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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병자호란의 원인에서, '청나라' 의 입장 - 전쟁은 오직 조선 때문이 일어난 것인가?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6.08|조회수1,411 목록 댓글 18

역사적인 사건은 항상 여러 각도에서 살펴봐야 하고, 게중에 '전쟁' 같은 거대한 흐름의 이야기는 이에 얽힌 속사정이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또한 전쟁은 '공격하는 자' 과 '공격 당하는 자' 이 있기 때문에, 그 서로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그 동기와 전개 과정을 모두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병자호란의 이야기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모든 전쟁은 공격하는 국가와 공격 당하는 국가, 양측의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국내 역사에 있어 유명한 전쟁들 ─ 이를테면 고수전쟁, 고당전쟁, 임진왜란 등의 전쟁은 모두 양측의 입장이 고려되며, "왜 전쟁이 일어났나" 라는 질문에 당시 국내는 물론이고 상대국의 입장도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아닙니다. 물론 전문적인 학술 논문이라면 다른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인터넷 상에서 병자호란의 동기에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조선 중심적인 이야기입니다. 




간단한 이야기 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병자호란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때 등장하는것은 광해군, 인조, 제조지은, 중립외교 등 입니다. 즉, "조선이 이렇게 하였기에" 전쟁이 일어났고, 만일 "조선이 이렇게 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식입니다. 소위 말해서,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조선이 개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면, 정작 공격하는 쪽은 청나라고 공격을 당한 쪽은 조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쟁의 원인에 있어 주체적인 입장은 청이라기보다 조선에 있게 됩니다. 반면에 청나라는 조선이 내린 결정에 끌려다니는, 이상한 모습이 연출됩니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이렇습니다. 전쟁의 원인에 있어 중요하게 살펴야 할 요소는 침략국과 침략을 당하는 나라 양측에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일반적인 경우라면 침략국을 더 살펴봐야 합니다. 인터넷 상에서 병자호란에 대한 "떡밥" 이 언급될 때는 그 가장 중요한 침략국의 사정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고, '침략을 당하는 나라' 의 입장으로 모든것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의 "침략국" 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조선사' 가 아닌 '청사' 의 흐름을 살피는 입장으로 이 전쟁을 본다면, 중요한 문제는 조선의 외교정책 보다는 오히려 경제적 요소 입니다. 




보통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기에는, 만주에서 거대하게 세력을 일군 청나라는 당시에 이미 천하의 대세를 결정지은 셈이나 다름없고, 병자호란의 시점에 이르면 이미 청나라가 중국을 근시일 내에 지배하게 되는것은 당연한 사실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릅니다.




요동에서 명나라의 군사력이 완전히 괴멸되는 시기는 1641년에 이르러서 입니다. 이때의 싸움에서 명나라는 홍승주가 이끄는 10만 이상의 군대가 괴멸 당하고, 산해관에 남아있는 오삼계의 군단을 제외하고는 요동의 모든 병력이 일소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는 1636년까지는 아직 명나라의 군사력이 요동에서 건재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만주족 정권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경제적 곤란 이었습니다. 보통 만주족에 대해 막연히 '유목민족' 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여진 ─ 만주족은 '수렵민족' 에 가깝습니다. 수렵으로 얻은 물건을 교역을 통해 팔고 필요한 물품을 사서 생활을 하는게 중요했는데, 만주 정권의 누르하치가 단시일 내에 거대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요동의 제왕이었던 이성량이 뒷배를 봐주며 무순, 청하, 관전, 애양의 4개 관에서 맹렬하게 교역을 할 수 있었던 점도 있었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후금 정권이 명나라와 적대하게 되면서 이러한 대중국 교역은 거의 끊기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해 당장 만주 정권에게 닥쳐오는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누르하치 시절부터  농업 경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당대에는 전쟁이 계속 되었던데다가, 여진과 한인의 공존 문제도 있고 수도도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겨가는등 여러모로 불확실한 면이 많아 농경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1625년 이래로 요동 한인 인구의 개편, 몽고의 귀속에 따른 대규모 인구 증가, 더구나 기상 악화까지 더해 흉작이 겹치면서 후금의 경제상황은 위풍당당한 군사적 면모와는 달리 꽤 곪아가고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관련 기록 중에는 이런 언급도 있습니다.






 "나라가 굶주려 곡식 한 승(升)에 은 8량 값이나 되었다. 이 나라에 은은 많았으나 무역할 곳이 없어서 은의 값은 싸지고 여러가지 재화의 양은 비싸졌다. 좋은 말 한 필에 은 300량, 좋은 소 한 필에 은 100량, 무늬있는 비단 한 필에 은 150량, 도둑이 만연하여 사람을 죽이고 혼란스럽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영원성 전투까지 막 실패한 참이었기에,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太宗文皇帝實錄 권2 에서는, 1627년 즉위 직후 홍타이지는 원숭환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막대한 양의 예물을 요구했습니다. 여기까진 흔한 으름장으로 여길만하나 몇달 후 곧 액수를 반으로까지 줄이면서 또다시 예물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의 요구는 금 십만량, 은 백만량, 비단 백만필을 주고,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는 금 일만량, 은 십만량, 비단 10만필 등을 바칠 것을 요구했으나, 이후 이런 소리를 공연히 덧붙였던 것입니다.



 "귀국이 (예물을 보내기에)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처음 화의를 맺는 예로서(예물 액수의) 반을 덜어도 됩니다."


당대 혼란에 대한 학술 논문의 묘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人蔘과 疆域 : 后 金 - 淸의 강역 인식과 대외 관계의 변화 - 김선민 中




다음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 관련된 소위 신청사(新淸史) 학파로 분류되는 외국 학자의 언급을 일부분 보겠습니다.




"누르하치가 국가 통합과 궁극적으로 명의 정복을 위해 전쟁 기계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자마자, 물류상의 병목현상은 극심해진다. 그가 경쟁하던 씨족 지도자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기' 로 통합했을 때, 그는 이 군대에 대한 보급 책임에 직면하게 된다. 가장 쉽게 새로운 보급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인접한 조선과 랴오둥의 민족들이었다."


(중략)


"그러나 1621년의 랴우동 정복으로 사실상 만주족과 한인 사이의 갈등이 더 극심해지고, 더 심각한 생존 위기로 어이졌다. 불평등한 대우에 항거한 한인들의 반란도 식량 공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만주족은 이웃한 한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는지 걱정하고 돼지고기, 소금, 가지, 닭 등의 생산물을 먹을 때 조심해야 했다 …… 만주족은 1621년부터 162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먹을 곡식이 없어서 곡심을 숨기려는 한인들에게서 짜내야만 했고, 긴급 구호 방편으로 전면적인 식량 배급을 시행해야 했다."


(중략)


"경제적 압박 아래에서 만주족은 자기네 가구의 한인을 착취했고, 이들을 노예로 다루면서 재산을 탈취했다. 1623년 랴오둥의 한인들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건물에 불을 놓고 만주족 이웃을 독살하고 창고에서 곡물을 훔쳤다."



(중략)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 의 문턱에 있었다. 1626년 처음으로 주요 전투에서 명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국가의 취약성을 심각하게 드러냈다. 한계에 달한 만주 경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가까스로 부양할 수 있을 뿐이어서, 군사 원정에 나선 대군을 보급하자면 그 군대가 승리 후 전리품을 모아야 했다."


(중략)


"1627년의 식량 위기는 가장 격심했는데, 곡물값이 만주 신(1.8석)당 여덟 냥, 즉 1623년의 여덞 배로 올랐고, 사람을 잡아먹고 강도 질을 한다는 흉문이 돌았다. 새로 항복한 백성들에게 줄 양식이 없었고 곡식 창고는 비워 있었다. 게다가 새로 이주해온 한인들에게 줄 땅도 없었다. 1635년과 1637년에 또 식량 위기가 닥쳤다. 군대의 보급 부족은 만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부유한 지주들에게 가난한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라고 권고해도 대체로 우이독경이었으며, 만주족은 그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저가에 곡식을 팔라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다시 한번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



(중략)


"그러나 약해지는 그의 군대가 (산해)관을 지키고 있는 중국의 사령관 오삼계에게 공격 받았고, 그는 오삼계의 군대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는 단지 1644년의 행운으로 구원을 받았다. …… 그때 심각한 물자 공급의 제약으로 만주 국가는 거의 무너질 뻔했다."


─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中




이러한 언급을 보면, 당시 만주족 정권의 경제적 위기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의 승리 이후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한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게중에서도 온갖 자질구레할 정도의 생필품의 목록들을 일일히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조선에 요구했던 점이, 그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점으로도 보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 입니다. 그런데 여러 매체의 언급을 보면 '내부의 비판' 에 치중한 나머지(게다가 가장 최악의 접근법으로, 현실 정치를 어거지로 당대에 맞춰 이에 맞게 입맛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조선이 ‘자초한 전쟁’ 이라는 식으로만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쟁은 서로의 상이한 입장이 충돌하여 발생하는 것이니, 한쪽의 입장만을 전제하고 본다면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조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 한명기

김한규 한중관계사 2권, 719~720쪽

人蔘과 疆域 : 后 金 - 淸의 강역 인식과 대외 관계의 변화 - 김선민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 피터 퍼듀

청(淸)과의 외교실상과 병자호란 ─ 오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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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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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G-VIRUS | 작성시간 13.06.12 만약은 없지만 조선의 전략이 제대로 이행됐다면 후금은 거란처럼 개박살 나버렸을 수도 있었겠죠.
  • 답댓글 작성자요미얌 | 작성시간 13.06.13 강화도가 먼저 털리지 않았나요?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6.10 몽고랑 싸우던 고려처럼 버텼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청도 제대로 버티지 못했을 지도...
  • 작성자Jitter | 작성시간 13.06.11 저도 항상 조선이 잘못해서 전쟁이 일어난걸로 생각했는데, 역시 양쪽을 두루 살피는게 필요하네요. 미디블 할때도 돈 궁하면 침략해서 초토화시키곤 했는데, 청에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 작성자블루제이제이 | 작성시간 13.06.12 균형된 시각을 위해선 양쪽을 모두 봐야할듯 합니다.
    이글을 보자면 어차피 전쟁은 피할수 없었다라고 보이네요.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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