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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서장) ─ 여진이 1만이 되면, 천하가 이를 감당할 수 없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29|조회수1,361 목록 댓글 11




golmin



 주션 구룬(Jušen Gurun : 여진은 Jušen이며 Gurun은 나라라는 이름과 비슷합니다. 이를테면 대청제국은 만주어로 Daicing Gurun)이라는 나라에는 세 가지의 성씨가 있었다. 이 성씨의 사람들은 어전(Ejen : 군주)이 되기 위하여 서로 치열하게 투쟁하였다. 주션 구룬의 이 혼란을 보다 못한 압카이 한(Abka-i Han : 하늘의 제왕)은, 까치로 변한 신에게 이렇게 혼란을 정리하고 주션 구룬을 다스리라 명하면서,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내 딸 셋이 부쿠리(Bukūri, 布庫哩)산 기슭의 불후리(Bulhūri, 布庫哩, 布爾瑚里) 연못에 목욕을 하러 갈 것이다. 이 붉은 과일을 가지고 가서 막내의 옷 위에 두고 오라."


 그리하여 시간이 자니고, 백두산 동쪽의 부쿠리산 기슭의 불후리 연못에 위대한 압카이 한의 딸이자 선녀인 세 명이 내려와 목욕을 하였는데, 맏이의 이름은 엉굴런(Enggulen, 恩庫倫)이라 하였고 둘째는 전굴런(Jengulen, 正庫倫), 막내는 퍼쿨런(Fekulen, 佛庫倫)이라고 하였다.


abkai ilan sargan jui bulh


 압카이 한의 딸이자 아름다운 선녀들은 목욕을 마치자 옷을 입으려 하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신령스러운 까치는 옷 위에 빨갛고 먹음직스러운 과일을 하나 올려놓았다. 막내 퍼쿨런은 과일의 색이 너무 아름다워 재빨리 입에 넣고 옷을 입으려다, 실수로 과일을 삼키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퍼쿨런의 몸이 무거워져, 이내 하늘로 날아갈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이 이야기를 언니들에게 퍼쿨런이 말하니, 언니들이 대답하길,


 "이건 아마도 하늘의 뜻이다. 우리는 묘약을 먹어서 죽지 않으니 네가 몸이 가벼워지기를 기다려서 하늘에 올라와도 늦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퍼쿨런은 언니들의 말대로 부쿠리산에서 지냈는데, 이내 사내 아이를 하나 낳았다. 그 아이는 몹시 신령스러워 태어나자 마자 곧 말을 했고, 또 금세 몸이 커져갔다. 퍼쿨런은 사내 아이의 이름을 부쿠리용숀(Bukūri Yongšon, 佛庫里雍順)이라 하였다.


fekulen beye de ofi juwe eyun ci tutaha


 부쿠리용숀이 장성해 나가자, 퍼쿨런은 그를 불러 말하였다.


 "너에게 주어진 천명은 어지러운 주션 구룬을 평정하라는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주션 구룬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이 너의 이름과 부모의 이름을 물으면, 이리 대답하거라. 부쿠리산 기슭의 불후리 연못에서 태어난 부쿠리용숀이며, 성은 아이신기오로(Aisin-Gioro, 愛新覺羅), 아버지는 없지만 어머니는 압카이 한의 세 딸 중의 막내인 퍼쿨런이라 말하고, 나는 하늘의 신이고 내 영혼은 압카이 한께서 붉은 과일로 만들어 까치로 변한 신에게 내려보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통나무로 만든 배를 주고 당부하였다.


 "이 배를 타고 가거라! 나라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물을 끌어들이는 나루가 있을 것이다. 나루에서 강가로 올라가면 길이 나온다. 그 끝에 너의 나라가 있다."


 부쿠리용손은 통나무를 타고 떠났다. 아들이 떠나는 모습을 본 퍼쿨런 역시 하늘로 떠나갔다.


 우거진 숲과 협곡을 지나, 부쿠리용숀은 백두산 동쪽의 오모호이(Omohoi, 鄂謨輝) 들판에 있는 오돌리(Odoli, 斡朶里, 吾都里, 鄂多理)성(또는 부락)에 도착했다. 강가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뭍으로 오른 그는 버드나무를 꺾어서 의자를 만들고 그 위를 쑥으로 덮었다. 그때 마침 물을 길러 가던 사람이 그를 보고 기이하다고 생각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가 어전 자리를 놓고 다투던 사람들에게 전했다.


"싸우지 마시오. 우리가 물을 끌어들인 나루에 아름답고 영리한 사내아이가 쑥을 덮은 버드나무 의자에 앉아 있소. 아무래도 주션 구룬의 아이가 아니라 하늘에서 온 것 같소."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다툼을 멈추고 달려와 사내 아이를 구경하였다. 모두들 궁금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누구의 아들이고, 성은 무엇입니까?"


 부쿠리용숀이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대답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감히 걸어가게 해선 안됀다고 생각해서 손을 모아 깍지를 껴 가마를 만들고 그를 태워서 데리고 갔다. 세 성씨의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고 그를 버일러(Beile, 貝勒 : 부족장. 청나라 조정에선 황자)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나트 버리 거거(Nat Beri Gege)라는 여성을 아내로 주었으며, 결혼을 하자 사람들은 그를 어전으로 삼았고, 부쿠리용숀은 나라 이름을 만주(Manju, 滿洲)라 하였다.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은 까치를 자신의 조상이라 하여 죽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부쿠리용숀의 후손들이 주션의 백성들을 괴롭히자 압카이 한은 그들을 책망하였고 백성들까지 등을 돌렸다. 백성들이 부쿠리용숀의 후손들이 살고 있던 성을 포위하자, 압카이 한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도망치게 하였다.


병사들은 그를 추격했고, 압카이 한은 전에 보냈던 신을 까치로 변하게 하여 그의 머리 위에 앉게 했다. 추격하던 병사들은 그것을 보고 철수했다. 도망치던 후손의 이름은 판차(Fanca)이다. 


 그로부터 다시 몇 세대가 지난 후에 두두(Dudu, 都督) 멍터무(Mengtemu)라는 덕을 갖춘 인물이 태어나 오모호이 들판의 오돌리성에서 서쪽으로 15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숙수후(Suksuhu) 강가의 허투알라(Hetuala, 赫圖阿剌)라는 곳에서 살았다. 멍터무는 함부로 날뛰는 40여 명을 오모호이 들판의 오돌리성에서 허투알라로 유인하여 절반은 죽이고 절반은 포로로 삼은 다음 그들의 형제와 가족을 잡아갔다. 그는 이후에도 허투알라에서 살았다.

ilan halai niyalma bukuri yong





 이는 만주족의 시조신화입니다.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이며,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꼭 만주족이 아니더라도 부근에서 종종 보였다고 합니다. 1635년의 기록에 의하면 아무르 강 위쪽의 후르하(Hūrha) 부족에게서도 똑같은 전승이 있었는데, 이런 부족들을 청나라 포용하는 과정에서 시조신화가 합쳐져, 부쿠리산과 불후리 연못은 아무르 강 근처에 있는 걸로 표시있다고 합니다. 


 만주족의 왕조, 청나라는, 그리고 청나라의 건국은 그 전제로서 수많은 부족들을 통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질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읍루(挹婁), 숙신(肅愼), 물길(勿吉), 그리고 말갈(靺鞨)이 여진인들로 이어진다고 하나, 고대 유목민들의 기원이나, 고대사에 대해서 늘 그렇듯 따지고 볼 문제등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인식이 되는 여진인들에 대해서는, 금나라 시절부터 이러한 말이 유명하게 인용이 되고 있습니다.


 "여진이 1만이 되면 천하가 이를 감당할 수 없다(女眞一萬卽天下不堪當)."


 이 말을 의미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여진인들의 강대함을 나타내지만,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면, 본래 여진인들은 사오분열되어있어 힘을 집결시키지 못한다는 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째서 여진인들은 분열되어, 힘을 모으지 못했을까. 힘을 합치면 천하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말입니다. 


 

 수괘(树挂)라고도 하는 길림무송(吉林雾凇). 
 추운날에 안개가 나뭇가지나 전선등에 붙는 현상으로, 송화강 유역에서 아주 가끔 발생한다고 합니다.



 유목민이라고 하지만, 지형적인 면에서 보면 삼림과 산지가 많은 지역에서의 생활은 몽골리아의 초원에서 넘나들며 움직이는 모습과는 많은 차리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산지에서의 사냥, 그리고 인삼 채집 등의 일로는 평원과 목초지에서의 유목민들처럼 많은 군중을 한번에 모으기가 힘이 듭니다. 


 기후적인 면에서 또 보게 되면, 북만주 등의 1월 평균 기온은 -25도를 넘나드는 강추위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런 지역도 강력한 지도자와 영웅이 나타나면 소규모 집단을 한번에 모을 수가 있습니다. 이미 여진은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12세기의 초에 말입니다.




 돌이켜 여겨보면, 그 당시에도 여진은 분할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여진은 생여진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차이를 보면, 속여진은 송화강 서남부에 위치하는데 요나라와 가까운 위치 때문에 거의 직접 지배 수준을 받고 있었습니다. 생여진은 송화광 동부에 있어 상대적으로 먼 거리때문에 요나라에 저항하였고, 드러내놓고 싸우지는 않아도 직접적이지 않은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점 때문에 숙여진을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아예 '만주(滿洲) 남서부(南西部)에 있어 요(遼)나라에 잘 복종(服從)하던 여진족(女眞族)' 라고 나오게 되죠.


 생여진(生女眞)의 부족이었던 완안부(完顔部)는 부족장 우구나이(烏古迺)의 시대부터 힘을 키워, 헤리보의 아들 우아슈(烏雅束)의 시기에 만주 동부의 여진인을 모두 규합했습니다. 그리고, 여진인들의 위대한 군주,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시대에 천조제의 70만 대군을 격파하고 요나라를 멸망시켰으며, 금나라를 건설하여 송나라까지 화북에서 쫒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금나라는 곧 내부적인 모순에 직면했고, 몽골의 대칸 우구데이(Ogedei)가 이끄는 군대로 인해 멸망당했습니다. 몽골 제국은 곧 원 왕조, 소위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 다이온 예케 몽골 울루스(Dai-on Yeke Mongγol Ulus)를 성립했는데, 곧 수많은 악재를 터뜨리며 당태종 시기의 명신 위징(魏徵)이 말한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 는 이야기를 실감하며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몽골을 쫒아내고 어지롭던 중국에 다시 한족의 부흥을 이끌어낸 걸물이 주원장(朱元璋)입니다. 주원장이 세운 명 제국(Ming Dynasty)은 엄청난 인구, 놀랍도록 고도화된 통치 체제, 가공할만한 여러가지 점이 있었는데 영락제(永樂帝) 때 이러한 점을 폭발시키고 나서는 내부적인 문제에 골몰 했습니다. 송대와 비교하여 명을 비판하는 점들 중에 하나가 체제에 쇄국적인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들도 있습니다.


 명나라를 곤란하게 한 문제 가운데 북로남왜(北虜南倭)가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왜적과 북쪽에 있는 오랑캐가 골칫거리라는 소리입니다. 보통 이 이야기가 나오던 시점에 '북로' 란, 타타르의 알탄 칸(Altan Khan)을 주로 일컫는 이야기입니다. 경술의 변(庚戌之變)이라는 사건을 일으켜, 명나라를 떠들석하게 했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나라의 대장군인 구란(仇鸞) 마저 알탄 칸에 매수가 될 정도였으니, 상황이 어찌되었는지를 알 법 합니다.


 '남왜(南倭)' 에 대해서는, 이미 당대부터 10명 중에 7명은 중국인이라고 말하던 기록들이 있고, 구성원 중에 일본인이나 중국인 뿐만 아니라 간혹 조선인이 있었지 않냐는 이야기부터 해서 오락가락하는 집단입니다. 명을 위협하는 북로(北虜) 역시 그 배경은 종종 바뀌었습니다. 북원에서 시작해서, 어느날에는 오이라트였고, 어느날에는 타타르였습니다. 


 하지만 이쪽은 비교적 명쾌해서, 상대가 누구건 딱히 바뀔것은 없었습니다. 토목의 변(土木之變)을 일으킨 에센 타이시(Esen taish)나 경술의 변을 일으킨 알탄 칸이나 결국 서로를 공격해서 자기네들끼리 결론을 내어놓고 달려드는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명나라의 역사에서 최종적인 '북로'가 된 여진인들은 이와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사는 지역부터 시작해서, 상황과 생활 습관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금나라 멸망 이후 완전히 분열되어버린 여진인들이 거대한 명나라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습니다. 그런데 명은 일찍이 이들의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건국 초, 명나라가 가장 껄끄럽게 여기던 최대의 적은 북원(北元)이었고, 홍무제(洪武帝)가 호유용(胡惟庸) 일파에게 죄를 덮어쓰게 해서 죽일때,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북원과 왜를 끌어들이려 했다.' 일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원 외의 '성가신' 적을 더 늘릴 필요도 없고, 또한 일이 잘 되면 북원을 어느정도 견제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것이 여진입니다. 홍무제의 시대부터 이미 여진인들에 대해 포섭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대상은 건주 여진(建洲女眞)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중국의 사가들은 여진인들을 크게 세 가지의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길림성(吉林省)의 건주 여진, 흑룡강성(黑龙江省)에 있는 해서 여진(海西女眞), 그리고 야인여진(野人女眞)입니다. 건주 여진과 해서 여진은 사는곳에 따른 이름이고, 야인여진은 그 생활수준이 미개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에서 지어졌습니다.


 건주여진은 요동의 산지에서 많이 지냈고, 위치가 가까워 명나라가 시행한 포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후라가이(胡里改路)의 부족장 아하추(阿哈出)는 1403년 명나라에게서 건주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자리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수장이 명나라의 영향을 받게 되자 자연히 생활 습관도 중국화가 많이 되었으며, 한족적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미개한 티를 벗은' 문명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역량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락제(永樂帝) 시기에 이르면 요동 지역에서 마(馬) 시장이 열렸고, 부족장들에게 성을 주거나 지위를 하사하면서 조공의 권리들을 내렸습니다. 홍치제(弘治帝) 시기에는 건주여진과의 관계가 많이 개선이 되기도 합니다.


 명 제국이 여진에 대해 펼친 정책이란 미묘했는데, 여진인들이 만일 힘을 합치고 명 자신들에게 달려든다면 이보다 귀찮은 ─ 이미 단계가 그 정도에 이르면 귀찮은 수준을 넘어 위협적인 존재들도 얼마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여진인들이 심각하게 약해진다면 제국은 가장 증오스러운 적, 저 막북(漠北)의 타타르나 오이라트같은 몽골의 망령이 다시 남하하려고 할때, 이를 동쪽에서 견제해줄 최고로 적절한 세력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명나라는 당초 해서와 건주의 여진족 중, 나름대로 위세를 떨친다는 인물을 무려 300명이나 찾아 일일히 관직을 주고, 중국에 조공 할 수 있는 권리 ─ 즉 일종의 무역 허가증을 주었습니다. 여진족에게 있어 명나라와의 교역은 생존에 직격이 되는 문제였고, 이러한 권리를 300명에게 각각 분산화 시킨다면 힘의 집중을 막아 그들의 협력을 저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이렇게 되자 명이 기대하던 방벽으로서의 여진은 전혀 제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의 주력군이 정통제(正統帝)의 50만 대군을 깨부수고 북경 공방전을 벌일때, 따로 오이라트의 동부군은 해서위로 들어가 여진인들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해서 여진은 이 당시 오이라트 군대에게 속절없이 수장 몇 명이 죽었고 격파되어 남쪽으로 도망을 쳤고, 이는 명나라가 자신들의 정책에 있어 어느정도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너무 뭉쳐도 좋지 않다. 그러나, 반면에 너무 잘게 흩어져,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게 되는것도 좋지 않은 일이다. 명나라는 그 양극단의 중간에 서서, 여진이라는 위험한 감자를 잘 굴려 컨트롤을 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진인들의 생활 양식에 대해 말하자면, 몽골등 몽골리아에서 발흥한 유목민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목은 가장 주요한 생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유목민'이라는 호칭도 많이 어색하며, 차이점도 상당합니다. 여진인들은 수렵에 힘을 더 쏟았고, 이로서 여우, 담비, 표범, 호랑이, 바다수달, 강수달을 잡고 그 모피를 팔았으며 인삼과 진주 등이 주요 교역품이었습니다. 오히려 교역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주로 무순(撫順) 등에서 교역을 벌였습니다.


 또한, 이미 이 시기부터 농업에 매우 집중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농업을 했습니다. 다름 아닌 우리 조선의 신충일(申忠一)은 건주 여진의 동태를 살펴 보고는,


 "서(墅) 가운데 일구지 않은 곳이 없고, 산 위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많이 개간했다."


 라고 자신이 본것을 말하였습니다. 역시 조선의 인물인 이민환(李民寏)은 건주견문록(建州見聞錄), 책중일록(柵中日錄)이라고도 불리우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토지는 비요(肥饒)하고, 화곡(禾穀)은 심히 무성하다."


 그러나 유목을 아예 하지 않았던것은 아닙니다. 같은 책에서 언급하기를,


 "육축(六畜)은 오로지 말이 가장 성하다. 장호(將胡 : 상급 여진족)의 집에는 1천 필, 100필의 떼를 이룬다. 졸호(卒胡)의 집도 10여 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렇듯 여러가지 면모가 공존하고 있는데다, 이미 이 시기부터 여러 한족들이 농경민으로서 존재하고 있었고 유목에 종사하는 몽골족들도 있어, 이 지역은 인종적으로도 복잡한 면모가 있었습니다.


 건주여진이 중국과 가까이 지낼때, 해서 여진 역시 힘을 키웠습니다. 그들 자신들은 서로를 '훌라운' 이라고 불렀고, 야인여진은 물론 건주여진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우월감을 가진 부족이었습니다. 다시 해서여진도 우라(烏拉), 후이파(輝發), 예허(葉赫), 하다(哈達)의 네 부족으로 나뉩니다. 이 가운데 본래 강한것은 예허부였고, 하다부의 왕타이(萬汗 : 명나라에서 부르던 이름은 왕대王台)라는 영리한 수장이 있던 당시에는 명과 사이가 좋아 교역에서 우대를 받아 세력을 불렸으나, 왕타이가 죽고 난 뒤 혼란이 벌어져 다시 예허부가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같은 해서여진이라도, 예허부튼 근본이 몽골에서 이주해 온 부족입니다. 그때문인지 친명적인 태도를 취하는 하다부와는 사사건건 대립을 벌였고, 항쟁이 줄곧 일어났습니다. 이 두 부족이 머리를 맞대고 으르렁거릴때, 건주 여진의 한 집안에서, 한명의 사내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천명제(天命帝)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Aisin-gioro Nurhaci)


  하나의 구전에 따르면(Crossley, The Manchus), 16세기 후반 길게 뻗어 있는 요동 지역의 한족 총병 이성량(李成梁)은 조선을 중화제국에 병탄할 속셈이었고,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이성량은 요동 총병으로 임명되면서 만주족의 마지막 부족장을 살해하라는 비밀 임무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누르하치라는 이름의 현지 고아를 아들로 입양해서 키웠습니다. 아마도 그가 소년과 함께 목욕을 하던 중에, 소년은 이성량의 발등에 난 2개의 모반(母斑)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이것들은 장차 통치자가 될 인물들에게나 생기는 것이다."


 이에 소년은 제 발을 들어 의붓아버지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습니다. 소년에게 있는 반점의 숫자는, 7개였습니다.


 이성량은 훗날 만주족의 지도자가 될 아이와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소년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지만 누르하치는 의붓어머니로부터 밀고를 받고 개 한 마리와 흑마 한 필을 데리고 이성량의 집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성난 이성량은 제 뜻을 거역한 아내를 살해한 뒤, 누르하치가 도망갔을 것으로 생각되는 숲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개는 불에 타 죽어지만, 누르하치는 흑마를 타고 달아났는데, 수많은 까치들이 떼를 지어 몰려든 덕분에 수색에 나선 병사들의 눈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흑마는 소년을 태우고 안전한 곳까지 간 후에 탈진해서 죽으니, 소년은 복수를 맹세하며 죽은 의붓어머니를 기리고 도와준 동물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는 까치를 자신의 수호 영물로 정했으며, 개를 만주족의 희생 제물에서 제외시켜습니다. 그리고 만주족이 중원을 정복하고 나면, 말의 검고 깨끗한 가죽을 뜻하는 중국어를 택해 국호를 정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고, 특별히 긴 반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청이라는 국호는 누르하치 생전에 쓰여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말입니다.



 완연한 근세와 근대에 해당하는 16세기를 관통하는 인물, 20세기까지 잔존한 거대한 청 제국의 시조. 하지만 누르하치의 기원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누르하치의 아버지는 탁시(塔失)라는 사람이었고, 그 성은 아이신기오로 였습니다. 아이신은 곧 금(金)을 의미하며, 기오로는 족(族)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이신기오로 성을 쓴 것은 누르하치의 다음 시대였으며, 당시에는 동 씨를 썻으며, 누르하치가 동 씨의 양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한 그 어머니는 아고 도독이라는 사람의 딸이었다는 소리도 있고, 생모가 일찍 죽고 계모에게 미움을 받아 열 아홉살에 가출을 했다고도 하며, 양자설도 있어 여진족 상인의 사위가 되었다고도 하고, 또는 명나라 장군 이성량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가신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또한 어머니의 뱃속에 13개월동안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으니, 누르하치의 전반부는 분명히 후대에 뿌옇게 칠해준 부분들이 역력합니다. 이렇게 명확한것이 없으니, 전기를 쓰기엔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것은, 누르하치의 대두에는 이성량의 막대한 힘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성량, 누르하치. 이성량이 누르하치의 장래를 걸고, 누르하치는 이 장군을 이용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 빈틈만을 보던 요동의 제왕과 여진족 애송이의 이 만남이, 장래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떠한 대 파란으로 끝나게 될지, 


 그 시점에서는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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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카이사르씨 | 작성시간 12.07.30 서양오랑캐들과 맞서 싸운 도광제까지 이꾸우~!!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gksmf | 작성시간 12.07.30 오호~~~ 이번엔 청나라 이야기인가보군요.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7.30 오오오 청나라 ! 감사합ㄴ디ㅏ~
  • 작성자고기 | 작성시간 12.07.31 새 새리즈 +_+
  • 작성자자우림 | 작성시간 12.08.0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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