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부분이 고려 말 극성을 부렸던 전기 왜구들의 출몰 지역
건국 초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북방에서의 여러 전란과 혼란상을 경험한 고려였지만, 이번엔 남방이 문제였습니다. 악명 높은 왜구(倭寇)가 전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보통 왜구라고 하면, 그저 사소한 해적때 정도로 생각할수 있지만, 이들의 한도를 모르는 약탈과 침략은 고려, 조선이 아닌 명나라에서도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였을 정도였고, 그 과정에서 척계광이라는 전쟁 영웅까지 등장했습니다. 무엇보다 왜구의 실체는 단순하게 열악한 무장을 갖춘 도적집단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쿠슈와 쓰시마, 이키 등의 세력들의 사병이나 사력함대 비스무리한 세력이기도 하다가, 반대로 그쪽 근방을 털어먹어 일본에서도 해적을 잡기도 하고, 구성원도 일본인에서 중국인, 한국인, 동남아인 아무튼 종을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구의 역사는 정말 오래되었습니다. 박혁거세 즉위 8년(BC 50년)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박혁거세의 신령한 덕을 보고 지리며 도망갔다고 하는데(-_-) 일본에서는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고다이고 덴노를 요시노로 내쫓고 고묘 덴노를 세운 1336년부터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몰락한 사무라이들이 재기를 노리며 해적질을 한것이 고려 말 극심하던 왜구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고려 말기의 해적들은 국가적인 차원의 재난 수준이었습니다. 훗날 이성계와 아기바투(兒只拔都)의 일전에서 보듯, 일정 수준 이상의 왜구들은 화살도 잘 들어가질 않을 정도로 무장 상태도 좋았구요. 고려 말 왜구가 얼마나 국가에 심각한 타격을 줄만한지, 공민왕때에만 쳐들어온 왜구들의 사례를 열거해보겠습니다.
1352년
내부소윤(內府少尹) 김휘남(金暉南)에게 명하여 전함 25척을 거느리고 왜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풍도(楓島)에 이르러 왜선 20척을 만나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
왜적이 파음도(巴音島; 경기 江華) 사람들을 도륙하였다.
왜선이 크게 몰려들었다. 김휘남은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어 물러나 서강(西江)에 머물러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왜적이 전라도에 침입하니 지익주사(知益州事) 김휘(金輝)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왜적이 강릉도(江陵道)에 침입하였다.
왜적의 배 50여 척이 합포(合浦)를 침략하였다.
1354년
왜적이 전라도의 조선(漕船) 40여 척을 약탈하였다
1355년
왜적이 전라도의 조선(漕船) 2백여 척을 약탈하였다.
1357년
왜적이 교동(喬桐)에 침노하였다.
왜적이 승천부(昇天府)의 흥천사(興天寺)에 쳐들어와 충선왕(忠宣王)과 한국공주(韓國公主)의 영정을 가지고 갔다.
1358년
왜적이 각산수(角山戍)에 침략하여 배 3백여 척을 불태웠다.
왜적이 면주(沔州; 충남 唐津ㆍ용성(龍城 경기 振威)을 침범하였다.
왜적이 검모포(黔毛浦 전북 부안(扶安))에 침입하여 전라도의 세미 실은 배를 불태웠다.
왜적이 화지량(花之梁; 경기 水原)을 불태우고 인주(仁州; 仁川)를 노략질하였다.
1360년
왜적이 사주 각산(泗州角山)을 침범하였다.
윤달에 왜가 강화를 침범하여 선원(禪源)ㆍ용장(龍藏) 두 절에 들어가서 3백여 명을 죽이고 쌀 4만여 석을 빼앗았다.
왜적이 교동현(喬桐縣)을 불살랐다.
5월에 왜적이 전라도 회미(會尾)ㆍ옥구(沃溝) 등을 침범하고, 양광도 평택(平澤)ㆍ 아주(牙州) ㆍ신평(新平) 등의 고을을 침범하였는데 용성(龍城) 등 10여 고을을 불태우니 경성에 계엄(戒嚴)을 내리고.....
1361년
왜적이 남해현(南海縣)을 불태웠다.(이 바로 뒤에 기근이 들어 사람을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까지 보입니다.)
왜가 동래(東萊)와 울주(蔚州)를 불태우고 약탈하여 세미(稅米) 실은 배를 빼앗아 갔다. 또 양주(梁州)ㆍ김해부(金海府)ㆍ사주(泗州)ㆍ밀성군(密城郡)을 침범했다.
1363년
왜선 2백 13척이 교동(喬桐)에 정박하니 경성을 계엄하고 안우경(安遇慶)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왜가 수안(守安)을 침범했다.
1364년
왜선 2백여 척이 하동(河東)ㆍ고성(固城)ㆍ사주(泗州; 경남 泗川)ㆍ김해(金海)ㆍ밀성(密城; 경남 密陽)ㆍ양주(梁州; 경남 梁山)에 침범하였다.
왜적이 조강(祖江)에 쳐들어와서 관리(關吏)를 죽였다.
1365년
왜적이 교동과 강화에 침범하므로 동서강 도지휘사 최영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동강을 지키게 하였다.
왜적이 창릉(昌陵)에 침입하여 세조(世祖)의 초상을 가지고 돌아갔다.
왜적이 교동ㆍ강화동ㆍ서강에 침범하였다.
1366년
왜적이 심악현(深嶽縣)을 침략하였다.
왜적이 양천현(陽川縣)에 침범하여 조운선을 약탈하였다.
1360년
왜적이 사주 각산(泗州角山)을 침범하였다.
윤달에 왜가 강화를 침범하여 선원(禪源)ㆍ용장(龍藏) 두 절에 들어가서 3백여 명을 죽이고 쌀 4만여 석을 빼앗았다.
왜적이 교동현(喬桐縣)을 불살랐다.
5월에 왜적이 전라도 회미(會尾)ㆍ옥구(沃溝) 등을 침범하고, 양광도 평택(平澤)ㆍ 아주(牙州) ㆍ신평(新平) 등의 고을을 침범하였는데 용성(龍城) 등 10여 고을을 불태우니 경성에 계엄(戒嚴)을 내리고.....
1361년
왜적이 남해현(南海縣)을 불태웠다.(이 바로 뒤에 기근이 들어 사람을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까지 보입니다.)
왜가 동래(東萊)와 울주(蔚州)를 불태우고 약탈하여 세미(稅米) 실은 배를 빼앗아 갔다. 또 양주(梁州)ㆍ김해부(金海府)ㆍ사주(泗州)ㆍ밀성군(密城郡)을 침범했다.
1363년
왜선 2백 13척이 교동(喬桐)에 정박하니 경성을 계엄하고 안우경(安遇慶)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왜가 수안(守安)을 침범했다.
1364년
왜선 2백여 척이 하동(河東)ㆍ고성(固城)ㆍ사주(泗州; 경남 泗川)ㆍ김해(金海)ㆍ밀성(密城; 경남 密陽)ㆍ양주(梁州; 경남 梁山)에 침범하였다.
왜적이 조강(祖江)에 쳐들어와서 관리(關吏)를 죽였다.
1365년
왜적이 교동과 강화에 침범하므로 동서강 도지휘사 최영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동강을 지키게 하였다.
왜적이 창릉(昌陵)에 침입하여 세조(世祖)의 초상을 가지고 돌아갔다.
왜적이 교동ㆍ강화동ㆍ서강에 침범하였다.
1366년
왜적이 심악현(深嶽縣)을 침략하였다.
왜적이 양천현(陽川縣)에 침범하여 조운선을 약탈하였다.
왜적이 조운선 3척을 빼앗았는데 죽고 다친 사람이 매우 많았다.
1367년
왜적이 강화부에서 노략질을 하였다.
1370년
왜적이 내포(內浦)에 침범하여 여러 주의 조세를 약탈하고 선주(宣州; 평북 宣川)에 침범해 오니 양백연(楊伯淵)이 맞아 쳐서 적의 머리 50여 급을 베었다.
1371년
왜적이 해주(海州)에 침범하여 관청을 불사르고 목사의 아내와 딸을 사로잡아 갔다.
왜적이 봉주(鳳州; 황해 봉산鳳山)에 침범하였다.
왜적이 예성강(禮成江)에 침범하여 병선 40여 척을 불태웠으므로 병마사 김입견(金立堅)을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1372년
1372년
왜적이 백주(白州)에 침범하였다.
왜적이 순천(順天)·장흥(長興)·탐진(耽津)·도강(道康) 등의 군에 침범하였다.
왜적이 강릉부(江陵府)와 영덕(盈德)·덕원(德原)의 두 현에 쳐들어왔다. 왜적이 쳐들어오니 우리 군사는 풍문만 듣고 패하여 달아났다.
왜적이 안변(安邊)과 함주(咸州)에 쳐들어왔다.
왜적이 동계의 안변 등에 쳐들어와서 부녀를 사로잡고 쌀 1만여 석을 약탈하였으므로 존무사 이자송(李子松)을 파면시켜 전리로 추방하였다.
왜적이 또 함주(咸州)·북청(北靑)에 쳐들어오니 주의 만호 조인벽(趙仁璧)이 군사를 매복시켜 이를 크게 깨뜨리고 적의 머리 70여 급을 베었다.
왜적이 홍주(洪州)에 쳐들어왔다.
왜선 27척이 양천(陽川)에 들어와서 3일간 머물렀다.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여 크게 패하였다.
1373년
왜적이 하동군(河東郡)에 침범하였다.
왜적의 배가 동·서강(江)에 모여서 양천(陽川)에 침범하여 마침내 한양부(漢陽府)에 이르러 가옥을 불태우고 인민을 죽이며 약탈하니 수백 리의 지방이 소란하고 서울이 크게 진동하였다.
왜적이 교동(喬桐)을 함락하였다.
왜적이 구산현(龜山縣)에 침범하니 경상도 도순문사 홍사우(洪師禹)가 적의 머리 수백 급을 베고 노획한 병기를 바쳤다.
1374년
왜적이 안주(安州)로 쳐들어오니 목사 박수경(朴修敬)이 힘써 싸워 물리쳤다.
왜선 3백 50척이 합포(合浦)에 침범하여 군영과 병선을 불사르니 죽은 사졸이 50여 명이었다.
최사정(崔思正)이 왜적과 목미도(木尾島)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왜적이 자연도(紫燕島)에 침범했다.
왜적이 강릉과 삼척에 침범하고 또 경주와 울주(蔚州) 2주에 침범하였다.
왜적이 안주(安州)에 침범하였다.
제가 본 기록만 53번
다른곳에서 본 기록으로는 115회라고 하고, 우왕 제위시에는 무려 378번이나 침공했다고 합니다.. 다른 왕때 기록까지 덧붙이는 너무 피곤할 정도고 -_-
왜구의 침공 사례도 많지만, 더 큰 문제는 왜구가 쳐들어와도 막지를 못한 것인데, 왜구가 이미 쓸고 빠져서 막을 도리가 없는 경우도 있는 반면,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 고려군이 달아나거나 오히려 관군이 왜구에게 패배해버리는등의 일도 왕왕 있었는데, 격퇴한적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그 사례의 숫자가 많은 편은 못 되었습니다.
왜구의 침입이 단순히 숫자만 많아서 위협적인 것은 아니라는 증거로, 실제로 고려 조정에서도 왜구를 경계하는 발언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역시 공민왕떄 왜구에 관련해서 걱정스러웠던 언급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해구(海寇)가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데 이제 경이 왜적 10여 명을 사로잡았으니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이에 경에게 술과 은 50냥을 하사하노라. 휘하의 군사 가운데 공이 있는 자는 그 명단을 올리라. 내가 장차 채용하겠다." ─ 1355년 10월 경상도 도순문사에게 보낸 어지
정주부사(定州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전라도만호 강중상(姜仲祥)이 제 마음대로 자기 임지를 떠나 왕께 와 뵈니 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 난이 많아 서쪽에는 홍두적(紅頭賊)의 우환이 있고 동쪽에는 왜노(倭奴)의 우환이 있어 바다 연변에 사는 백성들이 평안히 살지 못하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런단 말이냐." 하고 옥에 가두었다. ─ 1358년 3월
도평의사사가 아뢰기를 “요즈음 왜적의 침입으로 세미를 실은 배가 왕래하지 못하여 백관들의 녹봉을 주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제부터는 백(伯)으로 봉한 모든 사람들 중에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 이에게는 재ㆍ추의 녹과(祿科)를 주고 그 나머지 백에게는 이성 제군(異性諸君)의 예로 주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좇았다. ─ 1358년 4월
전라도의 조선이 왜적에게 막히어 운행되지 못하므로 왕이 동북면의 무사와 교동(喬桐)ㆍ강화(江華)ㆍ동강ㆍ서강의 전선 80여 척을 뽑아서 우도병마사(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좌도병마사 이선(李善)에게 명하여 나누어 거느리고 가서 엄호하게 하였다 ─ 1364년 10월
성준득(成准得)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새서(璽書)를 내렸다.
"요사이 사신이 돌아왔기에 국왕의 정사를 물으니 말하기를
'왕이 불도에만 힘쓰고 있으며 바닷가를 지나오는데 백성들이 바다에서 50리혹은 340리 떨어진 데서만 살고 있었습니다.'
하기에 짐이 그 까닭을 물으니 왜놈들이 침범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어
'성곽이 어떠하더냐.'
고 물으니 백성은 있어도 성은 없다고 하며
'갑병이 어떠하더냐.'
고 물으니 엄숙한 기상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며
'왕의 거처가 어떠하더냐.'
고 물으니 거처는 있어도 정사를 청단(聽斷)하는 곳은 없다고 하였다.
짐이 이내 생각해 보니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왕을 위하여 심히 염려된다. 짐이 비록 덕은 부족하지마는 중국의 임금이 되었으며 고려왕이 이미 신이라 일컫고 조공을 바쳤으니 사체가 옛날의 예절과 부합된다. 무릇 제후국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었는데 짐이 위태함을 붙들어 주는 도리로 왕에게 개유하여 이를 알리지 않을 수 없다. 안 될 것이다."
명나라 황제는 다름아닌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입니다. 고려가 왜구로 극심한 수난을 겪고 있는것을 주원장까지 알 정도였죠. 위의 언급에서도 나왔지만, 왜구가 너무나도 극심하여 도저히 백성들은 해안가에서 살 수가 없고, 50여리에서 혹은 300여리도 넘게 내륙으로 들어와서 생활을 하였는데, 그래도 왜구로 인한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그렇지만 왜구로 인한 피해는 도저히 줄어들지를 몰랐습니다. 얼마나 지독한지 지방의 세미를 배를 이용해서 실고 오기가 힘들 지경이었고, 급기야는 나중에는 관리들의 녹봉도 주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왕이 수원에 행차를 하려는데, 신하들이 "왜구가 올것이 두려우니 가지 마시라." 고 말리기까지 합니다. 어디 삼남지방 가려는게 아닙니다. 수원입니다……그럴만도 한것이, 왜구가 강화도까지 털어버렸다는 기록도 두세번을 넘을 정도입니다. 전 국토가 왜구의 놀이터가 되어버렸습니다. 경성이 왜구로 인해서 비상계엄을 실시한것만 봐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물론 고려로서도 이런 저런 조치는 취했습니다. 우선 일본에 계속해서 왜구 근절을 위해 노력해줄것을 요청했습니다.
봄 정월에 일본국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답례하였다.먼저 왕이 왜구가 침범함을 근심하여 김일(金逸)을 보내어 왜구를 금해주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 1368년
안길상(安吉常)을 일본에 보내어 왜구를 금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길상이 일본에 도착하여 병들어 죽었다 ─ 1377년
(일본에서는 그 뒤에 답신을 하는데, 도망한 무리들이라 자신들로서도 어렵겠다는 요지였습니다.)
전 대사성(大司成) 정몽주를 일본에 보내어 답례하고 또 왜구를 금지하기를 청하였다. ─ 1377년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이런 저런 노력을 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해상에서 왜구를 대적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다 위에서 왜구를 잡아내질 못하면 결국 상륙을 허용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과정에서 큰 피해가 올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대적할 수단이 별로 없다는것에 있습니다. 기본 수십 척에서 많으면 수백척의 함선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왜구인데, 이에 대항하려면 강력한 수군이 필요하지만 계속 연해안에 상륙해서 털리는것을 전혀 막지를 못한것을 보면 성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우왕때도 왜구의 침략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대 전기가 일어나게 되는데, 화약무기의 개발입니다.
1300년 중후반쯤 부터 화포 무기가 유럽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고려도 재빠른 시기에 화포 무기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역시 최무선이며, 최무선은 “왜구를 막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고 항상 말하며 그 당시 가장 필요한 대응책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최무선의 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정확했다는것은 뒷날 증명이 되는데, 우선 이성계의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1371년 압록강을 넘어 요성을 점령하고, 1372년 화령부윤이 된 후의 이성계는 그 후 몇년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다가, 1375년쯤에 인천에 있는 덕종도와 자연도(지금 이름은 영종도입니다) 근처로 많은 숫자의 왜구가 몰려들고 있자 우왕은 전국에서 군사를 소집해서 이성계와 최영에게 이를 맡기면서 위세를 보여, 왜구가 들어오질 못하게 했습니다. 최영은 이미 1355년부터 원나라로 가서 승상 탈탈의 밑에서 그 유명한 장사성의 군대와 싸운적이 있는 역전의 명장이었죠.
1377년 3월에는 왜구가 강화도에까지 나타나자, 사방의 민심이 크게 요동쳐 이성계는 의창군(義昌君) 황상(黃裳)을 비롯한 10명의 원수(元帥)와 같이 군대의 위엄을 보이면서 방비를 했습니다.
6년동안 일선 전투에 나서지 못하던 이성계는, 그 해 5월에 다시 지휘관으로 출정하게 됩니다. 3월 경에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보낸 급한 보고 때문이었습니다.
"왜적이 대마도에서부터 온 바다를 뒤덮고 오고 있습니다! 도와서 싸울 원수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고려의 상태가 최악이라는것인데, 지원군을 보내야 하긴 하지만 또다른 왜구의 무리가 바로 코 앞인 강화도를 공격하고 있는것이었습니다. 강화도가 크게 당하면 너무나도 중대한 타격이기에 여기를 방비하는것만도 벅차 고려 조정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금 뒤에 강원도 서강(西江) 쪽으로도 왜구가 몰려오는 극심한 혼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반쯤 손을 놓고 있는 사이, 4월 무렵 상륙을 마친 왜구 무리는 울주와 경주 등지로 침범하게 됩니다. 우인열은 언제 올지 모르는 원군을 기약없이 기다리며, 그 사이에 황산강(낙동강)에서 적군을 한번 물리치기는 하나, 왜구는 대단찮은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왜구는 울주의 언양현(현재 울주 언양면)을 공격하고, 그 주위를 모두 불태우면서 더 내륙으로 들어가 밀성(밀양)을 공격하자 우인열은 패배했는데, 다시 왜구는 창녕군 일대까지 나아갔고 우인열은 부원수인 배극렴과 더불어 율표에서 싸웠지만 또다시 대단찮은 피해를 주지 못하였습니다.
5월이 되어서야 고려군은 삼사우사 김득제(金得齊)와 지밀직 이임, 밀직부사 유만수을 이성계와 함께 경상도로 파견했습니다. 밀성에서는 계속해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우인열은 그 사이에 5백의 정예 기병을 이용해 한번 힘껏 들이쳐 이번에는 꽤 그럴듯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적군이 바다와 섬 사이에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는지라, 제대로 된 규모도 알 수 없는 실정이었고 인심이 불안정하고 공포는 극에 달한 시점이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우인열은 끊임없이 빨리 오라고 재촉을 했고, 이성계는 이틀 길을 단 하루에 주파하며 할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려갔습니다. 지리산 아래까지 도달하였을때, 왜구는 벌써 이쪽에까지 이르러서 곧바로 대치 상대에 들어갔습니다.
적과 대치하고 있자니 그 거리가 이백보가 되는데, 왜구들은 마음놓고 이성계의 군사들을 조롱했습니다. 심지어 왜구 중에 한 명은 엉덩이를 두들기면서 욕설을 퍼붓는 수준이었습니다 -_- 그러자 이성계는 편전을 들더니, 그대로 한방에 그 녀석을 맞추어버립니다. 그러자 왜구의 무리는 혼비백산하여 얼이 빠지버렸습니다.
그 즉시 이성계는 군대를 움직여 적을 공격, 적의 무리를 크게 낭패시킵니다. 왜구는 이렇게 당하고 지리산으로 올라갔고, 깎아지른 낭떠러지를 이용해 진을 치고 창칼을 고슴도치 처럼 내밀고 있으니, 아래에 있는 고려군은 난감한 지경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우선 자신의 비장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치게 했는데, 비장은 싸우지도 않고 돌아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안됩니다. 바위가 높고 가파라서 도무지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성계는 화가 나 비장을 꾸짖고,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인 이방과 ─ 즉 조선 2대 국왕 정종 ─에게 특별히 휘하의 용감한 군대를 주어 공격하게 했는데, 이방과도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비장의 말이 맞습니다. 안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보고 오겠다!"
이성계는 자신이 직접 가서 말을 채찍찔하며 여기저기의 지세를 살펴보더니, 갑자기 칼을 빼들고 그대로 적진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령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병사들고 서로 밀고 부딫히며 뒤를 따랐고, 이성계 휘하 고려군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왜구들은 오히려 낭떠러지로 절반이나 되는 군사들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싸우자 나머지 절반도 무찌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을 힘들게 했던 왜구 무리가 너무나도 간단하게 박살이 나버린 것입니다.
또한 김해 부사 박위(朴葳)는 이 시점에서 황산강(낙동강)의 왜적을 물리쳤습니다. 왜구들은 순풍을 이용해 황산강을 거슬러 올라 밀양을 칠 생각이었는데, 복병을 이용해서 시원하게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배극렵은 적의 괴수 패가대만호(霸家臺萬戶)가 이끄는 왜군을 물리쳐서, 경상도에서 벌어졌던 왜구의 준동은 어느정도 잠재웠습니다.
그러나 한쪽에선 이렇게 승리를 하고 있는 중에서도, 양광도(경기도 남부, 강원도 일부, 충청남북도)는 왜구로 인해 유린당하는게 현실이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 강화도는 정말 수차례 공격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습니다. 일단 적의 준동을 막자, 그로 인한 피로감 때문인지 초전에 적의 진공을 막아냈던 우인열은 병을 이유로 경상도 도순무사 직을 사직하고 배극렴이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왜구의 공격 루트는 사방을 가리는곳이 없었습니다.
우선 정리를 해보면, 경상도 쪽에서 적의 공격은 이성계와 우인열, 박위등이 활약해서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강화도에 대한 공격이 오고, 양광도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규모는 적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전라도에서도 왜적이 순천을 공격해서 정지(훗날 관음포대첩의 주인공입니다)가 적을 물리쳤는데, 그 후에 또 서해도(황해도)에 왜구가 대규모로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전국을 대상으로 공격이 펼쳐진 것이었죠. 심지어 제주도에는 왜선 2백여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중 서해도로 온 적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신주(信州)·문화(文化)·안악(安岳)·봉주(鳳州) 등 여러 곳이 공격을 받았지만, 원수였던 찬성(贊成) 양백익(梁伯益),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나세(羅世),지문하(知門下) 박보로(朴普老)·도순문사(都巡問使) 심덕부(沈德符) 등은 연달아 패배해서 적을 막을 수 없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9월 이성계와 문하 평리(門下評理) 임견미(林堅味), 그리고 지난번에 이성계를 따라갔던 유만수에 박인열을 딸려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황해도 해주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임견미와 박인열은 달아나버립니다. 이런 형편이지만 이성계는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확신이 서질 않아, 투구를 세개 가져와 백보도 넘는 거리에 놔두고는 시험 삼아 화살을 세번 쏘아보았습니다.
물론, 세 발 다 명중이었지요.
"오늘의 승부는 알만하겠군."
그리하여 해주의 동쪽 부근에서 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이성계는 난전중에 대우전(大羽箭)을 이용해서 17번의 화살을 쏴 17명을 죽였습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적을 대파하고 여유가 생기자, 약간 거드름을 피우는 것인지 이성계는 수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인 녀석들을 다 살펴보라고. 모두 왼쪽 눈초리에 맞았을 테니."
그리하여 살펴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전투에서는 대략 승리를 거두었고, 남은 잔당들은 험지에 들어가 나무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버텼습니다. 이성계는 그 앞에서 태연하게 앉아서 잔치상을 펼치면서, 풍악을 올리게 하고는, 고기에 술을 먹으면서 병사들에게 나무에 불을 지르게 했습니다. 타죽게된 왜구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돌진해서 화살을 쏘아 이성계가 앉아있는 자리에 술잔이 깨지기도 하지만, 이성계는 계속 태연하게 술을 마시면서 부하들에게 시켜 이를 일망타진했습니다.
경상도와 황해도, 두 지역에서 펼쳐진 눈부신 전공으로 인해 왜구들의 귀에도 이성계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전까지 왜구들이 이름을 외우고 다니며 피하던 장군은 오직 고려의 최영 뿐이었는데, 이제 고려인 포로를 잡으면 "이성계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고 이성계가 있는곳은 피했다고 합니다.
최영은 1376년 ─ 그러니까 바로 전해에 홍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두며 왜구에게 큰 타격을 준적이있습니다. 이즈음부터 몇년동안은 나라 전체가 왜구와의 총력전 형태로 들어가면서 전투는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 시기를 보면 왜구와의 싸움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그런데 이 해 1377년 10월, 정말 중요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침내 최무선이 원나라 염초공장(焰焇工匠) 이원(李元)의 도움으로 화약 병기 조제 방법을 습득하고 조정에 건의, 화통도감(火㷁都監)이 설치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대반격의 실마리를 찾을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왜구와의 대혈전은 절정으로 접어들어, 마침내 수원 마저 왜구의 손아귀에 짓밞혔고, 승천부(昇天府 : 현재의 경기도 개풍군)에 모여든 왜선들은 개경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수준까지 됩니다. 그 즉시 전국에 비상 계엄이 떨어지고, 병력을 소집하고 궁궐에 호위를 강화하였는데 그때문에 인심이 흉흉해지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최영은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양백연(楊伯淵)등을 부장으로 삼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승천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만약 여기서 최영의 주력군이 무너진다면, 저항할 도리가 없는 고려의 수도 개경은 드디어 해적들의 손에 떨어지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질 것인데, 왜구들도 정탐을 하여 이 상황을 알아내었습니다.
“최영의 군사만 깨뜨리면 경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왜구는 다른 병력이 주둔해 있는곳을 공격하는 대신, 그대로 최영의 군대가 있는곳으로 내달렸습니다. 최영은 비장한 각오로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국가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있다!"
드디어 대전투가 펼쳐졌는데, 왜구의 기세가 매서웠는지 한참 싸우던 최영은 패하여 달아나게 됩니다. 왜구는 그런 최영을 쫒아갔는데, 그때 마침 이성계가 등장,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양백연과 합세하여 왜구의 옆을 쳤습니다. 순식간에 왜구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후퇴하던 최영은 이 상황을 보고 다시 반격을 감행, 왜구는 완전히 괴멸되었고 고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전초전에서 최영의 패배가 과연 최영이 진짜로 패배해서였는지, 아니면 이것이 전부 협의된 계략이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모두 최영이 패배하였거나 후퇴했다고만 나오는데, 만약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성계와 비교해 최영을 낮추고 싶다면 이 경우엔 아주 간단합니다. 특별히 기록을 고칠 필요도 없고, 이것이 다 협외된 내용이었다는 기록만 지우기도 해도 되니까요. 그렇지만 이런것까지 신경쓰기 시작하면 믿을 기록이 아무것도 없고……어찌되었건 최영과 이성계는 이 시점에서 이미 나라를 구했고 최영은 공로가 인정되어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습니다.
이 승천부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마나 급박했느냐 하면, 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을때 조정에서 우왕은 피난할 이미 준비를 마쳤고, 조정의 백관들도 행장을 다 꾸리고는 수학여행 버스가 오는걸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대궐에서 모여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처음에 최영이 패배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어서 분위기는 흉흉해지고 어찌 할 바를 모르던 중, 좀 뒤에서야 승전 소식을 듣고 나라 전체의 계엄령을 풀었습니다.
물론 왜구의 기세 자체야 여전했습니다. 바로 직후에 또 수원이 털리는 불상사가 생겼고, 청주가 공격당할때는 조정의 관병들이 싸울 엄두도 못내고 도망가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한반도 역사상 이렇게 끈질긴 적이 또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고려사절요를 시간이 나시면 한번 보게 되시면, 그전터도 왜구의 침략은 끊임이 없지만 1380년 이전까지 삼, 사년 정도를 보게 되면 거의 전체 기록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이 왜구와의 사투로 가득차 있습니다. 정말 끊임없이 쳐들어오고, 노략질하고, 불태우고, 죽이고 했는데 최영, 이성계, 정지, 우인열, 배극렴, 박수경, 오언등은 거의 눈물겨운 사투를 계속했습니다(승천부 전투에서 나온 양백연도 공을 몇번 세웠으나, 성품이 교만해서 백성들은 차라리 왜적을 만나는것이 낫다고 했다고 합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정지가 홀로 끊임없이 침투하는 왜적과 맞서 싸웠는데, 패배를 하자 최영이 분노해서 재상들을 꾸짖기까지 합니다.
“왜적의 침노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재상들은 어째서 걱정을 하지 않소!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한들 많은 도적을 어찌하겠소!"
물리쳐도 물리쳐도 끝이 안보이는 전투는, 그러나 1380년 8월을 기점으로 대전환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해도 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 최무선(崔茂宣)등은 왜적을 막기 위하여 백여척의 전함을 이끌고 진포, 지금의 군산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이에 맞서는 왜구의 숫자는 무려 전함 오백여척. 진포 어귀에 배를 댄 그들은 마음대로 내륙을 오가며 노략질을 하고 있었는데, 곡식들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죽은 시체들이 사방에 가득찼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드디어 신무기인 화포를 사용했고, 그 연기와 화염은 하늘을 뒤덮을 정도였습니다. 그동안 해전에서 왜구를 상대할 엄두를 못 내던 고려군이, 무려 다섯배나 되는 왜구를 일방적으로 괴멸시킨 것입니다.
왜구들은 경악하여 내륙으로 도망쳐 옥천군에 이르러 그 근방을 약탈했습니다. 전함은 불태웠지만 아직 오백여척이나 되는 배에 타고 있는 주력은 건재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왜구는 지금의 영동군을 약탈하고, 인근 현을 불태우고는 마침내 상주까지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선주(善州 현재의 구미시)로 이동하였고, 다시 성주까지 공격했습니다. 이 왜구의 무리는 숫자도 많았고 배도 전부 불타져서 기세가 흉흉해, 지나는 군현은 모조리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그 때문에 3도 연해의 땅은 전부 비워졌습니다. 기록의 표현으로는 이같이 참혹한 일은 없었다. 고 단언할 정도입니다.
고려군은 배극렴, 정지, 오언, 박수경 등 그동안 왜구 토벌로 이름을 날린 장수들이 출동하여 함양 부근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오히려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박수경과 배언이 죽고 오백여 명이나 되는 관군과 장교가 죽을 정도로 저들의 숫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드디어 함양마저 왜구들의 잔혹한 노략질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왜구는 다시 전라북도 남원까지 이르러 그 현들을 불태웠고, 진을 치면서 소문을 내었습니다.
"이제 광주 금성(전남 담양)에서 말을 먹이고는 북으로 올라가겠다(수도를 공격하겠다는 소리)!"
다시 한번 고려가 발칵 뒤흔들어진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구 무리의 어마어마한 행동 방경
그 당시 왜구 무리의 숫자는?
이렇게 벌어지게 된 황산대첩에서, 양측의 군사 숫자를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숫자에 대한 언급은 최무선이 진포에서 박살냈던 500척의 전함과, "본래 적이 우리의 10배였는데" 라는 짤막한 언급 뿐입니다. 따라서 이 황산대첩에서 왜구의 숫자는 추론으로 짐작할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역개루 토코아 씨가 올리신 글을 참조로 해보면, 배 하나당 대략 30여명에서 35명 정도를 잡을 수 있겠고, 이렇게 되면 선원이나 기타 수용인원을 다 합치면 1만 5천여명에서 1만 7천 5백여명 가량의 숫자가 나올테고, 만약 왜선에 타고 있던 숫자가 평균 25명 정도에 이른다고 해도 1만 2천 500여명이 됩니다. 물론 전문적인 전투병력은 더 적었을테지만, 왜구들이 내륙으로 들어온 계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진포에서 나세와 최무선등에 의하여 전함은 모조리 격침을 당했고, 왜구는 해전을 피해 내륙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당연히 전투병력 뿐만 아니라 기타의 인원들도 몸을 피했을테니, 이들도 고스란히 숫자가 들어갈 개연성이 높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고려군이 전투가 끝나고 1천 6백 필이 넘는 말을 획득했다는 것입니다. 일본 친구들이 말을? 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기바투가 백마를 타고 싸우러 나왔다고도 하고……전투가 끝나고 잡은 말이 이 정도니, 실제 전투가 들어갈 당시에는 이보다 더 많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2000필 정도로 잡고…… 보병과 기병의 비율을 4:1로 잡으면(해적에 관해서도 이런 일반적인 비율이 맞을지는 모르겠찌만) 8000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여기에 기타 선원들을 합친다고 치면 1만 2천명 이상이라는 예상이 얼추 맞아 떨어집니다.
더구나, 2000필 정도의 말을 태우고 왔을 정도라면 500척의 배에 전부 골고루 말이 있다고 해도 한 배에 네척이 타고 있었다는 소리인데, 일반 병사들 타기도 좁은데, 그렇다면 세키부네 삘 나는 배 말고 좀 더 큰 거선들이 500여척에 포함됬을 수도 있습니다. 대략 퉁쳐서 전투병 + 기타 합쳐서 1만 5천이라고 칩시다. 사실 말은 고려군이 캐발리고 도망가니까 고스란히 일본군이 탈취했을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성공을 해적 집단으로 보면 무려 20만의 대병력을 보유했던 사상 최강의 대해적이 되지만-_- 이 시대보다 인구가 비교도 안되게 많던 400년 뒤쯤의 세계 최대 규모의 해적 정일수의 해적 무리가 5만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전투병이 8천정도라고 해도 1만 5천 가량의 해적들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숫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헷갈리는것은 "본래 적이 우리의 10배였는데" 라는 언급입니다. 만명이 넘는 규모의 왜구가 내륙을 초토화시키고 이제 개경까지 노리고 있는데, 고려 조정에서 동원 할 수 있는 병력이 고작 2천여명 이하? 잘못하면 국가 존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일인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4,5천 정도는 동원해야 말이 맞지 않나……싶을 수도 있습니다.
몇가지 가정이 있는데, 그냥 으례 이쪽이 숫자가 적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뜻으로 10배라고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편이 가장 자연스럽죠. 툭하면 황제들이 자기 군대가 백만이니 하고 하는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로 진짜로 그 당시 고려가 안습이라 병력을 동원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멀리도 아니고, 바로 그 해, 4월에 해도 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된 최영은 우왕에게 푸념을 한적이 있는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지금 전함이 백여척 밖에 안되고(진포대첩에 고려의 전 해군력을 쏟아부었다면, 딱 숫자가 백여척으로 맞아떨이집니다) 수군 졸병은 고작 3천여명입니다. 군사를 동원하면 1만명은 써야 할것인데, 창고가 모두 비었으니 어떻게 공급하란 말입니까?"
국가적인 위기가 하도 많았고, 왜구의 침입이 너무 많아 병력의 숫자도, 물자도 모두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최영의 말에 대해서 우왕의 대답은,
"1만명을 먹이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경은 3천명으로 한명이 백을 당하게 하라."
이게 당시 고려의 상황이었습니다. 정말로 상황이 안 좋았죠. 아무리 그래도 3,4천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성계가 사병 ─ 여진족으로 구성된 ─ 을 동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삼선 삼개의 난에서 보여주었듯이 여진족들에게 이성계의 이름은 대단했고, 실제로 친병을 동원했던 기록도 보입니다. 숫자도 천단위가 넘어 보이구요.
아무튼 국가적인 재난의 상황에서 고려는 이성계에서 양광-전라-경상도 삼도의 도순찰사 자리를 맡기고, 이성계와 여러번 호흡을 맞춘 변안열, 그리고 역전의 장수 우인열등 여러 장수를 맡겨 이성계의 지휘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제 남원에 이르자 왜구에 패퇴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배극렴등은 나와서 모두 이성계를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현 상태의 전황을 설명했습니다.
"적이 험한 곳을 점거하고 있지요. 기다려서 그들이 나왔을때 싸우는것이 최선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런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는데, 적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외다. 이제 적을 만났는데도 치지 않는것이 어찌 올겠소이까?"
다음 날 고려군은 승전을 맹세하고 남원의 황산에 올라갔습니다. 높은 정산봉(鼎山峯)에 올라 지리를 살펴보던 이성계는 길 오른편의 험한 지름길을 보고 왜구가 이 길을 이용해 아군의 후미를 칠것이라고 판단, 본인이 좁은 길로 가서 기습을 막기로 하고 다른 장수들은 평탄한 길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적의 기세가 날카롭자 일단 후퇴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날이 저물었는데, 이때 이성계는 좁은 길로 진군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과연 예상대로 왜구는 그 길을 이용해서 기습을 벌였는데, 미리 예상을 하고 있던지라 이성계는 당황하지 않고 세번 싸워 세번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신들린 화살 실력을 보여주었는데, 대우전 20여발을 쏘아 적을 죽이고, 또다시 50여발을 쏘아 적군을 맞춰 거의 백에 가까운 킬수를 찍었습니다. 워낙 전쟁터가 여러 사람이 얽히고 섥혀서 싸우니 화살을 쏘아 맞추어 죽이는것 자체가 그럴수도 있는데, 50여명 모두 얼굴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마침 땅이 진흙탕인지라 어지럽게 양군대가 뒤엉키며 싸웠는데, 진흙탕에서 나와서 보니 당한것은 죄다 왜구고 이성계의 고려군은 단 한명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왜구는 이제 높은곳에 올라가 험지를 발판으로 삼고 고려군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성계는 이대중(李大中)·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 10명을 시켜 싸움을 걸고, 적군을 후려쳤습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도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있는 바, 제아무리 이성계라도 패퇴하고 맙니다. 고려군은 뿔뿔히 흩어지듯 내려왔는데, 이성계는 이 상황을 보더니 나팔을 불고 병사들의 전열을 가다듬은 뒤에,
적진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당연히 그 즉시 왜구들의 공격이 이성계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곧바로 적의 장수 한명이 이성계의 뒤를 잡고 창을 내지르려 했는데, 편장 퉁두란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곧바로 말을 타고 따라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영공,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
하지만 워낙 정신이 없던 이성계는 그 말을 듣지 못했고, 이제 적의 창이 바로 이성계를 꿰뚫을 듯하자 퉁두란은 화살을 쏘아 그 적장을 죽였습니다. 정신이 없을만도 한것이, 몇백이 넘는 왜구들의 공격이 이성계에 집중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이성계는 그 공격을 받아가며 싸웠는데,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말이 화살에 맞으면 다른 말로 바꿔 타고, 다시 또 그 말이 죽자 다른 말로 바꿔탔는데, 기어코 화살이 다리에 맞아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곧바로 이를 뽑아버리고 싸우자 누구도 이성계가 화살을 맞은지를 몰랐습니다.
적군은 이성계를 두어겹으로 포위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마침 주위에 있던 기병 두명과 힘을 합쳐 포위를 뚫어내고는, 바로 선 자리에서 여덞명의 왜구를 죽여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왜구들도 이성계에게 다가오지를 못하였고 바로 그 자리,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이성계는 하늘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해를 가르키며 맹세를 하고, 적군이 바로 앞에 있는 상태에서 좌우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하, 겁나는 사람은 모두 물러가라! 그리하여도 나는 적과 죽을 것이다!"
만약 이게 과장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라면,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려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당연히 모든 병사들은 감동과 경외심에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이 되어 적군을 공격했고, 이성계의 포스를 보고 지려버린 왜구는 꼼짝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왜구 진영에서 한명의 소년 장사가 백마를 타고 나와 고려군의 사이를 헤치고 나가는데,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그 소년 장사를 피했습니다.
"아기바투(阿只拔都)다! 아기바투다!"
이성계는 묘하게도 많은 장수들을 굳이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는데, 원나라 장수 조무가 그랬고 이오르티무르나 처명이 있었습니다. 아기바투를 보고 무인으로서 탐이 난 이성계는 퉁두란에게 생포하라고 명령을 했지만 퉁두란은 자신없어 했습니다.
"저 자를 생포하려면 반드시 사람이 다칠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죽이기로 한 이성계였지만, 화살을 쏘려고 해도 아기바투는 얼굴까지 갑옷을 입고 있어서 쏠 쑤가 없었습니다. 이성계는 퉁두란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투구를 벗길 것이니, 네가 쏘아서 죽여라!"
이성계는 그 즉시 화살을 쏘아 아기바투의 투구꼭지를 맞추었고, 아기바투가 다시 고쳐쓰자 또 한번 화살을 쏘아 투구를 떨어뜨렸습니다. 퉁두란은 곧바로 화살을 아기바투의 머리에 맞춰 그를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아기바투가 죽자 왜구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이성계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적을 총공격, 그야말로 장엄하고도 끔찍한 대살육전이 벌어졌는데, 왜구들이 죽어가면서 우는 소리가 마치 수만마리의 소가 우는 소리 같았고, 하늘을 찌를듯이 사기가 고양된 고려군은 승리의 진군을 하며 북치고 달려가면서 미친듯이 기쁨의 소리를 치면서 왜구를 죽이는데 천지가 진동할 듯 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진동할듯한 무시무시한 기세였는데, 그 과정속에 어찌나 많은 왜구가 죽었는지 강물이 피강물이 되어 일주일이 지나도록 맑아지질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만이명이 넘는 적들은 100명도 남지 않아 지리산으로 도망갔는데, 이성계는 거기까지 추격하는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기적같은 전투가 끝나고, 이성계는 씩 웃으면서 장수들에게 말했습니다.
"적군을 공격한다면야, 진실로 이와 같이 해야 되지 않겠나?"
여러 장수들은 모두 탄복하고 맙니다.
대승을 고려군은 합당하게도 군악을 크게 울리면서 먹고 마시면서 즐겼는데,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고, 싸우지 않은 죄가 두려운 장수들은 벌벌 떨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요성에서 항복을 받아온 처명은 이때 미친듯이 싸워서 모두가 그에게 탄복을 하게 됩니다.
승전군은 위풍당당하게 도성으로 귀환했고, 도성에서는 문무백관이 나와 이성계를 기다렸습니다. 이성계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서 그들에게 절하며 재배를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최영이 앞으로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이성계에게 재배를 하고는, 이성계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공(公)이 아니면, 누가 과연 이 일을 해냈을 것입니까!"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늙은 고려의 충신은 진실로 감동해서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소리쳤습니다.
“공이여! 공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아닙니다. 감당하지를 못하겠습니다."
우왕 또한 상으로 이성계에서 금 50냥을 내려주었지만 이성계는 거절 했습니다.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은 시를 지어 이성계의 공을 칭찬했습니다.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충성은 백일처럼 빛나매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위엄은 청구 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
출목연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
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 신시(新詩)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
충성은 백일처럼 빛나매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위엄은 청구 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
출목연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
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 신시(新詩)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
전 삼사 좌사(三司左使) 김구용(金九容)도 이성계를 칭찬하는 시를 이색에 이어서 지었습니다.
“적의 기세 꺾기를 우레처럼 하니, 군사의 지휘가 모두 공(公)에게서 나왔네.
상서로운 안개 퍼져 나가 독한 안개를 없애고, 서리 바람 매서워서 위엄 바람 도왔도다.
섬 오랑캐 간담이 떨어지매 군용(軍容)이 성대하고, 이웃나라가 마음이 선뜩하매 사기(士氣)가 웅장하네.
온 나라 의관(衣冠)이 다투어 배하(拜賀)하니, 삼한 만세에 태평의 공이네.”
라 하였다. 성균 좨주(成均祭酒) 권근(權近) 역시 뒤질세라 이를 받았습니다.
“3천 신하 마음과 덕이 모두 다 같은데, 군율(軍律)은 지금에 와서 모두 공에게 있도다.
나라 위한 충성은 밝기가 태양과 같고, 적을 꺾은 용맹은 늠름히 바람이 나도다.
동궁(彤弓)은 빛나서 은영(恩榮)이 무겁고, 백우전(白羽箭)은 높다랗게 기세가 웅장하다.
한번 개선(凱旋)하매 종사(宗社)가 안정되니, 마상(馬上)에서 기공(奇功) 있을 것을 이미 알겠네.”
나라 위한 충성은 밝기가 태양과 같고, 적을 꺾은 용맹은 늠름히 바람이 나도다.
동궁(彤弓)은 빛나서 은영(恩榮)이 무겁고, 백우전(白羽箭)은 높다랗게 기세가 웅장하다.
한번 개선(凱旋)하매 종사(宗社)가 안정되니, 마상(馬上)에서 기공(奇功) 있을 것을 이미 알겠네.”
보면 알겠지만 완전히 영웅이 된 분위기입니다. 실제로 이성계는 이 시점에서 고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최영도 이런 후배가 있다는것이 ─ 그리고 그 후배가 고려를 계속 지켜줄것이라고 생각했기에 ─ 감격스러웠던 것이구요. 둘의 사이는 상당히 친밀했는데, 이성계가 모함을 받자 최영이 이성계가 죄가 없음을 왕에게 말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이 공은 온 나라의 주석이오! 그가 아니면 누가 있겠소!"
또한 평상시에도 이성계의 무예가 대단함을 (이성계가 없는 자리에서도) 높이 칭찬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1384년, 이성계는 (고려의 무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적을 물리치게 됩니다. 이번에도 왜구였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고려의 두 명장 최영과 이성계의 위명은 고려를 넘어 왜구의 두려움이 된것은 물론, 그 이름이 명나라에도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왜구는 아직도 골칫거리지만, 이제 파해법이 나왔기에 예전만큼 부담스럽진 않았습니다. 당장 지난해인 1383년에만 해도, 정지가 관음포 해전으로 왜구를 크게 무찔렀던 것입니다. 왜구는 120척이라는 많은 전함을 끌고 왔지만, 이에 맞선 고려는 절반도 못되는 47척의 전함으로 화포의 위력을 이용해 적을 무찔렀습니다. 항상 힘겹게 싸우던 정지는 이렇게 시원하게 이겨버리자 기쁘기도 하고 어이가 없는지 말했습니다.
"내가 왜적은 많이 죽였지만, 오늘처럼 쾌하게 이겨본적은 처음이군!"
그래도 이번에 온 왜구는 150여척이나 되는지라, 숫자가 상당히 많아 관군도 여러차례 패배하였습니다. 왜구는 간만에 세를 과시했는데, 이성계는 이 전투에는 자원해서 출정했습니다. 문제가 된곳은 함주였는데, 함주 관아에 도착한 이성계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70보 거리의 소나무를 가르키면서 말했습니다.
"저 중에서 몇번째 솔방울을 한번 쏘아보지. 봐 보거라!"
그리하여 일곱 발을 쏘아 일곱 발을 다 맞추니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 춤을 추면서 좋아헀다고 합니다. 다음날이 되어서 적군과 교전할 즈음이 되자, 이성계가 왔다는 소식만으로도 왜군들이 지리면서 벌벌 떨었습니다. 이성계는 아예 몇백명 정도를 이끌고 앞으로 느릿느릿 나왔는데, 코 앞에 적의 대장이 있지만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고 두려워서 왜구들은 공격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성계는 너무나 태연하게 그 앞에서 걸상에 앉아 있고, 병사들도 말 안장을 벗기고 쉬게 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이성계는 일어서서 말에 다시 올라타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전에 힐끗 멈추더니 백보 뒤의 나무에 화살을 세발 쏘아 모두 맞추었고, 왜구들은 이를 보면서 감탄하고 더욱 두려워 했습니다. 이성계는 일본말을 할줄 아는 병사에게 소리쳐 말했습니다.
"지금 이분은 이성계 만호시다! 후회하기 싫으면 속히 항복하여라!"
그러자 이성계라는 이름을 들은 왜구의 우두머리는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고는 머리를 맡대면서 고민을 하였는데, 의견이 나질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그런 기회에 적군을 공격하다가, 힘에 부치는 척 해서 돌아갔는데, 왜구 무리는 이를 추격했지만 함정이었습니다. 사방에서 복병이 일어났고, 그 공격에 왜구들은 반항한번 못해보고 죽어갔습니다. 이 싸움에는 이성계의 여진군사들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그들이 왜구를 함부러 죽이자 이성계가 "불쌍하니 생포하거라." 라고 말 할 정도였습니다.
다음검색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Dondegiri 작성시간 12.03.31 신립이 탄금대에서 회전을 결정한건 자포자기가 아닌 철저히 신립의 판단으로 행해졌던 것입니다. 기록에서 분명하게 "신립이 조선군의 주력인 기병을 활용하려고 조령을 포기했다" 고 밝히고 있고, 또 신립이 거느린 조선군의 규모와 편제 또한 FM을 어기고 경군을 편성해 내려보내서 -패배의 상황에서 연거푸 돌격을 시도할 정도로- 조선에서 제일가는 군대의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승방략 체제의 실패로 상주에서 참패를 당한)이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립이 탄금대에서의 회전을 결정한건 다른 이유보다 조선 최고의 장정들을 모은 최고의 군대라는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Dondegiri 작성시간 12.03.31 그리고 흔히 탄금대가 기병 대 조총의 싸움이라 하는데, 탄금대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일본군의 빠른 진격으로 사움터를 선점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두번째는 조선군의 탄금벌에서의 기동실패입니다. 고니시군이 당시 상식을 뒤엎는 기동으로 신립이 도달하기 전에 문경, 조령 등에 척후병을 보내고 있었고, 조령 주변에 여러 일본군 돌파구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이는 조선군이 이로운 싸움터를 쉬이 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보면 조령을 주장한 김여물 등이 오판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당연히, 신립은 그에따라 차선책인 탄금대에서 열악한 상황에서의 기병회전을 선택한 것이졍.
-
답댓글 작성자Dondegiri 작성시간 12.03.31 그리고 회전 직전에 신립의 수차례 실수로 일본군의 움직임을 조기에 포착하지 못했고, 이는 전투 당시에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진격하는 고니시군에 삼면이 포위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등 뒤는 달천강이고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당황한 조선군이 연거푸 돌격하는 장면이 바로 그 유명한 탄금대에서의 돌격이고 말입니다. 조총과 같은 전술적인 무기는 큰 틀에서 보면 그닥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는 없죠. 탄금대에서 고니시가 압승을 거둔것은 조총과 같은 개인무기 차이가 아니라 고니시의 탁월한 전략운영 능력입니다. 신립과 같은 명장을 몰아쳐서 싸우기도 전에 이겨버렸으니 대단한 능력을 가진 양반이죠.
-
작성자백인대장 작성시간 12.04.01 3편 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작성자Highsis 작성시간 12.04.05 이글 보기 전까지는 몰랐었는데 한국사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하나네요. 여태 이순신/을지문덕/연개소문/강감찬/광개토왕 밑으로 생각했던게 부끄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