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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항우 최악의 만행, 신안대학살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5.14|조회수2,214 목록 댓글 12

엔하위키에 항목을 작성하고 올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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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때는 모든 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더 많이 겁먹고 놀란 외침에 속절없이 묻혀 버렸다. 그리고 죽음의 덫에 걸려 반나마 넋이 나간 20만의 항졸은 막을 길 없는 거센 물결처럼 골짜기를 휩쓸며 모든 것을 앞으로만 밀어냈다.

이윽고 골짜기 끝으로 몰리던 항졸들의 선두가 비명과 함께 골짜기 끝의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 수백 명 대부분이 떨어지는 대로 머리가 깨지고 창자가 터져 바로 죽었다. 그러나 다음 줄, 다음 줄 차례로 떨어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두텁게 쌓인 사람의 시체 위에 떨어지니 쉬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들 위에 다시 다른 사람들이 떨어져 눌려 죽거나 숨이 막혀 죽어갔다.

나중에는 골짜기 끝의 사정이 골짜기 중간에서 몰리고 있는 항졸들에게도 알려졌다. 막다른 골목에서는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말대로 이를 악문 항졸들이 맨손으로 초나라 군사들에게 맞서보았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온몸을 갑주로 두른 초나라 기병이나 보갑(步甲)들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창칼에 사냥 당하는 짐승처럼 죽어갔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항졸들 중에는 아예 땅바닥에 엎드려 그렇게 애처로운 목소리로 빌어보기도 했지만 살 수 없기는 맞서는 패거리나 다름없었다. 피 맛을 보고 눈이 뒤집힌 초나라 군사들은 군령을 핑계로 마음껏 그런 항졸들을 찌르고 베었다. 
─ 민음사 이문열 초한지 中 4권 143pp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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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2.1 진나라의 몰락과 장한의 항복
2.2 징조
2.3 대학살과 초나라군의 함양 입성
3 영향

1 개요 

BC 207년, 현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阳市)에 있는 신안(新安)에서 항우(項羽)가 자행한 대학살극. 문헌 상 무려 20만 이나 되는 사람들이 생매장을 당해 죽은 경악스러운 사건으로, 장평대전(長平大戰) 당시 (秦)의 백기(白起)가 자행한 학살과 함께 고대 중국에서 전쟁포로에게 저지른 전대미문의 학살 사례로 손꼽힌다[1]. 그리고, 사실 학살은 신안의 진나라군에 대해서만 자행된것도 아니었다. 여하간, 초한전쟁 당시 항우가 저지른 수많은 막장 짓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이다.

2 전개 

2.1 진나라의 몰락과 장한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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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록대전(巨鹿大戰)

춘추시대(春秋时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며 끝없는 시간 동안 분열을 거듭하던 중국은 마침내 진나라 시황제의 손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너무나 엄격한 법치주의와 거대한 토목공사로 삽시간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고, 진승 · 오광의 난은 위태로운 제국의 나약한 기반을 날려버리는 일대 대사건이 되었다. 비록 진승의 난은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章邯)의 활약으로 진압 할 수 있었지만, 이미 천하는 진나라에 반기를 든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후였다.

그러한 여러 인물 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은 단연 항량(項梁) 이었다. 진나라에게 멸망한 (楚) 최후의 명장이었던 항연(項燕)의 아들이었던 항량은 이러한 혼란을 틈 타 기반을 쌓아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으며,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하여 망국의 한을 갚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한과의 싸움에서 결국 전사하고 말았으며,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엄청난 용력을 가진 젊은이, 항우가 되었다.

송의(宋義)를 살해하고 군권을 모조리 손아귀에 쥔 항우는 이후 북상을 감행, (趙) 구원전에 참여하였다. 당시 장한은 수하의 장수 왕리(王離)를 파견하여 조나라를 압박하던 참이었는데, 항우는 이 거록대전(巨鹿大戰)에서 초인 같은 용력을 보이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 인해 장초(張楚) 멸망 후 여러 제후들에게 가해졌던 장한의 엄청난 압력은 삽시간에 걷히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감한 지경에 처해진건 장한이었다. 장한은 극원(棘原)[2]에 진을 치고 항우와 대치 상태를 이루었으나, 형세가 그리 좋지 않아 퇴각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황제였던 무능한 군주 호해(胡亥)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장한을 여러 번 꾸짖기만 하였다. 답답한 장한은 현재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부하인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일의 자초지종을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은 사악한 간신 조고(趙高)가 장악 한 지 오래였는데, 조고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난리가 호해의 귀에 들어가는 일을 막고, 그저 호해가 먹고 놀며 즐기는 일 만 정신이 팔리게 하였다. 그래야 부재 중인 황제를 대신해서 자신이 전권을 부릴 수 있기 때문.[3] 사마흔은 함양에 도착하여 3일간 기다렸으나 답변이 없자 불안감을 느끼고 곧바로 도망쳤는데, 일부러 길을 다른 곳으로 돌아서 도망쳤다. 실제로 조고는 사마흔을 잡으려고 했으나, 결국은 잡지 못했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사마흔은 장함에게 충고했다.

"조고가 조정 안에서 정사를 독단하고 있어,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반군과 싸워 이긴다면 조고는 우리의 공을 시기할 것이고, 이기지 못한다면 그 책임으로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한편, 조나라의 진여(陳餘) 역시 장한에게 항복을 권유 하였다.

"진나라의 명장 백기(白起)는 남정하여 언(鄢)과 영(郢)을 함락시켜 초나라를 동쪽으로 내쫓았으며, 북정하여 장평에서 조나라 대장 조괄(趙括)를 죽이고 그 군사 40여 만을 구덩이에 묻었소.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고, 땅을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했으나 결국은 진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되었소. 몽염(蒙恬)은 장군이 되어 북쪽의 융인(戎人)들을 몰아내고 유중(楡中)의 수천 리 땅을 넓혀 불세출의 큰공을 세웠으나 그 역시 양주(陽周)4에서 참수되었오. 그 이유는 진나라에는 공을 세운 사람이 너무 많아 그들에게 모두 봉지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을 이용하여 주살했기 때문이오. 

장군이 진나라의 대장이 된 지 3년 동안, 수하의 군사 수십 만을 잃었으나 제후들은 서로 규합하여 그 군사들은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소. 오랫동안 이세의 눈과 귀를 막으며 아첨을 일삼았으나, 나라의 정세가 위급하게 되어 이세황제로부터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조고는 장군이 오랫동안 안전만을 고려하여 수비로 일관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살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 장군을 대신하여 이세로부터의 화를 면하려하고 있소.

지금 장군이 밖에 나와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는 동안 조정내부와 틈이 벌어져 비록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고 또한 공을 세우지 못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장차 하늘이 진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있는 사람이나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소. 

오늘 장군이 안으로는 직간을 할 수 없고, 밖으로는 나라에서 버림받은 장수가 되어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소? 장군은 어찌하여 병사들의 방향을 바꿔 제후들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나누어 왕이 되어 남면하면서 고(孤)를 칭하지 않으려고 하시오? 

장군 자신은 형구(刑具)에 엎드려 요참형(腰斬刑)을 당하고 가족들은 주륙을 당하는 것과 어찌 견줄 수 있단 말이오?" ─ 사기 항우 본기 中

장한은 처음에는 이러한 제안들을 의심스럽게 여겨, 시성(始成)이라는 인물을 사자로 보내 항우와 협상을 했지만 이루어지진 않았다. 이에 몇차례 교전이 벌어졌고, 항우는 진나라 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장한은 다시 항복 제안을 했고, 마침 군량이 떨어져가던 항우는 이를 승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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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항우

이에 장한과 항우는 은허(殷墟)[4]에서 직접 만나 항복에 관한 의식을 치루었다. 이 자리에서 장한은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왈칵 눈물까지 흘리면서 조고의 일을 이야기 하였고, 항우는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임명하고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해서 진나라를 향해 진격하게 하였다. 이렇게 항우와 장한 두 명의 걸물, 그리고 초나라의 군사와 진나라의 대군의 대결은 좋게 좋게 끝나는 듯 싶었다.

2.2 징조 

그렇게 항우의 본대와, 과거 장한의 부하였던 진나라 병사들이 함양으로 터벅터벅 진격하던 중,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엄격한 법률로 여러 사람들을 대단히 못살게 굴었고, 당시 진나라에 대항하던 제후군의 병사들은 이러한 압제에 오랫동안 억눌려서 지내고 있었다. 또한 이 중에서는 여산에서 벌어지는 공사에 끌려가서 개고생을 했거나, 멀고 먼 국경까지 끌려가 춥고 서러움을 견디며 수비병으로 지내거나 만리장성 공사에서 혹독한 대우를 받는 등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은 적이 많았다. 그런 병사들이, 비록 투항병이라지만 진나라 병사들에게 좋은 심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항복한 총사령관인 장한은 왕에 임명되고 사마흔 역시 상장군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던 상황으로 보면 당시 진나라 항복군은 일반적인 포로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후군의 병사들은 이러한 진나라 병사들을 마치 포로나 노예처럼 대하면서 수많은 모욕을 주었다. 진나라 병사들은 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되는것은 수치와 부끄러움 보다도 '이러다가 정말 우리 죽는것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었다. 진나라 병사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근거렸다.

"장한 장군 등이 우리를 속여서 제후군에게 항복을 했다. 오늘 우리가 진군을 파하고 관중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제후들은 우리들을 그들의 노예로 삼아 동쪽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되면 우리들의 부모처자는 진나라로부터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온한 움직임이 여러 장수들에게 포착 되지 않을 리 없었다. 이 소식은 결국 위로 올라가서 항우에게 전해졌는데, 항우는 경포(黥布)와 포장군(蒲將軍)을 불러 대응 방법을 논의했는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여전히 수가 많은 진나라 항졸들이 아직도 마음속으로 우리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관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우리들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일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장한, 장사(長史)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 등 세 사람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야 되겠다."

이것이 바로 항우의 대응 방법이었다.

2.3 대학살과 초나라군의 함양 입성 

"그래서 초군은 야밤에 진나라 항졸들을 기습하여 20여 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신안성(新安城) 남쪽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죽였다." ─ 사기 항우 본기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다가 신안(新安)에 당도하자 경포를 시켜 깊은 밤을 이용하여 장한이 데리고 항복한 진나라 군졸 20여 만 명을 습격하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 사기 경포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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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당하는 진나라 군

항우의 결정 한번에 20만 진나라 군은 모조리 생매장 당했다. 사기에서는 이 일을 간략하게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는 지라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는데,[5] 경포 열전에서의 기록을 보면 항우의 명령을 받고 일을 직접 시행한 사람은 경포로 보인다. 경포 열전에서는 야밤을 틈타 기습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되었다. 

간혹 이 학살된 인원이 계곡에 떨어져서 죽은것으료 묘사가 되기도 하나, 기록을 보면 묻어서 죽인 경우다. 당시 학살의 이유에 대해 항우 본인의 언급은 '복종하지 않는다.' 이지만, 이미 그 이전 대치 상황부터 군량이 부족하다는 언급이 나오는것으로 보아 군량 문제도 얽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항우의 부대만으로도 빠듯한 군량이기에 진나라 병사들까지 포함되면 필요한 군량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대학살을 저지른 항우는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군하였고, 잠시 유방의 부대와 대치한 후에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고 난 후 며칠 뒤, 함양에 입성했고 여기서 다시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하였다. 

그리고 이미 항복을 했던 자영(子嬰)을 참살했으며, 진나라의 궁궐에도 불을 질렀는데 불은 3개월이 지나서야 꺼졌다. 항우는 함양의 온갖 보물과 여자들을 거두어 들이고 다시 동쪽으로 물러났는데, 이 행동에 대해 누군가가 충고했다.

"관중은 험산과 큰 강에 의지할 수 있고, 땅은 비옥하여 패왕의 도성으로 삼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미 진나라의 궁전은 항우가 다 태워 먹은 후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항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귀하게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을 입고 밤중에 걷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자 항우에게 충고했던 사람은 어이가 없어 이렇게 비웃고 말았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그 사람을 가마솥에 삶아서 죽이고 기어코 동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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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을 불태우는 항우

3 영향 

"진나라의 항복한 군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에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그 장수들을 왕으로 봉했으니 그 죄가 여섯이다!"[6] ─ 사기 고조 본기

"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 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만이 목숨을 건짐으로 해서 진나라의 부형들은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오늘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7] ─ 사기 회음후 열전

보통 항우의 학살을 이야기하면 진나라군 20만을 학살한 이야기를 주로 언급하지만, 실제로 항우는 이 전대미문의 학살이 있은 후에, 함양에 입성한 후에도 학살을 자행했다. 이미 여기서부터 항우는 스스로 언급한 학살의 이유는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힘없는 일반 백성들이 무슨 위협이 된다고 학살을 자행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심지어 이러한 종류의 학살은 항우에게 있어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항우는 이미 이러한 전례를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아직 항량이 살아있던 시절 항우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이라는 곳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쉬울 것 같았던 싸움은 성안 사람들이 힘을 모아 싸움으로서 의외로 어렵게 전개되었는데, 기어코 성을 함락시킨 항우는 성 내의 모든 사람들을 구덩이에 파묻고 죽여 버렸다.

이후 신안에서의 학살이 있던 후에 제나라를 공격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나라의 전영(田嬰)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에서 항우는 항복한 전영의 병사들을 모조리 파묻어 생매장 했다. 이러한 면으로 볼때 신안에서의 대학살은 급작스러운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항우가 밥먹듯이 자행하던 만행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규모가 엄청나다는 점만 제외하면. 또한 학살은 진나라 병사들에 대한 우려때문에 자행된 일이었는데, 사실 장한이 처음 부대를 일으켰을 당시 주력은 여산에서 일하던 죄수들이었다. 그 죄수들이 각지에서 끌려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실제로 학살된 인원 중에는 진나라 출신이 아닌 타국 사람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학살은 윤리적으로도 용납받을 수 없는 행위이며, 그 점만으로도 항우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을 떠나 전략적인 관점으로도 항우의 학살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위였는데, 이러한 학살로 항우가 얻은 이득은 당장의 수고로움을 던 정도 밖에 없었고, 이는 모두 장기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가져왔다.

우선, 진나라는 이 당시 결국 망국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과거 열국을 호령하던 진나라의 그 생산력이 어디로 가는것은 아니었다. 전국칠웅이 쟁패할 당시 진나라의 생산력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압도할 정도였고, 항우가 모든 진나라 사람들을 개미 잡아 죽이듯 학살하고 진나라의 강산을 모조리 불태우지 않는 한 이것들이 단시간 내에 사라질 일은 없었다. 그런데 항우는 신안에서 진나라 병사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이후 함양에서 만행을 부린 후 진나라의 왕인 자영마저 살해하였다. 상식이 있는 진나라 사람들이라면 항우에 대해서 이를 갈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방 이라는 괜찮은 대안마저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제나라에서의 학살도 마찬가지였다. 항우는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들을 생매장하고 힘없는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모조리 묶어 포로로 만들어 버리고, 많은 고을에서 학살을 자행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공포감을 주어 더이상 반항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제나라 사람들은 이에 대해 겁을 먹기는 커녕, 초나라의 만행에 분노하여 오히려 더 크게 들고 일어서면서 더욱 결사적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틈을 타 제나라의 전횡(田橫) 다시 수만명의 군세를 일으킬 수 있었다. 결국 항우는 이렇게 제나라에서 시간을 허비한 끝에 유방이 팽성까지 함락하는 것을 두고봐야 했다.[8]

항우의 이러한 행위와 이로 인해 나타나는 역효과들은 일본군이 중일전쟁 당시 벌이던 삼광 작전(三光作戰)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삼광 작전 당시의 일본군이 이러한 작전으로 게릴라를 뿌리 뽑기는 커녕, 오히려 저항만 거세지게 했다는 측면에서 그러한데,[9] 초한전쟁 말기에 항우는 외황(外黃)을 공략하다 쉽게 항복되지 않아 짜증이 나 이곳에서도 15살 이상의 사람은 모조리 죽이려고 시도했다. 이때, 13살 짜리의 아이가 항우를 만나 충고를 해주었던 일이 있었다.

"사나운 팽월이 우리를 해칠 수 있기에, 외황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 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항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항우는 외항의 주민들을 학살하지 않고 용서해주었는데, 이후 항우가 동쪽으로 진군하자 여러 성들이 항복을 해 왔다. 죽이고 겁을 주어서 굴복시키려고 했을때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투쟁하던 사람들이, 자비로움을 보이며 유화책을 쓰자 동조 해왔던 것이다. 13살 짜리 애도 아는 사실을 모르던 항우나, 일본군이나 

반면에 유방은 항우와는 대조적인 포지션으로 인해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다. 함양에 입성하던 한나라군은 장량의 충고를 들은 유방의 결정으로 인해 아예 함양 내에 발도 들이지 않고 주변에 진영을 차려 백성들이 엄한 피해를 입는것을 막았다. 이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이 유방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후에 입성한 항우가 저지른 만행을 생각해보면 이후 진나라 사람들이 어느 쪽 편을 들었을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이후에 초한 전쟁 당시 관중을 장악했던 유방은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조조의 원소군 포로 생매장이나 서주 대학살이 실제 정사 삼국지에서 특별히 사건 이후에도 비난이 있거나 하는 경우가 없어 당대에 인식이 낮게 취급되는 측면에 비하여, 이 항우의 학살들은 여러 차례 만행으로 언급이 되고, 유방 역시 항우를 비난하는 소재로 썻으며, 한신은 한술 더 떠 전략적인 관점에서 이 학살이 한나라가 중원으로 나서는 것을 막는 삼진(三秦)을 무너뜨릴 수 있는 요소로 평가하는등 당대에도 충분히 주목을 받은 일이었다. 즉, 짤 없이 쉴드 불가능한 악행이라는것.

그러나 이 모든 막장 짓에도 불구하고, 가장 황당한것은 항우가 마지막으로 남긴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 사기 항우 본기"

즉, 나는 잘못을 한게 없고, 졸라 잘 싸우기만 했는데, 지금 내가 망하게 된것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하늘이 나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학살 관련한 부분만 해도 그렇고, 그외에 항우의 여러 실책을 고려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발언.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다. 

사마천을 비롯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항우의 인식에 대해 이러한 평을 남겼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했다. 이에 5년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사마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초가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하늘아!' 라고 하였다니, 믿겠습니까?" 이에 대답하였다. "한은 여러 정책을 다하였고, 여러 정책은 여러 명의 힘을 다하게 하였지만, 초는 여러 정책을 싫어하고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오.다른 사람을 다하게 하는 사람은 이기고, 스스로 다하는 사람은 지는 것이오."

"그러니, 하늘이 무슨 까닭이겠소." ─ 양웅[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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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보다 규모는 작지만 조조가 원소의 포로를 상대로 저지른 학살도 있다.
[2] 지금의 하북성 평향현(平鄕縣) 남쪽
[3] 이미 일전의 이사는 일의 전말을 고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고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4] 옛 상나라의 도읍지가 있던 곳이다.
[5] 이는 장평대전에서의 대학살도 마찬가지이다.
[6] 광무(廣武)에서 대치할 당시 유방이 항우의 열가지 만행을 비난할때 했던 발언이다.
[7] 한신이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항우를 이길 수 있는 여건들을 설명할때 했던 발언이다.
[8] 물론, 이후 항우는 그 유명한 팽성대전으로 유방을 박살내었다. 그러나 이미 유방의 세력은 자리를 잡은 후였다.
[9] 여담으로 르네 그루세는 몽골이 전략적으로 사용한 학살 작전이, 중동에선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중국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던 것이 중국인은 숫자가 너무 많아서, 학살로 공포를 일으키는건 불가능했다. 라는 언급까지 했다.
[10] 양웅은 한나라 시대의 인물로 당시에 박학하다고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이 평론은 양웅의 저서인 법언(法言)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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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BACCANO | 작성시간 13.05.16 돌대가리네
  •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13.05.17 내정은꽝이였네..
  • 작성자열혈청년 | 작성시간 13.05.17 그많은 사람들의 원혼이 항우를 가만두었을리가 없죠. 영혼 같은게 없더라도 하늘은 분명 있으니.....
  •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3.05.18 "르네 그루세는 몽골이 전략적으로 사용한 학살 작전이, 중동에선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중국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던 것이 중국인은 숫자가 너무 많아서, 학살로 공포를 일으키는건 불가능했다. 라는 언급까지 했다"ㄷㄷㄷ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5.20 20만 명을 어떻게 구덩이에 파묻어 죽일 수 있었을까요.. 구덩이 크기가 장난 아니었을 것 같은데... 너무 넓으면 운동장처럼 이리저리 도망쳤을 것이고.. 그렇다고 깊게 만들자면 또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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