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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역사 -인도네시아 공산주의자 학살(1965~1966)

작성자석림|작성시간14.11.18|조회수2,579 목록 댓글 7

1965년 10월부터 1966년 3월까지 반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는 희생자가 50만 명을 넘는 대학살이 일어났다. 인도네시아 전역의 수백 개 지역에서 일어난 이 참사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대부분 인도네시아 공산당 당원이거나 관련자였다. 학살에 가담한 사람은 군과 이슬람교도 민병대를 포함한 보수 무장 세력이었다. 우익의 좌익 공격이라는 성격을 띤 이 학살의 가장 큰 수혜자는 수하르토였다. 육군 장성이었던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최고 권좌에 올랐으며, 1998년 외환 위기로 물러날 때까지 30년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1975년 이후 동티모르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도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수하르토

 

1965년 역쿠데타로 집권한 뒤 1967년 국민협의회(MPR)에서 연설하는 수하르토. 그의 집권은 1백만∼3백만명에 이르는 양민 학살의 과정을 거치면서 공고화됐다.

 

1960년대 중반에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민-탈식민-개발 독재로 이어진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오랫동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아온 인도네시아인은 20세기에 들어와 독립을 위한 민족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 가운데 일부 활동가들은 독립 운동을 위한 이론적 무기를 식민 본국인 네덜란드에서 들여왔다.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공산주의는 그때까지 민족주의에 머물러 있던 독립 운동가들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민족 운동 진영은 공산주의자, 이슬람교도, 근대화 지향론자로 재편성되는 가운데, 종교 문제와 얽혀 심각한 분열을 겪게 되었다. 다수의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은 공산주의의 무신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를 보였다. 한편, 중소 지주들은 대규모 농장 노동자와 일반 농민에게서 지지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에 대한 독립 투쟁이 한창이던 1948년에 발생한 공산당 봉기는 다수의 군 지도자들까지도 공산주의자들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인도네시아가 1949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서 독립한 뒤, 한동안은 인도네시아 민족당과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다른 군소 정당들과 권력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51년 아이디트(Dipa Nusatara Aidit)의 주도로 재편된 공산당은 1955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 4당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공산당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과 지지는 계속 상승했다. 공산당의 약진에 대해 반대파가 갖고 있던 우려는 1957년에 의회 민주주의의 해체와 수카르노(Sukarno) 대통령의 이른바 ‘지도(指導) 민주주의’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공산당은 처음에는 이론 인해 고사할 것처럼 보였지만, 군부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간의 균형을 꾀한 수카르노의 전략에 따라 상당한 지지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특히 자바 섬과 발리 섬에서 농민층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보했고, 관료 사회와 군부에서도 적지 않은 지지자를 얻었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들과 주변국들은 수카르노의 사후에는 공산당이 집권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지도자 아이디트

 

수카르노

 

그러나 현실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1965년 10월 1일 자카르타에서 반공 성향의 군부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바뀌었다. 1965년 9월 30일과 10월 1일 밤사이에 인도네시아에서 혁명-反혁명-反반혁명의 연쇄혁명이 일어났다. 첫 혁명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反미-親중국경향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육군의 '장성평의회'가 주도했지만, 이들을 예방혁명으로 분쇄한 수카르노 경호대장 운통 중령은 자신들이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배후조종을 받고 있음을 강조했다. 운통 중령은 예방혁명에 성공하자 즉시 45명으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급진적으로 공산당과 제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혁명위 구성은 반공 민족주의적 세력이 중추였던 나수티온 국방상 이하의 육군 지도자들을 거의 완전히 제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1일 저녁 7시 나수티온 국방상과 수하르토 육군 준장이 이끄는 육군부대는 다시 행동을 일으켜 약 한 시간의 충돌 끝에 정권을 장악했다. 이 같은 인도네시아의 극심한 대립은 대체로 혁명적인 공군과 보수적인 육군, 중립적인 해군의 반목과 집권투쟁에서 기인했다. 몇몇 장성들이 살해되었지만 쿠데타는 곧 진압되었다. 쿠데타의 와중에서 목숨을 보전한 수하르토 장군은 이후 6개월 동안 수카르노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공산당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수하르토

 

역쿠데타군에 체포된 쿠데타군

 

공산당의 상징을 불태우는 모습

 

체포되는 공산주의자들

 

공산주의자에 대한 전국적인 학살은 이 과정에서 일어났다. 1966년 3월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해산되기까지 보수 세력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때로는 군부대가 학살에 나서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전면에 나선 세력은 무장한 자경단원, 곧 이슬람교도로 구성된 민병대원들이었다. 물론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후원한 세력은 반공을 기치로 내건 군부였다. 군대는 총기를 사용해 사람들을 죽였지만, 민병대는 종종 전통적인 방식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목을 베 죽이기도 하고, 각종 칼과 죽창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민병대들

 

공산주의자들을 총검으로 살해하는 모습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여성을 목매달고 의자로 폭행하는 모습

 

학살이 가장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역은 자바 섬 중부와 동부, 수마트라 섬 북부와 발리 섬이었다. 왜냐하면 해방 후에 공산당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과 대농장 노동자들의 편에서 농지 개혁을 위한 대규모의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던 곳이 바로 이 지역들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는 한때 지도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좌익과 타협했던 많은 사람들조차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들과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살에 가담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세력의 도움도 얻기 어려웠다. 반면 공산주의자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자바 섬 서부에서는 학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발리에서 일어난 학살 현장

 

자카르타 대학의 학생이 우익 청년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대적 탄압은 학살로 끝나지 않았다.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구속되었다. 재판 절차는 없었다.

군인들에게 연행되는 공산주의자

 

끌려가는 인도네시아 공산주의자들

 

인도네시아 공산당원들이 군인들의 감시하에 트럭에 실려가고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모습

 

결국 식민지에서 해방된 다른 나라들의 학살 사례와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학살도 어느 한 정당이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력을 장악한 세력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불안 속에서 유지되던 권력 균형은 학살을 통해 반대파가 원천적으로 제거된 후에야 안정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제는 확고한 지배권을 장악한 민족당의 독재만이 남게 되었다.

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데올로기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살의 대상이 공산주의자에 국한돼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학살에는 민족적 차원과 종교적 차원이 동시에 개입돼 있었다. 그러므로 화교도 민족적 차원에서 일차적인 학살 대상이 되었다. 화교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민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항상 큰 피해를 입는다. 그들이 주로 상업과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면서 현지 주민들과 커다란 갈등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마트라 섬 북부의 화교 상인들과 그 가족들은 특히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종교적으로 본다면, 일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가해자의 편에 섰다. 이들은 무신론자들과 토착적인 다신교 신봉자들에 대한 탄압을 위해 보수적 성향의 민족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학살의 전면에 나섰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학살은 도시 엘리트들이 농촌의 농민들을 통제하려는 의도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화교 학살. 1965년의 사건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1960년대 중반에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학살은 대단히 복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학살을 통해 공고하게 권력을 수립한 군부 독재 정권은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 세력의 도전을 받았지만, 이들의 요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 국면을 돌파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동티모르에서의 집단 학살이었다. 학살을 통해 권력을 얻은 수하르토에게, 이민족을 대상으로 또 한 번의 학살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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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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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빵꾸 | 작성시간 14.11.18 고구마 ㅉㅉ..
  • 작성자자주민보 | 작성시간 14.11.19 이런 참신한 글이많았으면 좋겠네요 잘 봤습니다
  • 작성자분석관 | 작성시간 14.11.19 잘봤습니다.
    이러한 시각의 글은 인도네시아 내부 사회모순을 원인으로 설명하는데 주안점을 둡니다.

    황석영이 소련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후 93년 방북한 후 수감이후에
    황해도 신천학살사건을 소재로 "손님"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는데
    그 소설의 시각도 외래사상과 종교인 막스와
    기독교 세력의 총돌이라는 모티브에 근거하죠.

    그후 2002년 김대중 때 북을 다시 방문한 황석영에게
    북의 관계자가 그러한 시각에 대해서 강하게 항의를 합니다.

    4.3학살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신천학살사건이나
    인도네시아 65학살은 미국 CIA가 학문적으로 체계적으로
    기획하고 촉발시킨 기획물이죠.

  • 작성자분석관 | 작성시간 14.11.19
    근년에 키신저의 죄악을 고발하는 연구물들이
    인터넷에 많이 공개되어 있죠...신문기사와 비밀해제된 기밀문서에
    근거한 것이죠.

    미유대는 결국 비판적인 진보지식인들이 황성영 수준의 관념과 결론에 스스로 맴돌도록
    유도하고 관리합니다. 물론 중국의 자본복속과 소련의 붕괴가 이들 진보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줬지만 폭넓고 여유롭게 관리하는 미유대의 전략에
    녹아나기 때문이라고봅니다.

    76년 아르헨티나 3만 중도와 좌파 지도자, 지식인 학살도
    76년 복지정책으로 사민주의를 구현하던 페론정부를 쿠데타로 뒤엎은
    비델라에게 전달한 키신저의 메모가 결정적인 학살실행의 도화선이 됩니다.

  • 작성자분석관 | 작성시간 14.11.19 미유대는 이러한 단호하고 교묘한 학살을 기획하고 직접적인 국제법적 증거를
    최대한 억제하는 식으로 개입하고 그 이후에 그럴듯한 음모론들이
    나오도록 유도합니다.

    진보지식인과 언론은 이러한 음모론이 완충지대에서
    그리고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라는 뮤지컬이 뉴욕에서
    상영되는 감상서비스를 좌파에 제공하여 감상적 완성 지대를 허용하는데
    결국 진중권의 숭미론이나 황석영의 양비론적 민족내부모순론에
    머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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