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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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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도꾜에서 유학 중 만나 연애를 하셨는데 두 집안은 극에서 극으로 반대형상이었다.
할아버지는 시골 선비로 들은바로는 동학농민운동에도 참가하였던 정의파셨고 집안은 씻은 듯 가난하여 아버지가 좀 커서
혼자 서울의 중학으로 유학가셨을 때도 돈십원 보태주시질 못했으니 당시 알바도 거의 없던 시절 아버지의 고생은 유년시절
부터 극심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버스비나 기차표 정도는 사주셨겠지만.)
어머니 집안은 떵떵거리는 대부호로 사람들이 그 지방의 외갓집 땅을 밟지않고는 다니질 못했을 정도였으니 외할아버지가
두분의 결혼을 결코 승낙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내 생각은 머리 천재셨던 아버지의 계략(?)으로 유일한 수단인 혼전
임신을 시켜 어머니를 집에 들여보내셨던 것이다. 딸셋중 위 두언니는 여학교를 나와 외할아버지가 정해주신 곳으로 얌전히
시집을 갔는데 그 중 가장 똑똑하고 인물 좋다는 막내 딸에겐 더욱 사방에서 사돈맺자는 자리가 유독 빗발쳤다 한다.
그시절 특히 여자로서 드문 동경유학까지 갔으므로. 어머니는 좀 퉁퉁하다할까 통통하다할까(리설주여사를 상상하면 된다)
그런 체형이 가장 미인으로 우대받던 시절이라 그러니까 부잣집 맏며느리감이었는데 반해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항상 영양
실조에 꺼떡하면 잡혀 들어가 두들겨 맞던 신세라 언제 살이 붙을 새가 없어 마른 체형 그러니까 貧相이셨다.
외할아버지는 그래, 그놈의 집안은? 등 다그치셨는데 시골의 빈농에다 독립운동가라? 그것은 마치 요즘 운동권처럼 가장 환영
받지 못할 천하의 나쁜 사위조건이었다. 아하 그러나 어쩌랴 이 완고한 보수주의자 영감님에게 가장 약점인 딸의 임신이라니..
그 시절엔 딸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의 도장이 없으면 혼인신고가 성립될 수 없었으니 결국 어머닌 혼인신고를 못하고
'동거'를 하셨다. 그래도 외할아버진 어머니에게 서울시내 근사한 이층집을 사주셨는데 그럼에도 그 외 경제적 도움은 일체
없으셨다. 사위 좋은 일만 시키긴 싫으셨을 테니.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머니는 교직에 나가기 시작하셨고 아버지는 본래 한자리에 취직하여 돈을 버는 자본주의식 남편형은 아니
셨으니 어쨋든 그렇게해서 낳은 자식이 바로 나의 언니이다. 그렇게하여 어머니는 언니에게 온갖 좋은 것을 사먹여 언니는
어려서부터 건강하고 밝은 성격이었다. 그런데 두번째 아이는 아들이었는데 너무도 인물이 좋아 동네사람들이 동네에 대통령감이
나왔다며 칭송을 하며 구경을 올 정도였다한다. 그 아들은 부모님에게 큰 기쁨이요 자랑이었는데 어머니는 직장생활에 육아에
힘이 부쳐 어느날 귀한 보약을 지어 드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보약이 아기에게 너무 강했던지 그 독한 성분이 젖으로 나와 아기는 돐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나 버렸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 버리셨고 어머니는 몇날몇일을 울고불고 직장이고 뭐고 식음을 전폐하고 그저 반 미치광이가 되 버리셨다.
주위에서 괜찮다 아들은 또 낳으면 된다며 위로를 해서 그러셨는지 드디어 어머니는 그 아들을 다시 낳기로 하고 집 나가신
아버지를 불러 들이셨다.
그 후부터 어머닌 방안을 사방 꽃으로 이쁘게 꾸미시고 브람스나 모짤트등의 좋은 음악만 들으시고 태아에게 좋치않다는 음식은 일체 멀리하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며 열달동안 좋은 태교에만 집중하신다. 아들아 이 엄마에게 다시 환생하여 오너라 우리 다시 만나자하는 절절한 염원으로...
그렇게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나였으니. 어머니는 그 순간부터 나를 안아보기는 커녕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나의 깊은 잠재의식
속의 유아 시절은 지독한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외로움 뿐이었다. 그것을 말로 할 수 없어 늘 울음으로 소리쳤는데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래서 친척들 말에 의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유명한 울보였다 한다. 하루에 몇번 식모언니가 들어와 기계적으로 우유병을 물리고 기본 처리만 해주고 나가버리고나면 나는 늘 혼자였고 우는 일 말고는 할일이 없었다. 그 후유증은
평생동안 건강에 영향을 미쳐 나는 늘 병약하였다.
내 어머니는 왜 그 아들이 性을 달리해 나로 환생했을 거란 가정은 못하셨을까. 그랬다면 우리 둘 다 행복했을 터인데... 그렇게
나의 인생은 탄생의 순간부터 그리고 나중에 결혼생활 내내 그놈의 아들이란 화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도대체
나의 잘못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100% 피동적으로 낳아졌을 뿐인데 왜 그 핏덩이 때부터 내가 모든 책임을 걸머지고 벌을
받았어야 했을까. 훗날 내가 딸을 낳은 것도 나의 잘못 뿐인가. 왜 나의 남편은 자신은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 내게만 아들 못낳
았단 책임을 따졌을까. 모든게 너무 비합리적이고 너무 비과학적이다.
나는 자라서 서너살이 되가며 점점 뛰어난 미모로 유명해져 '불란서 인형'이란 별명으로 불리웠었단 말이 있는 것보면 그렇게 죽은 아들의 환생이란 가정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친척들은 나중에 나를 보며 '그렇게 예쁜 아이였는데..' 라며 말끝은 흐리고그래도 좀 안됐던지 '그래도 뭐 아직도 괜찮긴 하다'라 하였다. 오랫만에 대학교 시험치러 서울로 돌아 온 나를 본 친척들은 옛날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비교했던 모양이다. 어머닌 내가 세살이 되며 주위에서 너무 예쁘다는 칭송을 받기 시작하자 그제야 눈길을 주며 예쁜 옷을 사다주기 시작하셨다 한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옷도 형편없이 입히셨단 말이다.
그런데 내 어린 시절 그 때부터 유독 내게 관심과 사랑을 주었던 사람은 바로 나의 언니였다. 그 전에는 너무 울기만 하니 가까이 오기도 싫었을 테고 언니 자신도 너무 어렸으니. 국민학교 들어서부터는 마치 인형갖고 놀 듯 학교서 돌아오는 대로 나를 데리고 놀아주었다. (언니가 초등1학년 때 나는 3살이었다) 여자란 어떤 관계든 아기든 성인이든 일단 이쁘고 볼 일이다. 이쁘면 이익이 생긴다.
내 일상은 오후에 돌아오는 언니를 기다리는 것으로 바뀌어 우는 것도 멈추게 된다. 그날이 그날이던 슬프던 날들에서 드디어 내게도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것이 생겼던 것. 그것은 내 인생 3년만에 찾아온 첫번 째 일생일대의 대 변이 였다.
나는 언니와 놀다 무엇이든 내맘대로 안되면 일단 으앙 하고 울었는데 그러면 언니는 쩔쩔매며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나는 언니 가방을 마음대로 열고 공책과 연필을 꺼내 빈 공책난에 마구 그림을 그려댔는데 참 재미가 있었다. 대신 언니는 옆에서 앙 하고 막 울기만했지 한번도 나를 제지하진 않았다. 언니는 내게 조금도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림을 얼마나 열심히 그렸던지 그렇게 해가 지나면서 모두 나를 신동이라 했다. 그림 대상은 인간과 동물이었는데 내가 본 동물은 고양이뿐이라 오로지 고양이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해서.
고양이에 관한 한 여러 포즈를 실감나게 잘 표현해내어 모두 감탄을 자아냈다. 두 앞발을 앞으로 길게 뻗어 기지게를 펴는 모습이라던지 특히 자는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나를 한번이라도 창경원 동물원에 데려가 주었다면 참 여러 동물들을 그려냈을 터인데. 그런 그림들을 보시던 어머니는 차츰 내게 하얀 도화지를 사다 주셔서 더 이상 언니공책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차츰 어머니는 내게 호기심을 보이면서 예쁜 옷과 도화지를 사 주기 시작하셨다. 예쁜 옷을 입히면 남들이 더욱 나를 칭송해 주었고 공책보다 도화지에 그리면 마찬가지로 그림도 더욱 괜찮게 보였으므로.
어쨋든 나는 내 위주로만 점점 버릇이 나빠져 옆에서 보고있던 엄마는 가끔 버릇을 고친다며 내게 매를 들었는데 (매라는 것도 관심이 생기셨기 때문이다)그러면 언니는 이 이쁜 애기가 어디 때릴 데가 있느냐며 대신 나를 때리세요 하고 막 울면서 나를 온몸으로 감싸고는 아무리 때려도 그 아픈 매를 고스란히 맞아내어 어머닌 할 수 없이 멈추었다 하신다. 매에 못견뎌서라도 달아날 줄 알았는데 결코 도망가진 않았다니 초등학교 1학년생치고 대단했던 것이다.
나는 큰 빽이 두개 있음을 직감하고 잘 활용하고 있었다. 하나는 으앙~하는 것이고 하나는 여차하면 엄마를 피해 언니뒤로 잽싸게
피하는 것. 우는 것에 관한 한 태어나서부터 자체훈련으로 일가견이 있었으므로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언니가
내대신 맞는 것에 대해선 죄의식이라던가 미안한 느낌이 없었을까.
어쨋든 나의 정신적인 엄마는 언니였던 것이다. 나의 엄마는 안아주지도 않고 매만 드는 무서운 사람. 그것을 막아주는 이는 오직 언니라. 그런데 언니의 그 사랑은 평생 변하지 않고 이어져 재작년 자신의 생을 마칠 때까지 매 순간 지속되고 있었다. 마지막 유언도 그 남편에게 부디 나를 자기대신 잘 보살펴 달라는 것.
그렇게 그때부터 어머니는 차츰 내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셨는데 그러나 이미 어머니를 향한 나의 마음은 차겁게 굳어져 있었다.
남들은 자식을 낳아보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된다 하는데 나는 반대였다. 자식을 보며 나의 어머니가 내게 했던
모든 것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생에서 3년이란 얼마나 짧은 것이냐 하겠지만 그 유아시절 3년이란 내 잠재의식에서
기초적인 인간형성에 엄청나게 큰 비중이란 것을 깨닫는다. 아기는 주위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라는 것인데.
내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은 내가 작은 애를 낳고나서 딸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더 따뜻하게 품어 준 것이다. 섣달 그믐달에 서울의 가장 추운날밤 불을 넣어주지 않아 차거운 방에서 나는 아이를 얼어죽지 않도록 내 가슴에 밤새도록 안고 쓸어 주었다. 만약 내 어머니나 시댁식구들처럼 내가 그 애를 딸이라며 차거운 바닥에 방치해 두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나는 커 가면서 내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생각해보면 그녀 역시 우리 전통사상의 불쌍한 희생자아닌가.
그러나 그건 이론일 뿐이고 감정적으로 완전한 용서까지 가긴 솔직히 힘들었다. 우리가 만일 독재정권에 의해 2,3년간 연명할 정도의 거친 음식만 제공 받으며 독방에 홀로 갇힌다면 나중에 그 정권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잠재의식속에 자리하는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나중에 언니는 몇번이나 한국에 나를 보러 방문했는데 내 농장생활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더구나 남녀평등의 미국
생활에 젖어있던 언니의 눈에는. 미국인 형부는 언니에게 집안일을 손 못대게 자신이 모든 집안청소나 부엌일 등을 도맡아했는데 단 한가지 요리만큼은 언니가 직접하였다. 언니는 한국식으론 그리 요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미국인보단 백배 낳아 형부가 요리한 건 그 자신도 맛이 없다고 그것만은 언니가 하게 하였다. 한국인의 미각은 미국인들이 결코 못따라오므로(옴으로? 남한에선 자주 철자법을 바꾸어 따라가기 힘들다. 그러니 자꾸 북한과 말이 달라지지)
어머니도 그 농장을 한번 방문하셨는데 몇일 지내보시고는 내가 힘들게 출퇴근을 해가며 주말이나 주중에도 틈틈이 쉴틈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시고 한성격하시는 어머니는 드디어 폭발하여 시댁식구들에게 호통을 치신다.
'내 딸을 이용해 먹고 있다' '애를 어떻게 이렇게 혹사시킬 수가 있는가' 라며. 남편과 시어머니는 어머니의 강한 기에 눌려서
아무말도 못하시고 나는 죄송스러워 두분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그 사건은 두고두고 두분에게 내가 책잡히는 사건이 되고 만다. 감히 안사돈이 바깥사돈에게 큰소리를 치다니. 한번 시집을 보냈으면 죽이든 살리든 간섭을 말아야지.. 그럼에도 나는 속으로 뭔가 시원한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과연 나를 걱정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고.
나중에 내가 남편과 헤어지자 언니는 내게 그만 미국으로 오너라 근사한 집도 사주고.. 등등으로 유혹하고 아껴주는 좋은 사람과 재혼해라 미국에서 얼마든지 좋은 사람을 소개도 해 주겠다. 세상엔 좋은 남자들도 많다. 너정도면 얼마든지.. 하며 나를 들들 볶았지만 나는 결코 설득되지 않았다. 내가 그정도에 넘어 갔다면 나는 오래전에 기독교인들 등살에 예수쟁이가 돼 있었을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언니처럼 나를 너무 사랑하여 볶는 사람 가까이 산다는 건 하나의 속박이 될 터이므로. 그 후론 일년에 한번 겨울방학 때 내가 미국에 초청 방문을 했는데 솔직히 나는 미국이란 나라에 별 흥미를 못 느끼고 비행기멀미나 가서도 오랫동안 시차를 극복 못해 낮에도 흐리멍텅한 기분이라 그만 가겠다했다. 그보다 미국의 번화가 빌딩이 치솟은 도시 또는 그 모든 모습을 볼 때마다 이 곳은 본시 우리 조상들의 땅이었고 그 분들을 학살하거나 쫒아내고 지은 잔인한 약탈의 문명이란 생각이 들어 절대로 호의적으로 미국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턴 일년에 꼭 두번 씩이나 언니는 나를 방문하였다. 솔직히 그 기간동안 너무도 간섭과 잔소리가 심하여 우리 세식구 모두 좀 부담이 되서 나 혼자라면 견디겠지만 우리애들이 불쌍하여 언니에게 한번 건의를 하기로 했다. 언니에겐 우리애들이 질녀라기 보단 최선생의 애들이고 옆에서 보기에 나를 그렇게 충분히 위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던지 한번이라도 내가 부엌에서 일하는데 우리애들이 거실에 앉아있으면 그 꼴은 절대 못보고 꾸짖었다. 그리고 입만 열면 너희 엄마는 고생을 많이 한 참 불쌍한 사람이다 너희가 잘해드려야한다는 틀에 박힌 말을 녹음기처럼 수도 없이 반복하며 꼭 눈물까지 보여 애들이 속으로 나중엔 지겨워 하였다.
나는 언니에게 일년에 두번은 너무 힘들테니 한번만 오라고 여러번 말했지만 '아니 괜찮아 이곳에 오는 것은 내 일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고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너무 좋아. 나는 괜찮아.'라며 자신을 생각해주는 말인 줄만 알아 한번은 내가 정색을하며 강하게 말했더니 '너는 내가 자주 오는게 싫으냐'하며 통곡하다싶이 하는데 정말 곤혹스러웠다. 그 후 한번만 와서 우리는 그래도 숨을 좀 쉬었는데 한번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내일 도착이야'라 해서 왠일인가 했더니 더 못참아 충동적으로 티킷을 샀다고.
주중에 우리 셋다 직장에 출근하고나면 언니는 대부분을 혼자 집안에 있어야만 해서 한번 씩 내 학교에 데리고 가서 캠퍼스 벤취에 앉아 있게 하거나 강의실에 끽소리없이 뒷자리에 앉아만 있으라 했는데 너무도 감동을 받는다며 좋아하였다. 자신이 옛날에 다녔던 캠퍼스풍경에 젖어 본다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으니. 무엇보다 그리던 한국의 공기를 혼자 조용히 앉아 폐부 깊숙히 마실 수 있는 것이 좋은 듯 했다. 미국은 혼자 조용히 앉아 사색할 기회가 별로 없다. 항상 바쁘게 쫒기는 생활이라.
미국의 대학들은 담장이 없어 학교내 모든 길은 사방팔방 곧바로 바깥 찻길로 연결되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무언가 학교라는
틀속에 보호받는 아늑한 느낌이 아니라 휑하니 뚫린 공간으로 느껴져서. 하긴 우리의 대학은 데모할 때나 계엄령시엔 앞뒤 두
대문만 전경들이 막으면 완벽하게 차단된다는 단점도 있긴하다. 데모하다 학교 안으로 쫒겨 들어오거나 밖으로 도망나가기도
힘들다는 말이다. 미국에선 대학생들이 그리 데모를 하지 않으니 담장을 칠 이유도 없겠지만. 요즘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점점
이기적이 되고 우익이 되어 담장이 있건 없건 별 차이는 없게 되었다.
언니는 특히 중고교 어머니 모임 강의때는 뒷자리에서 혼자 펑펑 울고 앉아있어 민망하였고 나는 들킬가봐 신경이 몹시 쓰여 할 수 없이 집에 혼자 있게 하였다. 언니귀엔 나의 강의는 최고의 말씀으로 나는 최고의 천재이고 최고의 인격자이고.. 최고의.. 등등 뭐든지 눈깍지 귀깍지가 씌어 있는 최고의 '동생바보'였다. 자신만 그렇게 알고 있다면 그건 자유겠지만 내 아이들 내 친구들에게 까지도 그렇게 늘어놓을 때는 정말 어디 쥐구멍에라도..
생각해 보면 언니는 분명 자신의 딸보다 평생 나를 더 사랑하였다. 부모들은 자식이 어렸을 때 무얼 조금이라도 잘하면 천재라며 호들갑을 떨고 남들에게 자식자랑을 마구 늘어 놓듯이 내가 하는 모든 언행은 언니에게 그런 식이라 창피하였다. 언니에게 나는 대여섯살 그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었으니 내가 무얼 말하던 어떤 행동을 하던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천재적으로 보였다. 내 어머니와 언니는 내게 모두 극단적이었는데 그 중간의 중용상태는 불가능했을까. 어머닌 나를 끝없이 외롭게 하셨고 언니는 나를 끝없이 버릇없는 아이로 만들었었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내가 만일 그 때 아들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의 어머니는 나를 물고 빨고 내몸이 바닥에 닿을 새도 없이 안고만 돌아갔을 것이고 그런 아이들의 말로가 뻔하듯 나는 그 후 무능한 남자애가 되었을 것이다.
장가를 보내도 며느리에게 나를 완전히 내 놓치 못하여 나는 고부간의 갈등속에서 평생 마누라로부터 만족할 만한 사랑을 못받고 불행한 결혼생활끝에 무능한 남편으로서 이혼을 당했을 것이다.
험난한 직업세계에도 나는 적응을 못해 엄마에게만 매달리는 멍충이가 되었을 것이고. 엄마 역시 성격강한 최씨 집안 출신이라 (이상하게도 평생 내 주위엔 최씨들이 많다 나역시 반은..) 나는 어머니에게만 속해 있었어야 했겠지.
그럼 아들과 딸 중 어떤 것이 더 좋았을까. 가운데 중간 中性은 없으니까. 나는 그래도 딸이 더 낳았다고 본다. 배부른 돼지보단 고뇌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하듯이. 내가 만일 남자였다면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며 위로해줄 수 있었을까. 나는 내 자신이 고통의 경험을 맛보았기에 그들의 아픔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하느님이 내게 바라신 것 아니었을까.
이 지구상에 온 목적이 자신을 훈련시키고 각성시키는 것에 있다면 다행히 나는 제법 훈련을 괜찮게 받고 가는 셈이니 천만다행 아닌가. 아들이었다면 앞으로도 몇번이나 더 와서 험난한 인생살이를 해야 했을테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다고 보고 요즘은 그저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는 기도(명상)만 한다.
언제나처럼 또 글이 길어져 다음 편에서 계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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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신정주 (본명 신경희) 작성시간 22.05.11 kbsns 5월 19일날 산비탈양님 언니가 인사동에 오신답니다
귀천에서 1시30분에 나오셔요
저도 보구요 ㅎㅎ -
답댓글 작성자신정주 (본명 신경희) 작성시간 22.05.11 김덕신 산비탈양님 언니 울고 있겠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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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색즉시공공즉시색 작성시간 22.05.13 지루한줄 모르고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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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산비탈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5.13 지루하지 않으셨다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