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4. 고난의 행군2-군인들을 가족처럼 | |||||||||||||||||||||
기사입력: 2016/09/27 [04: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우리 부대에는 한 달에 한번씩 “애병의 날“이 있다.
이 날은 3명씩 가족들이 조를 무어 한조가 20명 정도 군인들이 먹을 반찬을 만들어 부대에 가져가 가족들이 직접 식탁을 차린다.
군인들이 항상 부대 밥을 먹으면 집에서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그리워 할 것 같아 한 달에 한 번씩 가족들이 만든 집밥을 먹게 하는 것이다.
반찬종류는 정해진 것이 없고 각 조들에서 의논하여 5가지 이상의 찬을 만든다.
내손으로 만든 음식을 내 동생 같은 병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뿌듯하고 흐뭇하다.
그 외에도 1월1일, 음력설, 2월16일(김정일국방위원장 생일), 4월15일(김일성주석 생일), 4월25일(조선인민군 창건일), 7월27일(승전기념일-휴전기념일), 8월15일(광복절), 8월28일(청년절), 9월9일(공화국창건 기념일), 10월10일(당창건 기념일), 12월24일(김정숙 항일투사 생일)을 비롯한 국가 명절들에는 가족들이 떡, 튀김, 여러 가지 음식들을 해서 군인들을 대접한다.
나는 만두를 빚는 것이 특기라 항상 만두를 빼놓지 않고 만들군 하였는데 우리 가족들은 모양이 너무 예쁘다며 부러워하였다.
우리 군인가족들은 전국에서 모여온 분들이어서 음식도 전국의 특색 있는 음식을 다 먹어볼 수 있었다. 명절 때는 가족들이 군관들, 병사들과 함께 조를 뭇고 써클 공연도 하였고 체육대회도 하군 하였다.
그럴 때면 언제나 우리 딸이 앞에 나서서 태권도 시범동작을 하군 하였다.
딸은 3살에 지방에 나와 7살부터 태권도를 배웠다.
어쩔 수 없이 하루는 딸을 데리고 15리 떨어진 시내 체육구락부를 찾아가 태권도지도교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딸이 꽤 할 수 있는지 좀 봐달라고 하자 선생님은 딸의 손과 체격을 자세히 보더니 시켜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 딸은 부대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체육구락부에 다니면서 태권도를 배우게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엄마인 나조차도 놀랄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면서 봄철에는 군관들 본인만 식량이 공급되고 가족들의 식량이 몇 달씩 끊기군 하였다.
하지만 우리 군인가족들은 집에서는 조금 어려워도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되는 “병사의 날”만은 어김없이 진행하였고 부대 주변 농장마을의 유치원에 자주 찾아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군 하였다.
주민들은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군인가족들만큼 고생스럽겠냐고 하면서, 자기 가족보다 군인들과 이웃마을 인민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하는 우리군인가족들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2002년 아버지의 생신 60돐이어서 나는 남편, 딸과 함께 평양의 부모님 집에 올라가게 되었다. 부모님 곁을 떠나 지방에서 군인들과 함께 부대끼며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5년만에 다시 부모님을 뵈러 평양에 간다고 생각하니 어린애마냥 마음이 둥둥 떠다녔다.
생일선물을 고민하던 끝에 나는 3일 동안 한 뜸 한 뜸 딸의 지성을 담아 아버지의 외투를 만들었고 더는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어머니의 선물은 시장에서 세타를 사서 준비했다.
생신날에는 지금까지 돈독한 우정을 이어오신 40년 전 군사복무 때의 친구 분들과 현재 공장에서 함께 일하시는 분들, 어머니의 병원 친지 분들, 그리고 우리 3형제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아버지를 축하해 드렸다.
우리 3형제가 힘을 합쳐 처음으로 해보는 가족의 큰 행사여서 참으로 뜻 깊은 의미로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았다.
나는 오랜만에 온 집이여서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과 3일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5년만에 다시 보는 평양의 곳곳에는 힘겨운 고난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아픈 상처로 남아있었다.
평양의 아파트들은 온수가 돌지 않아 힘겹게 추위와의 싸움을 하고 있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승강기가 운영되지 못하니 20층이 넘는 아파트를 걸어서 올라가야 했고 물이 나오지 않아 세수물과 위생실에 필요한 물을 등짐으로 높은 층까지 지고 올라가야 했으며 저녘이면 등잔불 밑에서 연기 그스름을 맡아가며 밥술을 떠야 했다.
지방에서 따뜻한 아랫목에서 생활해오던 8살 된 나의 딸은 추위를 너무 힘들어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5리터짜리 플라스틱 통에 뜨거운 물을 담아 이불속에 넣고 잠자리를 덥혔고 그 통의 물은 새벽까지 온기를 간직해 주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방바닥이 너무 차가워 솜버선을 신고 지냈으며 대낮에도 방안에서 솜 동복을 벗지 못하고 지내셨다.
우리 지방에서는 텃밭에서 생산한 야채, 농작물과 산나물, 집짐승들이 식량위기에 큰 도움이 되었고 겨울이면 산에 올라가 해온 나무들이 추위를 막아주어 그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견딜 수 있었는데 평양에서는 우리보다 몇 배 더 어렵고 힘든 나날을 이겨내고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3일간의 평양행을마치고 지방의 부대로 다시 내려가면서 나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활기에 넘쳐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그토록 소중한 삶을 망가뜨리고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한입에 먹어보려고 세계 최악의 경제봉세를 가하며 악랄하게 날뛰는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들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우리 자식들에게는 그 어떤 외세도 감히 꿈쩍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하고 강대한 조국을 물려주려는 우리 조국의 선군정치를 받들어 남은 군인가족생활에서 병사들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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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똑쏘리 작성시간 16.09.27 내가 한국살때 가장 힘들어 하던 땐 추석 설날 같은 명절이였습니다.
그날만 되면 비단한복들을 차려 입고 고향으로 몰려들어가 화투놀이에 술에
어울려 지내는데 거기까진 좋은데
모여 앉으면 김서방네는 집산게 두배 올랐다는둥
직장에서 승진했다는둥
강남에 어느곳이 아파트가 좋다는둥
돈자랑에 출세줄타기 자랑하는 모습들이 이겨내기가 힘들어서 명절을 참 싫어했습니다.
패거리들을 이루어 제일 못난놈 하나 타겟삼아서 쐬주 안주로 씹어대는 명절의 잔치밥상앞에
앉을 수 없는 이방인은 그들의 그런 모습이 한없이 싫었죠.
그게 민족명절이라고 민족을 가져다 붙이면 민족에서 제외되는 나는
아프리카 밀림에 들어가 살고 싶 -
답댓글 작성자똑쏘리 작성시간 16.09.27 은 마음만 가득하였고 어쩌다가 마음속의 묻어둔 게 툭 튀어나오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는둥 ...
화투놀이에 머리들 맞대고 키키덕 거리며 이상한 소리들을 해대며 방바닥 화투짝만
들여다 보면서 열중하는 그들 뒤에 앉아서 멍하니 책장이나 넘기면
우리 서슬퍼런 장인어른
자넨 무슨 재미로 사나?
그 말에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뮈르쏘가 이해되곤 하였죠.
민족명절...
쌌다. 흔들어라. 라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날 -
작성자서흥남 작성시간 16.09.28 우리 자식들에게는 그 어떤 외세도 감히 꿈쩍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하고 강대한 조국을 물려주고 싶다.
는 말씀이시죠? -
답댓글 작성자서흥남 작성시간 16.09.28 나도 우리 자식들에게는 그 어떤 외세도 감히 꿈쩍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하고 강대한 조국을 물려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