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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 ─ 항우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6.16|조회수936 목록 댓글 8

엔하위키에 항목을 보충, 수정하고 올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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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그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루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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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BC 232 ~ BC 202
이름항적(項籍)
우(羽)
고향하상(下相)[1]
직위서초패왕(西楚覇王)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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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출신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은통을 죽이고 거병하다
3.3 반(反) 진 전쟁
3.4 신안대학살과 함양 입성
3.5 서초패왕
3.6 초한전쟁
3.6.1 제나라 공격
3.6.2 팽성대전
3.6.3 형양 함락
3.6.4 광무 대치
3.6.5 몰락의 길
3.6.6 사면초가
3.6.7 패왕의 최후
4 평가
4.1 군사적 능력
4.2 정치적 능력
4.3 인간적인 면모
4.4 총평


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 시절에 활약했던 지휘관이자 (楚)의 군주로서, (漢)의 유방(劉邦)과 함께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던 인물이다. 소위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로 표현되는 어마어마한 용력과 천부적인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으로 한때 사실상 천하의 주인 이었으며,[2] 이후 초한전쟁 중에도 유방을 수차례 위기에 몰아넣는 대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비슷한 시대,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와 함께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 군인으로, 전쟁은 명장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진리의 산 증인이다.[3]

여하간 그 포스가 너무나 강렬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초한쟁패기의 무수한 영웅호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임과 동시에, 후대에 여러 이야깃거리의 소재가 되었던 인물. 

2 출신 

그야말로 백수 건달 출신이었던 라이벌 유방과는 반대로, 항우의 할아버지는 (秦)의 이신(李信), 몽염(蒙恬), 왕전(王翦) 등 기라성 같은 진나라의 명장을 상대로 대항한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項燕)이었고, 그 집안인 항 씨는 항(項)[4] 에 봉해져서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를 지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물론 항우가 철이 들었을때는 이미 조국이 멸망하고 난 후였다. 하지만 항우와 같이 살고 있던 작은 아버지. 항량(項梁)[5]은 오(吳) 땅에서 상당한 명망을 가진 지방의 유지였고, 오나라 땅에서 유명한 사대부들은 모두 그 밑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의 인맥이었으니 생활에 큰 부족함은 없었을 것이다.

3 생애 

3.1 어린 시절 

그렇게 큰 명망을 가진 항량은 이 조카를 위해 공부를 시켰는데, 항우는 글공부를 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어 떄려치웠다. 그러자 이후에는 을 다루는 검술을 가르쳤지만, 항우는 여기에서도 끝을 보지 못했다. 끝도 못 본 검술로 그렇게 무쌍을 찍고 다니다니, 검술로 끝을 봤으면 이기어검도 날렸을듯 

이것도 안 한다, 저것도 안 한다고 하자 항량도 벌컥 화가 나 항우를 꾸짖었지만, 항우는 주눅이 들기는 커녕 이렇게 항변했다.

"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할 뿐입니다. 검술 역시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둘 다 배우기은 충분치 못하니, 만인(萬人)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항량은 항우에게 병법을 가르쳤는데, 이에 항우는 크게 기뻐하면서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대략 "이해했다" 고 느끼자 또 지겨움을 느끼고 때려치웠다(……) 훗날 보여주는 전술을 넘어 전략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항우의 부족함은 이게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어느날, 진시황(秦始皇)이 회계 땅으로 순수(巡狩)[6]를 하러 나와 절강(浙江)을 지날때, 흔치 않은 구경거리라 항량도 항우를 데리고 나와 구경을 했다. 그때, 구경하던 항우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저 자리를 차지 해야지!"[7]

이 말을 들은 항량은 기겁하며 항우의 입을 틀어막고 "이놈아, 우리 다 목이 달아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라고 꾸짖었지만, 내심 속으로는 이 맹랑한 꼬마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항우는 나이가 자라면서 키가 팔척을 넘었고[8][9] 힘도 장사라 큰 솥을 번쩍번쩍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오 땅의 자제들은 모두 항우를 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 외에 특이사항으로는, 사마천(司馬遷)은 항우는 눈동자가 두개 인 중동자(重瞳子) 였다고 언급했다.[10] 그러면서 과거의 "임금도 눈동자가 두개였다고 하는데, 혹시 항우는 순임금의 후예가 아닐까?" 라고 상상을 덧붙이기도 했다. 물론 그 다음에 (그렇게 잔인한 일을 했던 항우가)"어떻게 순임금의 후예이겠는가?" 라는 식으로 넘어가긴 하지만.

3.2 은통을 죽이고 거병하다 

항우가 장성했을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 · 오광의 난이 발발 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진승과 오광이 거병한지 두달 정도 지난 9월, 회계 태수 은통(殷通)은 지방의 유력자였던 항량을 꼬득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항량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오히려 항우를 시켜 은통을 죽여버리고 자신이 회계의 전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항우의 공이 지대했는데, 항우는 은통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 즉시 은통과 항량이 회의하던 건물의 밖으로 나가 당황하는 사람들 수십 명을 베어 죽였다. 그 위세가 워낙 살기등등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항우는 비장(裨將)이 되어 아직 복종하지 않은 관하의 현(縣)들을 돌아다니면서 복종시키게 된다.

3.3 반(反) 진 전쟁 

이후 소평(召平)의 말을 들은 항량이 회계를 떠나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수로서 종군했다. 항량의 여러 전쟁에 함께 참여했는데, 이 무렵의 독자적인 전투로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을 공격한 일이 있다. 그런데 외외로 항우는 이 전투에서 결사항전하는 양성 주민들 때문에 상당히 힘든 싸움을 했고, 그 분풀이로 양성이 함락되자 성 내 사람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죽였다. 어찌되었건 항우와 항량은 초나라를 부활시키고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장한(章邯)의 진나라 군대가 (魏)를 멸망시키고 (齊)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항량은 북상해서 장한과 교전을 벌여 승리했다.[11] 그 직후 항우는 패공(沛公) 유방과 함께 별동대를 이끌게 하고 성양(城陽)을 공격하였는데, 훗날 두 사람의 사이를 생각하면 꽤 흥미로운 일이다. 별동대는 이후 여러 성을 함락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런데 정작 항량의 주력은 이후 장한이 심기일전하여 펼친 역습 때문에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심지어 항량 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항우와 유방은 일단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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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과 항우의 진격로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f/Crystal_Clear_app_xmag.png/16px-Crystal_Clear_app_xmag.png 거록대전 항목 참조

잠시 초나라가 숨을 돌리며 패전의 충격을 극복하는 사이, 항량을 죽이고 북상한 장한때문에 (趙)나라는 최악의 형세에 몰렸고, 조나라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 수 밖에 없기에 여러 제후들도 구원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초회왕은 송의(宋義)를 임명한 후에 항우는 차장(次將)으로 삼아 구원에 나서게 하였다. 또한 초회왕은 서쪽으로는 유방을 파견하여 관중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이는 초회왕 주변의 노장군들이 "항우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니 유방을 서쪽으로 파견하는게 좋다." 고 언질했기 때문. 그 당시부터 평판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이다.[12]

그러나 송의에게 불만이 적지 않았던 항우는 출정하여 송의를 살해 하고, 군사들을 탈취해서 자신의 지휘 아래 조나라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경포포장군과 함께 왕리(王離)가 이끄는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최강의 제후가 되는데 성공했다. 

이후 항우는 장한을 항복시켜 사실상 진나라의 멸망을 결정지었고, 곧바로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3.4 신안대학살과 함양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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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f/Crystal_Clear_app_xmag.png/16px-Crystal_Clear_app_xmag.png 신안대학살 항목 참조

그러나 이때 항우는 치명적인, 그리고 도저히 쉴드의 여지가 없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당시 20만에 이르는 진나라군의 포로들이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阳市)에 있는 신안(新安)에서 이들 모두를 생매장해 죽인 것이다." '모두' 라는건 과장이 아니라, 실제 항우의 발언이다.

"여전히 수가 많은 진나라 항졸들이 아직도 마음속으로 우리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관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우리들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일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장한, 장사(長史)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 등 세 사람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야 되겠다." ─ 사기, 항우본기 中

대학살 이후 다시 서쪽으로 진군한 항우는 함곡관(函谷關)에서 잠시 막혔으나, 유방이 함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경포를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고 관중에 들어와 희수(戱水) 서쪽에 주둔했다. 조무상(曹無傷)의 이야기를 들은 항우는 4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유방을 박살내어버릴 생각이었으나, 항백(項伯) 때문에 일단 싸움을 멈추고 유방과 회담을 치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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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f/Crystal_Clear_app_xmag.png/16px-Crystal_Clear_app_xmag.png 홍문연 항목 참조

이 화담에서 범증(范增)은 유방을 죽여버릴 심산이었으나 항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유방을 죽이지 못한 항우는 함양에 입성해서 성 안의 백성들을 도륙하고, 항복한 진왕 자영을 죽였으며, 진나라의 궁궐에 불을 지르고 모든것을 불태워 버렸다.

이후 항우는 관중에 남을것을 충고하는 사람의 반대도 물리치고,[13]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랑해야 한다. 는 이유로 관중을 버리고 말았다.

3.5 서초패왕 

함양을 점령한 항우는 이후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올렸는데, 이는 회왕을 공경한다기 보다는 자기가 초나라 왕이 되고 싶어서 행한 조치였다. 항우는 노골적으로 의제는 아무런 공도 세운게 없고, 진나라 멸망은 나랑 장수들이 다 한 일이다." 라고 발언하며 여러 제후들을 각지에 분봉 했으며,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칭하고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삼게 되었다.

이후 걸리적거리는 의제는 장사(長沙)의 침현(郴縣)으로 옮겨가게 하여 대놓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면서, 그나마도 사람을 시켜[14] 의제를 장강 한 가운데서 죽이고 만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낭중(郎中)의 벼슬을 하고 있던 한신도 초나라 군에 있었다. 한신은 이미 그때부터 항우에게 몇차례 제안을 올렸지만, 항우는 이 제안들을 철저하게 무시했고 이에 상심한 한신은 유방의 진영으로 달아나 버렸다.

3.6.1 제나라 공격 

이러한 항우의 분봉 조치는 모든 제후들의 요구 조건을 맞춰주진 못했고, 특히 제나라의 전영(田榮)은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제나라를 세운 자신을 무시하고 거록대전에서 항우를 도운 전도(田都)를 제나라 왕으로 임명했기 때문. 대신 전영이 추대한 전불(田巿)은 교동왕으로 임명되었는데, 전영은 여기에 따르려고 하질 않았다. 

결국 불만이 폭주한 전영은 전도를 쫒아버리고[15] 항우에 대항했는데, 전영에게 추대되었지만 겁을 먹은 전불은 도망치다 이를 눈치챈 전영에게 잡혀 즉묵(卽墨)에서 살해당했다.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된 전영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서쪽으로 진군해서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까지 살해하여 삼제(三齊)를 망라한 세력이 되었다.

여기서 멈추지도 않고 팽월(彭越)을 회유하여 양나라 땅에서 초나라를 흔들게 만들고,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진여(陳餘)[16]에게 군사를 주어 장이를 날려버리는 등, 항우가 세운 천하를 죄다 흔들어버리는 수준의 분탕질을 해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때마침 이때는 심기일전한 유방이 한신을 얻고 삼진을 뚫고 나오는 참이었다. 항우는 일단 정창(鄭昌)을 한(鄭) 왕으로 삼아 유방을 막게 하고 소공각(蕭公角)을 파견해서 팽월을 상대하게 한[17] 항우는 장량의 "기만책에 속아[18] 유방을 막지 않고 전영을 먼저 제압하기 위해 북진했다.[19]

결국 그렇게 제나라와 전쟁을 치루게 되었는데, 항우는 성양(城陽)에서 벌어진 단 한번의 싸움으로 전영을 완전히 박살내고 전영은 도망치다 평원(平原)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죽었다. 이렇게 해서 전영 자체는 순식간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유방이 미친듯이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었을때 항우는 뜬금없이 북진을 계속하면서, 제나라의 성곽과 가옥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항복한 전영의 군사들은 생매장을 하고 힘없는 여자들이나 늙은이들을 밧줄로 묶어 포로로 삼았다. 

이러한 모든것을 파괴시키는 죽음의 행진은 북해(北海)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행진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마을들은 초나라군의 진격 루트에 있다는 이유로 몰살되었다. 항우가 이토록 엄청난 짓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데, 아마도 공포심을 부추겨 더이상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도에서 벌인 일이라면 항우의 행동은 완전한 삽질이었다.

왜냐하면 충격과 공포 수준의 만행을 목격한 제나라 사람들은 겁을 먹고 버로우을 타기는 커녕,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은 심정으로 모여서 반기를 들며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죽은 전영의 동생인 전횡(田橫)은 여기에 도망친 제나라 군사 수만명을 수습해서 성양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항우는 성양을 깨기 위해 수차례 공격을 퍼부었으나 워낙 저항이 완강하여 도저히 함락이 되질 않았다.

3.6.2 팽성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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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f/Crystal_Clear_app_xmag.png/16px-Crystal_Clear_app_xmag.png 팽성대전 항목 참조

그 무렵, 삼진을 완전 평정한 유방은 관중을 지배 영역으로 확고하게 다지고 다섯 제후들을 모아 56만 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세로 동진을 시작했다. 중간에 가로막는 제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모조리 박살이 나버렸고, 제후 연합군은 별다른 문제도 없이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을 장악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단 3만명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밞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심지어 과장을 고려해 한군의 전력을 10분의 1로 줄여도 초나라군의 숫자 열세는 변함이 없다. 제후 연합군은 숫적으로 압도했지만 여러 제후들의 군대가 모여 통일된 체계가 아니었고, 그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모랄빵을 먹자 제대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명의 병사들이 때죽음을 당했고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 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20]

그러나 항우는 이 싸움에서 유방을 완전히 끝장내는 일은 실패했다. 유방을 사로잡을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으나 한번은 모래폭풍 때문에, 또 한번은 정공(丁公)이 유방을 보내주어 놓치고 만 것이다. 이후 유방은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의 군세와 합류해서 전력을 추스리고 형양(滎陽)으로 이동했고, 때마침 소하가 미친듯이 보급을 해주어 한숨을 넘기게 되었다. 초군은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한군에게 패배 당해 추격을 멈추어야 했다.

이 싸움이 항우의 엄청난 대승이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항우는 '팽성의 수복' 외에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하지는 못했다. 유방을 죽이거나 재기불능으로 만드는데 실패한 점인데, 한군은 형양을 기점으로 계속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고, 후방에 관중과 파촉이라는 확고한 근거지가 있어 그 세력이 건재했다는 점이다.

또한, 항우가 남쪽으로 돌아간 틈을 타 전횡은 초나라의 세력을 제나라 땅에서 대부분 몰아내고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왕으로 추대하여 다시 한번 제나라를 부활시켰다. 즉 제나라에서 벌인 그동안의 싸움이 거의 의미가 없게 되었던 것. 다만 이 싸움의 결과로 한군에 붙었던 여러 제후들을 다시 초나라의 세력으로 끌어올 수는 있었다.

3.6.3 형양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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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유방은 형양을 중심으로 항우에 저항했고, 양 군은 주로 경(京)에서 교전을 벌였다. 팽성대전 이후 기세를 보자면 단박에라도 한군을 부셔버릴 수 있을 법한 초군이었지만 의외로 한군을 시원하게 몰아내지 못했고 한군은 거의 1년 동안 형양에서 초군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게 되자 한계에 봉착했고 BC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때문에 심하게 우려스러워 하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초나라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범증(范增)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항우는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이에 진평(陳平)은 이간책을 사용해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약화시키려고 했는데, 사실 방법 자체는 간단했다. 유방은 항우의 사자가 한군의 진영에 오자, 일부러 으리으리하게 대접을 했는데, 정작 사자를 만나자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는(……)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준 것이다. 그런데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격분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21]

하지만 범증이 죽었어도 포위망은 풀어지지 않았다. 진평은 2천여명의 여자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고,[22] 기신(紀信)은 진짜 유방은 탈출시키고 스스로 유방 행세를 하여 성 밖으로 나가 초군에 항복했다. 

속임수에 당한것을 깨달은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이후 잠시 형양을 내버려 두고 팽월을 격파 한 후, 다시 형양으로 돌아와 주가(周苛), 종공(樅公)이 지키는[23] 형양을 함락하고 주가를 팽형으로 죽였다.

3.6.4 광무 대치 

형양을 함락시킨 항우는 유방이 주둔하고 있던 성고(成皐) 역시 함락시켰다.[24] 성고를 함락시킨 초나라 군은 서쪽으로 진격하려고 했는데, 유방은 공성(鞏城)[25]에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초나라 군의 서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후에는 그야말로 '''미쳐 날뛰는 팽월의 활약으로 항우는 어려움에 처해졌다. 팽월은 초나라의 동아(東阿)[26]를 공격해서 초나라의 장수 설공(薛公)을 죽였는데, 항우는 팽월을 막기 위해 군사를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이때 유방은 항우가 팽월을 공격하려고 간 틈을 타 성고를 다시 수복했고, 광무(廣武)[27]에 주둔하면서 오창(敖倉)의 양식을 확보,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팽월을 물리친 항우는 다시 돌아와 수개월 동안 광무에서 주둔했지만, 또다시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팽월 때문에 항우는 대단히 근심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항우는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을 올려 놓고 "항복 하지 않으면 삶아서 죽이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상당히 막무가내 식의 작전인데, 당시 항우가 얼마나 초조해져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유방은 이런 충격과 공포 급 제안에 "우리가 예전의 의형제를 맺었는데, 지금 우리 아버지를 죽이면 너는 네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는 거다. 그래도 죽이려면, 아버지 요리한 국물 나한테도 한 사발 다오!" 라고 더욱 충격적인 발언으로 응수, 항우는 격분하여 정말 태공을 죽이려고 하다가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하지만 항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 천하가 혼란한건 우리 둘 때문인데, 차라리 우리가 맞짱 한번 떠서 이 싸움을 끝내자." 고 제안했다. 물론 항우와 대결할 생각이 전혀 없던 유방은 "난 힘이 아니라 지혜로서 싸우려고 한다" 고 거절했고, 대신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이 나서 초나라의 장수를 쏘아 죽였다.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완전무장을 하고 누번에게 달려들었고, 누번은 항우에게 활을 쏘려고 하다가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소리에 식겁하고 그대로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쳐 와 버렸다. 유방은 튀어나온 장수가 항우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항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가 유방에게 말을 걸었고, 유방 역시 항우와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방은 항우가 지금까지 저지른 10가지의 죄목을 열거하며 항우를 비난했다. 이때, 항우는 미리 숨겨놓은 쇠뇌를 쏘아 유방을 맞춰버렸다. 하지만 가슴팍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또다시 한술 더 떠 "저 도둑놈이 내 발가락을 맞추네!" 라고 하며 달아났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괴상한 제안과 기습은, 역으로 당시 항우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항우는 어떻게든 기책으로 난국을 돌파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항우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3.6.5 몰락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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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바로 한신의 북벌이 거의 완수 직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유방이 항우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사이, 한신은 위, 대, 조, 연나라를 모두 평정하고 이제 제나라마저 평정 직전에 놓였다. 

항우는 이에 용저(龍且)에게 20만이라는 대군을 주어 한신을 막게 했으나 한신은 오히려 그 용저를 격파하고 참살하였다. 

항우는 이 때문에 두려워 하면서 수하의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설득하게 했지만, 한신은 "항우 그 인간이 날 어떻게 대접했냐? 유방은 밥 주고 옷 주고 장군 주고 다해줬는데 이제와서 날 개차반 취급한 항우의 편을 하라고?" 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며 거절해 버렸다.

이렇게 심란한 와중에 징글징글한 팽월은 또다시 세력을 일으켜 초나라군의 보급을 끊었다.징하다 진짜 항우는 동쪽으로 나아가 진류(陳留)와 외황(外黃)을 공격했는데, 외황은 생각보다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외황이 함락되고 난 후 항우는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성 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는데, 13살의 소년이 항우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팽월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여 외황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 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항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그럴 법도 하다고 하여 죽이지 않고 그냥 항복을 받아들였는데, 이전에 사람들을 죽일때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던 성들이 정작 죽이지 않자 그 소문을 듣고 수십여개 성이 항복을 해왔다. 그러나 항우가 교훈을 얻기에는 일이 너무 늦어버렸다. 항우가 동쪽으로 이동한 사이, 유방은 초나라 장수 조구(曹咎)를 죽여버린것. 항우는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귀환했다. 똥개 훈련 

3.6.6 사면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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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f/Crystal_Clear_app_xmag.png/16px-Crystal_Clear_app_xmag.png 해하전투 항목 참조

서쪽에는 유방의 세력이 건재하고, 북방은 한신이 모조리 평정해버린 상황. 게다가 경포 역시 유방의 편을 들고 있고 후방에서는 팽월이 계속해서 날뛰고 있었다. 이렇다할 패전도 없이 항우는 최악의 형세에 놓이고 말았는데, 한군은 오창의 보급을 통해 군량이 풍부한 반면 저 지독한 팽월 때문에 초군은 보급도 충분하지 못했다.

이때 유방은 후공(侯公)을 보내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하자는 협약을 맺자고 했다. 형양 포위때는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던 항우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선 결국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승낙했고, 사로 잡았던 태공과 여후를 보내주었다. 협악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과 진평은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 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것.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항우는 고릉(固陵)[28]에서 그런 유방의 군대를 무찔렀다.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결국 이 마지막 싸움에서 항우는 패배하였고, 이윽고 한군은 초나라 군을 포위하고는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불렀다. 패배에 상심해 있던 항우는 이 노랫소리를 듣자 크게 놀라워 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그 수효가 많단 말인가?"

마음이 복잡해진 항우는 밤 중에 술을 마시면서 슬픔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지만
역발산혜기개세
時不利兮骓不逝 시세가 불리하니 추[29]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시불리혜추불서
骓不逝兮可奈何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추불서혜가나하
虞兮虞兮奈若何 우희여, 우희여! 너를 어찌해야 하는가.
우혜우혜내약하


이 노래를 듣고, 항우가 사랑하여 항상 데리고 다니던 우미인도 답가를 불렀다.

漢兵己略地 한나라의 병사가 이미 (초나라의)땅을 차지하였고
한병기략지
四面楚歌聲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사면초가성
大王義氣盡 대왕의 의기가 다 하였으니
대왕의기진
賤妾何聊生 천첩이 살아 무엇하리오
천첩하료생


결국 그 패왕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항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한다. 

3.6.7 패왕의 최후 

항우는 그 날 밤으로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를 수 있는 병사 800여명을 이끌고 한군의 포위망을 뚫었고, 날이 밝은 뒤에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군은 관영(灌嬰)을 시켜 5천여 기병으로 항우를 추격했고,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는 남은 수하가 겨우 100여명 밖에 없던 형편이었다. 이윽고 항우는 음릉(陰陵)[30]에 이르렀는데, 길을 잃어버린 항우는 밭을 가는 노인에게 길을 물어 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일부러 길을 속여 왼쪽이라고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고, 항우는 결국 늪지대로 접어들어 한군의 추격군과 조우하고 말았다. 항우가 천신만고 끝에 동쪽으로 길을 뚫어 동성(東城)에 이를 무렵에는, 수하의 병사가 고작 28명에 이를 뿐이었다. 그리고 한군의 추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추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긴 항우는 그때까지 자신을 따르고 있던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31]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공항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희들로 하여금 알게 해주겠다." 

그리고는 남은 기병들을 4방향으로 달려나가게 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한나라 장수의 목을 베겠다!"

이윽고 항우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고, 그 모습을 본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엎드려 버렸다. 결국 항우는 한나라 장수 한명의 목을 베었는데, 마침 항우를 추격하던 적천후(赤泉侯) 양희(楊喜)는 항우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질책하자 양희와 양희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서 몇 리를 달아나 버렸다. 패기[32]

항우와 그 기병들이 다시 모일 무렵, 또다시 한군은 포위하여 왔다. 그러자 항우는 말을 달려 한나라 도위 한명을 죽이고 수십에서 백여명에 이르는 병사들을 죽이고는 기병들을 다시 모으니, 두명만이 전사했을 뿐이었다. 항우는 기병들에게 물었다.

"어떠한가?"

병사들은 모두 엎드려서 말했다.

"대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항우는 계속 도망쳐서 오강(烏江)에 이르렀는데, 오강의 정장(亭長)[33]은 배를 타고 기다리다가 항우에게 말했다.

"강동(江東)의 땅은 비록 협소하다고 하나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숫자는 수십 만에 이르고 있어 가히 그곳을 다스릴 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배에 오르시어 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이 강안에는 오직 이 배밖에 없어, 비록 한군이 쫓아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항우는 웃으면서 거절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었하겠는가? 또한 옛날 내가 저곳 강동의 자제 8천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왔다가 모두 전사하고 오늘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비록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항우 혼자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오추마를 정장에게 주었다.

"나는 그대가 장자(長者)임을 알겠다. 나는 이 말을 5년 동안 타고 다니면서 이르는 곳에는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었다. 내가 차마 죽일 수 없어 그대에게 이 말을 맡기겠다." 

이윽고 항우는 말도 없이 한군과 정말 최후의 싸움을 벌였는데, 항우 혼자 수백여명의 한군을 죽였다.[34] 하지만 항우도 몸에 열군데가 넘는 상처를 입었는데, 항우는 문득 여마동(呂馬童)을 발견하고 "너는 내 부하였던 녀석이 아니냐?" 고 물었다. 여마동은 차마 대꾸를 하기에는 계면쩍었는지 옆에 있던 왕예(王翳)에게 "저 사람이 항우 맞습니다." 하며 딴청을 부렸고, 항우는 그런 여마동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노라."

그리고는 자살해버렸다. 천하무적의 항우가 이렇게 죽자 왕예는 그 목을 베어 가졌고, 뒤이어 수십여명의 기병들이 서로 항우의 몸을 밟는 난리통 끝에 자기들끼리도 죽이면서 병림픽 잘 한다 결국 양희, 여승, 양무, 여마동이 남은 시체를 취하고 상을 받았다. 이후 그 시체를 한번 조립해서 맞춰보자 딱 맞아 떨어졌음으로 5명은 모두 책봉되어 열후가 되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패왕은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이제 천하의 주인은 유방이 되었다. 

4 평가 

항우는 한때 천하의 주인이었으며, 그 위세는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최후는 대단히 비참했는데, 사실 이는 자업자득에 가까울 정도였다. 결국 패배자가 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체 왜 졌는가?"를 따져보는 작업이 될텐데, 항우는 패배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4.1 군사적 능력 

야전지휘관으로서 항우의 능력을 폄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록대전, 전영을 물리친 전투, 팽성대전, 고릉에서의 싸움, 심지어 마지막 해하전투 조차도 측면부대가 움직이기 전까지 항우는 한군을 몰아부치고 있었다. 전투의 영역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지휘관이었으며, 수천년 역사를 지닌 중국역사에서도 그렇게 단기간에 항우만큼 무지막지한 전공을 쌓아올린 인물들은 드물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당시는 형편없는 수준의 농민군이 태반이라, 한번 군사를 모으면 수만은 기본이고 심하면 깃발 좀 세우면 수십만에 이르며, 마찬가지로 이런 부대는 조금 패배를 당하면 통제불가능의 상태에 빠지며 탈주하는 정도[35]라는 점을 고려하면, 날려버린 병사들의 숫자는 조금 시대상을 감안해서 봐야할 측면도 있긴 하다.

하지만 항우의 병력 역시 대다수는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 조건은 비슷한 셈이다. 물론 항우의 부대 중에는 처음 거병을 했을 때부터 거록대전을 거쳐 제나라 전역 등을 거친 베테랑 부대원도 있었을 테지만, 그 숫자는 8천여명 정도이니 절대적인 수준으로 작용되는건 무리가 있다. 

어찌되었건 항우의 전술적 능력, 전투에서의 괴력은 어마어마한건 분명하다. 문제는 전쟁이 전투 몇번 잘한다고 이기는건 아니라는 점이다. 

항우의 전략적 능력은 좀 심하게 말하면 그런거 없다 정도의 수준. 항우가 보여주는 행보는 과연 그에게 대전략이라는 개념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다. 정치적 능력과 연계된 전략적 개념에서 항우는 어이가 상실할 정도의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라이벌인 유방이 스스로는 항우를 맞서 지구전을 펼치고, 한신을 보내 북방을 평정하고 여러 제후들을 하나하나 끌어모아 항우를 고립무원으로 만든다는 큰 그림 아래 행동한 것에 비하면[36] 항우는 일단 눈 앞에 적이 있다면 때려 부수고 보자 는 정도. 실제로 초한전쟁 내내 항우는 눈 앞의 상대인 유방에게만 집중하느라 별동대를 이끌고 하북을 평정하고 있던 한신을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 

물론 이는 유방이 의외로 잘 버틴 탓도 있지만, 항우는 막판 용저에게 대군을 맡겨 한신을 상대하도록 했다. 그런 여력이 있었다면 이미 한신이 조, 연, 제나라를 모조리 평정해버린 시점이 아니라 조금 더 일찍 견제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적어도 용저가 대패하고 참살당하고 난 뒤에도, 항우는 유방을 야전에서 격파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유방이 관중과 파촉에서의 지원은 물론, 형양 북쪽의 오창(敖倉)을 일찌감치 확보해서 군량 문제의 곤경에서 어느정도 벗어난 반면에 항우는 끝까지 보급으로 발목을 잡혔고, 팽월의 원맨쇼도 제어하지 못했다. 항우는 여러차례 팽월을 격파했으나 결국 끝까지 그 세력을 뽑아내지 못했다. 팽월과 유방의 기각지세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

결과적으로 항우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끈 전술적 차원의 싸움에서는 해하 전투 이전까지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하지만 싸워서 이기면 이길수록 세력은 축소되고 군대의 힘은 약화되는 괴이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말하자면 분명히 전술적 차원에서는 천재가 맞으나, 그것을 넘어선 전략적 개념은 전무한 지휘관. 최고의 야전사령관이 전역을 총괄하는 지휘관이 된 것이다. 에르빈 롬멜 이러한 전략적 개념이라는것이 결국 정치적인 부분을 총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항우의 정치가로서의 능력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항우의 정치적인 능력은 어떠하였을까?

4.2 정치적 능력 

간단하게 말하자면 재앙 그 자체다.  위에서는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위에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몸소 실천하는 인물. 딱 마오쩌둥[37]

그야말로 거시적인 모습이 전혀 없는 인물로, 전략적인 이점의 설명을 듣고도 관중을 버리고 '고향에 자랑하기 위해' 되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항우가 취한 행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또한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20만의 포로를 묻어버리고, 함양에 입성해서 진왕 자영을 죽이고 대학살을 자행하는 모습, 그리고 이후 제후들을 분봉하는 모습은 항우의 국가관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항우는 '천하를 아우른다' 는 의미보다는 마치 전국시대의 개념으로 진나라를 대했다. 타국을 정복하고 '외국인'을 학살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본래 관중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던 강소성 출신 유방이 관중의 사람들을 위로해서 인심을 후하게 산 부분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부분. 이후 이어지는 분봉 조치도 마찬가지다. 이때의 모습으로 보면 항우는 중국의 통일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예 이해를 못하거나 혹은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 때문에 군현제 등에 극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단, 이러한 모습을 항우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항우가 가진 세력로 문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스스로가 초나라 귀족의 후예이자 초나라 땅에서 거병하여 그 세력이 주축이 된 항우로서는 초나라 땅이 아닌 관중을 중심지로 삼는건 불가능한 일이고, 진나라에 대한 잔혹한 모습 역시 통일 진나라와 그 제도에 반감이 극심한 세력으로서는 당연하다는 이야기.[38] 어찌되었건 이러한 모습이 항우라는 개성의 개인적인 모습때문이든, 혹은 그 세력 자체의 모습 때문이든 초나라 귀족 가문 출신 항우가 춘추전국시대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것과 반대로 유방과 그 패거리는 오히려 그 출신 성분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한없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런 춘추전국시대 관점으로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준다고 해도, 실제 그 조치도 엉망 그 자체였다. 유방은 견제를 위해 파촉에 처밖아 놓았지만 항백의 설득 하나로 한중까지 지배 영역으로 퍼주는가 하면,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제나라의 장수에 불과했던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봉하고 본래 제나라 왕을 교동왕(膠東王)으로 옮겨버린 일때문에 전영의 분노를 샀으며, 그 전영은 자신이 직접 들고 일어남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후원해서 항우가 세운 천하를 단번에 뒤흔들어 버렸다. 

전영의 협조를 얻은 진여도 항우가 자신을 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왕에 봉하지 않아 불만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이후 정말 지독하게 항우를 괴롭힌 팽월에게 항우는 아무런 봉국도 내리지 않았다. 결국 알아서 적을 만든 셈이나 다름 없는것. 항우가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씨앗은 결국 스스로가 뿌린 셈이다.

무엇보다 항우가 밥먹듯이 자행한 생매장, 대학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잘 알려진건 신안대학살 이지만, 실제 항우는 이런 학살을 여러번 자행핬다. 기록된 사례만 하더라도 다음과 같다.

  • 양성 학살 : 항량 생전, 별동대로 출전하여 양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자,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생매장했다. 
  • 성양 학살 : 유방과 별동대로 움직일때 성양을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다만 이 건은 항우 본인만의 결정인지, 유방의 동의가 있었는지, 주체가 유방이었는지 불분명하다. 
  • 신안 학살 : 항복한 진나라 군 20만을 생매장한 전대미문의 학살이다.
  • 제나라 학살 : 제나라에서 주민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포로들을 생매장해서 죽였다.
  • 외항 학살 미수 : 여기서도 학살을 자행하려고 하다가, 소년의 설득을 듣고 그만두었다.

그 외에도 틈만 나면 사람을 태워 죽이거나 삶아 죽였다. 베스트셀러 소설이자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한국에도 인지도가 있는 대진제국(大秦帝国)의 저자 손호휘(孫皓暉)는 학살 사례를 보고 화들짝 놀라 "어이쿠, 이런 놈이 영웅 취급을 받다니!" 하고 [http]노골적으로 까기도 했다. 현대에 비해 고대의 인구가 적고,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히틀러나 스탈린 급으로, 하다 못해 이 경우는 전장의 열악함과 더불어 일단은 살려서 노동력으로 쓰려고 하기도 하였지만, 일단 항우는 상황을 떠나 죽이고 봤다. 게다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까지.

물론 각종 협약 등에 체결된 현대의 전쟁과 과거의 전쟁에서 민간인 피해를 동일선상에서 놓을 순 없지만, 일단 그 당대에도 항우의 경쟁자인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때 어떤 조치를 취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기억하자. 게다가 이런 학살은 윤리적인 부분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전략적으로도 최악의 악수였다.

항우의 학살에서 분풀이 외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면 '본보기'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학살은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했으며, 가장 극심했던 진나라에서는 당연히 적대감이 폭발하여 한신은 유방에게 전략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더욱이 항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학살과 도륙을 당하여 살아남은 것이 없게 되어 천하 백성들은 모두가 원망하며 아무도 항우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나, 단지 그의 위세에 눌려 복종하고 있는 체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는 패자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천하 인심을 잃고 있습니다."

"또한 삼진(三秦)의 왕은 모두 진나라 장수들 출신으로, 그들이 진나라 장군으로 몇 년간을 군사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싸움 중에 전사시킨 진나라 자제들의 수효는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 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만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진나라의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오늘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대왕께서 무관(武關)을 통해서 관중으로 진입하실 때, 터럭하나도 건들지 않음으로 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하고 법삼장(法三章만을 두기로 백성들과 약속함으로 해서 진나라 백성들치고 대왕께서 진왕(秦王)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기 회음후열전 中

이후 관중은 유방의 세력권이 되었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항우와 유방 중 누가 이기기를 바랄지는 너무 뻔한 일이다. 또한 유방이 동진하고 있을때 재빨리 끝낼 필요가 있던 제나라에서의 싸움은 쓸데없는 학살로 오히려 사람들의 공분만 사고 한없이 길어지게 되었다. 일단 유방의 세력은 팽성대전으로 격파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전횡이 제나라를 다시 부활시키는 바람에 항우의 제나라 원정은 결과적으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런 항우과 굉장한 유사점을 보이는건 과거 일본군이 중일전쟁 도중 벌였던 삼광 작전(三光作戰)인데, 이 경우도 공포심으로 저항을 눌러버리는데 목적이 있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39] 이후 13살 짜리 어린 아이의 설득을 따르자 학살을 자행할 때는 그토록 저항하던 성들이 항복하는 장면은 블랙 코미디 급.

또한 항우가 황제가 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미 실권이 없었던 초회왕을 굳이 살해한 것 역시 유방에게 명분만 주는 행위였으며, 유방이 슬금슬금 우군을 다 끌어들이는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마지막에는 거의 혼자가 되어버린 모습를 혀를 차게 될 정도. 

하지만 항우는 "나를 망하게 한 건 하늘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것이 아니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날렸다. 즉 항우는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절망스러울 정도다.

4.3 인간적인 면모 

평민 출신 유방이 욕을 입에 달고 살며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거나[40][41] 목숨을 건지고 대업을 이루는 일에는 자기 가족조차 없는 사람 취급 할 정도임에 비해 기본적으로 귀족 출신인 항우는 사람을 대할때는 인자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42] 또한 병에 걸린 사람이 있거나 하면 눈물을 흘리고, 그러다가도 한번 화를 내면 모두가 벌벌 떨었다고 하니 인간적인 매력과 카리스마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을 벗기고 보면, '남자다움' 과 '로망' 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항우의 인간성이라는 부분도 굉장히 의문스럽다. 일단 작은 일에는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작 사람을 쓸때는 쓸데없는 의심을 가졌으며 통 크게 양보를 해야 할때는 아까워하기 일쑤였다. 한신은 이에 대해 필부의 용맹, 아녀자의 인정 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진평의 계략으로 범증을 의심하게 되는 모습은 항우의 식견과 배포를 보여주는 사례. 정치적인 면에서 문제가 되었던 제후들의 분봉도 기본적으로는 자기와 친하거나 도움을 되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였기에 사단이 나버렸던 일이다. 범증을 그렇게 간단하게 의심했던 항우지만, 아예 대놓고 스파이짓을 벌인 항백은 자기 인척이라서인지 별다른 처벌을 받은 적도 없었다. 

반면에 유방은 면전에서 욕을 퍼붓던 인물이라도 쓸모 있는 충고를 받게 되면 곧바로 사과를 하면서 받아들였고, 필요하다면 자기 뒤통수를 쳤던 옹치를 열후에 봉하는등 배짱 있는 모습을 여러번 보여주었다.[43] 물론 이후 토사구팽을 벌이기는 했지만, 제후왕들이 아닌 이전부터 자신을 따라다닌 수하들은 많이 챙겨준 편이다.

4.4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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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항우본기

결론을 내리자면 항우는 최고의 야전 지휘관 인 동시에, 군주라는 과분한 자리에 있어 패망해버린 인물이다. 즉 애초에 군주감이 될 인물이 아니었다. 항우는 독선적이었고, 앞 뒤가 막혔으며, 옳은 말을 따를 줄 모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하며, 결정적으로 쓸데없이 잔혹했다. 가히 군주감으로서는 최악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인물이 순전히 군사적인 능력으로 한때마나 천하를 얻었으니, 얼마나 그 부분이 대단한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 애시당초에 항우의 윗사람이었던 항량이 살아있다면, 항우의 행적과 평가도 완전히 달라질 지 모르는 일이다. 

다만 항우는 철저한 패배자이고, 기록을 남기게 되는 쪽은 승리자인 한나라 족이라 그 기록을 얼마만큼 신뢰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마천이 패배자인 항우를 본기(本紀) 에서 언급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중국 역사 서술의 관점으로는 패배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어쩌면 도가 넘을 정도의 행동으로 그보다 더 높게 대우해주기도 힘든 일이다. 이를테면 실질적으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가 오삼계의 도움으로 산해관을 넘어오기 직전, 잠깐이었지만 중국의 지배자였던 이자성은 『명사』의 「유적전(流賊傳)」에 그 전기가 실려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사기의 서술에서 항우가 가지는 위상이 억지로 깔아뭉갰다고만 보기는 힘들 것이다. 

재밌는 점은 항우의 초인적인 행적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대단하다' 는 의미로 사서에서 항우의 기록은 정치적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부풀려 졌다고 여기고, 항우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경우에는 '패배자인 항우를 깔아뭉개기 위해' 승자의 입장인 한나라가 정치적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항우의 악행을 부풀렸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극과 극의 반응 인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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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ighsis | 작성시간 13.06.17 지난번에 봤을때는 삼국지 인물들에 비해 굉장히 빈약했었는데 많이 보충이 되었네요. 수고하셨습니다~
  • 작성자블라디미르 대공 | 작성시간 13.06.17 항우랑 같은 시대에 만났으면 공포 그 자체였겠죠? 흠;;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3.06.17 미치광이 연쇄살인마 ㅎㄷㄷ
  • 작성자블루제이제이 | 작성시간 13.06.19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 작성자율무차 | 작성시간 13.06.20 항우는 그냥 변명할 자격따위도 없는 패배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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