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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명 제국의 황혼(5) ─ 국성야(國姓爺)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5.21|조회수1,087 목록 댓글 6




실제 청나라 초중기에 변발 이런식으로 하면 죽습니다. 머리가 시작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밀어야 합니다. 저런 식의 스타일도 용납이 되었던것은 최소한 청 중기 이후, 말기쯤은 되서야 가능했던 일입니다.




남경 점령후에 청군은 변발을 강제적인 조치로 변경했습니다. 맨 처음 청군이 산해관 안으로 진입할때는 변발을 강제의사로 하다가, 남정군을 조직할때 무렵에는 자유의사로 변경되었습니다. 청군이 그토록 많은 한족 투항자를 얻을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는데, 남경이 함락되자 다시 강제 조치로 변경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반청 감정이 한번 더 꿈틀거리게 됩니다.




한편, 그런 반청 감정도 구심점이 있어야 득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강남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던 위치의 홍광제는 절호의 기회를 바보짓만 하다 끝내어 처형당했고, 홍광제와 제위를 다투던 노왕 주상방은 홍광제 몰락 후 자신을 옹립하려는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청에 항복했습니다.


"대사는 다 끝났소."


라는것이 그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를 따라 청에 항복한 사람들도 있었고, 따르지 않고 자결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장국유 등은 노왕(魯王) 주이해(朱以海)를 옹립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웠고 이들은 항주를 취하려고 했지만 청나라 총독 장존인(張存仁)에게 패배하여 퇴각했습니다. 노왕 정권 이외에도 망명 정권은 계속해서 생겨났는데, 앞서 말했다시피 정지룡의 음흉한 계략으로 인해 또 다른 황족이 선택되었습니다.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이 바로 그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정지룡이 '진정' 반청의 기치를 내세우는 인물이었다면 주율건은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과거 전과 기록이 있긴 했으나, 다른 황족들처럼 안하무인으로 굴거나 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고 스스로 군대를 모아 이자성 반란군과 격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군대를 모으는것은 분명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한 일이긴 하나, 사실 그전에 주율건은 조정에 3천 병력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병력을 모았던 것입니다. 그때문에 정상 참작되어 아주 큰 벌은 면하고 감옥에 들어가 있던 참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주율건은 남경 정권이 홍광제의 무능으로 붕괴 되자, 항주로 내려가다가 총병 정홍규(鄭鴻逵) 등을 만나게 됩니다. 이 정홍규가 바로 정지룡의 형제인 정지봉입니다. 정지봉은 정씨 일가의 본거지인 복건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는데, 마침 이 우연한 만남의 인연 때문에 주율건을 같이 복건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주율건은 남하하면서 여러 지방에 "아직 명나라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고 알리는 한편 일대 반격의 시기가 왔다는것을 알리면서 앞으로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이 될 정지룡에게도 각별히 사의를 표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우선 주율건은 홍광제의 생사 여부를 확인 할 수 있을때까지는 섭정으로 남아있기로 한 참이었습니다. 복건에 도착한 섭정은 신하들에게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한것을 권고하는 한편, 지체없이 주무 대신들을 임명하고 항전 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무렵, 홍광제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주율건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융무제(隆武帝) 였습니다.



융무제는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홍광제 보다야 유능한 인물이었고 반격에 대한 의지도 강했습니다. 하지만 반격을 하자면 정지룡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융무제는 정씨 집안의 인물들에게 여러 벼슬을 내렸고, 곧 융무제 정권의 중추는 누가봐도 정씨 일족의 손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중요한 인물인 정지룡은 심드렁할 뿐이었습니다. 정지룡은 처음 주율건이 융무제로 즉위할때도 '우선은 감국을 취한 다음에 황제가 되든 어쩌든 하는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고 비협조적으로 나왔는데, 정지봉 등이 '민심을 다잡는 계기의 의미로 보더라도' 황제가 있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여 이를 승낙하게 됩니다. 황제를 모시게 된 정지룡이지만, 정작 그의 관심은 가장 적절한 '투항의 시기' 를 노리고 있을 뿐이었고, 그 투항 시에 높이 대접 받을 수 있기 위해서 자신의 세력을 '쓸데없는' 반청 싸움에 소모시키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이 무렵 정지룡의 권세는 평노후라는 작위에서 평국공(平國公)에 까지 이르러 절정으로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정성공의 어머니인) 일본에 있던 아내 다가와가 중국에 오게 됩니다. 그녀는 안해성에 거주했습니다.



각지에서 도와달라는 보고가 올라왔고, 융무제는 몸이 달아 출정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정지룡은 좀 더 기다리자고 하여 어물쩡 넘어갔고, 융무제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승낙했습니다.


하지만 정지룡은 말했다시피 북벌할 의사 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실상을 말하자면 복건으로 쳐들어오는 청군을 막을 길목만 100군데가 넘는데, 이곳을 지키고 있는것만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북벌은 어림없는 소리였습니다. 정지룡은 융무제에게 복건의 재정이 장기전을 치르기엔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뱃길을 열고 각 포구에서 교역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이를 통하여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야 한다" 고 건의했습니다. 대외 무역으로 복건의 경제 여건을 회복시키고 융무제의 전쟁 수행 자금을 높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실행되고 나서 보니 이득을 얻는건 정지룡이었습니다. 정책의 실행에 필요한 부하, 선박, 각종 계약들은 모두 정지룡의 관할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지룡은 북벌 보다 자신의 이윤을 불리는데 고심했고, 북벌 계획은 점점 연기되고만 있었습니다.




반격 날짜는 한번, 두번 계속 연기가 되었고 결국 융무제는 정지룡에 대한 실망감으로 정씨 일족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천해의 요새이자 정씨 일족의 본거지인 복건을 떠나 바깥 지방에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절망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융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 때문에 괴로워 했습니다.

파일:ChinaFujianNanping.png

복건의 남평 시. 이곳에 연평(延平) 구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해야했던 융무제는 연평에 전진기지를 만들고 그곳까지 나아갔습니다. 정지룡은 이에 대해 전혀 지원을 안해주면서 '태업'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지원은 커녕 북벌 중이던 정씨 군단도 뒤쪽으로 물리면서 병력을 아끼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의 장군 보로(甫老 박락)은 항주 이남의 얆은 강을 그저 걸어서 건너오기 시작했고, 한족 병사들은 기겁하면서 도망쳤습니다. 이 무렵 연평에서 전전긍긍하던 융무제는 깜짝 이벤트를 선보였는데, 자신의 부하들이 만주족에게 보내던 편지 200여 통을 가로채고는 회장에서 이것들을 한줄도 읽지 않고 태웠습니다. 죄목들은 불문에 부칠테니 새로 출발하자는 이야기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미 정지룡은 보로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로는 정지룡에게 싸울 것이 무엇이냐고 제의했습니다. 정지룡은 변발을 하고 새로운 주군, 즉 청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만 한다면, 그 댓가로 복주와 광주 도독이 될 것이며 이는 정지룡이 중국 남동 지역의 제왕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가 할일은 남동 지역에서 왕이나 다름없이 지내면서 간간히 백성들을 족쳐 공물만 북경으로 올려 보내면 될 뿐이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융무제를 배신하는 일이었지만, 배신에 관한 문제에 대해 정지룡은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정지룡은 지난 1년이 넘게 만주족을 고생시켰고, 현재는 투항하기에는 자신의 가치가 가장 높은 최적의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정지룡은 이 순간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고 봐도 무방하고, 짜놓은 거미줄은 이 시점에 이르러 완벽한 그림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도 못했던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들, 정성공이었습니다.







정지룡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대만외지의 기록으로는, 정성공은 이때 복건의 길목 중 하나를 지켰고 부하는 고작 100여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는 22세였고 당연히 적을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성공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할테지만, 정성공은 자신의 아버지 정지룡이 명나라를 위하는 충신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기와 배신을 밥먹듯이 해온 정지룡과 달리 정성공의 어린 시절은 충효에 대한 유교 경전의 공부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정성공을 교육시킨것은 정지룡 본인이었습니다. 여하간에 정성공은 지원 대신 온 편지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 "복주에 있는 동안, 나는 보로 장군의 부대가 복건을 치고 명 유신들의 저항을 일소하기 위해 원병을 기다리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나 나는 황제 폐하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나로서는 군사를 모을 자신이 없구나. 만주족에게 헛되이 저항해 보아야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보로와 협상하여 우리 가문 사람들이 모두 양호한 대우를 받게 하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이에 너도 병장기를 내려놓고, 그로써 이로움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이때 정성공이 느꼈을 배신감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짐작도 가지 않을 일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하나 부서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척후병들은 어마어마한 만주족 병력이 접근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지원도 없다는것을 확인한 정성공은 어쩔 수 없이 복건의 해안으로 이동했습니다.



의외로 정성공 외에 정씨 가문 일족 내에서도 이 배신은 엄청난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융무제를 데려온 정지봉이 그러했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는 용맹무쌍한 사람이고, 바다로 나가 항전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며 정지룡에게 이렇게 진언했던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법이오!"



배신감을 느끼고 정지룡을 대면한 정성공은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항상 소자에게 충성의 도리를 가르쳐주시던 아버님께서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수치스런 항복을 심중에 두고 계시단 말입니까! 어찌 자식된 자로 하여금 제 아비를 역적 이라 부르게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평생 신의 따위에는 얾매인적이 없던 정지룡은 이런 친척들과 아들의 반응이 놀랍고 불쾌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친인척들이 사태를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으니, 누구라도 평상시처럼 지낼 수는 없다!"


젊은 날 마카오로 떠나, 해적 이단의 아래에서 밀무역을 하고 교활한 네덜란드 인들을 상대하면서 성장한 정지룡은. 그는 유가의 충효에 대해 배운적도 없고, 이상주의 따위에 정신을 빼앗긴 적도 없었으며,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미 남경이 함락되던 그 순간부터 명나라는 끝장난지 오래라는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지룡은 아들에게 신랄하게 덧붙였습니다.


"너 같은 애송이가 정치에 대해 무엇을 안단 말이냐?"




그러나 결국 엄청난 반발끝에 정씨 집안의 선단들은 바다로 나가게 되고, 정성공은 남쪽으로 융무제를 만나러 떠났습니다. 심지어, 심지어 정지룡의 부인 다가와 마저도 정지룡을 따르지 않고 정씨 집안의 몸을 의탁했습니다. 정지룡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바보같은 일이었지만, 세상에는 모든 일을 영리하게 하는 사람들 대신에, 손해를 보더라도 바보가 되는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정지룡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복주에 온 보로가 본것은 위풍당당한 정씨 집안의 대함대를 거느린 대세력 정지룡이 아니라, 선전 효과 이외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내 한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씨 집안의 함대는 여전히 청군에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보로는 정지룡이 '다른 일족들이 몸을 뺼 시간을 벌어보려 수작을 부리는것' 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태에 이르렀고, 그를 북경으로 잡아 보냈습니다.



본래 정지룡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고, 난투극까지 벌어져 경호원들이 사망하기도 하나 정지룡은 결국 강제로 가마에 올라타 북경으로 보내졌습니다. 바다를 주름잡던 대해적은 정지봉의 말대로 "물을 떠난 물고기" 꼴이 되어 죽을때까지 북경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최후는 더 끔찍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배신의 댓가를 넘치도록 치룬 셈입니다.




보로는 성이나 융무제를 추격하고 복건 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개 부대를 때어 안평 지역으로 보냈는데 이곳에는 일단의 정씨 진영이 있었고, 무엇보다 정성공의 어머니 다가와가 있었습니다. 정성공은 미친듯이 안평으로 내달렸습니다.




하지만 도착한 정성공의 눈에 보인것은 완전히 포위된 요새였습니다. 성벽을 오르는 만주족 병사들의 모습은 싸움이 이미 종말에 이르렀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정성공은 소규모 병력으로 만주족의 후방을 공격해보기도 하나 이미 어머니는 사망한 뒤였습니다. 폐허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정지룡도 그 소식을 들었고, 그는 격분했습니다. 정지룡이 보로와 분쟁까지 일으키며 북경으로 끌려간것이 이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더러운 배신자가 되었고, 얼마 되지도 않아 어머니는 죽었습니다. 젊은 정성공은 미친듯이 울고 절규하면서 방안에 있는 모든것을 칼로 베면서 오랑캐를 죽일것을 맹세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제법 진정된 정성공은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무렵 종말의 마지막이 닥쳐왔는데, 융무제가 사로잡혔다는것입니다. 그리고 곧 처형되었습니다.



정성공은 남은 정씨 일가를 해안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머뭇거리다가는 만주족 선봉대가 해안으로 밀려와 저항 세력을 일소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바다로 나가거나 대만으로 가는것만이 답이없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의 고향으로 가더니, 공자의 사당에 유생의 의복을 가져와 불속에 던저버렸습니다. 수하들은 당황하여 정성공을 바라보았지만, 정성공은 불에 타들어가는 옷을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그 동안 나는 일가친척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살았지만, 지금은 나 혼자 남았다."


물론 감히 지금의 정성공에게 '아버지는 살아계시지 않느냐' 고 말할 간 큰 부하는 없었습니다.


"대장부의 삶에는 자립할 떄가 오기 마련이다!"


정성공은 하인들을 불러 갑옷과 투구를 가져오게 한 다음, 자신은 더 이상 공부하는 선비가 아니며 명 왕조의 복수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대만외지에서는 이때 정성이 지은 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기쁨과 깊은 슬픔이 교차한 한 해로다.

사람은 입신양명에 열심이지만,
죽음이 그를 놓아주지 않으니,
쓸데없는 놀이처럼 모든것이 헛되도다.

사람들의 마음은 눈먼다 해도
천도는 진정한 마음을 알아줄 것이니
비록 나의 삶이 한낱 장기놀이에 불과하다 해도

나는 최후의 한 수도 두렵지 않구나

백성들이 원하는것을 말하게 하라
정직한 사람이 되기가 쉽지 않으니
비통하고 사악한 시기로다





현실을 중시하는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했을때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성찰하는것은, 정지룡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이를 편을 바꾸는 핑계거리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자신을 알아주고 명예롭게 해준 왕조에 대한 충성심으로 삼았습니다. 정성공이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만주족을 중국에서 축출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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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Jitter | 작성시간 12.05.22 정지룡이 옳았는지, 정성공이 옳았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이름을 남긴건 아들인 듯 하군요.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차로아침을 | 작성시간 12.05.22 지금와서 하는 얘기지만 만주족이 이때 축출되서 만주로 쫓겨났으면 만주땅은 중국땅이 안됬을거고(그리고 만주족이 세운 나라와 한국이 국경을 두고 대치하면서 으르렁댔을테니 만주족은 우리민족이라는 환빠들도 안나왔을거고) 내몽골이나 신강,티벳도 일부는 모르지만 전부 중국땅이 되지는 않았을듯.명나라는 인도보다 약간 큰 사이즈 아니었나? 그걸 키운건 강희하고 건륭인데.하기야 청조도 말기에 큰 영토를 잃었지만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5.22 글의 구성, 문장 다 읽기 편하고 재미있습니다. 필력이 여간 아니세요~

    생각해보면 북한 김씨 왕조에서 김정일과 김정남도 비슷한 듯... 외국에 보내서 공부시켰더니 개혁 개방을 주장하는..
  •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2.05.22 아니... 이런거군요... 정성공...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2.05.22 정지룡과 정성공이라............. 한국현대사에서도 있었던 일들이죠. 공화당 의원아들이 유신반대 데모 하다가 잡히는 일도 있었으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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