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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채악, 원세개의 야망을 부셔버리다 ─ 제3차 혁명, 호국전쟁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1.04|조회수666 목록 댓글 1







 중국 근현대사의 수많은 이름 중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원세개 만큼 유명한 사람은, 중국과 대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회가 모두 그 이름을 드높게 여기는 쑨원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는 가장 오래된 전제군주 국가인 중국에서 태어나, 전제군주제를 실시하는 청조를 무너뜨렸고, 최후에는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걸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원새개의 행동 원리에서 이념이라고 볼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권력을 향해 움직이는 괴물에 가까웠습니다.


 1911년, 중국은 어마어마한 혁명의 불꽃에 휩싸였습니다. 신해혁명이 벌어지고 청조 정부는 혁명군을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지만, 이 시점에서 중국의 군대는 이미 원세개 개인의 소유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원세개가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청나라의 섭정왕 재풍은 당초에 원세개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원세개는 죄인처럼 북경을 탈출해 하남의 고향에 은둔하고 있던 실정이었습니다. 원세개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않는다면 군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청조는 원세개를 호광 총독으로 임명하고, 흠차대신에 임명하고, 원세개의 부하인 풍국장, 단기서를 제1군, 제2군 총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경친왕이 사임하고, 후임 내각 총리대신으로 원세개가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북경 조정의 당황스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원세개는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황흥이 이끄는 혁명군은 무창에서 분전하고 있었고, 원세개의 부하인 풍국장은 호북성을 함락했는데, 원세개는 우선 풍국장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는 혁명군인 '남군' 에게 3일간의 휴전을 제의하고, 그 뒤에 이를 15일로 연장했습니다.



 그 후의 일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건이 발발하던 당시 미국에 머물던 쑨원은 신문을 사고 식당에 들어가서, 포크를 들고 신문을 흚어보다가, "무창, 혁명군에게 점령되었다." 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때 쑨원은 바로 중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유럽을 경유했습니다. 청조에 대한 차관을 중지시키고, 이제 탄생할 새로운 공화 정권을 위한 경제 원조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에는 쑨원의 은사인 캔트리 박사가 있었는데, 쑨원이 캔트리 박사를 찾자, 박사는 쑨원에게 편지를 하나 주었습니다.

 편지는 그저 '런던, 쑨원' 이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당시 쑨원은 상당한 유명 인물이고, 그가 어디있을지는 모르지만 캔트리 박사의 집을 들릴 것이라고 여겨 캔트리의 박사의 집에 전보국에서 편지를 보낸것입니다. 전보의 내용은 쑨원을 새로운 공화국의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내용. 이에 대해 캔트리가 수락할 것인가, 하고 물어보자, 쑨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달리 적당한 사람이 없다면. 당분간."


 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쑨원은 12월 25일 상해에 도착했고, 29일 남경에서 각 성 대표의 선거가 벌어져, 1월 1일에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쑨원이 냉정하게 살펴 보기에, 총저의 종언과 중화민국의 성립을 외국이 모두 승인하게 하는데는, 중국 최대의 실력자인 원세개 보다 나은 적임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미련없이 내놓아, 원세개에게 양보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당원은 파괴가 성공한 후, 이미 대부분은 혁명의 신의와 명예를 지키지 않았고, 지도자의 주장을 따르지 않아, 설령 혁명당으로 중국을 통일했더라도 혁명의 건설은 이루지 못하며, 그 결과는 새 관료가 옛 관료를 대신하는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당원을 이끄는 자신은 당연히 북양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대단히 겸허하게 당시의 심정을 술회했습니다. 다만 떠들기 좋아하는 무리들은 원세개가 백만금을 주고 쑨원의 총통 자리를 샀다고 수근대었습니다. 쑨원과 원세개의 전보 교섭은 다음과 같이 결론이 났습니다.


 1. 청나라 황제의 퇴위, 원세개가 북경에 있는 각국 공사에게 그 사실을 통지

 2. 원세개는 공화주의에 절대 찬성할것

 3. 쑨원은 외교단에게 청나라 황제의 퇴위의 포고를 통지한 뒤 사임한다.

 4. 참의원에 의해 원세개를 임시 총통으로 선출한다.

 5. 원세개는 임시 총통으로 선출된 후, 반드시 참의원이 정한 헌법을 준수한다.



 그런데 당시에 원세개는 "군주제인가, 공화제인가 하는 문제는, 국민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주장을 흐렸는데, 훗날 그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이에 대해 쑨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남북의 전쟁으로 사람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차마 견디지 못하므로, 화의하는 일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민주제냐, 군주제냐 하는 것을 다시 상의하지는 못하지만, 그대의 고심을 사람들은 알아 줄 것이다. 만일 그대의 힘으로 전쟁을 하지 않고, 또 국민의 염원을 이루며, 민족의 조화를 유지하고, 청 황실 또한 안락을 얻는다면, 한 가지 일로 몇 가지 선을 행함이니, 공을 참작하고 그 능력을 양보하는 일은 저절로 공론이 있을 것이다."


 즉 공화제인가 군주제인가 하는 문제는 재고의 여지가 없지만, (그가 바른 마음을 먹는다면)원세개의 공적을 사람들이 알아줄것이라며 추켜세웠습니다.  


 결국 모든 준비가 되어, 청나라의 선통제 부의가 2월 12일 퇴임하고, 15일 원세개가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습니다. 이제 왕조가 무너지고 중국은 중화민국으로 이름이 바뀌고, 공화제가 되어 의회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한 듯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원세개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원세개는 자신의 어용 정당인 공화당이라는 당을 만들었씁니다. 그리고 당시 존재했던 통일당 등을 끌어모아 다시 진보당이라는 당을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송교인등은 국민당을 만들었고, 정당 내각제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동분서주한 사람이 송교인입니다. 송교인은 결국 나중에 암살되었는데, 원세개가 한 짓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송교인의 모습.


 당시 의회 중의원 중 국민당은 267명. 그리고 원세개의 진보당은 154명이었습니다. 참의원에서는 국민당은 123명, 진보당은 69명이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의회가 원세개를 저지해야 하나, 원세개는 국회의 승인도 얻지 않고 외국의 차관단 과 조인을 하는등 월권 행위를 했고, 국민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원세개의 움직임은 대단히 노골적이었으므로, 이에 대응하기 위해 탄압과 좌천 인사로 막다른 길에 몰린 국민당계 사람들이 준비나 연락도 없이 거병했습니다. 신해 혁명이 1차 혁명이라면, 이것이 바로 2차 혁명입니다. 원세개의 군대는 남경으로 진격하면서 혁명군을 꺾어버렸고, 쑨원은 대만으로 망명했습니다.


 혁명군도 무찌른 그는 의회를 협박해서 대총통 선거법을 통과시키고, 자신을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임시' 대총통도 아니고 진짜 대총통이 된 그는 국민당을 모조리 해산시켰고,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게 됩니다. 1913년 말, 중앙정치회의에서 원새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정과 외교의 좋고 나쁨은 그 정부의 강고함에 달려 있으며, 국채, 즉 민주제냐 군주제냐 하는것과는 관계가 없다."


 하면서 속이 보이는 말을 하고는, 중국이 외교 문제에서 러시아나 영국 등과 문제가 벌어지는것은 정부 권력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정부 권력을 다시 강화시켜 중국이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주제가 부활해야 하고, 자신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숨은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세계 대전이 벌어지던 시기. 열강들이 유럽에서 싸우고 있을 무렵, 일본은 중국의 이권을 욕심내서 그 유명한 2개조 요구를 1915년 1월 18일에 중국에 제출했습니다. 5월 7일 일본은 최후 통첩을 들이댔고, 중국 정부는 9일 이를 수락했습니다. 원세개는 21개조 요구를 승낙한 후에, 군주제 실현을 위한 최후의 준비를 했습니다. 미국의 행정법학자인 프랭크 존슨 굿노(Frank Johnson Goodnow)까지 데려와서 "중국은 공화제보다 군주제가 훨씬 적합하다." 는 논리 등을 펴면서, 마침내 12월 12일.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원세개.



잘 아시다시피 원세개는 그 직후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고, 지식인들은 모두 이 사태에 대해 조롱을 퍼부었으며, 저잣거리 무지렁이 조차도 청조의 어린 황제에게 종언을 고한 사람이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한다며 괘씸하다고 분개했습니다. 이에 3차 혁명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전중국에서 일어난 사태의 첫 불을 붙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채악입니다. 



채악의 모습


'건당위업' 이라는 중국 영화에서 한국에도 유명한 유덕화가 채악의 역을 한 적 있습니다. 하지만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중국 영화 등은 무협 물이 아니라면 그냥 정치 선전물에 가까우니 별로 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채악은 호남성의 가난한 선비 집안 자식으로 태어났고, 당시 중국 지식인 중 최고의 명성을 가진 사람 중에 한명인 양계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양계초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학을 공부한 후, 신해혁명 당시에 29세의 나이로 혁명에 호응, 운남을 평정하고 운남군 정부의 도독으로 취임했습니다. 2차 혁명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1차 혁명, 즉 신해혁명이 벌어지기 전 당시 채악이 있는 운남성의 군관학교에, 채악보다 네 살 어린, 그리고 훗날 중국 근현대사에 대단한 획을 긋는 인물인 주더(朱德)가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주더는 어설프게 신식물이 들고 어설프게 혁명의 기치에 공감하고 어설프게 행동하는 인물이었는데, 주더는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라는 사람과 인터뷰를 했고, '당시 주더가 꿈에서나 생각해 볼만 일들을 이미 성취해 놓고 있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더


 우리는 채악의 사진을 알고 있지만, 그 당사자를 실제로 본 주더는 채악을 "허약해 보이는 체격, 피부가 하얀 전형적인 지식인의 모습, 야윈 얼굴, 두 눈 사이가 많이 떨어지고 턱이 여성적이지만 입은 모질고 완강한 인상을 풍겼" 다고 하면서, 당시 "말이 없고 냉랭하며 자기 자신이나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했" 다고 회고 했습니다. 


 채악은 매일 저녁 밤 늦게까지 일을 했고, 주더는 가끔식 자신의 문제를 상의하러 찾아갔습니다. 주더는 그곳에서 채악이 양계초, 강유위, 몽테스키외, 그리고 조지 워싱턴의 생애를 다룬 책을 읽는것을 보았고 이런 책들을 빌려서 읽었습니다. 또 채악은 호남성은 물론 동경이나 홍콩, 심지어 공화파의 비밀간행물등 온갖 종류의 신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것치고는 군주제 옹호세력을 공격하거나, 혹은 (비밀결사인 다른 동맹회 회원들처럼) 강의중에 은근히 혁명 사상을 주입하거나 하지 않아, 주더는 (주더 자신도 동맹회에 곧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채악이 동맹회 회원이라는 점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신해혁명이 벌어질 당시, 다른곳에서 일어난 봉기의 소식이 채악과 주덕이 있는 운남에도 전해졌고, 운남의 총독은 채악에게 운남의 신식 군대 내에 혁명파의 혐의를 받는 자들을 모두 체포해서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채악은 태연하게 받아쳤습니다.

 
"한 시간 이내로 모두 체포해서 데려오겠습니다."


 당시 주더는 혁명에 호응하려는 부대원들과 함께 변발을 잘라내고 약속한 장소에 집결하여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밤 9시가 되자 동맹회 회원들이 나타났는데, 그런데 그 자리에 채악이 같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채악은 자신이 동맹회에 의해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되었음을 선포하고, 청조의 운남성 지배를 전복 뒤, 공화파 정부를 따를것이라고 사무적으로 말한 뒤, 병력을 이끌고 행진했습니다. 그러다가 운남 총독이 보낸 기병 부대와 만났는데, 이들은 "비적을 진압하라" 라는 명령을 채악에게 전하기 위해서 가고 있던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략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채악이다."

 "아니,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우리는 만주족의 청조를 타도하려고 가는 길이다. 너희들도 협력하라!"

 그 후로 혼란이 벌어지며 전투가 일어났고, 혁명군은 적군을 격파한 뒤 총독관저의 침상 밑에서 총독을 끌어내었습니다. 총독은 자신이 신임하던 채악이 혁명군의 책임자임을 알고 바로 기절해버렸다고 합니다. 채악은 곧바로 8개 대대를 이끌고 사천으로 진격, 여러곳을 해방하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1912년부터 그는 몹시 안색이 안좋아지며, 건강이 심각하게 약하되었습니다. 주더가 채악의 건강을 우려하자 채악은 그냥 쓴웃음을 지었다고 합니다. 채악은 (신해)혁명 보다도, 앞으로 흘릴 피가 더 많을것 같다며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걱정은, 앞서 이야기한 원세개의 여러 음모등으로 실체화되었습니다.




 원세개가 황제 놀이를 준비할 당시, 원세개의 측근 중 누군가가 운남의 채악이라는 '위험 인물'에 대해 경고했고, 그는 채악을 자신의 군사고문으로 임명한다는 명목으로 베이징으로 오게 했습니다. 위험할 수 있지만, 채악이 가지 않으면 원세개가 운남을 공격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채악은 아픈 몸을 이끌고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그 후에 원세개의 21개조 조약 등의 사건이 벌어졌는데, 채악은 나중에 베이징을 탈출해 돌아왔습니다.



 베이징에 있을 당시 채악은 2년 여간이나 끊임없는 비밀 경찰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극적으로 이들을 따돌리고 천진으로 몰래 빠져나간 뒤,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라 일본에서 망명중인 국민당 지도자들과 협의하고, 인도차이나로 간 다음 그곳에서 프랑스 열차를 타고 운남으로 귀환했습니다. 1915년 12월, 길거리를 걸어가던 주더는, 느닷없이 이전에 잘 알던 어떤 국민당 동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채악이 보낸 사람이었던 겁니다. 채악은 주더에게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료 장교들을 모아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주더는 시키는대로 채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때 채악은 건강이 극도로 악회되어, 주더는 처음에 그의 모습을 보고 입만 떡하니 벌렸다고 합니다. 주더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두 뺨이 움푹 꺼진 채 유령처럼 수척한 모습이었다.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목소리도 너무 작았으며, 기력이 없어 가까이 가야만 이야기를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고 하면서도, "그 사나이의 두 눈만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 회고했습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채악이었지만 정신만은 멀쩡해서, 그는 전국적인 봉기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운남군이 공화파 세력이 결집될 때까기 버티고, 원세개의 막강한 군단이 버티고 있는 사천으로 진격, 동시에 다른 사단은 광서성과 광동성, 귀주성 등으로 진격하기로 했습니다. 혁명군의 명칭은 호국군(護國軍) 이었습니다.


 주더는 다 좋지만, 이 원정에 채악은 참여하면 안된다고 소리쳤습니다. 병환중이라 원정에 나서면 십중팔구 죽을것이라는 이야기 였습니다. 채악은 주더를 바라보다가, 다른곳으로 시선을 옮기며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잖소. 어차피 생명의 불꽃이야 이미 꺼져가고 있소. 난, 그저 남은 그 불꽃을 공화국에 바치겠소."


풍옥상


 호국군의 규모는 처음에는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원세개에 대한 반감이 극심한 상황에서 호국군과 채악이 일으킨 불꽃은 삽시간에 엄청난 기세로 타올랐습니다. 농민들은 가로회를 중심으로 무장, 봉기하여 적의 수송 루트를 공격했고 호국군에게 식량과 탄약을 가져다주었으며, 뱃사공들은 강을 오르내리면서 보급품을 실어주었고 부상병을 옮겨주었습니다. 


 이어 '크리스천 제너럴' 로 불린 풍옥상은 자신은 군주레르 신봉하지 않으며, 채악과 휴전하겠다는, 최소한 그를 진압하진 않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혹구군은 운남과 귀주성에서 도착한 증원군으로 26개 연대가 되었고, 8만명의 원세개 군단과 45일간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호국군이 운남과 귀주, 사천으로 진격하는 동안, 광동과 광서가 독립을 선포했고, 마침내 절강, 섬서, 강서, 호남, 신강에 이르는 전중국이 혁명의 불꽃에 넘실거렸습니다. 제아무리 원세개라도, 중국 전체와 싸워서는 이길 수가 없는 법입니다.


 패배를 실감한 원세개는 입법원을 소집해서 퇴위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황제 자리에 80여일을 앉아 있었고, 대총통의 직위는 유지하면서 재기를 노렸지만 6월 6일 사망하면서 모든 야망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황제 놀이의 실패가 가져온 충격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혁명이 끝나고, 채악은 주더의 사령부 건물과 이어져 있는 저택으로 옮겨졌습니다. 의사를 불러 상태를 살폈지만, 너무나 상태가 악화되었기에 기력이 회복될때까지는 누워서 아무도 만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채악은 병상에 누워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부관과 참모들을 만나 사천성의 부흥 계획을 협의했습니다. 주더는 이에 대해서 항의했지만, 채악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을 날은 얼마 남지 않았소. 내가 하는 이 일이 중국의 서부와 서남부 지역, 어쩌면 중국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지도 모르지."


 고작 2주 누워 있던 채악은 성도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군사를 이끌고 남은 잔적들을 격파하면서 성도에 도착했습니다. 성도에서 독군으로 취임한 채악이었지만, 불과 열흘만에 그는 그 자리를 자신의 참모장에게 넘겨주고, 결국 일본으로 정양하러 떠났습니다. 배편으로 떠나는 글을 주더가 배웅했는데, 주더는 이 때의 채악이 "유령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말했습니다. 기력이 너무 쇠잔한 이 혁명가는 몇 발짝도 제대로 떼지 못했고, 목소리도 너무 작았습니다. 채악은 주더에게 이러헤 말했습니다.


 "일본으로 가는건 쓸데없는 짓이오. 현재 두려운건 내가 죽는게 아니라 중국의 장래로, 나는 사천성을 궁화파의 든든한 기지로 만들고, 또 호국군을 화남 일대의 쑨원과 제휴아여 북방군벌에 대항 할 수 있기를 바라오."


 하지만, 채악이 사라질 경우, 호국군 내의 야심만만한 인물들이 떨어져 나가 별도의 군사조직으로 ─ 즉 군벌로 변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들을 규합한건 오직 채악의 탁월한 능력, 그리고 헌신적인 태도 뿐이었습니다. 중국 서부 지역에서, 채악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1월 18일, 주더는 예상은 했던, 그러나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채악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그의 유채는 상해로 옮겨져 영결식을 가진 후, 고향인 호남성으로 운구디었습니다. 운남성과 모든 운남구은 채악을 추도하는 특별추도식을 가졌습니다. 


 채악이 사망하고 난 뒤, 그 시신이 채 굳기도 전에 수많으 군벌들은 1917년 성도를 공격했고,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자신들의 거대한 영지를 마련했습니다. 심지어 이에 대응하는 호국군의 지휘관들 마저도 곧 '군벌화' 했습니다. 혁명은 끝났고 원세개는 패배했지만, 중국 전역은 여전히 군벌통치와 이들의 대립, 투쟁으로 혼란스러웠고, 그 속에서 농민들은 신음했습니다. 원세개가 사라진 중앙 정부에선 단기서, 오패부, 장작림과 같은 북양 군벌들이 대신 자리를 잡고 자신들의 권세를 다투는 수라장으로 변모했을 뿐이었습니다. 


 혁명의 투사 쑨원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군벌들에게 기대를 해보았지만, 쑨원이 기대를 했던 군벌들은, 쑨원의 전생애를 걸쳐 영원히 그를 배반했고, 이용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세력을 결집시켰고, 북경의 장작림, 단기서 등과 협의했지만, 결국 병마에 쓰러져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쑨원은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나는 3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반드시 민중에 호소해 궐기 하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해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원세개가 물러나고, 채악이 죽어도, 중국의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점에서, 진정한 혁명의 완성은 아직도 요원한 것이었습니다. 제국이 무너지고, 권력의 화신이 무너지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숭고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무너져내려도, 다시 그 위엔 군벌정권과 같이 이전의 잔재들이 자리를 대신할 뿐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혁명은 아직도 진행형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한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 아그네스 스메들리
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예용례
신해혁명 ─ 장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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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이캔 | 작성시간 12.11.05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역사는 이런 걸출한 인둘들의 자기희생이 모여서 대다수 민중들이 살기좋은 보다 나은 방향 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렇지 않다는 회의로 자괴감이 들때도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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