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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 ─ Unleashed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08|조회수956 목록 댓글 5




 

오삼계는 자는 월소(月所), 장백(長白)이며, 원래 집안은 강소성 고우(高郵)에 적을 두고 있었고, 아버지 오양 역시 장군이었습니다. 오삼계는 29살의 나이에 제독이 되었고, 명군 주력이 완전 소멸한 후에도 버티고 있었습니다. 오삼계는 스스로는 50만의 병력이 있다고 했지만 이는 병사와 민간인을 합한 숫자로 실제로는 5만 밖에 되진 않았으나, 그 정도 병력만으로도 청나라는 산해관을 돌파할수 없었습니다.

 

 

산해관을 수비하던 오삼계 휘하 장병은 명나라 최후의 희망이자 명 제국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최강의 정예군이었습니다. 당초에 계요 총독 왕영길(王永吉)은 관외의 성을 버리고 오삼계에게 북경을 지키게 하자고 건의했고, 오삼계는 자신의 군주 숭정제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와 백성 50여만을 데리고 북경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정했습니다. 그러나 난주 부근에서 숭정제의 자살 소식을 듣자 일단 그 자리에 머물면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자성이 북경을 령했고, 오삼계가 고민을 하고 있으며, 그 너머 만주족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가 어찌 전개될지는 오삼계의 선택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는 오삼계. 이자성이든, 청나라든, 모두에게 있어 오삼계는 즉시 도움이 될법한 인물입니다. 이자성의 대순(大順) 왕조가 북경을 점령 한 후 각지에서 항복을 청하는 문서들이 도착했지만 오삼계의 항복 문서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삼계는 명나라 최후의 정예군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모든 지역에서 항복이 늦더라도 오삼계의 항복은 빠른 시기 내에 이루어져야 이자성에게는 유리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명나라를 넘어 만주족이라는 적을 상대하는데도  오삼계만한 명장이 없었습니다.

 

 

 

청의 입장에서도 오삼계는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무엇보다 무적의 요새 산해관을 열어줄 수 있는 인물이 오삼계입니다. 그렇지만 오삼계는 명 왕조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지, 청나라 쪽이 잇다른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전까진 산해관은 단단히 지키며 벼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을 돌려보면, 1641년 청은 명에 대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산해관 밖에 있는 모든 성이 청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계요 총독 홍승주 등이 사로잡혀 항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는 29살의 청년 오삼계도 참가했었는데, 간신히 사로잡힘을 피해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오삼계가 어떻게 행동을 했건간에, 숭정제가 사망한 33살까지 오삼계는 자신의 평생을 북방에서 만주족과 싸우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삼계의 형 오삼봉, 외삼촌 조대수 등 여러 인물들이 오삼계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했으나 이 젊은 시절의 오삼계는 고작 5만 남짓한 병력으로 기개를 잃지 않은채 청에 전력으로 맞서고 있었습니다. 훗날 50세의 늙고 노회한 오삼계는 남명의 마지막 황제를 버마까지 추격하여 살해했지만 말입니다.

 

 

 오삼계에게 이자성의 접근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은 오삼계의 아버지를 이용한 공작이었습니다.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吳襄)은 권고장을 보냈는데, 천하의 형세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대세를 따르자는 식의 이야기 였습니다.

 

 

 젊은 무장 오삼계는 이 요청을 일축합니다.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숭정제에 대한 충절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인지, 실제 젊은 날의 포부인지, 오삼계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음덕을 입어 출정했습니다. 적 이자성도 곧 박멸될 것이라 여겼습니다……그러나 나라에 사람이 없어 바람을 맞아 쓰러지고, 소문을 듣자하니 주군도 돌아가셨다 합니다."

 


 "눈가가 찢어지는듯 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여겼던 것은, 아버님께서 망치를 휘둘러 일격을 가하셔서 맹세코 적과 생을 하지 않으시고, 그렇지 않으면 곧 목을 쳐서 국나에 순사하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 목숨을 훔치시고 가르치시기를 의가 아닌 것으로 하십니까!"

 


 "아버님은 이미 충신인 아니십니다. 그러한데 어찌 소자가 효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소자는 아버님과 갈라서겠습니다. 어서 적을 도모하지 않으신다면, 적이 아버님을 가마솥과 도마 곁에 놓고 소자에게 회유를 한다 할지라도 돌아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애첩입니다. 오삼계의 애첩 진원(陳沅)을, 이자성의 부하 중에서도 무례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는 유종민이 차지해버렸습니다. 청나라 초기의 시인 오위업(吳偉業)은 원원곡(圓圓曲)에서, 이때 오삼계의 모습을 묘사하며

 

 

머리털이 관(冠)을 찔러 격노한 것은 홍안(紅顔 : 미녀)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후일담으로 오삼계가 나중에 오위업에게 돈을 보내주면서 그 구절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오삼계의 뜻이 어떤것인지 명확해지자, 이자성은 오양을 비롯한 오삼계의 일족을 모조리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10여만이 넘는 대병력을 이끌고 오삼계를 공격하러 떠났습니다. 오삼계는 무엇이든 대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오삼계는 우선 산해관 쪽으로 군사를 옮기고 대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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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르곤(Aisin-gioro Dorgon)



 한참을 명나라 내부의 사정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 연재글에서 주가 되는것은 청나라의 사정입니다. 청나라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청태종 홍타이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예친왕 다이샨은 황족, 제왕, 패륵을 모두 모아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습니다. 다이샨은 태종 홍타이지의 친형이자, 천명제 누르하치의 장남입니다.



 천명제 누르하치 시대와 태종 홍타이지 시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부족 연합의 맹주격이던 후금의 모습이 정차 중앙집권적인 청나라로 바뀌어가는 광경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일단 누르하치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부족 연합의 대표자격인 성향이 농후했기에, 사망할 당시 누르하치가 꽤 고령임에도 불구, 후계자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35살 나이의 홍타이지는 여러 후보중에 하나였지만 다이샨이 후원을 해줘 그럭저럭 무리 없이 군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도 앞서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때 말하길, 팔기 중에 소위 사천왕이라고 불리우는 사패륵이 5기를 가지고,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는 삼형제 도르곤, 도도, 아지게가 다른 3기의 수장이 되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 당시 도르곤의 나이는 고작 15세였고, 도도의 경우에는 13세에 불과했으니 실질적인 힘은 사천왕의 상대조차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설로는 본래 누르하치는 도르곤이 영리하다고 여겨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는데, 도르곤이 너무 어려 반발이 있을까 두려워 후계자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죽었다고도 합니다. 그저 하나의 가설일뿐이니 크게 의미가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찌되었건, 홍타이지가 사망할 당시 도르곤은 32세. 홍타이지가 35세의 나이로 군주가 되었다는것을 생각하면, 이제 도르곤이 군주가 되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의장인 다이샨이 "태종의 장남을 후계자로 세우는것이 좋지 않은가." 라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병 없이 죽은 태종도 정황상 급사에 가까웠던지라, 후계자에 대한 유언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와 같은 다이샨의 의견에 홍타이지의 장남, 하오게(豪格)는 의외로 빼는 모양새를 취합니다.



 "복이 없고, 덕이 없다. 감히 천위를 이을 수 없다."



 하며 물러났습니다. 실제로 제위에 뜻이 없었던, 상황을 살펴 돌아가려던 의도였던, 하오게의 이런 결정에는 꽤 목소리를 내고 있는 도르곤에 대한 인식이 엿보이는듯 하기도 합니다. 하오게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오면 도르곤의 천하가 이어질듯 싶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각 장군들이 모두 칼을 차고 앞으로 나서서, 우리는 선제의 은원을 입었으니 만약 선제의 아들이 위에 오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지하의 선제를 섬기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지하의 선제를 섬기겠다. 그 선제는 죽었습니다. 즉 집단 자살을 하겠다는 소리입니다. 어쩌면 하오게가 순순히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한것은 이런 일을 예상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은 원로 다이샨은 입장이 난처해지자 쓸데없는 일에 말려들지 않기 위하여 의장직을 내던져버렸고, 결국 의장직은 도르곤이 억지로 대신 수행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도르곤도 지금 자신이 황제 노릇을 하기에는, 상황이 적절치 않다는것을 인정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와서 하오게가 황제가 되게 할 수도 없으니, 다른 방안을 내놓게 됩니다. 그리하여 도르곤이 선택한 인물이 바로 후린(福臨), 홍타이지의 6살 짜리 아들이었습니다. 대신 본인은 섭정 노릇을 하여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려는 요량으로, 본인만 섭정을 하면 너무 속이 보이는 처사니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두 명의 섭정을 두기로 결정합니다. 본래는 자신과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 도도가 공동섭정을 하기로 했으나, 이건 너무 문제가 있는 인사조치라 황제의 사촌형인 지르하란(濟爾哈朗)이 공동섭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민감한 후계자 문제의 갈등은 이런식으로 적당히 미봉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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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우여곡절끝에 황제가 된 사람이 순치제(順治帝) 입니다. 그리고 실권은 아무래도 도르곤쪽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즈음에 도르곤에게 숭정제의 사망 소식, 즉 명제국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오게 됩니다. 5월 20일이었고, 거의 동시에 그토록 도도하게 버티면서 까탈스럽게 굴던 오삼계의 서한도 도착했습니다. 글은 제법 중후했지만 내용인즉 군대를 보내주라는 소리였습니다.


 

 ─ 뜻밖에도 도적의 무리가 하늘을 거스르고 궁궐을 범했다. 그 좀도둑, 오합지졸들이 어찌 능히 일을 이루겠는가. 그러나 어찌하랴, 북경의 인심이 굳지 않고 간사한 자들이 문을 열어 적을 들여서, 선제는 불행(죽음) 했고, 구묘(九廟)는 재가 되었다. 지금 적은 존호를 참칭(僭稱)하고 부녀자와 재물을 노략하며, 죄악이 이미 극에 달했다. 참으로 적미(赤眉), 녹림(綠林), 황소(黃巢), 녹산(祿山)과 같은 무리다. 천인공노, 민심은 이미 떠나갔다. 그 패망을 서서 기다리면 될 것이다.

 

삼계는 명의 후은(厚恩)을 받았기에, 그 백성이 난에 화를 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변방의 문을 막아 지키고, 군대를 일으켜 민심을 위로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경동(京東)의 땅은 작아 병력이 아직 모이지 않았다. 특히 피눈물로 도움을 청한다. 우리나라와 귀조(歸朝)는 좋은 관계에 있기를 200여년, 지금 까닭없이 난을 만났다. 귀조는 이를 측은히 여기라! 또한 난신적자(亂臣賊子) 는 귀조 역시 마땅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힘을 합쳐 도성의 문에 도달하여 도적을 궁궐에서 멸하고, 대의를 중국에 보이면, 곧 우리나라가 귀조에게 보답하는것이 어찌 제물에만 그치겠는가. 무릇 열토로 보답하겠다. 이는 결코 허언이 아니다.

 

 

 

 도르곤의 입장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싶을 만했지만, 그는 차분하게 범문정, 홍승주등과 논의 한뒤 오삼계의 충의를 칭찬하는 답신을 보내는 동시에,

 


 ─ 지금, 그대가 만약 무리를 이끌고 귀순하면, 반드시 고향 땅에 봉하고 번왕으로 삼을  것이다. 하나는 곧 나라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는 곧 몸과 집안을 보존하여 세세 자손 오래도록 부귀를 누리기가 산하처럼 오래일 것이다.

 

 

 라고 하여 늬앙스를 고쳐 명을 구원하는게 아니라 오삼계에게 직접적인 투항을 권하는 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오삼계로서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쓰고 있을 만한 상황이 못 되었습니다. 서한이 도착하기 15일인 5월 5일, 오삼계는 이자성의 군대를 상대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5일이 지난 10일 날에 또다른 공격을 저지해내었습니다. 명나라 최강의 정예군은 분투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 사이, 도르곤은 청의 운명을 가를 이 전투에 직접 주력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고, 양익 사령관으로 영친왕 아지게(阿濟格), 예친왕 도도(多鐸)를 사령관으로 삼았는데, 모두 어머니가 같은 형제이니 도르곤의 의도를 가히 짐작 해 볼 수 있습니다. 23일 청나라군은 열려진 산해관을 통해 마침내 그곳을 넘을 수 있었고, 오삼계를 만나 그의 군대가 모두 변발을 할 것을 명했습니다. 오삼계는 이 마당에 거부할수도 없어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날부터 전투가 벌어졌지만 청군은 상황을 지켜보며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오삼계나 이자성이 양패구상하여 힘이 떨어졌을때 나가는 편이 좋았던 것입니다. 도르곤은 아지게, 도도, 홍승주, 조대수, 공유덕, 상가희 등과 함께 말 위에서 오삼계군과 이자성군의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자성의 군대는 이미 엄청난 대규모가 되어 오삼계의 군대를 급습했고, 그 숫자는 20여만에 달했으며 산에서 해안에 이르기까지 늘어설 수준이었습니다. 오삼계의 5만 정예 부대는 4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이틀이 다 되도록 놀라운 분투를 보여주며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이대로 가다간 전력의 열세로 패배는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놀라운 격전을 벌이던 산해관 방어 부대도 결국 한계를 들어내며 물러서기 시작할때, 갑자기 어마어마한 모랫 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바람 소리가 천둥과도 같았다고 하는데, 바람이 거치는 순간 이자성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정체불명의 기마군단이 노도와 같이 진격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마(萬馬)가 튀어올랐다.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입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기마대는 격전으로 지친 이자성의 군대를 눈깜짝할 사이에 도륙하고, 그들의 머리는 모두 변발이었습니다. 이자성은 사태를 깨달았습니다. 이 당시 상황을 기록할수 있는 주체는 결국 만주족 뿐인데, 만주족의 기록에서는 이자성이 만주족이 나타났다며 고함을 지르며 가장 먼저 도망쳤다고 합니다.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한번 기세를 잃은 도적군단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했으며, 반대로 만주족 부대는 기세를 타고 배 이상의 힘을 내고 있었습니다. 오삼계 역시 보병과 기병 2만명으로 이자성을 추격하고, 달려갔습니다. 선제의 복수를 하고, 연인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자성은 산해관에서 북경까지 내달리듯 도망쳤습니다. 최후의 발작인듯, 4월 29일 그는 즉위식을 치루고 스스로 황제를 일컫었습니다. 그 즉위식는 조악하기가 이를데 없었으며, 주무 대신들도 도망치거나 죽었습니다. 이자성은 황제가 되어 하룻밤을 보내고 즉시 도망쳤습니다. 자금성이 수많은, 가치를 감히 매기기조차 힘든 보물들은 '가져가기 힘들다' 는 이유로 모두 녹여져서 금괴 등으로 변해 실려갔습니다.



 북경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방에서 약탈하는 자들이 넘쳐났고, 이자성의 뒤를 따르는것이 늦었던 추종자들은 군중들에게 사로잡혀 죽었습니다. 반란군에 부역했던 자들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부는 오삼계가 이자성을 물리치고 황제의 아들을 앞세워 귀환하고 있다고 떠들어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이자성이 떠난 바로 다음날, 일단의 군대가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도르곤이었습니다.  

 

 

 도르곤은 조양문으로 입성했으며, 살아남은 명나라 관리들은 성밖 2킬로미터 까지 나가 그를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도르곤을 맞았습니다. 도르곤은 약탈을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이제 청 제국의 수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나라 관리들은 옛 직에 복귀할 것을 명 받았지만, 관청의 인자에는 만주문자가 새겨졌고 사방에 삭발을 강요하는 사자들이 움직였습니다.

 


 또한 청나라에 투항하여 순종하는 자는 용서를 받지만, 거부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호히 조치를 취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만일 항거하여 따르지 않는 이 있다면, 대병이 단번에 가서 옥석(玉石 : 선인과 악인)을 함께 태우고, 모두 도륙해 버릴 것이다.



 라고 하여 참으로 끔찍한 협박을 내뱉었습니다. 오삼계는 평서왕으로 임명되었는데, 백작에서 왕이 되었으니 엄청나게 지위가 높아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오삼계는 평생동안 배신자의 소리를 듣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자성 일파의 몰락을 보게 되면, 그는 섬서로 일단 몸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청군과 오삼계의 추격은 매우 집요했으며, 특히나 홍이포의 위력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도도, 공유덕, 아지게, 상가희 등도 모두 나서 이자성 군을 협공했습니다. 한번 기세를 잃은 이자성은 계속해서 도망치고, 또 도망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지게는 이자성과 13번을 싸워 13번을 이겼고, 결국 버티지 못한 이자성은 혼자 목을 매고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성무기'에 따르면 이자성의 시신이라는것은, 얼굴이 가래에 맞아 죽었다고 했기에, 얼굴이 뭉개져 이자성인지, 혹은 체격이 닮은 사람인지 확증할 수 없어, 사실 이자성은 민간에서 숨어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부대를 이끌었던 이자성이 죽었으니, 수하들도 무너지는 일만 남았습니다. 유종민등은 청에 사로잡혀 죽었으며, 이자성의 아들들이나 부하 대부분도 투항했습니다. 우금성도 그의 아들과 함께 투항했는데, 능력을 인정받아 꽤 중용 되었습니다.



 이자성이 박살이 났으니 다음은 장헌충의 차례입니다. 하오게와 오삼계가 사천으로 출정했고, 장헌충이 믿고 보낸 부하는 오히려 청에 항복을 해버렸습니다. 본래부터 장헌충의 세력은 이자성보다 약하다고 평가를 받았으니, 버텨낼 재간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장헌충은 순치 3년에 죽었지만 그 세력이 여러곳으로 흩어져 유적으로 남아,청군을 괴롭혔습니다.



 청군이 이에 대항하는 방법은, 거의 철저한 학살이었습니다.



 민-적이 서로 섞여 옥석을 가리기 어렵다. 또는 성 전체를 모두 죽이고, 또는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살려 두었다.



 청군의 학살은 무지막지했습니다. 오히려 살인귀로 알려진 장헌충 보다 청군의 학살이 더 극심할지도 모릅니다. 청나라 정부는 순치 3년경에 사천을 모두 평정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13년은 지나서야 모든 반란을 전부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장헌충의 포악함을 과장하면 과장할수록, 청나라가 정당화되는 효과가 나옵니다. 그리고 장헌충이 꽤 사람을 죽이기도 했으니, 모든 책임을 덮어 쓰게 하기엔 아주 적절합니다. 장헌충에 대해 유명한것은 칠살비(七殺碑)라는 것인데, 장헌충이 학살을 자행한 곳에 세웠다는 비석입니다.



 하늘은 만물을 낳아 사람을 기르는데

 사람은 하나의 덕으로도 하늘에 보답하지 않는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殺殺殺殺殺殺殺



 하늘의 은혜를 잊은 인간 따위는 죽여 없애자는, 그야말로 살인귀와 같은 글입니다. 그런데 훗날 다른 공동묘지에 장헌충의 '성유비' 가 출토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은 만물을 낳아 사람에게 주었고,

 사람은 일물도 하늘에 주지 않았다.

 귀신이 분명하니,

 스스로 생각하라, 스스로 헤아려라.



 하늘의 자비에 대한, 인간의 왜소함을 반성하는 글입니다. 같은 도입부로 시작하는 글이 후반부만 완전히 달라져서 퍼졌다는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Nanjing is located in China

 

 남경은 본래 명나라의 수도였고 주원장이 그 지역을 장악하여 거점을 불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영락제 시절에 북경으로 수도가 바뀌었고, 홍희제 시절에 남경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홍희제가 일찍 사망하여 그리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남경은 제법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고 토목보의 변때는 남경으로 천도하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남경에는 형식적이나마 작은 정부가 있었고, 이제 북경이 떨어진 이상 남경이 명나라의 남은 세력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명나라의 멸망과 숭정제의 자살, 이자성의 패망과 오삼계와 청의 연합 등 너무나 급박하게 상황이 바뀌는 순간이라 남경에 도착하는 장계들은 제때 도착하지도 않았고, 순서가 뒤바뀌어지는 일도 흔해서 이로 인한 혼란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자성이 수도를 장악하고, 명 황제가 죽고 새 황제가 즉위했다고 하는데, 새로 즉위한 황제가 이자성인가? 명 황실의 계승자인가? 그도 아니면 오삼계인가? 오삼계는 누구 편인가? 오삼계와 새로 동맹을 맺었다는 '낮선'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어린 만주족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섭정왕 도르곤, 그자는 또 대체 어떤 인물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렷품이 이 사실의 조각을 맞추어 현실을 바라볼수 있게 되자, 남경은 곧바로 전시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전겸익(錢謙益) 등의 인물들이 남경 조정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새 황제를 즉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황족을 찾는 일은 대수로울게 아닙니다. 명 제국 전체에 황족은 8만명이 넘게 흩어져있었는데, 남경 지역만 해도 존경받을만한 황족들이 여러명 있었지만 이 시점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숭정제와 가까운 혈족의 황족을 즉위시켜야만 했던 것입니다. 곧 두명의 후보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복왕(福王) 주유승(朱由崧)은 이자성에게 살해당한 만력제의 아들의 아들이었고, 아버지가 살해당했을때 알몸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습니다. 노왕(潞王) 주상방(朱常淓)은 융경제의 손자였습니다.

 

 

 

 황통으로 따지자면 복왕이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복왕은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고, 전겸익등은 복왕에게 "일곱 가지의 옳지 않음(七不可)"가 있다고 하여 반대했습니다.

 

 

"복왕은 탐욕, 음란, 주란(酒亂 : 술주정),불효, 학하(虐下 : 아랫사람을 학대), 부독서(不讀書), 관리에 간섭하는 악덕이 있소이다. 이는 옳지 않은 일이오."

 

 

 반면에 노왕은 말끔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두사람을 두고 다시 한번 당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갈라진 당파가 동림당과 환관당이었습니다. 환관당은 환관은 아니었지만, 위충현등의 환관에게 빌붙어 승진하려 하다가 숭정제의 즉위로 일이 실패하여 남경으로 쫒겨난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고, 처음에 복왕의 즉위를 반대하던 남경의 병부상서 사가법(史可法)은 결국 위급시에 국론이 분열되는것을 막기 위해 복왕의 즉위에 찬성했습니다. 사가법은 남경의 병부상서로 숭정제를 도우러 갔다가 일이 이미 늦어버리자 돌아왔던 인물입니다. 환관당의 마사영(馬士英)이 봉양 총독을 겸해 군대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던것도 원인이었습니다.

 

 

 

사가법. 

 

 

 

이리하여 복왕이 남명 정권의 황제가 되고 홍광제(弘光帝)가 되었습니다. 강남의 경제력이 중국의 중심인건 불변의 사실이었기에 청군의 공세만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과거 남송과 금나라같은 상황을 기대해볼수도 있었으나, 홍광제는 기대 이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직계 황족으로서 일체의 근로가 금지된 그는 거처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오로지 주지육림에만 빠져 지내왔던 것입니다.

 

 

 

 청군이 언제 남쪽으로 말을 향할지 모를 그 위급한 시기에 홍광제가 처음으로 행한 조치는 놀랍게도 '숙녀 고르기' 였습니다. 홍광제는 항주 출신의 여자가 좋다고 고집하여 그 위급한 시기에 남명 조정에서는 결혼 적령기 여성을 찾아 민간의 혼인을 금지하여 여자를 뽑아갔습니다. 강남의 민심이 진동한건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이 채홍사(採紅使)들은 여러 도성들은 물론 먼 지방의 유곽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녔고, 홍광제가 처녀들과 과연 무엇을 하고 노는지 알 도리야 없지만 홍광제의 침소에서 하룻밤에 2명의 꽃따운 소녀가 죽어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남명 정부는 어찌되었건 많은 귀족과 장수들을 새로 임명했습니다. 재정 조달이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남명 조정은 관직을 마구 팔았고, 60여개가 넘는 작위를 지방의 유력한 재력가에게 내리고는 충성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인물 중에 남중국해의 해적이자 희대의 풍운아 정지룡도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그에게 남안백(南安伯)의 작위를 내리고 남경 방어를 지원할것을 부탁했습니다.

 

 

 

 해적 정지룡의 입장에서 이것은 자신의 위상을 높일 기회였습니다. 정지룡은 곧바로 동생 정지봉이 이끄는 병력을 파견하였고 정지룡의 형제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그는 장강 유역의 한 거점을 막게 됩니다. 정지봉 외에 다른 남명의 부대 중 한쪽은 사가법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남명 정부의 무능한 모습에 진저리가 나서 적과 대치하는 변경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 외에는 고걸(高杰)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본래 이자성 반란군의 일파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자성의 부인인 형(刑) 씨를 건드려 명나라 조정에 투항해 온 것입니다.

 

 

 본래 조정의 군대였던 자들과 반란군이었던 자들,해적이었던 자들이 엉키게 되니 서로간의 융합이 잘 될리가 없었습니다. 남명의 장수들은 서로 으르렁거렸고, 홍광제가 한심한 행보를 계속하는동안, 청나라가 움직이게 됩니다.




 

 도르곤

 

 

 

 천하의 도르곤 조차도 당초에는 과연 강남 지방 원정이 가능할까 의심스러웠던 모양으로, 당초에 북경의 도르곤과 남경의 남명 정권사이에서는 몇가지 문서가 오갔습니다. 그러나 남명 정권은 상상 이상으로 부패와 무능을 가지고 있었고, 도르곤은 움직이기로 결심합니다. 도르곤은 남명 정권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청은 명나라를 위해 숭정제의 원수를 잡고 간적 이자성의 뒤를 쫒고 있는데, 과연 남명의 정부라는것은 병사를 한명도 내지 않다니 이는 어찌된 일인가. 복왕 주유숭이라는 자가 즉위했다고 들었는데 그와 같은 유조가 과연 있었는가, 하고 따진 것입니다. 자살한 숭정제는 자신과 무능한 대신들에 대한 책망, 백성들의 원망에 관한 이야기만 적었지 후계자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만일 기록이 남아있었다손 쳐도 청나라에서 조작질을 해서 지워버렸을 것입니다. 여하간에 유조가 없으니 '명을 공식적으로 이어 받은 청'은 남명 정부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리하여 청나라 남벌군이 조직되었습니다. 정국대장군(定國大將軍) 도도의 군대가 남하를 시작했고, 남경은 강북에 4개의 진을 치고 회북(淮北)에 유택청, 사수(泗水)에 고걸, 임회(臨淮)에 유랑좌, 여주(廬州)에 황득공(黃得功) 등 네 총병을 주둔시켰는데 이 총병들은 엄청나게 분쟁을 일으키고 맙니다. 사가법은 황득공을 의진(儀眞)으로 옮기려도 시도했지만 고걸이 복병을 배치하여 300명의 병사를 죽이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황득공은 대노하여 고걸과 사투를 벌이겠다고 하는것을 사가법이 간신히 무마시켰지만 이게 당시 남명 군대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남 총병인 허정국(許定國)은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 청나라 쪽에 투항한 상황이었습니다. 허정국은 고걸을 연회에 초청하여 간단하게 대취하게 만들고는 그를 제거해버리고 맙니다.

 

 

 

 남명 군대의 상황이 이런 모습이니, 청나라 남정군의 상대가 될리가 만무했습니다. 청사고 순치 2년 3월 항의 기록에서는

 

 

 ─ 지나는 곳마다 나와서 항복하여, 하남 땅 모두를 평정했다.

 

 

 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남명 조정에는 이변이 일어나게 되는데, 자신이 진정한 황위 계승자라고 하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숭정제의 아들을 자처하며, 북경이 함락될 때 탈출하였다는 것입니다.

 

 

 

 

 헌민태자(獻愍太子) 주자랑(朱慈烺)은 논란의 인물이었습니다.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남명 조정에 올라오는 보고는 모두 내용이 제각각이라, 어떤 장계에서는 주자랑이 이자성의 편에 들어갔다고 하면, 살해당했다고 했고, 오삼계의 보호 아래에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1644년 겨울의 무렵 전겸익 등 남명 조정 관료들은 느닷없이 자신을 황태자로 자처하는 사람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그 신분을 알 수 없는 젊은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해대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색을 일삼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황실의 법도대로 오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수께끼의 인물은 남경에 도착하자 스스로 주자랑을 자처했으며, 북경이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서 감시자들을 따돌리고 탈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자랑' 의 말대로라면 그는 도성을 떠나 피신 길에 오르면서 첫째 날은 도랑에 숨어서 밤을 보냈고, 이후 7일간 행인과 피난민들을 피해서 남쪽으로 걸어가다 허기에 지쳐 결국 신분을 드러냈고 신하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어찌해야 할지 감도 못잡고 있는 판국에 주자랑은 자신을 맞이하는 여러 대신들 중에 북경에서 탈출한 환관 한명을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때에 이르자 남경 백성들의 흥분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자신들은 숭정제의 황태자와 함께 있다. 저 오만불손하고 무례하기짝이 없는 홍광제는 가짜 황제며,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황제가 될법하다는 것입니다.

 

 

 

 홍광제는 별볼일 없는 인물이었지만 오직 숭정제와 피가 더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지금 숭정제의 아들이 나타난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남명 조정의 신료들은 고심을 했고, 지금 같이 중대시한 상황에서 더 이상 퇴진이나 조정의 개편은 무리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반대하는 쪽에서도는 만약 이 주자랑이 진짜 주자랑이라면, 그를 홍광제의 양자로 받아들이는 편이 가장 좋지 않겠나, 하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노발대발한것은 홍광제였습니다. 그는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 면서 이에 대한 모든 논의를 일소에 붙였고, 신하들은 예의를 갖추어서, 그러니 명백한 심문을 벌여 시시콜콜한것을 주자랑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의문은 증폭되었습니다. 이 주자랑은 분명 북경의 황실 생활에 관한 질문에는 시원스레 대답을 했지만, 정작 주자랑의 학업에 대한 일등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어물쩌물 두리뭉실했던 것입니다. 북경에서 탈출한 환관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혹사시켜 기억을 짜냈고, 아무리 따져봐도 자신들이 먼 발치에서 본 헌민태자의\모습과 저 자칭 주자랑의 모습이 다르다는데 의견을 합쳤습니다. 심지어 숭정제의 후궁으로서 주자랑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등을 알고 있다는 여인의 주장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내가 알던 그 분의 외모와는 탈출하는 도중에 충격으로 달라진것 같고, 태어나면서 있던 다리의 반점도 사라진것 같아요."

 

 

 

 너무 중대한 일이기에 아무도 대놓고 그를 '가짜' 라고 매도하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어느정도 마음에 결정을 내리고 있을때 전혀 뜻밖의 곳에서 사실이 전달되었습니다. 북경의 만주족들, 그들이 명의 옛 신호들에게 보낸 전갈 중에 이미 황태자는 죽었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일이 밝혀져 가짜 주자랑의 정체는 왕지명(王之明)이라는 사람인것이 탄로가 났으며, 1645년 4월 왕지명은 구금되었고 황실 근위대 소속이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몇몇 환관과 사기꾼들 때문에 이 일에 말려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경 주민들은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그가 왕지명이라는 이름을 말한것은 홍광제의 협박때문이라고 여겼고, 왕지명은 명지왕(明之王)을 거꾸로 바꾼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홍광제는 민심을 잃을까 두려워 왕지명을 죽이지는 못하고 그를 감금하는 대신 풍족하게 생활 할 수 있게 조치했습니다.  

 

 

 

 

 이제 만주족의 공격은 눈 앞까지 다가왔고,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 저항은 미미했습니다. 만주족 본대는 교활하게도 최전방에 투항자들로 조직된 부대를 배치하여 숫자적으로 소수이자 이 이상 줄어들면 중국 통치에 문제가 생길 그들은 직접적인 위험에 처하는것을 막게 했고, 여러 한족들을 투항시키고 변발을 시켜 자신들의 병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만주족의 목표는 북경에서 시작된 대운하가 양자강의 지류와 맞나는 지점인 양주에 이르렀습니다. 양주에 이르는 두 갈래 주요 길목은 모두 함락된 상태로, 그곳의 명나라 장수들은 만주족에게 투항하여 변발을 하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성들과는 달리 양주는 항복할 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44세의 사가법, 그는 명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장수였는데, 홍광제를 수차례 군사 문제로 수위 높게 비판할 정도로 꼿꼿한 무인이었습니다.

 

 

 도르곤은 이 기골 있는 인물에게 그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명 왕조' 가 아니라 '부패하고 무능한 군주' 일 뿐이라고 환기시켰고, 어떻게든 그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꿈쩍도 하지 않은 사가법이지만, 만주족 부대보다도 괴로운것은 그들이 말한 '무능한 군주'라는 이야기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무능한 군주 밑에는 무능한 인물들이 모이기 마련이라, 고걸이 죽은 뒤 허공에 뜬 고걸 휘하 10만의 부대는 당초에 사가법의 지휘 아래 있기로 되어있었지만 사가법을 시기한 마사영이 ─ 聖武記에 따르면 ─ 헛소문을 퍼뜨려 여러 곳으로 흩어져 버리는 바람에 사가법의 휘하로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청나라 군대. 나라가 곧 망할지도 모르는데, 오직 경쟁자를 시기하는데에만 열중하는 정부. 남명 정부의 종말은 바야흐로 목전 앞까지 다가왔고, 이 양주에서 청나라 군대가 중원에서 행한 만행 중에 가장 잔혹하고 비참한 대학살이 벌어지게 됩니다.

 


 

 

 

극적인 타협이 벌어지기에는 이미 상황은 벼랑 끝까지 몰린 뒤였고,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상황은 누구도 용납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중화제국의 적법한 주인이라고 자처한 사람이 두 명이 있었고, 도주한 이자성까지 치자면 셋이나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르곤의 동생 도도는 군사를 이끌고 양주에 도착하면서, 한번 투항을 권유하며 기회를 주었습니다. 한발 앞서 만주족에게 투항한 명나라 장수 이우춘(李遇春)을 보내 투항을 권유했습니다.

 

 

"황제는 장군을 믿지 않고 있소이다. 그럼에도 왜 만주족과 힘을 합쳐 이름을 구하고, 공훈을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오이까?"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도는 그 후에도 친필로 설득을 해보는 등 사가법을 달래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오히려 사가법은 부하들을 시켜 양주 성곽을 따라 나무 받침대를 설치한 뒤, 그 위에 대포를 배치했습니다. 북경에 있을 시절, 그는 아담 샬을 기용하여 화포를 제조하자는 계획에 찬성했던 인물로 화포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 명나라의 총병 유조기(劉肇基)는 계책을 하나 내었습니다.

 


"성 안은 지세가 높고 성 밖은 지세가 낮습니다. 회하의 둑을 터뜨려 적군 진지에 물을 몰아 넣는다면 저들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듯한 소리지만 사가법은 거절했습니다.

 

 

"백성을 귀히 여겨야 하오. 사직은 그 다음이라오."

 

 

청군은 물에 휩쓸리겠지만, 회양 백성들도 대량으로 익사하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직이 백성 다음이라는것은 맹자에 있는 말입니다.

 

 

 

사가법의 대포는 과연 효과가 있어 청군은 예상 이상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상자가 수천 단위에 이르자 군대를 이끌던 도도도 격분하기 시작했는데, 7일간 전투가 벌어지며 몰아부치자 결국 양주성도 한계에 다다르고 맙니다. 청군은 시체를 밞고 올라가 성내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성 수비대 병사들이 투구를 벗어던지고 창을 내팽개친 채 성벽 아래 가옥으로 뛰어내려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놀라 집 밖으로 뛰쳐 나온 주민들이 도망치는 수비대 병사들을 목격하면서, 거리는 순식간에 피난민으로 넘쳐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달아날 곳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도성 남문을 열어놓았으나, 그 최후의 탈출로 마저 더욱 수가 많은 만주족에 의하여 차단되기에 이르고 맙니다. 사가법은 성문을 연 자를 처단하라고 하였지만 제 목숨을 걸고 그 명령을 시행할 부하는 없었습니다. 유조기 등도 전사했고, 만주족이 도성을 점령하고는 사가법은 도도 앞으로 끌려나오고 맙니다. 도도는 그의 충성심이 자신에게도 큰 인상을 주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항전은 참으로 놀라웠소. 이제 그대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하였으니, 내 그대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는 것이 기쁠 따름이라오."

 

 

하지만 사가법은 거부 의사를 단호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답했습니다.

 

 

"죽음 이외에 더 바랄 것은 없소이다."

 

 

며칠동안 사가법을 회유하던 도도는 시간이 지나서 약이 올라 사가법을 참수하고 맙니다. 그리고, 사가법에 대한 처우와는 별개로 도도는 양주을 공략하는데 든 상상 이상의 시간과 인적 손실에 대해 격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휘하 군사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격전끝에 약이 오를데로 오른 야수같은 병사들이 성안으로 진입하였고, 이때가 4월 25일이었습니다. 악몽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벌어진 일에 관해서, 성무기에서는

 

 

"우리 병(청병)이 머물기를 10일, 그리고 이를 도(屠) 했다."

 

 

하여 그저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10일 동안 청나라 병사들은 야만의 극치를 달리며 수없이 많은 주민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빼앗고, 망가뜨렸습니다. 남자들은 학살당하고 부녀자들은 겁탈당했으며, 이전까지 만주족이 북쪽에서 항복한 도성에서 보인 자비심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건물들은 불에 탔습니다. 도성내 사방에 올라온 불꽃은 폭우가 내리면서 가까스로 진정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처참하게 도륙당한 양주 백성들의 숫자만 무려 80만명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삼국시대 촉나라 인구 전체에 가까운 인구가 살육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항이 심했다? 그리하여 아군의 피해가 커졌다? 사가법의 대포로 인해 청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허나 어떤 이유로도 80만명을 대학살하는데 적법한 이유가 되진 못합니다. 이 지옥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왕수초(王秀楚)라는 사람은 은밀하게 이때의 모습을 적어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를 만들었습니다. 문자의 옥 등의 탄압이 심하던 청나라 시대에는 당연히 이 책은 금서로 분류되어 지하 출판물로 몰래 나오거나 불에 태워져 일반인은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주십일기는 역으로 일본에 전해졌고, 메이지 시대 청나라 유학생들은 이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침 반청에 대한 열망이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을때, 이러한 책은 그들의 가슴을 격동시켰고 결국 반청혁명이 일어나 청은 패망하게 됩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대문호 루쉰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또한 (유학생의) 일부 중에는 명나라 말기 유민의 저작이나 만인(蠻人)의 잔학 기록을 모으는데 전심(全心)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도쿄와 그 밖의 도서관에 들어앉아 글을 베껴 와서는 인쇄하여 중국에 들여와, 잊혀진 옛 원한을 부활시켜 혁명 성공에 일조하려 했다. 이렇게 해서 양주십일기, 가정도성기략(嘉定都城紀略), 주순수집(朱舜水集), 장창수집(張蒼水集) 등이 번역, 인쇄 되었다.

 

 

 

사가법은 백성들이 상할까봐 수공(水攻)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수많은 백성이 그의 투항 거부 때문에 도륙당했습니다. 만주군의 잔학함이 상상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남정군의 이와 같은 만행은 본보기 목적도 있었으나, 어떤 이유건 간에 양주에서 벌어진 10일은 저항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자들에게 벌어진 비열한 폭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양주를 쓸어버린 청군은 거칠 것 없이 대운하를 따라 양자강으로 진격했습니다. 전겸익은 홍광제에게 남경보다 남쪽으로 피신할 시기가 되었다고 조언했지만 간단히 무시되었습니다.

 

 

남명군의 다음 후방 진지는 진강(鎭江)이었는데, 양자강 남안의 중무장한 도성으로 남경 동쪽 인근에 위치에 있었습니다. 양주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맞은편의 장대한 양자강과 만나는 곳으로, 필연적으로 진강은 만주족의 다음 공격 목표가 될 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인물은 정성공의 숙부, 정지룡의 동생, 홍광제로부터 관작을 하사받은 인물인 정지봉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정채와 같이 말입니다. 부대는 참호를 파고, 남중국해의 유럽 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화기를 배치하여 청군을 맞을 채비를 했습니다.

 

 

정지봉은 고걸이 죽은 뒤 혼란에 빠져 도적군대로 돌아간 이전의 남명군대와 교전하여 1만여명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승리는 근본적으로 아무 의미없는 승리였습니다. 패잔병들은 변발을 하고 만주족에게 투항하여 그들의 충실한 새 부하가 되었던 것입니다. 도도의 군대는 투항한 한족들의 가담으로 더욱더 수가 불어 양자강 북안에 이루어고는 정지봉의 군대와 대치했습니다.

 

 

몇일간의 대치가 벌어지고 난 후, 어느날 밤에 청군 진영에서 뗏목들 위에 등불을 놓아 반대편으로 보내게 됩니다. 정지봉은 그 땟목들이 적군이라고 판단하여 소총과 대포를 발사하게 했는데, 실상 청군의 주력은 어둠 속에서 상류쪽으로 지나가 도강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속은것을 판단한 정지봉은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퇴각했습니다. 이 퇴각은 자기 전력을 이런 싸움에 소모시키기 싫은 정지룡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남명 조정에서도 정지봉이 당초부터 오래 지키고 있을 생각이 없지 않았느냐고 쑥덕거리는 판이었던 것입니다. 정지봉을 제외한 나머지 정씨 집안들은 이미 그들의 본거지인 복건으로 철수한 뒤였습니다.

 

 

즉, 정지봉이 진강을 떠난것은 이제 정지룡의 군대가 남경 방어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청의 도강 소식이 전해졌을떄, 홍광제는 연회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원(왕실 가무단)에는 예술이 능한 자가 없단 말이지! 어떻게든 찾아내서 데려오고 싶구만……"

 

 

이는 제정신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홍광제는 술에 취한채로 말에 걸터앉아 달아났습니다. 전겸익은 이제 상황이 다 틀렸다는것을 알았고, 그의 젊은 부인이자 애첩이며 시인이며 정성공에게 서예를 가르치기도 했던 류시(柳如是)는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전겸익이 존경받는 유가인 만큼 자살할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강물에 빠져죽으려고 하자, 전겸익은 이렇게 말하면서 마음을 바꾸고는 만주족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합니다.

 

 

"물이 차가울 것 같다."

 

 

류시는 정색하면서 '이게 옳은 것인가' 하고 따졌지만, 전겸익은 한평생 곧은 유학자로 권신들과 부딫히는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 이때는 무엇인가 홀린듯이 만주족에게 항복하는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홍광제에 대한 진저리가 그 탓인지도 모릅니다. 홍광제가 그토록 형편없기에, 수십년 후의 만주족은 더욱 편하게 자신들을 명의 후계자로 자처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형편없는 인물이 어찌 중화제국의 주인이 될 법하겠느냐면서 명사(明史)의 마무리를 지으면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전겸익은 양주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침략군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면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런 사이에 백성들은 감옥에 있는 가짜 황태자, 왕지명에게 곤룡포를 입히면서 그를 새 황제로 삼겠다고 열성이었습니다. 마침내 도도의 군대가 폭우를 뚫고 성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별다른 문제없이 인수인계가 이루어졌고, 도도는 문제의 가짜 황태자 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의견을 내었습니다.

 

 

"진위 여부는 지금 파악할 순 없겠군. 북경으로 돌아가야 모든것이 밝혀질 것이다."

 

 

남경의 한 구역이 만주족 거주지로 정해지고, 한족 주민들은 쫒겨나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격리시킨것은 막대한 희생을 치른 양주의 전례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남경은 비교적 평화롭게 만주족의 수중으로 돌아갔습니다. 전겸익은 변절자가 되었지만 수만의 목숨을 살릴 수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쯤엔 도망친 홍광제도 붙들려 남경으로 압송된 후였습니다. 백성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졌으며, 비참한 꼴로 도도에게 끌려갔습니다. ─ 조너선 클레멘츠의 '해적왕 정성공' 에서는 ─ 도도는 가짜 황태자를 등을 참석시키고 연회를 하고 있었는데, 홍광제가 이 자리에 도착하자 그를 자리에 앉히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숭정제의 아들이 도성에 나타났음에도 어째서 황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는가?"

 

"만약 홍광제가 그 자신의 주장대로 중화제국의 진정한 황제라면, 왜 이자성의 잔당을 청나라 군사들이 뒤쫒아 소탕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홍광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을 몰랐지만 도도는 그를 더욱 몰아부쳤습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떠했기에 청군이 진군해 오자마자 황제가 남경에서 비겁하게 도주했는가?"

 

"진정 홍광제가 천명을 받은 황제라면, 마땅히 두려울 것이 없는것이 아닌가?"

 

 

마침내 도도는 홍광제가 무능력한 겁쟁이 주제에 황위를 찬탈했다고 비난하며 추궁을 마무리하고는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만주족은 본래 남경까지 내려올 계획은 없었지만, 저항이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족들이 기꺼이 투항해 왔기 때문에 계속 남진 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홍광제가 양자강 북쪽에 군대를 주둔시켜 막았다면, 만주족은 수많은 한족 투항자들을 확보를 못했을테고 지금같은 사단이 일어나기 전에 격퇴할 수 있지 않았겠나는 소리입니다.

 

 

홍광제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도도는 지루해져서 그를 끌고 가라고 명령했고, 만주족은 다른 정보를 얻기 위해 홍광제를 강도 높게 심문한 다음 처형해버렸습니다. 북경으로 압송된 가짜 황태자도 도르곤에 의해서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첫번째 남명 정부가 무너질때, 손에 피를 전혀 안 묻히고 그쪽을 포기하고 떠난 정지룡은 본거지 복건에서 새로운 황제를 세울 궁리를 했습니다. 정지룡이 자신의 세력을 수차례 해산시키려고 했던 명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정지룡의 진정한 계획은 더욱 소름끼치는 종류였습니다.

 

 

정지룡의 진짜 목적, 그것은 황제를 새로 세우고 그 조정을 좌지우지 할만한 사람이 되어서, 그토록 강력한 세력으로 청 왕조에 투항하는 것이었습니다. 투항 할때 자신의 위치가 높은만큼 그만큼 보답과 대우도 클 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청나라 초중기에 변발 이런식으로 하면 죽습니다. 머리가 시작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밀어야 합니다. 저런 식의 스타일도 용납이 되었던것은 최소한 청 중기 이후, 말기쯤은 되서야 가능했던 일입니다.

 

 

 

 

남경 점령후에 청군은 변발을 강제적인 조치로 변경했습니다. 맨 처음 청군이 산해관 안으로 진입할때는 변발을 강제의사로 하다가, 남정군을 조직할때 무렵에는 자유의사로 변경되었습니다. 청군이 그토록 많은 한족 투항자를 얻을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는데, 남경이 함락되자 다시 강제 조치로 변경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반청 감정이 한번 더 꿈틀거리게 됩니다.

 

 

 

 

한편, 그런 반청 감정도 구심점이 있어야 득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강남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던 위치의 홍광제는 절호의 기회를 바보짓만 하다 끝내어 처형당했고, 홍광제와 제위를 다투던 노왕 주상방은 홍광제 몰락 후 자신을 옹립하려는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청에 항복했습니다.

 

 

"대사는 다 끝났소."

 

 

라는것이 그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를 따라 청에 항복한 사람들도 있었고, 따르지 않고 자결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장국유 등은 노왕(魯王) 주이해(朱以海)를 옹립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웠고 이들은 항주를 취하려고 했지만 청나라 총독 장존인(張存仁)에게 패배하여 퇴각했습니다. 노왕 정권 이외에도 망명 정권은 계속해서 생겨났는데, 앞서 말했다시피 정지룡의 음흉한 계략으로 인해 또 다른 황족이 선택되었습니다.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이 바로 그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정지룡이 '진정' 반청의 기치를 내세우는 인물이었다면 주율건은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과거 전과 기록이 있긴 했으나, 다른 황족들처럼 안하무인으로 굴거나 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고 스스로 군대를 모아 이자성 반란군과 격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군대를 모으는것은 분명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한 일이긴 하나, 사실 그전에 주율건은 조정에 3천 병력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병력을 모았던 것입니다. 그때문에 정상 참작되어 아주 큰 벌은 면하고 감옥에 들어가 있던 참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주율건은 남경 정권이 홍광제의 무능으로 붕괴 되자, 항주로 내려가다가 총병 정홍규(鄭鴻逵) 등을 만나게 됩니다. 이 정홍규가 바로 정지룡의 형제인 정지봉입니다. 정지봉은 정씨 일가의 본거지인 복건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는데, 마침 이 우연한 만남의 인연 때문에 주율건을 같이 복건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주율건은 남하하면서 여러 지방에 "아직 명나라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고 알리는 한편 일대 반격의 시기가 왔다는것을 알리면서 앞으로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이 될 정지룡에게도 각별히 사의를 표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우선 주율건은 홍광제의 생사 여부를 확인 할 수 있을때까지는 섭정으로 남아있기로 한 참이었습니다. 복건에 도착한 섭정은 신하들에게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한것을 권고하는 한편, 지체없이 주무 대신들을 임명하고 항전 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무렵, 홍광제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주율건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융무제(隆武帝) 였습니다.

 

 

 

융무제는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홍광제 보다야 유능한 인물이었고 반격에 대한 의지도 강했습니다. 하지만 반격을 하자면 정지룡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융무제는 정씨 집안의 인물들에게 여러 벼슬을 내렸고, 곧 융무제 정권의 중추는 누가봐도 정씨 일족의 손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중요한 인물인 정지룡은 심드렁할 뿐이었습니다. 정지룡은 처음 주율건이 융무제로 즉위할때도 '우선은 감국을 취한 다음에 황제가 되든 어쩌든 하는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고 비협조적으로 나왔는데, 정지봉 등이 '민심을 다잡는 계기의 의미로 보더라도' 황제가 있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여 이를 승낙하게 됩니다. 황제를 모시게 된 정지룡이지만, 정작 그의 관심은 가장 적절한 '투항의 시기' 를 노리고 있을 뿐이었고, 그 투항 시에 높이 대접 받을 수 있기 위해서 자신의 세력을 '쓸데없는' 반청 싸움에 소모시키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이 무렵 정지룡의 권세는 평노후라는 작위에서 평국공(平國公)에 까지 이르러 절정으로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정성공의 어머니인) 일본에 있던 아내 다가와가 중국에 오게 됩니다. 그녀는 안해성에 거주했습니다.

 

 

 

각지에서 도와달라는 보고가 올라왔고, 융무제는 몸이 달아 출정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정지룡은 좀 더 기다리자고 하여 어물쩡 넘어갔고, 융무제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승낙했습니다.

 

 

하지만 정지룡은 말했다시피 북벌할 의사 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실상을 말하자면 복건으로 쳐들어오는 청군을 막을 길목만 100군데가 넘는데, 이곳을 지키고 있는것만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북벌은 어림없는 소리였습니다. 정지룡은 융무제에게 복건의 재정이 장기전을 치르기엔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뱃길을 열고 각 포구에서 교역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이를 통하여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야 한다" 고 건의했습니다. 대외 무역으로 복건의 경제 여건을 회복시키고 융무제의 전쟁 수행 자금을 높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실행되고 나서 보니 이득을 얻는건 정지룡이었습니다. 정책의 실행에 필요한 부하, 선박, 각종 계약들은 모두 정지룡의 관할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지룡은 북벌 보다 자신의 이윤을 불리는데 고심했고, 북벌 계획은 점점 연기되고만 있었습니다.

 

 

 

 

반격 날짜는 한번, 두번 계속 연기가 되었고 결국 융무제는 정지룡에 대한 실망감으로 정씨 일족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천해의 요새이자 정씨 일족의 본거지인 복건을 떠나 바깥 지방에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절망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융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 때문에 괴로워 했습니다.

 

파일

 

복건의 남평 시. 이곳에 연평(延平) 구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해야했던 융무제는 연평에 전진기지를 만들고 그곳까지 나아갔습니다. 정지룡은 이에 대해 전혀 지원을 안해주면서 '태업'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지원은 커녕 북벌 중이던 정씨 군단도 뒤쪽으로 물리면서 병력을 아끼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의 장군 보로(甫老 박락)은 항주 이남의 얆은 강을 그저 걸어서 건너오기 시작했고, 한족 병사들은 기겁하면서 도망쳤습니다. 이 무렵 연평에서 전전긍긍하던 융무제는 깜짝 이벤트를 선보였는데, 자신의 부하들이 만주족에게 보내던 편지 200여 통을 가로채고는 회장에서 이것들을 한줄도 읽지 않고 태웠습니다. 죄목들은 불문에 부칠테니 새로 출발하자는 이야기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미 정지룡은 보로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로는 정지룡에게 싸울 것이 무엇이냐고 제의했습니다. 정지룡은 변발을 하고 새로운 주군, 즉 청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만 한다면, 그 댓가로 복주와 광주 도독이 될 것이며 이는 정지룡이 중국 남동 지역의 제왕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가 할일은 남동 지역에서 왕이나 다름없이 지내면서 간간히 백성들을 족쳐 공물만 북경으로 올려 보내면 될 뿐이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융무제를 배신하는 일이었지만, 배신에 관한 문제에 대해 정지룡은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정지룡은 지난 1년이 넘게 만주족을 고생시켰고, 현재는 투항하기에는 자신의 가치가 가장 높은 최적의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정지룡은 이 순간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고 봐도 무방하고, 짜놓은 거미줄은 이 시점에 이르러 완벽한 그림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도 못했던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들, 정성공이었습니다.

 

 

 

 

 

 

정지룡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대만외지의 기록으로는, 정성공은 이때 복건의 길목 중 하나를 지켰고 부하는 고작 100여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는 22세였고 당연히 적을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성공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할테지만, 정성공은 자신의 아버지 정지룡이 명나라를 위하는 충신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기와 배신을 밥먹듯이 해온 정지룡과 달리 정성공의 어린 시절은 충효에 대한 유교 경전의 공부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정성공을 교육시킨것은 정지룡 본인이었습니다. 여하간에 정성공은 지원 대신 온 편지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 "복주에 있는 동안, 나는 보로 장군의 부대가 복건을 치고 명 유신들의 저항을 일소하기 위해 원병을 기다리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나 나는 황제 폐하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나로서는 군사를 모을 자신이 없구나. 만주족에게 헛되이 저항해 보아야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보로와 협상하여 우리 가문 사람들이 모두 양호한 대우를 받게 하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이에 너도 병장기를 내려놓고, 그로써 이로움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이때 정성공이 느꼈을 배신감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짐작도 가지 않을 일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하나 부서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척후병들은 어마어마한 만주족 병력이 접근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지원도 없다는것을 확인한 정성공은 어쩔 수 없이 복건의 해안으로 이동했습니다.

 

 

 

의외로 정성공 외에 정씨 가문 일족 내에서도 이 배신은 엄청난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융무제를 데려온 정지봉이 그러했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는 용맹무쌍한 사람이고, 바다로 나가 항전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며 정지룡에게 이렇게 진언했던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법이오!"

 

 

 

배신감을 느끼고 정지룡을 대면한 정성공은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항상 소자에게 충성의 도리를 가르쳐주시던 아버님께서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수치스런 항복을 심중에 두고 계시단 말입니까! 어찌 자식된 자로 하여금 제 아비를 역적 이라 부르게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평생 신의 따위에는 얾매인적이 없던 정지룡은 이런 친척들과 아들의 반응이 놀랍고 불쾌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친인척들이 사태를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으니, 누구라도 평상시처럼 지낼 수는 없다!"

 

 

젊은 날 마카오로 떠나, 해적 이단의 아래에서 밀무역을 하고 교활한 네덜란드 인들을 상대하면서 성장한 정지룡은. 그는 유가의 충효에 대해 배운적도 없고, 이상주의 따위에 정신을 빼앗긴 적도 없었으며,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미 남경이 함락되던 그 순간부터 명나라는 끝장난지 오래라는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지룡은 아들에게 신랄하게 덧붙였습니다.

 

 

"너 같은 애송이가 정치에 대해 무엇을 안단 말이냐?"

 

 

 

 

그러나 결국 엄청난 반발끝에 정씨 집안의 선단들은 바다로 나가게 되고, 정성공은 남쪽으로 융무제를 만나러 떠났습니다. 심지어, 심지어 정지룡의 부인 다가와 마저도 정지룡을 따르지 않고 정씨 집안의 몸을 의탁했습니다. 정지룡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바보같은 일이었지만, 세상에는 모든 일을 영리하게 하는 사람들 대신에, 손해를 보더라도 바보가 되는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정지룡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복주에 온 보로가 본것은 위풍당당한 정씨 집안의 대함대를 거느린 대세력 정지룡이 아니라, 선전 효과 이외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내 한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씨 집안의 함대는 여전히 청군에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보로는 정지룡이 '다른 일족들이 몸을 뺼 시간을 벌어보려 수작을 부리는것' 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태에 이르렀고, 그를 북경으로 잡아 보냈습니다.

 

 

 

본래 정지룡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고, 난투극까지 벌어져 경호원들이 사망하기도 하나 정지룡은 결국 강제로 가마에 올라타 북경으로 보내졌습니다. 바다를 주름잡던 대해적은 정지봉의 말대로 "물을 떠난 물고기" 꼴이 되어 죽을때까지 북경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최후는 더 끔찍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배신의 댓가를 넘치도록 치룬 셈입니다.

 

 

 

 

보로는 성이나 융무제를 추격하고 복건 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개 부대를 때어 안평 지역으로 보냈는데 이곳에는 일단의 정씨 진영이 있었고, 무엇보다 정성공의 어머니 다가와가 있었습니다. 정성공은 미친듯이 안평으로 내달렸습니다.

 

 

 

 

하지만 도착한 정성공의 눈에 보인것은 완전히 포위된 요새였습니다. 성벽을 오르는 만주족 병사들의 모습은 싸움이 이미 종말에 이르렀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정성공은 소규모 병력으로 만주족의 후방을 공격해보기도 하나 이미 어머니는 사망한 뒤였습니다. 폐허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정지룡도 그 소식을 들었고, 그는 격분했습니다. 정지룡이 보로와 분쟁까지 일으키며 북경으로 끌려간것이 이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더러운 배신자가 되었고, 얼마 되지도 않아 어머니는 죽었습니다. 젊은 정성공은 미친듯이 울고 절규하면서 방안에 있는 모든것을 칼로 베면서 오랑캐를 죽일것을 맹세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제법 진정된 정성공은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무렵 종말의 마지막이 닥쳐왔는데, 융무제가 사로잡혔다는것입니다. 그리고 곧 처형되었습니다.

 

 

 

정성공은 남은 정씨 일가를 해안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머뭇거리다가는 만주족 선봉대가 해안으로 밀려와 저항 세력을 일소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바다로 나가거나 대만으로 가는것만이 답이 없습니다.




 

코에이 사의 삼국지 시리즈에 나온 정성공

 

 

 

정지룡은 결국 사기꾼으로 판명이 났고, 정성공은 저항 운동을 하기로 했는데, 정성공은 정지봉의 아들이자 사촌인 정채, 정련등과 합류했고 또한 정지룡 때부터 이어지고 있던 가문의 무역 활동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비단을 잔뜩 실어 류쿠 열도를 경유해 일본에 보넀는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봉건 영주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하고, 마침내는 극단적인 기치까지 내세우게 됩니다. 지금까지 어떤 저항가도 내세우지 못했을 캐치프레이즈였습니다.

 

 

 

"애비를 죽이고(殺父), 나라에 보답하리라(保國)."

 

 

 

워낙 무지막지한 말이기에 진순신은 "구부(求父)가 잘못 전해진것 아니냐" 라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고, 청에서 조작을 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정성공이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면, 충성을 바칠만한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광저우(廣州)까지 달아난 융무제의 동생이 황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사람이 소무제(紹武帝) 였습니다. 그런데 소무제가 등극하고 난 뒤 몇일 뒤,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광저우 부근에서 만력제의 손자이자 22살이었던 영력제(永曆帝)가 즉위했습니다. 융무제는 짦긴 했지만 명 왕조의 적통을 이어받았고, 영력제는 북경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가장 가까운 혈통 중 한명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둘 다 정통성이 있다보니 어느쪽이 적법한지 혼란이 일게 됩니다.

 

 

 

 여러곳에서 보고가 들어왔고 그 이야기에 따르면 만주족은 겨울 동안 움직이지 않을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소무제와 영력제는 마음 놓고 서로 싸우면서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소무제는 해적 세력을 협조자로 거느렸는데, 숫자가 많아 영력제를 물리치고 그를 굴복 직전의 상황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기병 수백명이 등장하게 됩니다. 처음에 광저우의 사람들은 이들이 남명 정권을 지원하려고 온 비적일 것이라 여겼지만, 경비병들을 공격하는 그들을 보고 경악하게 됩니다.

 

 

 

 그들은 만주족의 기병대였습니다. 만주족 병사들은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성문은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꼼짝 말아라. 얌전하게만 있는다면 두려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만주족은 단 한번도 진격을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만주족이 겨울을 나고 있다는 보고는 전부 거짓으로, 남명 조정의 각종 문서와 인장을 손에 넣은 청나라 측이 날조를 해서 정보에 혼선이 일게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놀라 도망쳤고, 도성의 수비대는 도망을 치는 한편 기마병들은 저항 세력을 색출했습니다. 혼란의 와중에 만주족 병사 4명이 붙잡혀서 소무제 앞에 끌려왔습니다. 이 황제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곤 환관과 후궁 몇 명밖에 없었습니다.

 

 

 "저 자들이 나보다는 빨리 죽어야지! 처형하라!"

 

 

 4명의 만주족 병사들은 처형 당했습니다. 이게 청군이 광저우를 점령하는데 입은 피해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날이 저물 무렵 다른 청나라 병사들이 황궁에 도착하자, 그들의 눈에 비친것은 황실 일가의 사람들이 죽어서 널부러진 모습과, 자살한 소무제가 황상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은 영력제는 당초에는 소무제의 기만책이라고 여겼으나, 실상을 알게 되자 서쪽으로 멀리 피하게 됩니다. 어찌되었건 남은것은 영력제 뿐이었고, 정성공은 영력제에 대한 충성을 대외에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남중국해의 바다에 있는 정씨 세력과, 내륙 서부로 깊숙이 도주중인 영력제 집단과의 의사소통은 매우 드물게, 그리고 아주 위험천만하게 이루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미리 앞일을 조금 더 말해보자면,


 
 정성공의 대규모 반청운동이 실패한 후,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장장 15년간을 도망 다니면서 지냈습니다. 해안 지방에서 쫒겨난 영력제와 남명의 조정 신료들은 내륙을 향해 서쪽으로 몸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중국의 국경까지 벗어났고, 황실 여인들은 가지고 있는 귀금속까지 팔아치우면서 연명했습니다. 황제는 그들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이들에게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회복하면 영광을 누릴것" 이라는 약속 밖에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을 떠나, 버마에 도착했습니다. 사가잉(Sagaing)이라는 한 도시에서 빈탈레(Bintale)라는 왕에게 몸을 의탁했습니다. 그들은 2년 동안 버마에서 나름대로 행복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1616년 6월, 프롬(Prome) 지역의 영주이자 빈탈레의 동생인 폐 민(Pye Min)은 형을 죽이고 옥좌를 찬탈했고, "신성한 물"을 마시기 위한 의식 행사에 영력제 일행이 참가할것을 권했습니다.
 
 
 영력제의 금위대장은 이것이 미심쩍다고 여겼습니다. 폐 민이 영력제 일행을 달갑지 않게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폐 민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1개 부대와 무려 100여 마리의 코끼리를 보내 불쌍한 영력제 일행을 학살했습니다. 수천명이 죽어갈 무렵, 돌연 폐 민은 일을 중지시켰고, 영력제는 태후, 황후, 후궁, 아들, 그리고 한 환관과 함꼐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병사들은 모두 코끼리등에 처참하게 당해 의식이 불분명했습니다. 이들이 명 제국 최후의 군대였습니다.
 
 
 영력제는 폐 민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은 것이 한 통의 서한을 받았기 때문이라는것을 들었습니다.
 
 
 "명 왕조에 충성스런 장수가 보낸 서한일 것입니다! 그가 폐하를 모시러 올 것입니다!"
 
 
 황실 사람들은 기대에 차서 이런 소리를 했지만, 영력제 일행은 40일동안 또 갇혀있다가 폐 민으로부터 나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고, 문제의 그 부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5,000여명의 기병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표지도 없었고 아직 동이 틀 무렵이라 어두워 황실 사람들도 그들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무장을 하지 않은 병력이 영력제의 처소로 와서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명의 유신들로서, 폐하를 본토로 모셔가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4년 전까지 남명 군대에서 복무하던 자로, 영력제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지만, 영력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삼계가 보냈는가."
 
 
 잠시,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곧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영력제는 그들을 꾸짖었고, 기세에 눌린 병사들은 자신들이 만주족을 위해 복무하며, 다만 황실 인사들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고 영력제를 안심시켰습니다. 선택의 여지는 이제 없었기에, 영력제는 변졀자들과 함께 버마를 떠나, 3개월간의 고통스런 여정을 견뎌 중국까지 도착했습니다. 황제는 점점 견디기 힘든 고통에 시달리며 끼니를 거부했고, 갈수록 천식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홍무제 주원장으로부터 이어진 대제국의 마지막 후예는 이제 처량한 꼴로 운남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운남의 지배자는 오삼계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50세. 이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습니다.
 
 
 영력제를 본 오삼계의 병사들은 동요했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고, 만주족 정권의 밑에 알랑거리며 부귀와 목숨을 연명하는 그들이지만, 그 옛날 그들은 산해관에 남아 만주족의 공격으로부터 명 왕조를 수호하던 마지막 정예군이었으며, 숭정제를 죽게한 이자성군과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을 벌였던 부대였습니다. 늙은 병사들은 오랫동안 잊고 지내는 뜨거운 충정이 핏속에서 다시 꿈틀거렸지만, 과거 혈기넘치던 무장 오삼계는 이미 노회해질대로 노회해진 뒤였고, 다른 문제가 생기기전에 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영력제의 구금을 북경에 알렸습니다.
 
 
 
 당시는 아직 네명의 대신이 어린 강희제의 업무를 대리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들은 영력제의 처형을 명령했습니다. 오삼계는 일을 지체없이 처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662년 5월 9일. 영력제와 세레명이 콘스탄티노인 그의 아들 주자훤은 오삼계 앞에 섰습니다. 영력제는 최후의 순간을 예상하고 오삼계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조용히 군말없이 따랐습니다. 오삼계는 북경에서 내린 칙령을 자신이 직접 읽었습니다. 그 칙령의 마지막 구절이 끝나기도 전에, 부하들은 영력제와 그의 아들을 붙잡고는, 밧줄로 두 사람의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황후는 도자기 그릇을 깨어 부수고 누가 말리기도 전에 자신의 목을 쳐 죽었습니다.
 
 
 하늘이 노한것인지, 곧바로 구름이 일고 어두워지고,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여름철 우박을 둘러싼 폭우가 내렸습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보고 죽은 영력제를 깊이 동정했고, 오삼계의 부하들도 죄책감과 회의감에 빠진 사람들이 상당 수 있어, 이 조짐을 불길하게 여긴 오삼계는 많은 병사들을 처형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날씨도 좋아지자, 이제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중국의 영역에서 청에 대항하는 마지막 남은 명나라의 세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ps : 시기가 겹치기에, 일전에 작성했던 '명 제국의 황혼' 과 '수신 정성공' 게시글이 다시 올려졌습니다. 다음화부터는 그렇진 않을것입니다.(정성공의 남경공략 시도 정도를 빼면)
 ps2: 영력제의 최후 서술때문에 강희제 시대까지 뛰어넘었지만 다음화는 정상적으로 도르곤과 순치제 이야기입니다.
 ps3: 최소한 건륭제 시기까지는 연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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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gksmf | 작성시간 12.08.08 청나라군대 산해관 넘으니깐 중국을 걍 파죽지세로 삼키네요.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8.08 일단 입관 후 이자성 주력군을 한번 격파한 시점에선, 중국 자체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으니까요. 남명 정부도 소무제 영력제 융무제 이 정도까지 가면 희망도 없고 남북 정권을 이루자면 홍광제 정부 정도가 희망인데, 홍광제가 좀 너무 심했죠.
  • 답댓글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2.08.08 결국 이자성 군이 청군에게 완파 당한게 결정타였군요...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2.08.09 오삼계가 항복하기전에 충절이 어쩌고 한것도 다 쑈 같네요. 어느쪽에 붙건 배신자가 될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반란군이라는 것이 한번의 대패로 순식간에 무너질수 밖에 없는 모래알같은 존재고 반대로 청군의 무서움과 집요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터이기에 결국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면 승산이 높은 청나라가 될수 밖에 없을듯. 북경정부가 이자성군에 무너진 시점에 이미 게임은 끝났다고 봐야겠죠.
  • 작성자사탕찌개 | 작성시간 12.08.09 명나라는 참 진짜... 멸망할 만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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