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고행장(求道苦行章) 7절
(원불교)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수도를 하여 나갈 때 심령(心靈) 열리는 것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허령(虛靈)이 열리는 것이다.
허령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생각지 아니하여도 이것저것이 마음 가운데 어른어른 나타나서 알아지는 것이다.
그 둘은 신령(神靈)이 열리는 것이다.
신령이라 하는 것은, 때를 따라서 생각지 아니해도 알아지고, 마음으로 어느 곳이든지 관(觀)하는 대로 알아지는 것이다.
허령은 며칠 내지 몇 달 동안 번개불같이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큰 필요도 없으려니와 근기 약한 사람에게는 도리어 큰 병만 주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령은 존절히만 쓰면 한 생 내지 몇 생 동안이라도 계속할 수 있으며, 어두워지면 다시 밝힐 능력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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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도이적장(初度異蹟章) 5절
대종사 김성섭(金成燮)이 한문만 숭상하여 그에 구애됨을 알으시고 하루는 짐짓 물으시었다.
"돌아오는 세상에 교법을 제정하려면 한문으로 경전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성섭이 의아하여 내심으로 생각하였다.
"대종사께서는 본시 한학(漢學)을 충분히 하신 바 없으신데 어떻게 교법을 제정하시려는고."
성섭이 대답치 못함을 보시고 대종사 미소하시며 말씀하시었다.
"내가 지금 한문으로 교법을 불러낼 것이니 그대는 즉시로 받아 쓰라."
대종사 즉석에서 수 많은 한시(漢詩)와 한문(漢文)을 연속하여 불러 내리셨다.
성섭이 한참 동안 받아 쓰다가 부르시는 글을 미처 다 수필(受筆)하지 못하고 황겁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도덕은 문자 여하에 매인 것이 아니니, 그대는 이제 한문에 얽매이는 생각을 놓아 버리라. 앞으로는 모든 경전을 일반 대중이 다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편찬해야 할 것이며 우리 글이 세계의 명문이 되는 동시에 우리 말로 편찬한 경전을 세계 사람들이 서로 번역하여 배우는 날이 멀지 아니하다. 그대는 다시 어려운 한문을 숭상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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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도이적장(初度異蹟章) 6절
이재풍(李載馮)은 본시 풍골이 늠름하고 세상 상식이 풍부하여
매양 대종사를 친견할 때마다 (대종사가) 보통 사람과 다르신 점을 대종사의 체상(體相)에서 살피려 하였다.
대종사 하루는 재풍에게 배코를 처 달라고 명령하신 후, 상투 머리를 풀어 그의 앞에 보이시었다.
재풍이 배코를 치려고 대종사의 두상을 들여다보니 곧 대종사의 이환현궁(泥丸玄宮)이 샘같이 뚫어지며 재풍의 몸이 그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재풍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서 있었다.
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시었다. "성현을 마음의 법으로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몸의 표적으로 찾으려 하는 것은 곧 하열한 근기인 것이다." 재풍이 정신을 차려 다시 보니 대종사의 이환에 아무 흔적도 없었다. 재풍이 크게 깨달아 다시는 이적을 살피지 아니하고 평생토록 정법을 받들었다.
이환현궁 (泥丸玄宮) : 이환(泥丸)은 상단전(上丹田)을 의미한다. 도교에서 상단전을 미화(美化)해서 이환현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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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링크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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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도이적장(初度異蹟章) 7절
九인 단원이 정관평(貞觀坪) 방언을 진행할 때였다. 이웃 마을에 김모(金某)라는 부호가 있었다. 그는 원래 그 지역에 세거한 사람으로 문벌이 또한 유세하였다. 조합원들이 방언 공사에 착수함을 보고 그는 곧 분쟁을 일으키었다. 자기도 동일 지역의 간석지 개척 원서를 제출해 놓고 관계 당국에 빈번히 출입하여 맹렬한 운동을 벌였다.
장차 토지권 문제에 우려가 생기자 단원들간에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태도가 깊어 갔다.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공사중 이러한 분쟁이 생긴 것은 하늘이 우리의 정성을 시험하려 하심인 듯하다. 그대들은 조금도 이에 끌리지 말고 또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말라.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이치의 당연함이지마는 사세(事勢)가 그렇지 못하여 우리의 노력한 바가 헛되이 그 사람의 소유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에 있어서는 양심에 조금도 부끄러울 바가 없는 것이다.
또는 우리의 본뜻이 항상 공중을 위하여 활동하기로 한 것이니, 비록 처음 계획과 같이 많은 대중을 위하여 널리 사용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도 또한 대중 중의 한 사람은 되는 것이며, 이 빈궁한 산촌 주민들에게 상당한 경작지가 생기게 하였으니 또한 공익도 되지 않는가.
이때를 당하여 그대들은 자타(自他)의 관념을 초월하고 오직 공익의 본의대로 근실히 노력한다면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그 후 그 사람의 운동은 실패에 돌아가고 우리 방언조합에서 허가서를 받았고 그는 의외에도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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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도이적장(初度異蹟章) 8절
한 제자 여쭈었다.
"누가 대종사님의 신통(神通) 유무를 묻사오니 어떻게 대답하오 리까."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모른다 하라."
또 여쭈었다.
"굳이 물으면 어찌 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큰 신통이 있다고 하라."
또 여쭈었다.
"어떤 신통이 있으시다 하 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우리는 각기 제 마음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우리 스승은 우리들의 마음 쓰는 것까지 살펴보시며,
우리는 제 마음도 제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데 우리 스승은 우리들의 마음에 부처님 마음을 접부치는 재주까지 있으시니 그것이 어찌 큰 신통이 아니냐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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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지종장(自初至終章) 1절
대종사 하루는 김성섭(金成燮 : 八山)을 부르시어 말씀하시었다.
"전북 정읍땅에 경북 성주에서 온 송모라는 젊은 이가 있거든 데리고 오라."
팔산이 명을 받들어 찾아가던 즉시로 송도군(宋道君 : 鼎山)을 만나 대종사의 말씀을 전하였다.
도군 또한 숙연임을 크게 깨달아 말하기를
"나 역시 큰 원을 픔고 수백 리를 정처 없이 왔으나 항시 마음에 무엇이 걸린 것만 같아 주소(=밤낮으로)로 걱정하던 중 오늘에 불러 주시니 이제 영겁대사를 해결할 날이 왔습니다." 하며 멀리 사배를 올리고 즉시로 동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집 주인의 지극한 만류로 일시에 정의를 떼지 못하여 팔산과는 후약을 두고 갈리었다.
팔산이 돌아와 대종사께 그 사유를 고하니 대종사 미리 짐작하신 바 있으신듯 하였다.
2,3개월이 지나매 친히 팔산을 대동하시고 그 곳을 찾아가 일숙하신 후
사제 겸 부자의 의를 맺으시고 말씀하시었다.
"이 일이 우연한 일이랴. 숙겁 다생에 기약한바 컸었느니라."
대종사 정산을 영광으로 데리고 오시어 중앙 위에 오르게 하시고 수기를 주시어 제반 사무를 대행케 하시므로 八위와 일반 대중은 十九세의 연소한 분이나 장형같이 숭배하며 받들었다.
송규 (宋奎)
1900~1962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 본명 도군(道君), 법호 정산(鼎山).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서 부친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와 모친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의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국량이 호대하며 기상이 화청하여 선동(仙童)이라 불리웠다.
8세경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세계를 바로잡고 모든 인류를 구제하는 큰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큰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 각처를 헤매다녔다. 16세경에 당시 신흥종교의 본거지이던 전라도로 와서 보천교의 교조인 차경석을 만나 보았으나 그가 정법도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정법의 스승을 찾지못해 우울한 심경으로 모악산 대원사에서 혼자 수행에 전념하던 중, 마침 이 절에 불공하러 온 김해운(金海運)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김해운의 간청에 따라 정읍시 북면 화해리 김해운의 집으로 가서 몇달동안 혼자서 기도하며 수행 적공했다.
1917년(원기 2)에 소태산 대종사가 친히 화해리를 찾아와 처음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에 송규는 영광으로 가서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師第之誼)를 맺었다. 이 때부터 송규는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로서 다른 구인제자들과 함께 교단 창립에 적극 노력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부안 봉래정사에서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제정할 때에 크게 보필하였다. 교리 제정에 기여한 공로로 인하여 소태산 대종사는 그를 「우리 회상의 법모(法母)」라고 까지 칭찬하였다.
이후로 송규는 익산총부와 영산성지에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1943년(원기 28)에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종통을 이어 후계 종법사가 되었다.
일제말기의 가혹한 탄압과 8·15의 혼란, 6·25의 수난 등을 극복하면서 소태산 대종사의 성업을 계승 발전시켰다. 8·15 광복 이후에 교단의 명칭을 「불법연구회」에서 「원불교」로 바꾸었다.
1953년(원기 38)에 거행한 「제1대 성업봉찬 기념사업」을 주도했다. 「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명」을 직접 집필하여 소태산 대종사를 후천개벽시대의 주세불로, 원불교를 주세종교로 천명하였다.
1961년(원기 46) 4월에 동원도리·동기연계·동척사업의 삼동윤리를 처음 설했고, 이듬해 1월 24일, 중앙총부에서 삼동윤리를 최후 법문으로 남기고 열반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송규에 대해 「송규는 보통사람의 지량(知量)으로 능히 측량할 인물이 아니다. 내가 그를 만난후로 그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한 일과 두번 시켜 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의 마음이 되고 그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학문의 수습(修習)이 별로 없었던 것에 비하여 그는 당시 저명한 유학자 밑에서 한학을 체계적으로 수학하였다. 그는 〈원각가〉·〈불법연구회 창건사〉·〈건국론〉 등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각가는 당시 교도들의 신앙·수행심 고취에 큰 역할을 하였고, 불법연구회창건사는 원불교 교사의 기본이 되었다. 건국론은 현재까지도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법문을 수록한 〈정산종사법어〉가 1972년(원기 57)에 발간되어 원불교 교서의 하나로 쓰여지고 있는데, 〈대종경〉과 더불어 많이 읽히고 있다. 후세 제자들은 그를 개벽계성(開闢繼聖)이라 추앙하고 있다. 2000년(원기 85)은 그의 탄생 백주년이 된다. 교단에서는 그의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추모기념사업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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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지종장(自初至終章) 4절
한 제자 여쭈었다.
"대종사의 제일 사랑하시는 제자는 어떠한 자격을 가진 사람 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그대도 이미 여러 자녀를 거느렸으니 그 중에 어떠한 자녀가 제일 사랑스럽던가."
그 제자 사뢰었다.
"저의 시키는 대로 모든 말을 잘 듣는 자식이 제일 사랑스럽더이다."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그렇다면 그를 미루어 생각하여 보라. 나의 제자 사랑하는 것도 그와 같나니
나의 시키는 대로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며 모든 것을
나의 명령에 위반됨이 없는 제자를 제일 사랑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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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지종장(自初至終章) 5절
대종사 석두암(石頭庵)에 계실 때 한 여인이 와서
"저 같은 여자의 몸으로도 남자 제자와 같이 대성현을 모시고 자 볼 수 있나니까."
모시고 있던 제자들이 그 온당치 못함을 꾸짖으려 하니 대종사 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었다.
"저 여인의 원이 지극하니 너희들 자는 옆에 하룻밤 재우라
석두암 (石頭庵) :봉래정사의 다른 이름. 전북 부안군 산내면 실상사(實相寺) 부근에 있었다.
1919년(원기 4) 10월, 혈인기도를 끝내고 부안 봉래산을 찾아 들어간 소태산 대종사는 처음에 월명암과 실상사에 임시로 거처하다가 1921년(원기 6) 9월에 석두암을 지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 석두암에서 원불교의 기본교리와 제도를 초안하고 제자들을 훈련하며 창립인연들을 기다리고 스스로 보림(保任)공부도 하였다. 또한 당시의 이름난 선승 백학명·한만허 등과도 교유하였고, 스스로를 석두거사라고 자칭한 것이다. 석두거사란 이름은 익산 총부 건설 후에 까지도 상당한 기간동안 사용하였다.
실상사와 석두암은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리고 터만 남아있다. 석두암에 지금은 「일원대도 비」와 「봉래정사 석두암터 비」가 세워졌다. 〈대종경〉 성리품 법문의 대부분이 이곳 석두암에서 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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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지종장(自初至終章) 6절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어느 큰 사찰 부근에 여자 신도 한 사람이 어육 주초로써 여러 승려들을 음탕하게 농락하여 사원의 재산을 십년내로 전부 착취하더니 그 여자는 일시에 부호가 되고 사원은 빈찰이 되어 결국 여자에게 이용을 당하였는데 천리가 무심치 않아 그 여자가 우연히 병을 얻어 반신 불수가 되므로 그가 벌어 놓았던 재산 전부를 치료비에 다 쓰고 나중에는 할 수 없이 사원의 처진 음식으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다가 금사망보까지 받은 일이 있다 하니 참으로 여러 사람의 성금은 무서운 것이다
금사망보 (金絲網報) :말세 수도인들이 세속적 쾌락에 탐닉하고 수행을 잘못하여 구렁이 몸을 받게되는 축생보.
정법을 모르고 대중을 잘못 인도하여 여러 사람의 다생 전도를 그르치거나, 수행정진하지 않고 신자들의 정재(淨財)로 무위도식 하거나 사은의 큰 은혜에 보은하지 못하고 사회에 폐해를 끼치게 되면 금사망보를 받기 쉽고, 한번 받으면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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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언법훈장(要言法訓章) 10절
또 말씀하시었다.
"수도인은 허위 가식이 없어야 하나 만일 조금이라도 허위와 조작이 있다면
천진 면목이 손상되어 참 가치를 잃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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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언법훈장(要言法訓章) 13절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모든 사람이 피차 없이 다 잘 아는 체하나 그 아는 것은 무엇이며
또 다 잘했다고 자랑하나 그 해놓은 것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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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품(展望品) 5장
대종사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시어 "금강이 현세계(金剛現世界)하니 조선이 갱조선(朝鮮更朝鮮)이라"는 글귀를 대중에게 일러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라 멀지 않은 장래에 세계의 공원으로 지정되어 각국이 서로 찬란하게 장식할 날이 있을 것이며, 그런 뒤에는 세계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그 산의 주인을 찾을 것이니, 주인될 사람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 없으면 무엇으로 오는 손님을 대접하리요.]
‘
금강산은 세계적 명산이므로 그 이름은 세계적으로 광포(廣布)되어있다. 금강탑승은 종사주의 다년간 현안이었으나 기회가 미적(未適)하고 사정이 불허(不許)하여 종시 유의미투(有意未투)하옵시더니 당시 종사주 경성 주가(住 駕)를 제(際)하여 당시 공주, 동진화, 신원요 제씨는 금강산행로를 누누이 주청하게 되었다 …’
이상은 당시 교무부 서기 전음광 선진님이 월말통신 27호에 기록한 내용 일부를 옮겼다.
대종사는 경성지부 교무 이공주와 요인 이동진화, 신원요의 주선으로 원기15년 5월28일~6월5일까지 8박9일간의 일정으로 금강산탑승 하셨다.
금강산 탑승을 마치고 익산본관에 귀관하시어 6월11일 금강산 여행법설을 하시었다.
“사람이 어디 구경을 한다면 반드시 그 구경으로부터 얻은 바 가치가 있어야 하나니라. 범상한 사람은 잠시적 오락으로나 혹은 일시의 소창으로 하는 자가 많지마는 상당한 포부와 목적을 가진 자로서는 구경은 고사하고 일정일동이라도 다 가치 있는 행동을 해야만 할 것이니라.
나의 금번 유산(遊山)은 그 소지(素志)가 산천 풍경에만 있는 바가 아니요, 그곳은 고대 사찰이 즐비하여 가위 조선 불교계의 근거지라 칭할 자격을 가졌고, 또는 불법에 대한 연구자와 지식가가 많음을 들었으므로 그 제도와 법리를 시찰 겸 금차(今此)탑승을 단행하였노라.
나는 금강산을 한번 본 후 하나 남김없이 다 거두어 왔나니, 제군은 앉아서도 능히 금강의 산천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거두어 온 금강산을 보고 행여나 금강산을 가지 못한다는 말은 말기를 바라노라" 하시니 여럿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여 방황하던 찰나 한 폭의 금강화첩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보라 이것이 금강산이 아니고 무엇이랴”
또 말씀하시되
“나는 이 금강산 유람을 기념하기 위하여 1귀의 시를 음(吟)하였나니
단문(短文)한 나로서 졸구(拙句)를 난면(難免)이나 제군은 들어보라.
‘보습금강경(保拾金剛景) 금강개골여(金剛皆骨餘)’ 이것은 금강산 구경을 기념하기 위하여 읊은 것이요. ‘금강현세계(金剛現世界) 조선갱조선(朝鮮更朝鮮)’ 이것은 속인을 대할 때 금강산을 두고 읊은 것이요. ‘금강현세계(金剛現世界) 여래도중생(如來度衆生)’ 이것은 불제자인 승려를 대할 때 금강산을 두고 읊은 바이다”하셨다.
원기15년대의 대종사님과 선진님들의 화법의 일면을 뵐 수 있어 그대로 옮겼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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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론직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9.07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났다 하듯이....
허령이란....가끔 진리가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하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래서 항상적으로 진리가 보이는 도통 상태가 아니므로
의미가 없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에 반해 신령이 열린다는 의미는...
달이 가려짐이 없이 언제나 항상 밝은 달빛만 비추이는 상태와 같이
언제나 진리가 보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추측됩니다.
정신 수양 과정에....그와같이 허령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으나
진정으로 도통을 하면....언제나 신령이 열린 상태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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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태허루 작성시간 17.09.07 반갑습니다. 직필님!
허령은 일상을 살면서 만든 거짓 정보가 신령을 가리지요.
그니 구름과 달에 비유합니다.
허령은 구름이고 신령은 달이니 구름이 걷히면 달이 상시 밝듯이
수행으로 허령이 걷히면 신령이 드러납니다.
표현의 차이입니다.
조계종에서는 허령을 업식이라 합니다.
신령을 불성, 자성, 본성 등으로 칭합니다.
업식이 걷히니 본성이 드러난다.
같은 수행 결과지요.
개인적으로는 신령을 더 좋아합니다.
상고시대 일신삼체와 같은 맥락이고, 상고부터 전통은
신령 또는 신으로 표현을 했지요.
이 시원이 미신으로 치부되 곤혹을 치르지요.
서구문명과 이민족 사상에 쩐 어리석은 백성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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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태허루 작성시간 17.09.07 태허루 깨닫지 못하면 허령이 신령을 지배하는 삶을 살다가 떠나지요.
이런 상태를 지옥이나 천국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천국 지옥도 허령이라는 말이지요. -
작성자태허루 작성시간 17.09.07 오차가 없는 정확한 추측입니다.
허령을 걷어내 어둡지 않으니 신령이 태양보다 밝게
현전합니다.
오우! 대단한 직관력입니다. -
작성자웃고살자 작성시간 17.09.07 이렇게 원불교 대종사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올려주시어 교도로써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