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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3) ─ 기묘한 이야기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6.12|조회수841 목록 댓글 4

 


 혁명당원, 장용. 장작림에게 살해당합니다.



 장작림이라는 군사력을 가지게 된 총독, 조이손은 두려울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신군부 장령등을 압박해서 보경안민(保境安民)이라는 주장을 제기, 통과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이 주장은 혁명에 반대하고 계속해서 황제 체제를 유지하다는 전형적인 보황(保皇) 노선입니다. 그리고 장작림이 그 앞잡이로 활약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전국이 혁명의 기운으로 불타오르는데, 저런 짓을 한다고 해서 혁명의 기세를 막기는 힘들었습니다. 봉천의 혁명당원들은 시내에 모여 무창봉기(武昌蜂起)에 어떤 방식으로 호응할까 논의를 했습니다. 격렬한 논쟁 끝에 평화적인 방법을 이용하기로 하고, 남천위, 오경렴 등의 혁명당 수령은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동북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경렴은 봉천성 자의국 의장 명의로 성내 각계 인사들에게 회의를 소집하고, 혁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습니다. 혁명파가 세운 계획은 치안 유지의 명목으로 봉천성 보안회를 조직한뒤, 청나라 조종에서 임명한 총독 조이손을 내쫒고 혁명파 신군부 남천위를 관외 도독으로 추천, 오경렴을 봉천성 민정장(民政長)으로 추대하여 독립을 선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북의 군대를 이끌고 관외로 진입, 혁명을 돕자는 계획이었습니다.


 뭔가 굉장히 허술하고, 고생은 덜하면서도 요행수를 바라는 느낌이 들죠. 그 당시 경험없는 미숙한 혁명당원들은 이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앞서 말한 오경렴은 봉천교육회 회장, 봉천 자의국 의원등을 지냈으며 곧 자의국 의장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명목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는 진보적 사상을 갖추고 있었고,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1911년 12월 12일 보안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참여한 사람은 각계 인사 200여명 이었습니다. 물론 조이손도 장작림을 대동하고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물론 노회한 정치가인 조이손이 아무 생각없이 나간것은 아닙니다. 그는 장작림에게 명령해서 회의장 주변에 총을 든 요원들을 쫙 깔아놨습니다. 압력을 주는것이죠. 물론 장작림 본인도 권총을 소집하고 회의에 참석했는데, 얼굴이 살기등등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회의장은 회의는 커녕 살벌한 모습에 그야말로 일촉즉발, 무슨 일이 터져도 터질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기세 등등한 젊은 혁명당원들은 겁을 먹기는 커녕 자신들의 주장을 폈습니다.


 "청조에서 독립해서, 자치 기구를 세우고 독립합시다!"


 조이손은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하기에 왔는데, 뭐? 자치? 독립?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건가!"


 "독립을 선포하시오!"


 사방에서 혁명당원들이 조이손에게 독립을 요구하던 바로 이때, 조이손을 수행하던 장작림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튀어나왔습니다. 그는 권총을 들고 탁자를 총으로 탕탕 내려치며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습니다.


 "나 장작림은 군인이다! 오로지 총독 각하를 보호할 뿐이다, 이 말이다! 불평을 계속 늘어놓는다면, 비록 어제의 동지라고 해도 이 총으로 처리 할수 밖에 없지!"


 동시에 회의장 주변에 있던 장작림의 부하들이 모두 권총을 빼들었습니다. 이런 마당에 회의가 지속될리가 없었습니다. 혁명당원들은 겁을 내긴 커녕 분기탱천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그들을 지지하는 의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회의장은 보황파 세력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회의 안건도 자연히 조이손의 뜻대로 되어 국민 보안공회가 만들어졌는데, 말이 보안공회지 보황 단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물론 조이손은 실권을 그대로 지켰고 말입니다. 혁명파가 보황파에 제대로 얻어 맞은 사건이었습니다.



다음날, 그러니까 1911년 12월 13일. 조이손은 남천위 협통(協統 : 여단장)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했습니다. 어제의 회의에서 혁명파가 혁명 사상을 가진 ─ 그리고 쑨원의 동맹회 회원이기도 한 ─ 남천위를 관외 도독으로 밀려고 했다가 조이손에게 저지 당했는데, 언제 또 다른 수작을 부릴 지 모름으로 군사 실력을 모두 뻇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물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전보는 북경을 향했고, 대상자는 원세개였습니다. 


 


 "섭여청(攝汝淸)에게 동북 2혼성군의 협통직을 잠시 겸직하게 하여 봉천에 주둔시키고 치안을 담당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전보의 내용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모든 군사적 실권을 섭여청에게 주자는것입니다. 그럼 섭여청은 어떤 사람이고, 하면 전형적인 구식 군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조이손의 충식한 수하였습니다. 원세개가 이를 승낙하면서 조이손은 혁명파 남천위의 권한을 모두 빼았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서 점잖게 말했습니다.


 "남천위 협통이 뜻이 크고 식견이 높은 분이라는것이야 유명하지요. 그래서 이번에 동남의 각 성을 돌아보시도록 하고, 우리의 실정을 널리 알리고 여론을 청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새로 출발하는 봉천 보안공회가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취지도 널리 알렸으면 합니다. 때문에 협통의 자리는 잠시 맡겨 두고 서둘러 출발 하도록 하시고 수시로 보고를 해 주십시오."


 실로 교활한 계략이었습니다. 조이손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천위를 치울 수 있었는데, 정작 외부에서 보면 (산해)관외에 있는 사람을 관내로 보내는 것이니, 남천위는 아주 중요한 일을 맡은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관외, 그러니까 봉천성의 혁명파는들은 자신들의 혁명 지도자를 손도 못쓰고 잃게 되었습니다. 장작림이 모시는 인물은 그만큼이나 교활했습니다. 이렇게 충돌하는 과정에서 장작림은 남천위의 무장을 직접 해제시키려고 하는등 은근히 협박을 가했습니다. 


 
 남천위를 처리했으니, 다음은 장용 차례입니다. 장용은 북경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다 러일 전쟁이 일어난 직후 봉천으로 들어와, 관동 자위 독립군을 조직하고 비밀리 간행물을 발간하여 혁명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도망갔고, 그 유명한 혁명가 황흥(黃興)과 함께 혁명 활동을 했습니다. 1910년에 귀국한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봉천에서도 혁명을 준비하며 조직을 만들고, 군민을 포섭했는데 그 숫자가 1만이 넘어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무장 봉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움직임은 조이손에게 포착되었습니다. 원금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용은 그에게 할말 못할말을 다 했으나 기실 원금개는 조이손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이런 식으로 장용을 감시했던 것입니다. 또한 장작림을 보내 장용과 친구를 먹게 했습니다. 이제 거사 계획을 알았으니 선수를 칠 차례입니다.


 1912년 1월 23일. 원금개는 장작림과 장용을 불러 조촐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서글서글한 장용은 무서운 음모를 깨닫지 못했고, 한참 식사를 하던 중에 원금개는 문득 장작림에게 말했습니다.


 "먼저 일어나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이것이 계획을 실행하자는 신호로, 장은 먼저 일어나 부하들을 불러 준비를 시켰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장용은 괴한들의 총격을 받아 반항도 못해보고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이 혁명가의 당시 나이는 고작 28세 밖에 안되었던 것입니다. 괴한들이 장작림의 부하인건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장용이 죽고 난 후 그 피가 마르기도 전에 장작림은 패거리를 이끌고 장용의 집을 수색하는 한편, 장용의 조수와 혁명당원 등 100여명을 처형했습니다. 성내는 공포에 떨었고, 조이손은 "통령의 직분을 지키고 악질분자를 처단하여 민심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그대의 행위는 표창을 받을 만하다." 하고 회신을 했습니다. 장은 그 대가로 사단장급의 자리에 오르지만, 아직 사단장은 아니었습니다. 




한편, 상황을 본 장작림은 자기가 더 출세를 하려면 원세개에게 붙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보황이니 혁명이니 하는 이념 따위가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원세개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만 연구했습니다. 이를테면, 처음에 원세개가 청조를 지켜려고 생각했을 즈음에 장작림은 33명의 장령들과 의견을 모아 "결사적으로 황실을 지키겠습니다." 라는 연서를 보냈습니다. 진충보국 하겠다 이것 입니다.


 흥미를 느낀 원세개는 장작림과 몇번 사람을 보내 연락을 하면서, 현제의 황제인 선통제가 물러나는것은 역사적 필연이라는 식으로 넌지시 운을 때었습니다. 그리고 선통제가 물러나면 장작림이 동삼성 독판(督辦)이라는 높은 자리에 임명될것이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장은 매우 크게 기뻐하면서 삽시간에 태도를 돌변하여 보황론을 팽개치고 공화제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장작림이라는 사람의 이념입니다.


 장은 다시 두번이나 원세개에게 전보를 보내 공화제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원세개가 임시 대총통이 되자 누구보다 빨리 아부하는 전문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원세개에게 어느정도 인정을 받았으며 떡고물이 보상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마침내 원세개의 "성은"으로 장작림이 맡고 있던 부대가 육군 제27사단이 되었습니다. 장작람이 드디어 사단장이 된것입니다. 그의 나이 38세였고, 포병대, 공병대, 수송 대대 등 뛰어난 장비도 얻어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그 부하들로 장작상, 탕옥린, 장경혜 등이 기용되어 이 27사단은 사실상 장작림의 사병 집단이 되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장작림은 결정적인 눈도장을 찍기 위해 결정합니다. 원세개를 알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번외 : 기묘한 이야기



곽송령(郭松龄)


 곽송령의 자는 무신(茂宸)이며 봉천인입니다. 1883년 생입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 기묘한 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그렇지만 그 역시 어린시절 가난했습니다. 어렸을때 옷을 제대로 입지 못했고 음식도 변변찮게 먹지 못했습니다. 구걸을 하러 다니기도 했고, 이 과정 속에 빈부 차이가 심한 사회에 강한 불만이 생기게 됩니다. 어느정도 글자를 알던 곽송령의 아버지가 사숙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그도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잠시, 청일전쟁이 터져 요동 주민들은 집을 모두 잃었고, 사숙관도 폐쇠되었습니다. 곽송령은 노동을 하며 돈을 벌려고 애를 썻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지주는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울분을 삼키고 아무 말도 못했고, 이러한 형편 속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한편 "삼국지연의" 나 "수호지"를 보며 호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도 했습니다.


 지주는 도둑을 맞는 일이 생겼는데, 억울하게도 곽송령은 도둑으로 몰려 누명을 쓰고 쫒겨났습니다. 이런 형편 속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한 그는 동네에서 다른 사람들의 부동만 매매계약서 등도 써주게 되어, "농민 수재" 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내는동안, 그는 부자들에 대한 증오심과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혁명의 길로 빠진 것입니다.


 곽송령이 19살때 집안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여 그는 제대로 된 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이해와 애국심을 기른 그는 러일 전쟁이 터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은 이에 분개하며 실력을 키워야겠다고 떠들어댔고, 저마다 군인이 되거나 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곽송령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선택한것이 조이손이 세운 봉천 육군 소학당입니다. 1905년에 세워졌고 육군 장교의 기초 소양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든 신식학교였습니다. 교관들은 모두 일본, 독일에서 군사학을 배운 인재들로 채워졌고, 곽송령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마침 그때 곽송령을 가르치던 교관이 동맹회 회원이었고, 애국 사상을 설파했습니다. 곽송령은 혁명 사상에 물들었습니다.



 졸업 후 그는 소대장이 되었는데, 실력이 좋아 오합지졸 부대를 빨리 규합시켜 봉천 육군 통령 주경란의 신임을 받았고, 주경란은 곽송령을 자기 옆에 두고 키웠습니다. 주경란이 성도로 가자 그 역시 성도에서 복무하면서 중대장, 대대장까지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곽송령이 진급할수록 주위에 혁명 적인 기운을 가진 인물들도 늘어났습니다. 결국 그는 사천에서 동맹회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봉천으로 돌아가면 혁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는 봉천에 돌아와서 장용 등과 협력하여 혁명 운동을 했지만, 결과는 앞서 말했다시피 장용은 장작림의 손에 죽었고, 혁명당원들도 많이 죽었습니다. 곽송령 또한 체포되었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한번 실패를 겪은 그는 더욱 교육에 매달리고 북경 육군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고, 서양학자나 중국학자의 강의를 반드시 경청하며 기갈이라도 생긴것처럼 정보를 흡수했습니다. 졸업 후 그는 북경 강무학당의 초빙 교관이 되었는데, 당시 시국이 어수선하자 큰 마음을 먹습니다. 직접 쑨원을 만나보기로 한것입니다.


Sun Yat


 1917년이었습니다. 마침 광동 성장으로 있던 사람이 일전에 곽송령을 신임하던 주경란이어서 그 도움으로 쑨원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쑨원을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공화국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군인부터 혁명을 해야 합니다. 군인들은 매번 군벌을 이용해 특수 세력을 조성하여 실질적으로 공화 정치의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고로 군인 자신부터 혁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지들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삼성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려면 나쁜 군벌들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군벌을 쓰러뜨리려면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봉천으로 들어가 봉천 군벌의 소굴에 일단 들어갔다가 군권을 잡고 세력을 기른 후에 근본적 개조를 도모해야 한다."


 그렇게 말을 하고는 곧바로 짐을 꾸려 봉천으로 돌아왔고, 이때 시기가 1918년입니다. 그는 강무학당의 교관이 되었는데, 어느날 장작림이 그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아니! 자네는 그떄 그 혁명 당원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 어찌하여 이곳에 있나?"


 곽송령은 가만히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작림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더 이상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자기 밑에 왔는데 과거 일은 물어 무엇하냐는 것이어씃ㅂ니다.




 당시 교관은 학생 대장들에게 권한이 없었으나, 곽송령은 엄격하고 호된 교육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단지 엄하기만 할뿐 아니라 실제 전술에 대해서도 조예가 있어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 중에서는 다름아닌 장학량도 있었습니다.




장학량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장작림이니, 교관들은 장학량이 학생임에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곽송령은 달랐습니다. 그는 장학량을 엄격하게 대했고 차별해서 다루지 않았습니다. 장학량이 옹졸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는 곧 곽송령에 대해서 감탄을 했고, 관리가 엄격하고 솔선수범하는 곽에 대해서 존경과 신임을 했습니다. 다음은 곽의 고문(顧問)을 맡았던 이견백 이라는 인물의 글입니다.


 ─ 이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강무당의 학생이었다. 곽송령이 교관이었던 인연으로 이 둘은 서로 친분을 맺었고, 학량에게 군사 지식을 특별히 훈련시켜 후일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도록  하여다. 학량은 편협한 사람이 아니고 또 곽송령의 지식을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드려고 하였다. 장학량은 곽송령을 "존경하는 스승" 혹은 "가까운 친구" 로 여겼다.


 둘은 심지어 의형제도 맺었습니다. "내가 곽송령이고 곽송령이 바로 나다." 장학량의 말입니다.

 
 장학량이 1920년 봉천 육군 강무당을 졸업하자 그는 동삼성 순열사 경호대 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즉시 장작림에게 곽송령을 추천하여 참모장 겸 제2연대 연대장에 임명토록 했습니다. 곽송령의 모든 행동은 장학량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병사를 거느린 곽송령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듯이 활개쳤습니다. 그는 하층 병사부터 군 사관학교 교관까지 해본 풍부한 경험에 깊은 이론 지식, 북과 남을 다녀 얻은 견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군대를 엄히 다스려 군벌들의 나쁜 습관을 없애고, 떄리지 않고, 욕하지 않고, 상관에 아첨하거나 부하를 억누르는 행위를 하지 않았고,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이 잘못하면 사정 봐주지 않고 처벌을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에 대해서도 엄격하여,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술을 하지 않았고, 유흥가 출입이나 도박같은것을 하지 않았습니다(장학량은 정반대입니다.). 선물을 받거나 주지도 않았고, 부대 검열 시 영접하러 오는 것도 거절했습니다. 더구나 신체가 장대한데다 귀밑털이 무성하여 서양인 같이 특이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군사 교육에 전력투구 하였고, 곧 곽송령과 장학량의 3,8 여단은 장작림 휘하 최강의 여단이 되었습니다. 그 최강 여단은 훗날 직봉전쟁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과를 내어주니, 장작림도 곽송령을 신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씨 부자는 곽송령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결국 그는 혁명파입니다. 장작림은 내부에 호랑이를 키웠고, 훗날 몹시 곤란한 상황을 연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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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2.06.13 난세의 슬픔이군요... 이상도 뭣도 없는 자가 물리력을 쥐고 휘둘러대다니.. 뭐, 사실 굳이 난세가 아니라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아무튼 곽송령이 나중에 어떻게 통수를 칠지 기대가 된다는..
    그런데 궁금한것... 당시 원세개는 어떤 위치에 있었나요?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13 1912년의 원세개는 쑨원의 양도로 임시 대총통에 있는 위치였습니다.
  • 작성자Waffen-SS | 작성시간 12.06.13 혹시 욱이님이세요?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13 아닙니다. 그 분 글은 잘 보지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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