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대하며 인민의 리익을 진정으로 옹호 보위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진정으로 지켜주는 군대만이 인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받을 수 있다. 인민혁명군은 주민부락에 잠깐 들렀다 가는 경우에도 인민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군대라는 걸 등대고 절대로 재세를 하지 않았다. 배낭을 벗어놓기 바쁘게 물을 긷고 불도 때고 마당도 쓸고 장작도 패주었다. 그런일에서는 사령관도 례외로 되지 않았다."
"자본주의 군대에서는 동지관계 상하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거기엔 오직 강압 기만 갈등 대결 맹종 맹신이 있을 뿐.슬픈 사실은 제국주의 국가의 군대에 선 병사 상호간에도 서로 위해주고 아껴주는 인간본연의 아름다운 세계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우리 백성들은 그 사실을 체험하고 인민군들은 신사적이라며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우리 국군들은 오히려 경계하였다. 인민군들은 절대로 여자들을 겁탈하거나 식량을 강제로 뺏지 않았는데 국군만 보면 도망갔다는 말들을 나는 직접 많이 들었다.
우리 귀한 청년들이 군에 가서 빳다를 맞고(다행히 요즘은 좀 낳아졌다지만) 영혼을 있는데로 상처받고 있는 이 사태는 언제라야 개선될 것인지. 심상이 순수하고 영혼이 맑은 청년들은 그 트라우마로 평생 괴로울 것이다.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고 인민군들은 위아래로 막히자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가 북의 도움의 손길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북에선 여러 경로로 도움을 주려 했으니 그것을 잘 알고있는 남의 군대가 곳곳의 길목을 철저히 차단해버린 바람에 그들은 모두 사살돼버려 연결이 되지 못했다. 이현상은 바위위에 앉아 아련히 북쪽을 쳐다보며 있었다는 사실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현상 뿐이 아니라.. 내가 궁금한 것은 이현상이 죽을 때 까지 북에서 그렇게 힘썼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들을 포기하여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숨을 거두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제발 전자였기를.
그런데 그들은 춥고 배고파도 보급이 차단돼 있어 참다못해 밤에 지리산 아래 민간인 촌으로 내려가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절대로 강제로 욱박지르거나 총을 들이대지는 않았을 것이고 필시 그들이 가지고 내려온 '화폐교환증'을 내밀며 곡식등을 주면 나중에 그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며 설득했을 것이다. 곡식포대를 지고 산으로 운반해주면 그 삯도 드리겠다고 정중하게 청했을 것이고.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국군들이 들이닥쳐 그런 집은 사정없이 보복을 하여 린치를 가했다. 특히 부역자들은 바로 빨갱이라며 끌려갔으니 '밤에는 인민군 낮에는 국군'으로 번갈아가며 당한다고 불만이 많았다.
이현상휘하에 빨치산으로 있던 28세의 청년 이태(李泰)는 1952년 혹심한 지리산의 겨울과 배고픔을 더 견딜 수 없어 3월에 토벌대에 투항하여 그 후 '남부군'이란 제목으로 체험소설을 쓴다. (이현상은 1953년 9월까지 버티다 토벌군에게 사살되어 그로서 지리산의 빨치산은 공식적으로 전멸한다.)이병주의 '지리산'도 웅장했지만 이태의 글은 참으로 더 생생한 아픔으로 닥아오던 생각이 난다. 그 후 그는 옛날의 기억을 떠올려보려 다시 지리산에 올라 보았는데 여기서 저 능선까지 상당히 가까워 산을 타고 쉽게 오르내리던 거리가 그때 보니 꽤 멀어 참 이상하다고 쓰여있었다. 그들은 산사람이 다되어 타잔처럼 산을 타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으로 68년 공비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이승복어린이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2003년 드디어 나는 직접 평창으로 차를 몰아 가 보았다. 물론 산좋고 물좋은 경치도 즐길 겸 평창의 경치에 빠져 그 속사초등학교를 찾아(네비게이션이 아직 없던 때라) 겨우 도착했더니 오후 4시 30분. 5시에 문을 닫는다 하여 금방 보고 나오겠다해도 수위아저씨는 절대 안된다한다. 할 수없이 학교앞 모텔에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에 입장을 했는데 교문을 들어서니 바로 오른 쪽에 시골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잘 지은 고급 2층 관리건물이 버티고 있어 정부에서 이곳에 큰 투자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입장료는 전혀 없고 대절버스들이 연이어 전국 곳곳에서 도착하여 사람들은 이승복전시관을 보러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전시관은 정부에서 모든 국민들이 보러 오도록 장려하고 있는듯 보였고 관리비 역시 물론 홍보비로 정부의 세금에서 아낌없이 지출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시관엔 두 면에 빼곡히 사진과 기사로 차 있어 나는 고개를 쳐들고 찬찬히 훑어 읽어보았다. 모두 그냥 휙휙 지나가 버리지 나처럼 귀찮게 읽어보는 이는 없었는데 나의 관심사는 과연 누가 이승복군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을 듣고 나중에 전했는가 인데 아무리 보아도 그점이 확실치않고 애매하였다. 아버지는 어느 친지의 이사를 도우러 출타중이시어 다음날 돌아오실 예정이었고 문제는 그 형(당시16세)은 아버지와 함께 간 것도 아니고 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확실히 언급이 된 바가 없어 필시 외출중이었던 것 같았는데 승복이 외친 그 말은 그 형이 근처에서 듣고 전했다하여 무언가 석연치 않게 보였다..
벽보엔 군복을 입은 박정희가 군복의 부하들과 방문해 기념사진 찍은 것도 붙어있었는데 그는 무언가 당당해 보였다. 보아라, 이래도 내가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내거는 게 틀렸냐 하는 표정으로.
그런데 그 후 말이 조금씩 변하여 요즘은 그 형도 동생들과 같이 집에 있다가 공비의 칼에 찔렸고 아버지는 무언가 감이 이상하여 도중에 집에 돌아와 공비들에게 칼에 찔려 당했다고 돼있다.. 그 벽엔 분명 아버지는 다음 날 와보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했는데. 초를 다투어 도망가는 그들이 안가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 아버지를 찔렀다는 말인가.
이 기사는 조선일보가 독점 보도한 것인데 그 후 이 기사는 그신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어 소송에 까지 들어가 있었다. 승복이 외침을 누가 들었느냐는 문제에서 조선일보 기자가 들었다는 기사가 잠깐 있었는데 그후 왠일인지 그말은 쑥 들어가 버렸다. 8년간의 지리한 소송끝에 대법원은 조선일보의 손을 들어주었고. 어쨋든 조선일보의 그기사는 어린 학생들에 대한 반공교육의 도구가 되어 군사정권에 큰 도움을 주었고 어린이들의 공산당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박정희의 사랑을 받는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일보는 조선일보다. 그 후 조선일보의 정부여당과의 밀착은 더욱 공고해지고 그 세력과의 허니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일제시대이래 권력의 풍향계 눈치만 보는 그 신문은 여의치 않으면 바람에 따라 그 밀착의 방향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박정희는 곧 각 초등학교 교정에 이승복동상을 세우도록 지시했고 이승복 사건은 5학년 도덕교과서에 그 기사를 넣도록 한다.
승복의 아버지 이석우씨(당시35세)는 그동안 내내 정신질환을 앓아오다가 2014년 83세의 나이로 강릉의 한 병원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저세상에서 아들을 만나 이제 편안한 삶을 보내시기를. 승복의 형 이학관(올해 54세)씨 역시 내내 정신질환에 시달렸는데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동생이 나는 공산당이.. 라고 외친 것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래도 늦깎이로 상고를 나와 지금은 한전자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다행히 결혼도 하여 슬하에 아들이 둘 있다고 한다. 그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니 매년 가족들 모두의 제사는 지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믿거나 말거나 내 나름으로 소설을 써보겠다.
공비들 백이십명에서 따로 떨어진 그 4명은 오랫동안 앉아 밥을 먹어보질 못해 배는 몹시 고프고 피로에 지쳤는데 외딴 집이 있어 잘되었다 하고 들어가 주인에게 식사를 청하였다. 승복이 어머니는 우리집에 쌀은 없다했더니 공비는 전투용으로 준비해온 두툼한 남한돈을 내 놓으며 무엇이든 좋으니 배를 채울 것을 해 달라 하였다. 돈뭉치를 본 어머니는 저 돈이면 장에 가서 곡식을 실컷 새로 사고도 남겠다 싶어 겨울저장용 옥수수 감자등을 많이 내다가 신나게 큰 솥에 삶아 내 놓았다. 이제 다음장에 쌀을 사서 자식들에게 흰쌀밥을 해줄 수도 있겠다는 희망으로.
삶는 동안 공비아저씨는 승복이에게 몇학년이냐 학교가 멀어 힘들지 않느냐 하며 친절히 말을 걸었는데 승복이는 '학교에선 공산당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가르쳤는데 아저씨들을 보니 좋은 사람들 같네요,'라 하자 공비들은 모두 즐거운 듯 웃고 식사를 급히 마치자 그들은 바쁘다며 '통일이 되면 우리 모두 다시 만나자'라 하고는 급히 자리를 떴다. 얼마 후 남한 군경들이 들이닥쳐 살기등등하여 어찌된 일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라하며 욱박지르자 이 겁많고 순진한 강원도 산골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보고했던 것이다.
................. (이 부분은 너무도 비참하여 생략한다. 과거 지리산 자락 마을에서 벌어진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고 상상하면 된다. 어린아이의 입은 대검으로 귀밑까지 찢겨져 있었다고.. ).......
만일 승복이 전경들에게 자신이 '공산당이 싫어요'라 했다하면 그렇게 잔혹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한 군대는 적에게 식량을 주는 것에 가장 격분하여 미쳐버린다.
나중에 돌아온 아버지와 큰 아들도 칼부림을 당해 상처를 입고 특히 큰아들은 십여군데나 칼에 찔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인사불성이라 전경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치고 거름에 갖다 버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아들은 다시 살아나 전경들은 상의결과 그를 다르게 이용하기로 한다. 즉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말을 해야하는지를 군경들은 칼로 더 위협하며 똑똑히 다짐을 해둔다. 특히 그 아들은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정신착란이 와서 그 후 성인이 된 후도 오랫동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큰 아들이라해야 고작 16세 였는데. 중3이었지만 고교에 진학할 정신 상태가 못되어 스무살이 훨씬 넘은 후에야 겨우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 후 군사정권이 지나자 국민들 사이에 그 사건에 대해 말이 많았고 특히 학부형들은 자기 아이들이 교과서의 그 가르침에 큰 충격을 받아 '우리도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렇게 외쳐서 죽어야하나'하는 공포에 시달려 아이들 정서에 큰 장애가 된다며 항의하였고 그 사건은 조작이라는 말도 많아 정부에선 90년대 이후 교과서에서 이승복얘기는 자취를 감추고 각 초등학교 교정의 이승복동상도 허물어버린다.
미국의 중재로 북한은 남한에게 무장공비를 보낸데 대한 공식사과를 하였다. 그들은 남한 시골 주민들을 집합시켜놓고 북한책자를 배포하고 북한의 발전상과 함께 김일성사상을 교육시키면서 인민유격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으니 참으로 순진하다할까 무지하다할까, 남한주민들은 이미 철저한 반공의식 교육으로 그렇게 간단히 넘어가지 못한다는 걸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지금이 1930년대 북만주도 아니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정권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한다는 걸 몰랐으니 참 한심했다. 어쨋든 한민족으로서 한쪽이 다른 쪽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한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120명 공비들 중 7명은 생포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었다니 생포된 그 7명이 불쌍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사살되는 것이 낳았을 것을.7명에게 남쪽으로 귀순하라 종용했지만 그중 한명만 귀순을 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음을 택하였다. 그 한명이 누구인지 언론에 공개되진 않았지만 여생동안 조국과 동료들에대한 죄의식과 배신 그리고 회한으로 괴로웠으리라.
사진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도 공비들의 칼에 찔렸다며 피를 흘리고 있던데 내가 알기로 그 벽보에 의하면 공비들이 떠날 때 그 두사람은 집에 없었다. 무언가 엉성하고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온몸이 칼에 찔려 거의 시체가 다 된 그형은 등뒤에서 찔려 칼이 앞으로까지 나오고 다른 곳도 십여군데 깊은 자상을 입었는데도 그는 살아 숨을 쉬고 있었다 한다. 그는 하늘이 내린 대단한 체력의 최강의 증인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가 승복이 외침을 들었다는 기사는 예사로 듣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그 기자가 공비를 동행했을리는 없고 우리쪽 전경을 참전기자로 취재차 동행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그가 들은 외침은 '나는 공산당..'이 아니라 찢어지는 어린아이의 비명이었을테니 그 대목에서 우리는 문제의 진리를 봐야한다.
나는 그 학교를 나와 학교앞에 많은 음식점중 가장 오래 된 집을 알아내어 들어가 보았다. 후덕하고 편안하게 생긴 그 아주머니는 처음에 이 학교앞엔 음식점이 자기집밖에 없었는데 요즘은 음식점 모텔등이 더 많이 들어섰다 한다. 이승복덕에 완전히 관광촌처럼 발전했다고. 매년 12월 9일 승복이 죽은 기일이 되면 이제 40대가 된 그의 학급친구들이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꼭 이 집에 들러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진다 한다.
지구상 어느나라가 전쟁이 나면 자신들 백성들부터 잔인하게 죽이는가. 양민학살(거창 노근리 산청 베트남한국군 지리산 함평 제주 등)에서 우리 정부측에서 발표한 희생자 수는.
제주도 1,775명
거창군 719명
함양군 593명
.............................(이하 생략)
함양군이란 주로 지리산 자락을 말하는데 인구밀도가 극도로 희박한 그곳에서 그 숫자란 엄청난 것이다. 정부측 자료이니 실제 숫자는 감안해서 생각해야. 참고로 진상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제주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이라 한다.
노근리의 총살은 미군에 의한 것인데 노근리 외에도 미군이 저지른 곳은 더 많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개구리 소년들 부터 효순이 미순이 사건등 모두 미군의 짓이라는 건 다 알고 있지만 정부에선 쉬쉬한다. 어떤 사건이든 정부가 나서서 한사코 희석시키는 사건일수록 그것은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개구리 소년들사건도 당시 김대중대통령이 적극 덮으려 한 것보면 어떤 힘이길레 김대통령만한 분도 꼼짝 못했는가 싶다.
베트남 양민학살한 한국군문제도 아직 미해결이지만 내게 한국의 군대를 장악하고있는 상위층은 모두 서북청년단들의 혼(魂)이 철저히 씌워진 것 같아 보인다.
내가 농장생활을 할 때 서울의 시댁식구들 방문 때문에 편할 날이 없었다 했는데 실은 그보다 더한 손님들 무리가 있었다. 시어머니는 결혼 후 가족들을 데리고 시골의 친정곶이로 들어가 2십년간을 살며 자식들도 낳고 그곳에서 남편도 떠나 보냈다. 친구들을 좋아하는 시어머니는 동네분들 모두를 사귀며 살다가 나중에 서울로 와서 나와 살다가 결국 시골 농장으로 오신 것이었다. 그러자 같은 경상도 내이니 그 시골 친구 친척들이 줄을 지어 우리 농장을 방문하여 그 손님들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집에만 가면 며느리가 밥도 잘 해주고 시어머니의 접대는 물론이고 몇일 있다 떠날 때는 아들이 차비라며 두둑히 내준다더라 하는 소문이 쫙 퍼져서. 남편은 한사람 당 3만원(요즘가치로 약 25만원)씩을 주었는데 시외버스비 몇천원을 빼고도 상당히 남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런 성주(城主)같이 과시하는 역할에 크게 만족하여 내가 그러다가 우리 빚은 언제 갚냐고 푸념하면 나를 대단히 이기적이고 나쁜 며느리로 폄하하는 바람에 불평도 별로 하지 못했다. 하녀는 주인이 하는 일에 간섭하면 안된다는 투로.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그렇게 힘들어했나 반추해보니 그 노동엔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수고 많았다며 추어주는 재미라도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 것을. 그러나 그 대상이 항일혁명투사들이었다면 나는 얼마나 신이나서 열과 성을 다 했겠나 생각해 본다. 그렇게 되면 또 남편이 결사반대했을 거고.
내가 그런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분들 중에 한 할머니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나서이다. 그 할머니가 젊어서 한 때 진주에 나가 살 때인데 6.25전쟁이 끝나는 해(1953년) 7월 1일부터 가까운 사천軍비행장(버스로 3,40분거리이니 15분정도 걸릴 것)에서 미군 폭격기가 아침 10시만 되면 날아와서 진주시내를 폭격했다고 한다. 처음엔 무작정와서 포탄을 퍼붓는 바람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그 후 가만보니 그로부터 정확히 보름동안 아침식사 후 일과처럼 정확한 시간에 와서 두시간동안 진주시를 폭격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모두 남강으로 달려가 빼곡히 고개만 내밀고 들어가 있다가 비행기가 가고나면 나왔다고. 어쩐 일인지 강에는 포탄을 안떨어트렸다니까. 강물은 파괴할 수 없었을 테니. 그 때 진주시내는 거의 파괴되어 지금 있는 집들은 모두 그 후 새로 지은 것들이라 한다.
내 생각엔 전쟁도 거의 끝나가니 남아있는 포탄들을 재고처리할겸 7월 27일 종전되기 전 전쟁도 끝나 무료한 병사들을 달래기위해 아침과 점심사이에 남한의 한도시를 깨 부수는 소일거기를 준 것 같다. 히로시마를 치기 위해선 서태평양의 티니언섬의 비행장에서 6시간이나 날아와야 하지만 진주시는 어떤 대항능력도 없고 15분 거리밖에 안되니 간단한 사냥이나 낚시거리로선 제격이었을 게다.
서부경남의 가장 큰 중심도시를 무자비하게 파괴한 미국은 그에 대해 어떤 사과도 없고 다른 지방들 처럼 미군의 만행은 언론 상 쉬쉬하여 그런 큰 사건을 우리는 모르고있다. 우리는 그들의 식민지 정도가 아니라 마구 죽여도 되는 개돼지임에랴. 그들은 게임하듯 한 도시의 사람들과 살고있는 집들을 재미삼아 포탄을 떨구어 파괴해 버렸으니 그들이 우리의 혈맹이요 우군이라고...?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는데 다른 할머니들은 모두 아는 얘기라며 맞다 맞다하며 맞장구를 치셨다. 나의 시어머니부터 그 때 그 할머니들은 거의 다 저세상으로 가셨으니 그 민간인학살을 증언할 분들은 이제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그렇게 온갖 파괴와 살륙을 겪은 당사자인 남한은 종전협정에 끼지도 못하고 북한 중국 미국만 싸인을 했으니 왜 우리가 아니고 미국이 대신했는가.
그나저나,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은 이승복군 가족들을 죽이고 죄없는 두남자에게 칼부림을 한 범인은 어느 쪽이라고 판단하십니까.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하이고 작성시간 22.08.08 김일성주석께서는 남파공작원들의 애환을 이해하신겁니다.
그당시는 북파공작원 남파공작원들이 다반사였는데 남파공작원들이 체포된후전향하면 남과북어느쪽도 환영을 받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신겁니다.
그리고 종당에 김신조일당처럼 공비 아닌 공비로 비참하게 이세상을 떠납니다.
이점을 너무도 가슴 아프게생각하신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파공작원을 보낸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나 나는 그리 생각합니다.
대신 남쪽도 북파공작원을 보내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나 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입니다.
즉 소설에 가깝습니다.
북파공작원도 엄청나게 이남쪽에서 보냈습니다.
요즘은 <휴민트>라고 합니다.
중국 화교들 중국에 왔다갈수 있는 북조선 공민들을 이용하는것같은데...
이상 소설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
답댓글 작성자산비탈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8.08 sjmuhan님 하이고님 그동안 궁금
하던 상당부분이 님들의 글로 인해
풀렸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세리랑 작성시간 22.08.08 하이고 믿고싶지 않은 일이지만
한국의 정보부대란 게 있지요.
그 부대에서 훈련을 시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냥 소문으로만 듣고
그런가보다하고 흘리고 말죠.
박정희시대만 해도 북파공작원이 있었다고 하죠.
실미도 사건이 그럴 가능성을 인증한 것이고요.
여하튼 정보부대에서 그런 일을 한다고 알만한 사람들은 알죠.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고 인증하라면 못하고 말죠.
왜냐면 극비라서 실증하라면 뻑나가기 때문이죠.
한국에서 특공작전으로 특정인을 암살한다고 하는 것도
다 그런 차원이라고 보여지죠.
북한도 그걸 다 알고 김우중씨를 호되게 몰아부쳐서
김우중이 간첩질을 했다는 걸 실토했다는 말도 있죠. -
답댓글 작성자김봉수 작성시간 22.08.12 1960년대 초중반에
북의 지도부에서 젊은 간부들의 등장이
있었습니다
인민군에서는 국방상으로 김창봉,
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허봉학이 되였는데
이들이
인민군대내 모든 사업들에서
당의 로선과 방침대로 일한것이 아니라
주관과 독단, 군벌관료주의, 소영웅주의,
공명주의, 모험주의적으로 일하였지요
김신조 무장소부대 뿐만 아니라
여러 무장소조를 남파하기도 하였고
무장유격대 활동만으로도
남조선혁명을 성공할수있다는 망상을
시도하였지요
하여
많은 젊은 인민군인들이 희생되였고
인민군의 전투력강화에 지장을 초래하였으며
남북관계에도 좋지않은 영향을 가져왔지요
김창봉일당은 조선로동당 인민군 위원회
4기 4차전원회의에서 폭로비판되고
응당한 타격을 받았지요
김창봉, 허봉학 등은 항일투쟁시기에
아동단, 소년중대를 거친 유격대원으로서
구대원, 지휘관들이 친동생처럼 아끼고
키워왔었지요
해방후에는 당에서 젊은 투사들을 쏘련에
보내여 군사종합대학서 유학까지 하고온
인물들이였는데
당중앙의 군사상과 정책대로가 아니라,
인민군을 당의 군대, 인민의 군대가 아니라,
저들의 명령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저들의 소왕국처럼 만들려고 하였지요
당의 령도를 거부하고
인민들에게도 군림하였지요 -
작성자지금 이 순간 작성시간 22.08.09 우리들의 슬픈 현대사 서로서로 모략과 음모에 점철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