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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영국의 역사 : 왕국의 설계자, 헨리 2세와 사자심왕 리처드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7.28|조회수720 목록 댓글 5
King Henry II



플랜태저넷 왕가(House of Plantagenet)
헨리 2세(1154 ~ 1189)



 스티븐의 사후 헨리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위계승에 대한 분쟁이 없었던 것은 100여 년 동안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헨리가 손아귀에 쥐고 있는것은 하나의 왕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제국이었다. 스코틀랜드 국경선에서 피레네 산맥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의 종주였던 그는 *1) 어쩌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즉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보다도 더 부유하였으며, 그가 대륙에 갖고 있던 영지에 대한 명목상의 영주였던 프랑스 왕의 중심 세력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잉글랜드가 그에게 막대한 부와 왕의 칭호를 부여한것은 사실이었지만 '제국'의 중심지는 앙주였다.


 헨리는 아버지로부터는 앙주, 메인, 투렌(Touraine)을, 어머니로부터는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물려받았고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와 혼인함으로서 아키텐(Aquitaine), 프와투(Poitou), 오베르뉴(Auvergne)를 손아귀에 넣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벡생(Vexin), 브르타뉴, 툴루즈(Toulouse)를 제국에 합쳤다. 이를 보고 헨리에 대해 '운이 좋은 사내'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분리된 영지들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으며 어찌되었건 그는 대륙의 영지를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거대한 제국은 '헨리 개인의 제국' 이었다. 그 존립은 왕의 정력과 통치술에 의존했고, 오직 그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과 이동을 통해서 하나의 제국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헨리는 군주에게 필요한 야심만만한 태도를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기실 헨리는 대단한 면모를 지닌 사내였다. 이는 겉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국의 군주는 용모가 시원찮았다. 몸은 작달만하고 뚱뚱했으며, 붉은 머리털에 스무살이 넘어서도 얼룩과 주근깨가 많은 그의 용모는 상스럽게 보였다. 지루한 미사 시간에는 경박하게도 끼적거리거나 속삭이면서 무료함을 달랬고, 급한 성질이 터져나올라 치면 푸른 눈은 튀어나올듯 발갛게 충열되기 일쑤였다. 더 심할 경우 왕은 마룻바닥에 엎드려 이빨로 멍석을 물어 뜯는 괴벽을 보였다.


 그러나 왕과 한번이라도 대화를 나누어본 사람들은 부정적인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헨리는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말솜씨로 주위 사람들을 자연스러운 담론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담론도 어리석은 중세 군주의 하품 나오는 자기 자랑이 아닌, 풍부한 학식을 바탕으로 한 품위있는 담론이었다. 기실 헨리는 노르만의 정복 이래 완전히 글을 깨친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었고, 당대 유럽의 어느 군주보다도 학식이 깊었던 것이다.  


 헨리는 군주로서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며, 라틴어는 프랑스어 못지않게 유창했고, 영어를 제외한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역사와 문학에 깊은 애정을 보인 왕은 동시에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이었기에 그의 손엔 늘 책이 아니면 활이 들려 있었다. 뜻한 바를 이루고야 마는 헨리의  성격은 그가 궁정신하들과 끊임없이 옮겨다니던 일정을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면모들은 그로 하여금 여러 날 동안 새벽부터 해질 무렵까지 마상에 있었으며, 항상 정무를 보거나 아니면 사냥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왕은 식사와 승마시간을 제외하고는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헨리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는 그가 나라를 통치하는 일에 전념하여 즉위한 지 반년이 채 지나자 않아 스티븐 시대의 무질서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2) 왕은 당면한 과제를 놀라운 정력으로 처리했다. 헨리는 대관식을 치루자마자 스티븐과 마틸다의 분쟁에서 오랫동안 백성들을 괴롭히던 플랑드르의 용병 부대를 국외로 추방시켜 사람들의 환호를 이끌어 내었다. 또한 분쟁 기간 생겨난 여러 백작령을 없애고 전왕의 시대에 축조된 불손한 영주들의 성을 허물게 했다. 내전에 지친 영주들 대부분은 왕에게 반항하기 보다 협력하는 쪽을 택했다. 이처럼 단시일 내에 평화를 정작시킨 헨리는 마음을 놓고 1156년 다시 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헨리가 엘레오노르와 결합한 것 역시 그 넘치는 야심의 일환이었다.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루이 7세(Louis VII)는 1137년, 자신보다 더 넒은 봉토를 가지고 있던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인 기욤 10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철저한 정략적 결혼이었지만 루이는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2차 십자군 원정 도중 사랑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이 이슬람 지도자 누레딘(Nureddin)의 요새인 알레포(Aleppo)를 치려하였을 때, 동행하던 엘레오노르가 그곳의 영주인 레몽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추문이 번진 것이다. 이에 루이는 원정에서 돌아온 후 정략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1152년 3월 그녀와 이혼을 했다.


 이혼을 당한 엘레오노르는 루이로부터 아키텐을 돌려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노르망디 공의 주군인 프랑스 왕에게 '봉건제후의 예'를 표하기 위하여 파리를 방문한 헨리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헨리는 아키텐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11살이 더 많았던 엘리아노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루이와 헤어진 지 2개월 만이었다. 


 헨리와 엘레오노르는 적어도 '정치적 파트너' 로서 보조를 아주 잘 맞추었다. 엘레오노르는 결혼한 후에도 정치에 깊이 참여했는데, 자신의 아키텐 영지 안에 있는 푸아티에 궁정에 음유시인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충성의 표시로 궁정예절의 본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궁정예절은 아키텐을 통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는 헨리가 세운 새로운 왕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감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일조하였다. *3)


 이토록 야심만만한 헨리가 '잃어버렸던 것' 을 그대로 내버려 둘 이유가 없었다. 마틸다와 스티븐의 분쟁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는 데이비드 1세(David I) 등의 지휘 아래 국경을 넘어 남으로 진격해 왔고, 잉글랜드의 북부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헨리는 1157년 어린 군주 맬컴 4세(Malcolm 4th Scotland)에게 압력을 가해 컴버랜드, 웨스트모어랜드, 노섬브리아를 모조리 잉글랜드에 반환하게 하였다. 


 그러나 웨일즈에 대해서는 그리 손쉽게 일이 해결되지 못했다. 무능한 맬컴 4세와는 달리 그위네드의 오와인(Owain of Gwynedd)와 데하이바르스의 리스(Rhys of Deheubarth)는 그리 호락호락한 위인들이 아니었다. 1157년과 1165년의 시도에서 헨리는 웨일즈의 게릴라 전술과 폭우 앞에서는 군대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1165년 이후 웨일즈 지배자들에 대한 헨리의 태도는 훨씬 더 유화적으로 변했다. 허나 헨리의 목표는 웨일즈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아일랜드에 대한 공격의사를 1155년부터 가지고 있었고 1169 ~ 1170년 그의 군대는 아일랜드로 진격했다. 처음에는 웨일주 변경주 출신의 귀족들이, 그 다음에는 헨리 자신이 직접 침공하였다. 


 헨리의 야망은 끝이 없는것처럼 보였다. 노르망디 공, 아키텐 공, 그리고 앙주의 백으로서 헨리는 주변 지역의 계승 문제에 끼어들었다. 그는 1156년 낭트(Nantes) 문제에 개입하였고 1159년에는 툴루즈에 원정하여 까오르(Cahors)와 퀘르시(Quercy)를 취하였으며 1160년에는 노르만 벡생을 회복하고 마지막으로 1166년 이후 계속된 침입의 결과, 브르타뉴를 정복하여 그의 아들 제프리를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Map of England and France under Henry II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욕을 보인 정도에서 그쳤다면 헨리에 대한 평가는 훨씬 낮았을 것이다. 그는 1166년 직접봉신들에 대한 봉건적 의무를 새로 부과했다. 그는 그들이 공급하기로 한 기사들의 수를 재확인하고 실제로 그 수만큼의 기사를 양성하도록 했으며, 모든 하위 봉신들에게 최우선적 군주에게 신서하도록 했다. 1181년에는 각자가 갖추어야 할 무기를 규정함으로서 민병대를 활성하했고, 주요한 다섯개의 항구인 '5항(Cinque Ports)' *4) 에 선박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 모든 방법을 통해서 헨리는 그의 군사적 기반을 봉건적 군대 뿐이 아닌 전체 자유민에 의존하기를 바라였다.


 1170년 헨리는 전체 지방정부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셰리프의 심사(Inquest of Sheriffs)'라고 불린 이 조사는 대귀족들의 토지 관리인과 집사들, 몇몇 성직자 등 지방 관리들에 대한 조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헨리는 지방을 순회재판구(Circuit)로 분할하고 각지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위원들(Commissioners)를 파견하였다. 그 결과 여러 부패 관행들이 시정되었으며, 많은 셰리프들이 해임되고 그들의 자리를 왕의 관료들이 차지했다. 이 같은 새로운 셰리프들은 왕에게 책임즐 지는 부지런하고 믿을 만한 관료들이었다.


 헨리는 잉글랜드보다 대륙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므로, 외할아버지인 헨리 1세와 같이 그가 해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원할하게 기능할 수 있는 잉글랜드의 항구적 행정 기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유력자들의 모임인 대자문회의나 왕을 따라다니는 측근들의 모임인 소자문회의가 아니라, 그의 치세에 성장하고 성숙해진 회계청이었으며, 거기에는 숙련된 서기와 행정가들뿐만 아니라 법률에 밝은 재판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원래 왕의 재정 기구였던 회계청은 왕의 서기들이 일하는 상서청 구실과 함께 하나의 법정으로서의 업무도 맡게 되었다. 왕이 관심을 두는 법률 업무가 더 많아짐에 따라 '왕의 법정' 으로서의 회계청이 가지고 있는 역할 역시 한층 더 커졌던 것이다.


 헨리는 많은 사건을 지방 법정에서 국왕 법정의 관할로 옮겨 모든 자유민들로 하여금 국왕 법정을 이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결과 국왕 법정의 업무량이 크게 늘어났다. *5) 국왕 법정은 지방 법정보다 훨씬 우월한 재판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사건이 국왕 법정에서 다루어지기를 원하였다. 헨리는 사람들이 국왕의 재판을 좀 더 쉽게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랬으므로 순회재판 제도를 개선했다. 왕의 고위 관료들은 전국을 돌며 소규모의 소송사건을 다루었는데, 이는 웨스트민스터의 재판과 동일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헨리와 여러 국왕 법정의 재판관들은 일부 앵글로 - 색슨법과 노르만법을 활용하고 여기에 로마법과 교회법을 차용하여 새로운 요구에 맞는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냈다. 이런 관행은 영국인들의 관습으로 인정되었고, 여러 법정에서 내려진 판결들로부터 선례와 법의 원칙들이 추출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잉글랜드 전체에 적용되는 하나의 공통적 법체계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잉글랜드와 주요 영어권 국가들에서 통용되고 준수되는 보통법(Common Law) 체계였다.


 국왕의 관심사 중 하나는 신민들의 재산권 보호에 관한 문제였다. 정의의 원천으로서 국왕은 신민의 재산을 보호할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헨리는 여러 봉건적 법정이나 사적 법정에서 재산에 관련된 사건들이 공정하게 다루어지는지 감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간여는 왕의 영장을 통해서 행사되었는데, 헨리는 지방 법정에서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라고 지시하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경고하는 권리영장(writ of right)과 사건을 지방 법정에서 국왕 법정으로 옮기도록 명령하는 이송영장(writ of praecipe)을 통해서 재판이 신민의 재산권 보호에 기여하게 했다.





 헨리 치세의 초기 형사재판은 앵글로 - 색슨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죄법과 보증선서의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노르만인들은 결투에 의한 사죄법을 도입했는데, 싸움에 진 편이 살아남으면 수족이 절단되거나 교수되었으며, 무거운 벌금이 부가되었다. 1166년 헨리는 이보다 더 합리적으로 범죄자를 고발하고 재판하는 방법을 마련했는데, 범죄자를 소추할 의무를 지역공동체에 부과하여 헌드레드마다 12명, 마을마다 4명의 믿을 만한 주민으로 하여금 셰리프앞에, 나중에는 지방 법정의 판사 앞에 출두하여 강도, 절도, 살인자 또는 그들의 비호자를 고발할 의무를 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범죄자의 고발에 그쳤으며, 죄의 판정은 여전히 결투, 보증신서, 사죄법에 의한 재판으로 내려졌다.


 법률 개혁에서 헨리의 또다른 업적은 바로 배심제도의 이용이였다. 헨리가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범죄자들의 폭력과 잔혹 행위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범죄자들을 고발하고 체포, 처벌할 기구가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탓이 컸다. 경찰 조직은 없었기에 범죄자를 소추할 유일한 기구는 프랭크플레지(frankpledge)로 알려진 것으로, 12세 이상의 주민이 집단적으로 가입하고 이에 소속된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에게 범죄의 혐의가 있을 때에는 다른 소속원들이 이를 범정에 고발하는 제도였다. 헨리는 이 제도를 강화하여 셰리프들로 하여감 연 2회 헌드레드 법정에서 프랭크플래지 검열을 열게 하였다. 


 민사재판에서도 역시 배심제도가 도입되었다. 스티븐 시절의 혼란기에 유력자들은 부당하게 토지를 빼앗았는데, 헨리는 빼앗긴 토지를 적법한 원보유자에게 신속히 돌려주기 위해 모든 자유민들에게 국왕 법정을 개방하고 배심제도를 이용하게 했다. 법원의 판결 없이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은 순회판사에게 토지를 빼앗겼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답변한 뒤, 자신의 재산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재산 소유권에 대한 소송은 본래 영주의 봉건적 법정에서 다루어지는게 보통이었으며, 주로 결투의 사죄법에 의해 판가름 나는것이 통상적이었다. 헨리는 어느 자유민의 재산권에 도전하려는 사람은 하나의 영장을 구득함으로써 소송을 시작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그렇게 도전받은 자유민은 사건을 봉건 법정에서 국왕 법정으로 옮길 수 있었으며, 그 또한 합당한 영장을 구득함으로써 배심에 의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대배심재판(grand assize)' 은 웨스트민스터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엄격한 재판으로서 자유민이 결투에 의한 사죄법에 의하지 않고 배심에 의해 재판받을 수 있는 훨씬 더 공정한 절차로서 환영받았다. 



File



 그러나 헨리의 교회정책은 그의 법률 정책처럼 성공적이지 못했다. 스티븐 시대의 대혼란 동안 교회는 새로운 특권과 독립을 획득했다. 종교적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 교황에게 상소하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 되었고,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권은 국왕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종교재판소는 계약과 채무 등에 관련된 사건의 재판까지도 맡을 정도였고 그 재판권을 확대하고 성직자의 범죄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재판권을 행사했다. 헨리는 이러한 성직자들의 특권을 제압해서 선왕들이 교회에 누린 국가의 통제권을 되찾고자 하였다.


 허나 헨리가 목적을 위해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을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 것은 최악의 선택이였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헨리는 베켓이 적임자라고 생각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베켓은 런던에 정착한 루앙(Rouen) 상인의 아들로 제대로 교육받았으며 외교가와 사업가로서 뛰어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한 헨리는 1154년 그를 상서로 임명했고, 국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서 베켓은 충실히 봉사했다. 따라서 헨리에겐 베켓만한 적임자도 달리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켓이 너무나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것이 재앙을 불러 일으켰다. 국왕의 충실한 하인 노릇을 했던 베켓은 이제 대주교로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여 교회의 보호자가 되었다. 세속의 궁정인으로서 고급 옷을 입고 사냥을 즐기던 왕의 동반자는 이제 타협을 모르는 성직자로서 갑자기 금욕 생활을 하고 성직자의 독립과 교황의 우월권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대주교로서 왕과 날카롭게 맞서 다투었다.


 12세기 중엽 교회와 국가의 관계란 우호를 유지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덮어둘 수 있지만, 싸우고자 한다면 모든 세월이 지날만큼 싸울 수 있는 소재가 널려있는 판국이었다. 1163년 10월 헨리는 웨스트민스터에서 벌어진 회의에서 교회가 죄지은 성직자의 성직신분을 박탈하여 그를 세속재판소에 넘겨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베켓은 이를 반박하였다.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은 베켓에게 회유적인 입장을 취하라고 강요하고, 클래런던 조례(Assize of Clarendon)에서 헨리가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번 강하게 주장하자 베켓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이전 주장을 되풀이하여 헨리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문제의 핵심은 죄를 범한 성직자에 대한 재판과 처벌이었다. 성직자들은 종교 재판에서만 처분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기껏해야 면직이 고작이었으며, 대게는 어떤 속죄 행위를 명령받는 정도로 그쳤다. 사실 이런 특권은 신부나 수도승에게만 국한된것도 아니었다. 형식상 성직자 신분이라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면 특권은 누구에게나 주어졌으며, 그러한 증거로는 지정된 성서 구절 몇 줄을 읽을 수 있는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정도는 아무리 어리석은 범죄자도 옥리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암기할 수 있었다. 


 헨리는 범죄를 저지른 성직자에 대한 재판권을 모조리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범죄행위에 대한 고발과 입증이 세속 법정에서 먼저 행해지고 난 뒤, 그 후 범죄자가 왕의 대리자의 출석하에 종교 재판에서 심판을 받되 유죄로 판명되면 성직에서 해임된 후 세속 법정에 되돌려져 처벌받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왕의 논리는 합당한 면이 있었으나, 자기 직분에 충실한 베켓은 이런 방식을 거부하고 성지갖에 대한 재판과 처벌의 모든 과정이 교회 법정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베켓이 대주교가 된 일년 후 갈등은 파국을 맞이했다. 일련의 살인죄로 고발된  성당참사회원이 주교의 법정에서 방면되자 왕은 그를 세속 법정에 세울것을 주장했으나, 베켓은 이를  거부하고 이 사건을 다루고 싶다면 앵글로 - 노르만의 국왕이 켄터베리 종교 법정에 출석해야 한다고 맞섰다. 헨리의 분노가 절정에 이르자 베켓은 프랑스로 도피하여 6년간 머물면서 왕을 비난하였고, 심지어 파문을 이용해서 협박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베켓의 측근들을 추방하고 그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는것으로 보복했다. 






 1170년, 헨리는 켄터베리 대주교가 대관식을 주재해 온 오랜 관례를 깨고 요크 대주교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 헨리(Henry the Young King)의 대관식을 주재하게 하였다. 그러자 베켓은 즉시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에 참여한 주교들을 파문시킬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파국을 피하기 위해 헨리는 베켓의 귀환을 허용함으로서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기어코 베켓이 대관식에 참여한 주교들을 파문시키자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분노가 폭발하였다. 왕은 분노에 빈정거렸다.


 "이 말썽많은 성직자를 처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인가?(Will no one rid me of this turbulent priest?) *6)


 이 말을 듣자 네 명의 기사들이 즉시 해협을 건너 켄터베리로 달려갔다. 그들은 대성당 안에서 베켓을 발견했는데, 베켓이 자신은 왕의 배신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종일 뿐이라며 맞서자 기사들은 고함을 치며 칼을 쳐들었다. 베컷의 옆으로 몰려왔던 수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다만 에드워드 그림(Edward Grim) 수사가 장식용 방패를 들고 베켓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기사는 칼을 휘둘러 방패를 쳐 땅에 떨어뜨렸다. 베켓은 자신이 "예수를 위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영광스럽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 다고 말했고, 그 즉시 목이 잘려 살해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목은 그대로 서 있었으며, 또 다른 칼이 그의 무릎을 베자 무너지듯 쓰려졌다고 전해진다. 베켓의 최후는 그림 수사에 의해 알려졌다. *7)


 이는 전기독교 사회를 경악시켰고, 베켓은 기록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성인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베켓이 살해될 당시 흰 피가 쏟아졌다는 이야기가 퍼지며 사람들은 그를 켄터베리 성자라 불렀고, 헨리는 어쩔 수 없이 교황과 교권에게  어느정도 양보를 하고 베켓의 묘를 참배 한 후 70여명의 수도사로 하여금 자신을 매질하게 함으로서 그의 죽음에 대한 참회의 뜻을 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헨리는 모든것을 양보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주교와 수도원장의 선발에 대한 통제권을 계속 유지했고, 공석이 된 성직의 수입을 누릴 수 있었으며, 그의 동이 없이 왕의 고위 관리나 직접봉신들에 대한 파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낮은 성직자의 범죄에 대한 재판권은 국왕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야망으로 가득찬 헨리의 일생은 아들들의 반란이라는 재앙으로 인해 저지되었다.  헨리 2세는 세 아들인 헨리와 리처드, 제프리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었으나 *8) 실제적인 실권은 여전히 자신들이 쥐고 있었다. 헨리의 야심에 찬 아들들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기대감은 헨리가 죽기 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고, 더구나 헨리의 아내인 엘레오노르 역시 자식들을 부추겼다. *9) 게다가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존엄왕' 필리프(Philippe Auguste)가 이들의 가장 큰 후원자로 나서자 이는 더욱더 큰 문제가 되었다.


 1173년 여름 노르망디에서 시작된 반란은 브르타뉴와 잉글랜드에 퍼지고 이듬해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William the Lion)이 군대를 이끌고 국경선을 넘게 되면서 최악의 위기로 변모하였다. 사자왕은 칼라일을 거점으로 삼고 컴벌랜드와 웨스트모어랜드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헨리는 기민한 대응으로 차례차례 반란을 진압했다. 알른윅 전투(Battle of Alnwick)에서 사자왕은 패배하고 잉글랜드 병사들에게 사로잡혔으며, 그는 헨리 2세 앞에 끌려 와 신하의 예를 취한 후에야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3주 후 반란은 모조리 진압되었고, 헨리는 아들들은 사면시켰지만 왕비 엘레오노르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감금시켜 버렸다.


 1181년, 아들 헨리와 리처드는 어머니의 영지인 아키텐을 두고 싸움을 벌이면서 또다시 분쟁을 만들었다. 아키텐은 리처드의 영지였다. 그러나 리처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형제들인 헨리와 제프리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헨리 2세는 이 반란이 성공하면 이 지방이 독립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리처드를 돕도록 했다. 1183년과 1186년 아들 헨리와 제프리가 사망하자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남은 아들 중 존에 대한 편애가 리처드를 자극시켰다. 리처드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그리고 앙주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존은 아키텐을 원했다. 리처드는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아키텐을 넘겨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늙은 왕은 존의 편을 들어주었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또다시 칼을 뺴들었다. 1181년 11월, 리처드는 프랑스 땅에 있는 잉글랜드의 영지를 걸고 프랑스의 필리프에게 충성을 서약하며 동맹을 맺었고, 르망에서 소뮈르까지 아버지를 추격하며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중병에 걸려 시농(Chinoin)에 머물러 있던 헨리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가한것은 리처드의 칼이 아니었다. 그는 반역자들의 명단 첫머리에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 존의 이름이 올라온 것을 보았다. 존은 사태가 리처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듯 하자 편을 갈아탄 것이었다. 한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이탈리에서 내쫓을 계획을 거대한 계획을 세우던 이 군주는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그만하면 됬다! 될대로 되게 놔두어라. 내 자신의 일이건 이 세상의 일이건 아무것도 내겐 상관없다……. 내 명예를 앗아가고 자식으로 하여금 나를 욕되게 하는 그리스도를 내가 왜 경배해야 한단 말인가? …… 정복당한 왕의 창피스러움이여!" *10)


 회한에 잠긴 그는 7월 6일 시농 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몇 주간만이 방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데 있어 자신에게 부담을 주었으며, 항상 제국의 한 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충성하게끔 했다. 또한 헨리는 자신의 부재중에도 사법과 재정의 일상사를 다룰 수 있는 지방행정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합리적인 개혁에 대한 관심은 보통법의 창시자로, 그리고 위대하며 창의적인 왕으로 여겨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들의 말석에 놓일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를 몰락시킨 아들들보다는 수십배는 더 위대한 군주였다.


 그러나 헨리 자신에게는 그러한 요소들이 부차적인 중요성만 가질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가족 정치' 였으며, 이 점에서 그는 실패했다고 믿으면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30년간 성공적인 통치를 하였다. 






리처드 1세(1189 ~ 1199)



 리처드가 프랑스의 존엄왕과 동맹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그의 아버지인 헨리의 권력과 영지의 상속자로서의 리처드의 권리에 도전할 수 없었다. 존은 아일랜드의 영주로 남아 있었다. 세워이 지나면 브르타뉴는 현재 2살 밖에 안된 제프리의 유복자 아서에게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고, 그 나머지는 리처드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는 1189년 9월 30일 잉글랜드의 왕관을 섰다.


 사자심왕(The Lion Heart)으로 불리워진 그는 실로 괴물과 같은 전사였으며,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무용을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이기도 했다. 아버지 헨리 2세에게 감금된 엘레아노르의 모습은 리처드를 분노하게 하였으며, 헨리 2세가 사망하면서 구금에서 풀려난 엘리아노르는 이전보다 더 깊숙이 정치에 관여했다. 그녀는 리처드가 잉글랜드를 떠나 있는 동안 사실상 왕좌를 지켰다. 


 그러나 통치자로서 리처드는 즉위 이전부터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가 아키텐에서 명성을 얻은 것은 푸아티에와 가스코뉴의 반항적인 귀족들을 다루게 되면서부터 였지만, 가스코뉴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는 그들이 헨리와 제프리에게 도움을 청하게 만들었다. 기실 리처드는 잉글랜드의 군주들 중 가장 비잉글랜드적인 왕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옥스퍼드였으나 자란곳은 아키텐이었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프랑스인으로 생각했다. 그가 잉글랜드에 머무른 것은 10년의 치세에서 단 6개월에 불과했다. 용감하고 저돌적이며 충동적인 그는 국왕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기사였다.


 사실 그에게 잉글랜드는 군자금을 마련하는데 유용한 영지였을 뿐이다. 그는 관직을 팔고, 돈을 받고 스코틀랜드의 사자왕을 봉신의 지위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며, 프랑스의 존엄왕에게는 오베르뉴를 팔아넘겼다. "만일 그것을 살 수 있을 만큼 돈 많은 구매자만 있다면, 나는 런던까지도 팔아 넘기겠다." *11) 고 리처드는 말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십자군 원정에 떠난 그는 이슬람의 대영웅 살라딘(Saladin)을 상대로 엄청난, 그러나 결정적이지 못한 전투를 계속했다. 이 모든 과정은 리처드의 일생에서는 중요한 일일지 모르나, 영국의 역사를 살피는데 있어서는 언급하지 않아도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리처드가 부재 중인 동안 동생인 존은 존엄왕과 더불어 왕위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몄고, 리처드는 서둘러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 당시 리처드에게 모욕을 당한 일로 앙심을 품은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Leopold)에게 사로 잡히고 말았고,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Heinrich VI)에게 넘겨졌다. 그는 리처드를 프랑스의 존엄왕에게 넘기겠다고 협박하며  15만 마르크의 몸값을 요구했다.


 리처드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노르망디에서는 존엄왕이 벡생을 유린했고, 루앙은 거의 점령할 지경에 놓여졌다. 또한 궁정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왕을 석방하기 위하여 기사들에 대한 군역면제금, 데인겔드 대신 부과된 토지세, 동산에 대한 세금, 심지어 교회의 금은 기물과 수도원의 양모까지 거두어들였다. 리처드의 부재에도 잉글랜드가 그의 석방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헨리 2세 시대에 이루어진 개혁이 그만큼 성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194년 몸값 중 3분의 2인 10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석방된 리처드는 잠시 잉글랜드에 들른 뒤 대륙으로 돌아갔다. 그후 죽을 때까지 5년 동안 사자심왕은 존엄왕에게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일에 전념했다. 그의 군사적 능력은 이를 거의 성공시켰으나 1198년, 리모주(Limoges) 부근의 한 성을 공략하던 도중 화살에 맞은 상처로 말미암아 사망하고 말았다. 





*1) 실제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프랑스에서 성장한 헨리는 34년의 통치 기간 중 21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2)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의 시대에 이루어진 여러 개혁에 대해서 실제 이상으로 높이 평가해 온 경향이 있으며, 근래에는 잉글랜드의 법률제도가 실은 헨리 2세가 즉위한 1154년 이전부터 이미 발전해왔다는 점진적인 면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헨리의 업적이 괄목할 만한 것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영국의 역사, 나종일 pp.108 

*3) 이야기 영국사, 김현수 pp.120

*4) 켄트와 서식스 해안의 여러 항구 도시를 말한다. 원래는 도버, 샌드위치, 롬니, 헤이스팅스, 하이스의 다섯 항구를 지칭했찌만, 나중에 윈첼시, 라이 등의 다른 도시들이 부가되었다. ─ 영국의 역사, 나종일 pp.109

*5) 헨리가 큰 관심을 기울인 법률 업무는 중죄(felony)에 대한 소추였다. 중죄는 왕의 평화를 깨뜨린 것이기 때문에 곧 왕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었으며, 따라서 헨리는 이와 같은 사건을 지방 법정이 아닌 국왕 법정에서 다루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 Ibid pp.111

*6) Knowles Oxford Dictionary of Quotations p. 370

*7) 이야기 영국사, 김현수 pp.123

*8) 처음에 영지를 배정받지 못한 존은 '무토지자(Lackland)'라는 별명으로 불리웠으나 1185년 무렵에는 아일랜드를 상속받기로 되어 있었다. 즉 '잃어버린' 것이 아닌 처음에 없는것이었기에, 훗날 그가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대륙 내의 영토를 상실한것을 두고 Lackland를 붙이거나, 실지왕(失地王)이라고 부르는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9)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와 결혼한 후 얼마 후 웨일즈에 많은 영지를 가지고 있던 윌터 드 클리퍼드(Walter de Clifford)의 딸 로저먼드(Rosamund)와 사랑에 빠졌으며, 아름다운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 우드스톡(wood stork)에 있는 한 미궁에 숨겨놓음으로서 시기하는 눈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 영국의 역사, 나종일 pp.117

*10) Ibid pp.118

*11) Ibid p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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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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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7.29 그냥 딴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영국사람들은 저 역사들을 모두 영국의 역사로 생각하는 거죠??????
  • 작성자[주태]^^; | 작성시간 13.07.29 백년전쟁때 저땅들을 가지게된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크킹하면서 느끼는건데 중세서유럽의 나라간 전쟁들은 결국은 국가단위의 상속권분쟁이네요.
  • 답댓글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7.29 끊임없는 상속권 분쟁~ 누가 누구의 아들이니 언제 이 땅을 물려받고... 의 연속인듯요 ^^ 그나저나 크킹 잼나나요?
  • 작성자Royal Eyelander | 작성시간 13.07.29 리처드는 무쌍만 할줄 알지 그닥 정치적 이력이 보잘것 없네요.
  • 작성자[주태]^^; | 작성시간 13.07.29 크킹 재밌어요.권력을 위해 마음껏 막장드라마를 찍을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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