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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명장 이성계의 활약(3) ─ 왜구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다

작성자신불해| 작성시간12.03.26| 조회수2104| 댓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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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북현무진 작성시간12.03.29 어찌되었든 망국은 원래 끝이 조선이나 고려만큼 안좋은건 당연하죠.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단지 조선이 바로 윗대의 나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비참하게 느껴진거지... 그래서 까이기도 많이 까이고... 근데 님들아. 신립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진짜 신립의 병력 중 제대로 된 기병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탄금대가 기병대 조총이라고 하는데 그 정도까지 얘기가 나올정도로 기병동원력이 당시 조선에 없었을거라고 보는데요. 북방에서도 기병은 커녕 성에 틀어박혀 방어전 펼칠 정도인데...
  • 답댓글 작성자 bookmark 작성시간12.03.29 조선은 평시엔 육군의 절반을 기병으로 운용했습니다만. 평시 함경도에서 주둔하는 기병만 6천 5백여에 달합니다. 전시 동원 들어가면 더 높고.
    국경인이 일본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을때 끌고 나온 병력이 '갑기 5천' 입니다. 그냥 기병도 아니고 '갑기' 요.
    거기다가

    최황(崔滉)은 아뢰기를,
    “병가(兵家)는 제각기 장기(長技)가 있습니다. 왜적은 칼을 잘 쓰고 우리는 활을 잘 쏘는데 장기인 궁마(弓馬)로 하지 않고 지친 군졸만을 먼저 내보냈다가 한번 무너지고 나면 맹장(猛將)마저도 패합니다. 또 우리는 척후(斥候)를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매번 복병(伏兵)에게 패합니다.”
    선조 25년 5월23일

    장기를 '궁마' 라고 하고 있죠.
  • 답댓글 작성자 bookmark 작성시간12.03.29 함경도에서 성에서 방어전을 벌이곤 했던건 기병부족을 이야기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인구가 적어서 함경도군의 규모 자체가 부족했던 데 기인합니다. 성종 24년의 전염병 영향때문인지는 모르나 성종 24년, 함경 북도 전역의 방위병이 6천, 함경 남도가 5천이였습니다. 그 넓은 함경도 전역에 병사가 1만대였던 시절이 있다 이말이지요.

    내륙지대인데다 대부분의 군역이 수군으로 전용되는 경상우도에서 군수 한명(유숭인)이 기병을 1천씩 끌고 다니다가 충무공장계에도 이름이 올라옵니다. 물론 유숭인은 단순한 일개 군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수군쪽으로 비중이 높은 경상우도에서 기병 1천의 집단이 포착되고 있지요.
  • 작성자 북현무진 작성시간12.03.29 북방에서도 대기병전을 펼칠 기병대가 없어서 똥줄 타고 있었는데... 군마 관리도 안된다고 난리나던 시절... 기병은 둘째치고 수도에서 제대로 된 병력도 끌어모으지도 못해서 귀중한 시간 날려먹던 당시 조선에게... 모을 수 있는 기병이 몇이나 될을런지... 이 근거 대는 경우를 본 경우가 없고(근거라고 책에서 떠들어 대는데 전혀 증거라고 보기도 힘듦)... 진짜 내가 신립이었음... 그냥 단기돌격하고싶었을듯... 게임은 그래도 근위대라도 있지. 설마 그냥 승마 가능한 한량들 데리고 나간건가? 니탕개의 1만칠때 신립군은 여기저기 중앙에까지 지원받아서 그 중 기병만 500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 답댓글 작성자 bookmark 작성시간12.03.29 신립이 서울에서 끌고 내려간 병력은 8천~1만이며, 이들을 위해 도성에서 마필을 대규모로 징발해 배분해주기까지 합니다. 근거요? 징비록, 수정실록, 정만록 등입니다. 이런 사료들을 근거라고 보기도 힘들다 말하는 학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거기다 이 중에는 활 잘쏘는 한량도 있었다 하지만 도성의 무사, 즉 왕실을 지키는 친위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충청도군 포함해서 최대 1만 6천 이상이 나옵니다. 절반 이상이 기병으로 추정되는. 충청도+서울에서 다 모으지도 못한 병력이 이정도입니다. 조선군이 훈련도가 부족했다는 평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동원력이 부족했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Dondegiri 작성시간12.03.31 신립이 탄금대에서 회전을 결정한건 자포자기가 아닌 철저히 신립의 판단으로 행해졌던 것입니다. 기록에서 분명하게 "신립이 조선군의 주력인 기병을 활용하려고 조령을 포기했다" 고 밝히고 있고, 또 신립이 거느린 조선군의 규모와 편제 또한 FM을 어기고 경군을 편성해 내려보내서 -패배의 상황에서 연거푸 돌격을 시도할 정도로- 조선에서 제일가는 군대의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승방략 체제의 실패로 상주에서 참패를 당한)이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립이 탄금대에서의 회전을 결정한건 다른 이유보다 조선 최고의 장정들을 모은 최고의 군대라는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Dondegiri 작성시간12.03.31 그리고 흔히 탄금대가 기병 대 조총의 싸움이라 하는데, 탄금대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일본군의 빠른 진격으로 사움터를 선점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두번째는 조선군의 탄금벌에서의 기동실패입니다. 고니시군이 당시 상식을 뒤엎는 기동으로 신립이 도달하기 전에 문경, 조령 등에 척후병을 보내고 있었고, 조령 주변에 여러 일본군 돌파구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이는 조선군이 이로운 싸움터를 쉬이 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보면 조령을 주장한 김여물 등이 오판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당연히, 신립은 그에따라 차선책인 탄금대에서 열악한 상황에서의 기병회전을 선택한 것이졍.
  • 답댓글 작성자 Dondegiri 작성시간12.03.31 그리고 회전 직전에 신립의 수차례 실수로 일본군의 움직임을 조기에 포착하지 못했고, 이는 전투 당시에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진격하는 고니시군에 삼면이 포위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등 뒤는 달천강이고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당황한 조선군이 연거푸 돌격하는 장면이 바로 그 유명한 탄금대에서의 돌격이고 말입니다. 조총과 같은 전술적인 무기는 큰 틀에서 보면 그닥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는 없죠. 탄금대에서 고니시가 압승을 거둔것은 조총과 같은 개인무기 차이가 아니라 고니시의 탁월한 전략운영 능력입니다. 신립과 같은 명장을 몰아쳐서 싸우기도 전에 이겨버렸으니 대단한 능력을 가진 양반이죠.
  • 작성자 백인대장 작성시간12.04.01 3편 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작성자 Highsis 작성시간12.04.05 이글 보기 전까지는 몰랐었는데 한국사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하나네요. 여태 이순신/을지문덕/연개소문/강감찬/광개토왕 밑으로 생각했던게 부끄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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