윌 듀란트 같은 사람들은 이태백을 '중국의 존 키츠' 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두보

손 뒤집어 구름 만들고 다시 엎어 비로 만드니
분분한 세상을 어찌 모름지기 헤하리랴
보지 못했는가, 관중과 포숙의 가난한 때의 그 사귐을
이러한 도리를 지금 사람들은 흙 버리듯 하는구나


시성(詩聖)이라고 까지 존경받는 두보는 중국인들에겐 오히려 이태백보다도 존경받는 시인입니다. 


아서 웨일리는


"중국의 문학을 다루는 사람들은 이백을 가장 위대하다 말하길 꺼리지 않는다. 허나 중국인들은 언제나 그 명예를 두보에게 돌린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불운으로 점칠되어 있었는데, 어린시절부터 시를 잘 쓰기로 유명했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세상을 방랑하며 이태백같은 이를 친구로 삼아 지냈으나 안사의 난이 일어나 모든것이 엉망이 되었고 관직에는 올랐으나 길게 가지 못하고 좌천당하여 벼슬을 버려야 했습니다. 다시 사는 지역에 대기근이 들어 모든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는데, 두보의 시에서는 이러한 전쟁과 참혹함이 절절하게 들어납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 속에서도 그는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찰과, 거기서 나온 감동을 잃지 않고 무수한 자연 가운데 지금까지 알아내지 못했던 새로움으로 비와 꽃, 산과 달을 노래했습니다. 



한유 - 백거이 - 소동파 등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두보를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그의 시는 중국은 물론 국내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쳐 일종의 교재와 같은 수준으로 쓰였습니다. 이태백이 한번에 시를 내려서 외운다면 두보는 수십, 수백번에 걸쳐 하나의 작품을 꼼꼼하게 다듬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삼국시대 두예의 후손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망명한 명나라 장군 두사충 때문에 그의 후예는 한국에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백거이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주소서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언약했지요



역시 당나라의 시인이자 소년 시절부터 천재라고 이름이 났던 백거이는 두보와는 달리 관직에서 오래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지방으로 좌천되었는데 그때의 심정을 고스란히 시로 노래했습니다. 백거이의 대표적인 시는 장한가와 비파행으로 이 시들에서는 인간 세상을 넘나들는 깊은 낭만적인 색채가 가득합니다.


 더구나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았고, 농촌의 소박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길 즐겼으며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시를 다시 고치는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백거이의 시를 불렀고, 노래를 파는 기녀와 지긋한 사람들 모두 장한가를 즐겨 불렀습니다. 당나라 헌종은 이런 시를 써서 백거이의 시를 말했습니다 "어린 동자도 장한가를 읊을 수 있고, 호족의 아이들도 비파행을 가창할 수 있도다."

 


"시" 라는것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것이 아닌,

늙은 노파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와 가까운것.

그것이 백거이의 시입니다.


한유

눈부시게 피어난
오월 석류꽃
가지 사이로 수줍게 맺힌
아기 열매들
마차도 다니지 않아
적적한 고을에
붉은 꽃봉오리들 떨어져 내리네
푸른 이끼 위로

역시 당나라의 시인인 한유는 고문 운동의 창시자로, 이 산문의 문체 개혁이 있은 뒤 고문은 송나라 이후 중국 산문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소동파는 ‘문장으로는 지난 8대(동한東漢, 위魏, 진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수隋)를 다시 일으켜 세운 분' 이라고 칭송했는데, 그는 시인으로서도 뛰어났습니다. 다만 너무 지나치게 난하해고 산문과도 같다는 비난도 있습니다. 


이하

검은 구름이 성을 눌러 성이 무너지려 하고
갑옷의 광채가 해를 향하니 금비늘이 열리는 듯
가을 빛 속에 뿔피리 소리 가득하고
국경 요새의 연지는 밤에 보랏빛으로 엉켜있다.



한유는 어느날 어떤 시를 보고 깜짝 놀라 시를 지인 사람을 수소문 했는데, 찾아보니 7살 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한유는 반신반의해 그를 시험해 봤지만 아이는 즉석에서 대단한 시를 지어 한유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이하로, 이하는 20살이 안되어 명성을 크게 날려 시귀(詩鬼)라고 까지 불리게 됩니다. 허나 그는 관직과는 인연이 멀었는데, 이하의 아버지 이름은 '진'숙이라 아들은 '진'자와 관련된 일을 피해야 하기에 음이 같은 '진'사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이는 이하를 시기하는 무리들의 소행이었습니다. 한유는 어처구니가 없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이름이 '진'숙이라 '진'사 시험을 못본다면, 아버지 이름이 인(仁)이면 아들은 사람 노릇(人)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하는 결국 9품관에 머물며 얼마 못가 죽고 맙니다.


 

소식

아득하구나, 나의 그리움이여
하늘 끝 미인을 기다리네
손님 중 퉁소를 부르는 이 있어 노래에 기대어 화답한다
 
그 소리가 구슬픈 듯,
기쁜듯, 사모하는 듯, 노래하는 듯, 원망하는 듯,
남은 소리는 간드러지고 실처럼 끊어지지 않네
 
그윽한 골짜기서 교룡은 춤을 추고
외로운 배의 과부가 울겠네
소동파가 슬피 놀라 옷깃을 바로잡고 무릎을 세우며 앉았다


소동파, 소식은 두말할것 없는 북송 제일의 시인으로, 김부식, 허균, 그 뒤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 않던 대시인입니다. 허나 그는 왕안석의 신법파와 사마광의 구법파의 분쟁에 얽혀 성공적이지 못한 정치 인생을 벌였는데 그는 신법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신법파의 독선은 미워했고 이 탓에 중앙정부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신법파가 제거되고 난 뒤에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신법파를 지나치게 제거하는 구법파에 진저리를 냈고 정통 주자학자들과 대립을 벌이며 비난을 받았습니다. 다시 신법파가 즉위하자 그는 오지 중의 오지 해남도로 귀향을 떠났고, 다시 휘종이 즉위하며 사면을 받자 상경하던 중 병을 얻어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자 백성들은 울었고, 학생들은 수업을 때려치고 추모를 했으며, 기생들은 울다가 지쳐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원호문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가름하게 하는가? 

천지간을 가로지르는 새야! 
너희들은 지친 날개 위로 추위와 더위를 몇 번이나 겪었던고 .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속에 
헤매는 어리석은 여인이 있었네. 

님께서 말이나 하련만, 
아득한 만리에 구름만 첩첩이 보이고...... 

해가 지고 온 산에 눈 내리면 
외로운 그림자 누굴 찾아 날아갈꼬. 




남송은 엄청난 문화 대국이었고, 그에 반해 여진족들이 세운 금나라는 문화적인 성취에 있어서 송에 비할바가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초반, 원호문은 단 혼자의 힘으로 양국 시인들의 성취를 팽팽하게 끌어놓은 인물입니다.


금나라의 지배층 여진에서 보면 원호문은 한족 나부랭이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인 금나라를 사랑했고, 자신의 나라가 결코 송나라의 문화적인 성취에 뒤지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의 시대가, 금나라가 몽골의 말발굽에 유린되며 고통스럽게 최후를 당하던 시기였습니다.


저항하는 자는 모두 학살되고, 평화스럽던 마을이 야만스러운 폭력에 무너지고, 단단하던 성이 지옥의 아수라장이 되는 세상. 원호문이 살던 시대는 바로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원호문의 형 조차도, 몽골군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무너져버린 조국. 과거 영화를 떨치던 금나라는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전란이 끝난 후엔 원호문 역시 늙고 힘이 없어 거동조차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원호문은 붓을 계속 잡았는데, 그의 붓은 망국을 기록하는 붓이었습니다.



금나라 말기의 여러 시인들과, 전란으로 인해 흩어진 훌륭한 작품들. 원호문은 힘든 몸을 이끌고 일일히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취재하고, 탐문하며 그 모든것을 모았습니다. 많은 목격담을 보았고, 자신도 많은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록했습니다. 시대는 흘러가고 왕조는 수없이 탄생하고 또사라지겠지만, 뒷 시대를 이어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 우리를 기억해다오. 우리의 나라를 기억해다오. 우리의 나라에 있었던, 그 이야기들과, 그 모든 시들을 기억해다오. 우리에게도 그러한 것이 있었음을……



가늘디가는 붓을 들고,

힘을 다해도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노쇠하여 더디어짐을 스스로 아쉬워하지만

걱정가 두려움을 누구에게 들려줄까.


뒤척이고 또 뒤척여도, 날은 아직 밝지 않았는데

컴컴한 창에 간간히 빗소리만 울린다.




붓은 가볍디 가벼운 것입니다. 하지만 멸망한 나라의 멸망한 유민으로서, 사라진 조국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책임감에 원호문은 온 힘을 다해도 붓이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체력의 쇠함을 홀로 위로하고, 걱정과 두려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런 감정을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될지 조차 알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이해할수 없을만큼 거대한 책임입니다. 그런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기만 하는데, 날은 좀처럼 밝지 않고 어두컴컴한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만, 간간히 들려옵니다.



소름끼치도록, 놀라운 집념과 무섭도록, 강고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원호문은 김용의 '신조협려' 로 유명한 안구사를 지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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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havoc(夏服ㅋ) | 작성시간 12.07.19 감사합니닿~! 데헷.
  • 답댓글 작성자퇴계지부 | 작성시간 12.07.19 총통각하를 의미할 수도..
  • 작성자jowlaw2 | 작성시간 12.07.19 흠 시인 중에 소동파도 저기에 견주면 발릴려나 ㅠ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7.20 소식이 소동파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jowlaw2 | 작성시간 12.07.21 아 그렇군요 아명 개객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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