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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7) ─ 영웅 원숭환의 비참한 죽음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05|조회수1,223 목록 댓글 12






 천총제는 제 1차 조선출병, 즉 정묘호란을 통해 조선의 굴복을 얻어냄으로서, 후방의 안전과 더불어 더 중요한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일단 한숨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막대한 재물로 어지로운 내부 사정을 정비하고, 상황을 살피다가 원숭환이 지키는 영원성으로 재차 출병을 감행합니다. 일단 나중에 명과 협상을 벌인다 쳐도, 영원성을 함락시키고 하는 협상과 그렇지 않는 상황에서의 논의는 대단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원숭환이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는겁니다. 1627년 1월에 후금은 조선으로 출병했는데, 같은 해 5월 11일 급하게 요서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금주(錦州)를 둘러싼 전투에서 천총제는 명나라 조솔교(赵率教)를 상대로 우위를 보였지만, 그렇다고 금주를 함락시켰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원숭환은 이미 천총제의 속내를 다 뚫어보고, 자신의 주특기대로 미리미리 준비를 해 놓은 뒤였습니다.


 이를테면 천명제 누르하치의 사망 이후 천총제 홍타이지가 즉위할때, 양국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원숭환은 사신을 34명 심양에 파견하여 축하하는 뜻을 보였는데, 기실은 정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금주성을 보수하고 성벽을 쌓아 올려 방어력을 튼튼하게 갖추었고, 천총제의 공격이 현실화되자 편지를 보내 조솔교 등을 안심시켰습니다.


 "금주성의 병기와 병마로 얼마든지 금주성을 지킬 수가 있다. 적은 무더운 더위를 무릎쓰고 들어왔으므로 절대 오래 지탱해 내지는 못할 것인즉, 금주는 충분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수하 조대수에게 기병 400명을 파견하여 구원토록 했습니다. 천총제는 금주 공략이 여의치 않자 아예 원숭환이 있는 영원성으로 와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원숭환이 이미 튼튼히 방어력을 갖추게 한 데다 직접 성 위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이틀만에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천총제는 또다시 금주로 돌아가 금주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전선으로 병사들은 무더위에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병사들의 사기가 엉망이 되는것을 본 천총제는 당황하여 군대를 뒤로 물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1626년에는 16만 군대를 이끈 누르하치를 막아내었고, 1627년에는 조선출병으로 기세가 등등한 홍타이지까지 격파한 원숭환. 하지만 이러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조정에서는 한 단계 승관만을 시켜주었을뿐, 상급이 내려지진 않았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물론 원숭환이 위충현의 파당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사악한 환관 위충현



 위충현과 엄당(閹黨) 패거리들은 과연 무뢰배다운 본성을 발휘해 그 공로를 자신의 공로부에 기록했으며, 원숭환이 어째서 금주를 직접 구원하러 가지 않았나 하고 말같지도 않은 트집을 잡았습니다. 피곤함과 위험을 느낀 원숭환은 아예 사직을 해 버리고 일단 고향인 광동으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세도 오래가진 못했는데, 몇달 지나지도 않은 바로 그해 8월, 위충현의 뒷배경이었던 천계제가 사망하고, 주유검(朱由檢)이 새로운 황제, 즉 숭정제(崇禎帝)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위충현은 그 사이에 자신의 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더욱 사악하고 사특한 수단들을 사용하지만 결국 숭정제에게 당해버려 봉양(鳳陽)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귀양 도중에 도망을 치려다 일이 여의치 않자 자살하고 맙니다. 


 1628년, 원숭환은 숭정제의 부름을 받고 고향에서 북경으로 이동했고, 숭정제를 만나 한 차례의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원숭환은 요동 방위에 관한 책략을 제시하면서 양초의 보급과 간섭 자제를 부탁했고, 요동의 후금 말고도 여러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던 숭정제는 원숭환에게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숭정제는 보검을 하사하면서 요동을 잘 지켜줄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원숭환이 요동에 다시 부임하기 전에 병란이 있었는데, 군대에 군량이 부족했던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중앙에서 황제가 교체되며 혼란이 있었던 시기에 중간에서 다른 사람들이 전부 꿀꺽해버린 일이었고, 원숭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탕금으로 군량을 지급할 것을 부탁했지만 숭정제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고 둘의 사이는 이때부터 문제가 조금 생기게 됩니다.


 마침 이러한때 후금의 천총제가 움직임을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1629년 10월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공격과는 뭔가 달랐습니다.


 원숭환 등의 활약으로 산해관 방면의 방어선에 대해 매우 거북감을 느끼고 있던 천총제는 아예 군대의 진로를 바꾸어버린것입니다. 수십만 대군을 동원한 그는 종래처럼 영원 ─ 산해관 방면으로 진격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몽골 지역 쪽으로 빙 돌아가는 기상천외한 진군로를 사용했습니다. 


 이 방법은 명군을 놀래키는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만주 군대는 준화를 공격했고 이곳을 지키던 순무 왕원옹(王元雍)은 싸움이 어려워 보이자 자살했으며, 일전에 금주를 지켰던 조솔교도 전사했습니다. 다음 목표는 곧바로 북경, 대명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당연히 명나라 조정은 엄청난 경악에 빠졌습니다. 일전까지 후금 군대와 격전을 자주 벌이고 패전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요동의 일입니다. 북경에서 만주 군대의 모습이 보인다는것은 압박감이 차원이 다른 일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원숭환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 그는 300여리를 이틀만에 돌파하였는데, 워낙 빠르게 달려왔던지라 도착하고보니 군사는 9천여명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원숭환은 일단 북경 광거문(廣渠門) 앞에 진을 치고는, 병사들이 너무 지쳐있으니 북경에 들어와 잠시동안 쉬게 해달라, 고 숭정제에게 요청했지만 갑자기 의심병이 도진 숭정제는 서둘러 적을 물리칠것을 요구했습니다. 원숭환은 10여리를 오락가락하며 10여 차례나 적과 교전을 벌여, 주특기인 미리 판을 짜놓은 싸움도 아닌 야전을 벌여 승리를 하고 적을 몰아내며 성과를 내었습니다. 양군이 쏘아대는 대포 소리가 북경에까지 들려왔지만, 숭정제는 여전히 군대를 들여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금 군대를 추격해 완전히 격멸할 것을 요구헀습니다.


 파일:Ming Chongzhen.jpg

 의심이 많았던 숭정제



 북경 밖에서 만주 군대와 야전을 벌이던 원숭환의 형편과는 달리, 정작 북경 내부에서는 이상한 소문들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원숭환이 사실 만주와 내통하여 적군을 끌어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후금군은 여러곳에서 명나라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머물고 있던 형편이었고, 이에 대한 불안감에 자신의 재산을 잃을지도 모르게 된 태감들은 화풀이를 원숭환에게 하며 그가 후금 군을 끌어들였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숭정제는 본래 의심이 많았는데, 원숭환이 일전에 5년이면 요동을 안정화 시킬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어 지금의 사태를 더욱 의심했습니다. 사실 이 5년 계획은 당시 정세를 살펴볼때 어느정도 원숭환의 호언장담이 섞인 발언이었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가 북경성 대문에 올라가 원숭환을 욕하면서 돌을 던져 원숭환의 부하들을 다치게 했습니다. 이런 일까지 생기자 숭정제는 더욱 깊고 깊은 의심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는데, 바로 이때 천총제 홍타이지의, 소설 같은 반간계(反間計)가 시행되었습니다.


 천총제는 수하인 포승선(鮑承先), 고홍중(高鴻中)을 불러 무엇인가를 지시했고, 후금 군은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그 사이에 포승선과 고홍중은 자기들이 일하는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사로잡은 태감을 감시하는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일부러 여봐란듯이 대화를 나누는것이었습니다.


 "오늘 싸움에서 물러난것이야 주상의 계략일 뿐이지. 나중에 주상이 단기필마로 적에게 갈 터이니 잘 살펴보라고. 적 진영에서 사람이 나와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질 것인데, 원 경략(원숭환)과 밀약이 다 되었으니 일은 성공할 것이 틀림 없다고."


 태감은 자는척하면서 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천총제는 다음날 그 태감을 풀어주었고 태감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숭정 황제에게 전했습니다. 매우 격분한 숭정제는 원숭환을 불러 이 이야기를 따져 물었고, 영문을 모르던 원숭환은 당황해다가 황제의 금의위이 달려들어 원숭환의 의관을 벗겨 버리고는 그를 감옥에 쳐넣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 성지가 내려왔습니다. 원숭환이 적과 내통했기에 그에게 죄를 묻고, 다른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것입니다. 이에 원숭환의 부대에서는 매우 비통해 했고 심지어 숭정제를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해도 소용이 없을 상황. 원숭환의 부하인 조대수는 매우 화가나 군사를 이끌고 금주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조대수가 그렇게 가버리자 이번엔 숭정제가 놀랐습니다. 천총제가 다시 올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숭환을 재촉해 편지를 쓰게 했는데, 원숭환은 옥중에서 편지를 써 군대를 돌려보낸다는것이 사사로운 일이라 생각해서 마땅찮아 했으나 거절할 수도 없어 편지를 썼습니다. 조대수는 숭정제가 보낸 사람을 보자 죽이려고 했지만, 원숭환의 친필 서한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조대수의 모친이 지금 귀환해 보아야 원숭환의 죄명만 더해질 뿐이며, 차라리 공을 세워 원숭환의 무죄를 증명함이 좋겠다고 하자 곧바로 천총제와 만주 군대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천총제는 일이 계획대로 되자 매우 좋아했고 전투를 벌여 승리도 했지만, 적진 한가운데에서 퇴로가 차단당하는것은 아무래도 너무 위험한 일이라 화친을 요청하며 서서히 군대를 퇴각시켰고, 반년 후에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그 사이에 조정 내에서 원숭환의 무죄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과거 원숭환을 기용한 손승종도 원숭환 구명을 위한 시문을 바쳤습니다. 


 “적이 성 아래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장성(長城)을 허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대신 벌을 받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원숭환은 편지를 써서 부하들이 적을 물리치는데 힘을 내도록 독려했지만 숭정제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결국 원숭환은 1630년 9월 22일, 베이징의 서시(西市) 거리에서 온몸을 잘라내어 죽이는 가장 처참한 능지형(凌遅刑)을 당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광거문(廣渠門)의 광동의원(廣東義園)에 묻혔습니다. 한떄를 빛낸 인물치고는 너무나도 처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숭환을 죽이게 된것이 온전히 청태종 천총제의 반간계 때문이라고 하면 억지스러울 것입니다. 실제로 홍타이지가 반간계를 시도했다고 해도, 일단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먹혀든것은 숭정제 본인이 원숭환을 죽일 마음이 있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원숭환이 투옥된 상태에서 그를 구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죽을 수 밖에 없었던것도 그런 연유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숭정제는 원숭환을 죽일 마음을 품었나?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들과 가설들이 있습니다.


 1. 원숭환의 5년 평정설의 실현 가능성

 본래 원숭환은 5년이면 요동을 평정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숭정제는 그 말을 믿었고, 따라서 원숭환이 다소 무례한 행동 ─ 이를테면 아래서 언급하게 될 모문룡 사건 ─ 들이 있다쳐도 그를 믿었지만, 후금 군대가 베이징 앞에 나타나는 지경에 이르자 원숭환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가 요동을 수복하는게 가망 없는 일이라는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원숭환이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는 가능성

 이미 원숭환이 투옥당하거나, 죽게 되었을때의 주위의 반응을 보면 이미 단순한 대신의 영역을 떠난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숭정제는 물론이고 엄당의 잔존세력에게도 위협적인 일입니다. 숭정제에게 계속해서 원숭환의 안 좋은 소리를 이야기 한것은 태감이나 엄당의 잔여 세력이었습니다.

 3. 모문룡 살해라는 월권 행위로 인한 가능성

 모문룡의 게릴라 활동은 당초에는 명나라 조정에 열광을 가져왔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고 사태를 냉정하게 보자 모문룡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습니다. 모문룡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거나, 후금에 투항할 것이라는 소문들이 나돌기도 했는데, 특히 정묘호란 이후에 극심해집니다. 이때 모문룡은 터무니 없는 말로 전황을 완전히 날조하여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후금을 격퇴하여 조선의 수도는 완전히 보존되었고, 마침내 후금군이 심양으로 회군했습니다."


 모문룡이 피도에서 조선과 명의 외교 경로를 중개, 장악하고 있었으나 모문룡의 기만적 행태와 조선 영내에서의 횡포 등에 대한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있었습니다. 조선은 조선대로 모문룡을 밀어내야 한다,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 등의 이야기가 나왔고 심지어 모문룡이 조선이 후금의 첩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무고까지 하는데다 쌀 운반선을 습격하는등 해적 행위까지 벌이자 반감이 극에 달했습니다.


 명 조정에서도 모문룡에 대한 비난은 들끓고, 그 역할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었습니다. 모문룡은 조선에서 명으로 파견하는 사신을 저지하기까지 했는데, 후금 측에서도 모문룡에게 실제로 공작을 할 정도였습니다. 피도의 시장에 후금인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관찰되기도 했습니다.


 원숭환은 이렇게 도무지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조차 없는 집단에 도저히 신뢰를 보일 수가 없었고, 피도에 중국 상인들이 드나드는것을 저지해 모문룡이 말라죽게 해버렸습니다. 모문룡은 이에 대해 40여척의 선단으로 무력 시위까지 해보였으나, 그의 기만적 행태와 발호를 혐오하고 두려워한 원숭환은 모문룡을 갑작스럽게 제거했습니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제거한 과정은 이렇습니다. 우선 1628년, 원숭환은 군사 검열을 한다면서 쌍도라는 섬으로 왔고, 모문룡도 그를 만났습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환대했고, 며칠동안 주연을 서로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원숭환이 모문룡에게 병사들이 활 쏘는것을 구경하자고 했고, 활 쏘는 데 이르자 갑자기 모문룡을 포박하고 수하들을 무력화 시킨뒤, 그의 죄상을 열거하고는 "수하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 고 하여 그를 죽였던 것입니다.


 모문룡의 수하들은 겁에 질림과 동시에 시체를 부둥켜 안고 울었는데, 원숭환의 기세가 하도 당당하여 그를 공격하진 못했습니다. 원숭환은 모문룡의 제사를 치뤄주었습니다.  


 모문룡의 행태가 이상야릇하고 위험해 보였던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는 별개의 일이고, 그게 원숭환이 독단적으로 모문룡을 처단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모문룡이 분명히 기만적 행위를 벌이고 있는건 분명하나, 완벽한 반역 의사를 표명한 적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숭환이 모문룡을 월권으로 처리하는것은, 어떤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순신이 원균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선조에게 알리지도 않고 원균을 참수했다, 같은 상황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사실 원숭환 본인 조차도,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다는것은 알고는 있었습니다. 숭정제에게 사건을 보고하며, 석고대죄한다는 표현을 썻는데 잘못이 있을 수 있기에 자신도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숭정제는 모문룡의 처형 사실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야 원숭환을 처리하기도 그렇고 약속한것도 있으니 넘겼는데, 이후 북경 앞까지 후금 군이 나타나는데 상황이 이르자 여기에 대해 놀라며 원숭환의 능력에 의구심도 생기고, 또한 원숭환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까지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문룡이 북경에 뇌물을 꽤 뿌렸을텐데, 모문룡의 죽음으로 이것이 끊기게 되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원숭환에 대한 안좋은 소리를 더 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원숭환은 죽었습니다. 그것도 능지처참이라는, 너무나도 끔찍한 형태로 이루어졌기에 원숭환의 심복이었던 사람들로서는 너무나 억울했을 것입니다. 원숭환의 사망 소식을 들은 조대수는 곧바로 무려 1만 5천기나 되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해버렸습니다. 


 또한 모문룡의 사망 이후,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등의 모문룡 휘하 인물들은 명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실패하자 수군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합니다. 후금은 이로 인해 수군전력이 생겼는데, 더 중요한것은 바로 홍이포 제작 기술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었다는 것입니다.


 원숭환 후임의 산해관 방면 총사령관은 손승종이 임명되었고, 준화와 난주 등 천총제에게 빼았겼던 네개의 성을 수복하는 성과를 내었습니다. 하지만 후금에게 있어 이는 일시적인 휴식기간에 불과했고, 그 기간 동안 천총제는 홍이포 생산에 몰두했습니다. 만주에서 처음으로 대포가 주조되는것은, 천총 5년. 즉 1631년 6월입니다. 원숭환이 처형된 이듬해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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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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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게오르기우스 | 작성시간 12.08.05 숭정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려고했지만 이미 나라가 썩을대로 썩어서 답이 없는건줄 알았는데 그냥..선조같은 놈이였네요.
  • 답댓글 작성자카이사르씨 | 작성시간 12.08.05 사실.. 강산풍우정의 그대로입죠. 그러고보면 강산풍우정이 나름 잘만든 사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신만 봐도 대개 항국 사극에선 주인공을 미화시키는 것이 보통인데 , 강산풍우정의 숭정제는 황제로서의 책무에 대한 의욕이 충만함과 동시에 의심많고 은근히 무능하고 찌질한 모습을 보이니.. 한국에서 만들었으면 엄친아에 졸라 차칸데, 불운하게도 때를 질못
    만나 비극적이고 간지나는 죽음을 맞이한 위인으로 그려질 겁니다.
  • 답댓글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8.07 선조같은 놈.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2.08.06 숭정제하고 고종하고 많이 오버랩되는듯.
  • 작성자콤네누스황제 | 작성시간 12.08.11 아 진짜 명나라가 내부에서 곪아 썩어가지만 않았더라도 청조에게 멸망당하는 일은 없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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