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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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촌인 작성시간26.06.22 new
님의 자식에 관한 야기는 믿음이 가질 않아요.
공부 안하고 논다는 데 노는 비용이
더 많이 드는 걸로 압니다
정유라의 승마 예술(미술,음악,운동) 돈 무지 드는 것으로 알고
재산이 없다는 데 이런거 곤란하지요
민주화 하는 데 노동귀족(직업 데모꾼)이라도 되는지
님이 자연이 어떻고 하는 데
내용을 쭉 봐 왔는데
책에나 나오는 야기 이론에나 나오는 야기이지
실제로 배를 골아가면
식수를 구하고 열매를 따 먹고
물고기를 잡아보고 사냥을 한 것은
전혀 보이 질 않아요
요행으로 잡은 방편을 확고한 신념도 없이
끌고 가려고 하는 게 보여요
사는 곳 사진을 보니
벌거지(지네,쉰발이) 뱀이 나올 것 같은 데
방역과 퇴치는 손 수 하시는지
님의 글을 보니 선생으로 퇴직한 형을 보는 것 같아서
입으로 만 농촌생활 좋아하지
교육관도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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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스스로그러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41 new
그당시 농촌은 다그러 하였지만....
나는 어린시절을 참으로 힘들게 보낸것 같다.
할아버지때는 마당백석을 하는 부자였다고 하지만....
나는 전혀 기억이 없다.
끼니를 죽으로 국수로 때우고 으례 학교에 돌아오면 소꼴을 베고 소먹이고
개간밭에서 늦게 돌아오던 부모님을 대신하여나무를 때어 저녁밥을 짓고
겨울방학이면 어린나이에 지게를 지고 어른들과 같이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강한분이 셨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면 집안식구들이야 굶어 죽든살든 남의집 먼저 걱정하시고
많은 재산을 어려운 이들에게 빌려주고 돌려 받지도 못하고....
해방공간에서 빨치산 산패들이 우익 청년단장집에 불을 질러 불타는것을 새벽에 오줌누러 나오셔 보시고 불이여 했다고 다음날 영문도 모르고 지서에 끌려가 망루에 묶어 놓고 경찰과 우익청년단에게 죽도록 맞았습니다.
경찰서에 넘겨져 누가 땅문서를 넘겨 주면 내보내 준다고 해서 논밭문서를 넘겨주고 나셔야 풀려 나왔 습니다.
이놈들은 애당초 땅을 뺏으려는 것이 목적이 였습니다.
그일로 평생 화병과 장독으로 농사일을 제대로 못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내몫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아버지 -
답댓글 작성자 스스로그러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48 new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양반집 부잣집 둘째아들이란 말만 믿고
꽃다운 17살 나이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추시고
아버지 얼굴 한번도 못보고 우리집에 시집을 오셨다 합니다.
일평생 호강은 고사하고 고생만 죽도록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선조들은 이성계쿠테타에 반기를 든 두문동 70賢人에 한분이십니다.
평생 재야사림에서 민초들과 동고동락 하면서 사시다가
폭악군주 숙종때 남인 사림 대표 논객으로 잠시 白衣 이조판서로 조정에 나가신 갈암 이현일 할배가 노론 영수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게 해서
그뒤 300년간 이조가 망한 고종때까지 중앙정계진출은 마지막 입니다.
매국매족 백성의 착취수탈세력인 노론들과 맞장을 뜨다가
귀양과 유배생활을 거듭 하면서
중앙정계진출은 노론세력들의 괘씸제인 연좌제로 오직 우리집안은 진사초시 벼슬도 못했습니다.
그길을 마지막으로 벼슬길과는 영영 담을쌓고
江湖의 머물면서 부패한 노론과 지배권력에 맞서 가난한 선비의 양심과지조를 지키며
이조봉건 시대 외적이 침입하면 앞서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나서 곳곳에 항일순직비가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스스로그러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53 new
해방공간에서는 단독정부반대 자주독립 국가수립 건설을 위해
민족해방 계급해방 투쟁에 앞장서 싸웠습니다.
외가에 남자들은 기골이 강대하고 뱃짱이 좋고 한학과 신식교육을받은분 같습니다.
어릴때 주위에 나이드신 어른분들이 나보고 너 외아재는 통이 크고 베짱도 좋고 잘생기신 훌륭한 사상객이라고
너도 크면 큼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일제때 훌륭한 사상객이라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일제때부터 외삼촌들은 사회주의독립운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일본경찰이 온몸을 인두로 지지고 거의 초죽음이 되도록 고문을해서 내놓으면 집에서 정성껏 치료를 햇서 보양한것을
어릴때 옆에서 보신 어머니가 가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 민족,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 친일민족반역에 길로 돌아서고
더이상 탄압에 견디다 못해 만주로 떠났지만...
외아저씨는 워낙 기골이 강대하고 끝가지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일제말 일본고등계형사가 위에서 전령이 왔는데 여기에 있으면 죽을지 모르니 멀리 피하라 해서 서울로 가족이
이사를 갔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스스로그러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56 new
당시 일본 형사는 직책상 어쩔수 없이 악랄한 고문을 했지만... 독립운동가와 사상객에 대해서는 인간적 존경심과 대우는 정중히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놈 밑에있는 조선인 고등계 형사보조하는 인간들이 더 야비하고 악랄했다고 합니다.
이사가서 일제 해방후 해방공간에서
나이든 외가 형님 들은 서울홍릉 옛서울공대근처에 사시다 우익테러로 돌아가시고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살길을 찾아 북으로 가신지 그 뒤 생사를 알길이 없습니다.
오래전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연관되어 7년간 옥고를 겪은 기록을 찾아서 사회주의독립운동가도 유공자로 추서한다고해서 국립 문서보관서에 자료을 찾아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한적이 있습니다.
담당직원의 말인즉
이런분들을 마땅히 일제때 독립운동 서훈을 해야하나 북에서 농림차관까지 하신분이라
현행법으로는 어쩔수 없어 곤란하니 훗날 좋은세상이오면 하라고 한다.
내위로 형들은 그당시 농촌은 예방의학이 제대로 안되어
요즘 같으면 큰병도 아닌데 어릴때 저세상으로 다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위 누나와는 12살 차이가 납니다.
그당시 가난한집 아이들은 다 그러 하였지만 나는 다른집 애들보다 더어렵고 힘들게 산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스스로그러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58 new
당시 일본 형사는 직책상 어쩔수 없이 악랄한 고문을 했지만... 독립운동가와 사상객에 대해서는 인간적 존경심과 대우는 정중히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놈 밑에있는 조선인 고등계 형사보조하는 인간들이 더 야비하고 악랄했다고 합니다.
이사가서 일제 해방후 해방공간에서
나이든 외가 형님 들은 서울홍릉 옛서울공대근처에 사시다 우익테러로 돌아가시고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살길을 찾아 북으로 가신지 그 뒤 생사를 알길이 없습니다.
오래전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연관되어 7년간 옥고를 겪은 기록을 찾아서 사회주의독립운동가도 유공자로 추서한다고해서 국립 문서보관서에 자료을 찾아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한적이 있습니다.
담당직원의 말인즉
이런분들을 마땅히 일제때 독립운동 서훈을 해야하나 북에서 농림차관까지 하신분이라
현행법으로는 어쩔수 없어 곤란하니 훗날 좋은세상이오면 하라고 한다.
내위로 형들은 그당시 농촌은 예방의학이 제대로 안되어
요즘 같으면 큰병도 아닌데 어릴때 저세상으로 다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위 누나와는 12살 차이가 납니다.
그당시 가난한집 아이들은 다 그러 하였지만 나는 다른집 애들보다 더어렵고 힘들게 산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스스로그러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44 new
국민학교 저학년 어린나이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당연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었습니다.
어김없이 일요일이 되면 뒷산 500고지 꼭대기 개간밭에 이른 아침을 먹고25키로가 넘는 쟁기나 비료를 지고 오ㅡ르막 산길을 올라가 올때는 내리막길이 쉽다고 40키로가 넘는 땔나무를 지고내려 옵니다.
산꼭대기 해는 산길 8키로 짐지고 집에내려 오면 저녁 9시가 가까운 밤중 입니다.
그때 어린나이에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으면 ....
소원은 더도 덜도 아닌 제발 일하고 내려갈때 빈지게로 가고 싶다고 했을까요
평소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먹이고
소꼴을베놓고 마을뒤 집에서 10리 이상 떨어진 개간 밭에서 일하시고 밤 늦게 돌아오시는부모님을 위해 나무를때어
쌀이 귀한 시절이나 보리쌀을 삶아 불려서 밥을 지어야했다.
나무를 때어 밥을 하다보면 물과 불을 조절을 잘못하여 밑에는 타고 중간에만 밥이되고 위에는 죽이되는
삼층밥이 되기가 일수 였습니다.
각자 식미와 좋아하는 대로 먹으면 되지 하지만....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것이 생쌀을 그대로 먹는것 같은 오래 먹다보니 질러버렸습니다.
평소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에 소먹이로 가는것이 가장 즐겁고 행복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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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스스로그러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47 new
스스로그러함 산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산딸기등 나무열매를 따먹고,
나무를베어 칡으로엮어 어설프게나마 원두막도 지어보면서
그때 어린시절 산에서 뛰어놀며 호연지기와 야생성을 키우면서 .........
자연속에 살아가는법을 일찍 배운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농사일과 먹고살기에 바빠서 한번도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별간섭은 없으셨습니다.
모든것을 너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산에서 감자를 삶거나 구워먹으면서 형들이 재미있는 이야기에 날이 저문줄모르고 듣다가
소를타고 집에돌아오고 .....
딴집소들은 등에타면 발로차고 난리를 피우지만 .........
우리소는 어머니와 내가 소를 가족의하나로알고 사랑으로 보살펴서 그런지 ...........
소가 죽을안먹고 아플때는 소마구에서 같이 자기도 하면서...
어릴때 소장수에게 소를팔아 일주일넘게 밥도 안먹고 울정도로 소를 끔직히도 사랑했다.
항상 소는 나의분신이였고 내사랑의 대상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소도 내마음을 아는지 내가 소를 타면 가만히 등을 내밀어 주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감성지수가 소가 사람보다 높은것 같다.
어머님은 소등이 굽는다고 절대로 소를 타면 안된다고 야단치시지만.........
부모님몰래 어린 우쭐한 -
답댓글 작성자 스스로그러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52 new
스스로그러함 동네 동생과 형들이 부러움속에서 소먹이러 갈때는 언제나 개선장군처럼 제일앞장서 소를 타고다녔다.
특히 동네사람이 모여있는곳과 동갑내기 여자애들이 노는곳에서는
일부로 보란듯이 소를 타고다니기도 했다.
저는 중학교 어린나이에 이미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른 장정들과 대등한 노동력을 갖추어
모내기 손바꿈 품앗이를 할정도 체력과 노동력을 길러야 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을 짓고 하지만 ........
모듯것이 부족하고 가난하고 힘든시기 였지만 ........
그속에서 재미있는 어린시절을 즐기며 보낸것같다.
누나들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버지 농사일을 대신하여 낮에 남이 볼까봐 처녀들이 지게를 질수가 없어서
밤에 볏단을 지게로 져 나르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강하게 자란누나와 동생들이
가난하고 어려운집에 시집가서 자식들 잘키우고 成家해서 잘 사는것을 보면
어릴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닌것 같습니다.
그당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자녀 교육은 요즘사람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사내애는 다섯살만되면 안방 어머니 곁에서 사랑방 아버지 방으로 사정없이 내쫓아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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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스스로그러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58 new
스스로그러함 사내가 안방구석 여자들속에 크면 암사내가 되어 제대로 사내답게 크지 못한다는 것이였습니다.
네 다섯살때 어머니 젖가슴을 만지고
어머니 품속에서 자고 싶은데
밤에 자러 나오지 않으면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셨습니다.
한창때도 여자에게 성적 욕구보다 가슴을 만져 보고 싶은것은...
아마 어릴때 쫓기듯 사랑방으로간 어머니 젖가슴이 아쉬움 때문인것 같습니다.
부부사이라도
합방할 시기가 아니면 부부유별이 엄격했고 유가적법도에 철저했습니다.
누가보든 안보든 행동을 함부로 하지않으시고
아무리 화가나도 어머니에게 욕설은 하지 않으신것 같습니다.
사랑방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글을 읽거나 본인일만 하시면서
집안식구에게는 엄했지만 내집보다 이웃을 먼저걱정하고 꼿꼿하게 사셨습니다.
네다섯살 어린나이에 새벽 소죽끓일때 단잠을 깨워 찬물에 세수하고 꿇어앉아 천자문을 외우게 하고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잘못 읽고 해석하면 예외없이
몽치미 (木枕)위에 종아리를 걷고 올라서게하고
싸리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셨습니다.
당시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것이 전통적 자식교육 방법이였습니다.
늦게 얻은 귀하게 얻은 아들이지만 엄하게 키워야한다는 교육관이 확고한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