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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회의 실상

“씨디알 돌려 보자우” 북한 군부대에도 한류 - 북한 협동농장 2

작성자정론직필|작성시간12.07.12|조회수2,024 목록 댓글 3

“씨디알 돌려 보자우” 북한 군부대에도 한류 - 북한 협동농장 1


(위 글에 이어서 계속해서 북한 협동농장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합니다.)


우리 카페는 북한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예리한 안테나를 가지고

북한관련 정보들을 수집,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다른 일반 국민들 보다는 훨씬 많은 대북관련 정보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솔직히....여전히 북한사회의 진짜 실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지경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무식해서도 아니고, 지능이 떨어져서도 결코 아니라

단지 찌라시들이 있는그대로의 실상과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나아가 당국이 북한사회에 대한 진짜 정보들에 대해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는 소위 "반공교육"이라고 해서 북한 관련하여 터무니 없이

진실왜곡된 내용들을 국민들에게 주입식으로 교육해왔기 때문이지요.


그런 와중에도 찌라시들이 열심히 보도들을 해대거나 또는

소위 "탈북자"들이 많아지다보니 북한관련 내용들을 여기저기

무수히 많이 흘려놓다보니.....그 내용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상충되는 경우들이 매우 많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거나 등등의 방법으로 우리는

그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를 역추적하고 있기도 하지요.


예컨데, 한반도 관련 국제정치적 정세를 분석하는 카페의 카페지기인

나 자신 조차도 솔직히 북한 협동농장의 진짜 실체가 무엇인지

거의 아는 바 없었습니다.


그저 고작해서.....북한의 농민들은 북한사회의 최하층민들로서

소위 "출신성분"들이 나쁜 사람들이 주로 농촌에 배치되어 중노동

혹사당하는 사람들이자, 그들의 생산물은 대부분 북한당국에 의해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남한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지요.


그리고....북한 행정조직이 "군" 밑에 바로 "리"라는 것이 있고

"리" 마다 협동농장들이 하나씩 있다는 사실도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카페지기인 내가 그럴 정도로 한심한 대북정보 밖에 없는 실정이니

일반 남한 국민들이야 새삼 말할 것이 없겠지요.


내가 갑자기 북한 협동농장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바로

아래 찌라시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北 “생산물 수매, 시장가격으로”… 김정은체제 첫 경제개혁

기사입력 2012-07-12 03:00:00 기사수정 2012-07-12 03:50:04


대북매체 ‘6·28방침’ 보도… 협동농장 개인분배율 높여


북한이 각종 생산단위의 생산물 정부 수매가격을 시장가격에 맞추고 협동농장의 말단 생산단위인 분조(分組)의 구성원을 기존 10∼25명의 3분의 1 수준인 4∼6명으로 줄이는 것을 뼈대로 하는 새로운 경제개혁 조치를 내부에 공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장과 기업소의 경우에도 국가가 원자재와 기계 등을 먼저 투자하고 생산물이 나오면 판매수입을 국가와 생산단위가 일정 비율로 나눠 갖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전문인터넷매체인 ‘데일리NK’는 10일 북한이 지난달 말 ‘우리식의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른바 ‘6·28방침’을 내놓고 10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올해 초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지시로 내각 산하 소조가 농업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혁 방안을 연구해 왔다. 


▶본보 6월 26일자 A1면 농지 私有-협동농장 개혁 나선다


‘6·28방침’은 북한이 2002년 7월 1일 시작했던 ‘7·1경제관리개선조치’만큼 획기적인 것은 아니지만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발표된 첫 개혁조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부 수매가격을 시장가격에 맞추면 생산자들이 생산품을 몰래 시장에 내다 파는 대신 정부에 판매해 국영상점 등이 물품을 풍부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분조 구성원을 줄이면 생산을 위한 의사소통이 빨라지고 추가 생산품에 대한 개인 분배 비율이 높아져 전반적으로 생산 의욕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 북한은 군(郡) 밑에 바로 리(里)를 두고 있으며 리마다 보통 협동농장 하나가 있다. 농장 안에는 부락 단위로 작업반이 있다. 한 개 작업반은 다시 5, 6개의 분조로 구성된다.


하지만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경제난 이후 대부분의 생산 기반을 잃은 북한 당국이 수많은 공장 및 농장에 생산시설과 원자재를 공급할 능력이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http://news.donga.com/Politics/3/00/20120712/47704624/1



위 찌라시 기사는 소위 "김일성대학" 출신인 주성하 기자가

작성한 내용입니다.


생산자들이 생산품을 몰래 시장에 내다 파는 대신...


농민들이나 공장 및 기업소 등에서 몰래 시장에 내다 팔다니요?


아니, 북한은 무시무시한 독재정치 국가로서  강압적 통치와

강제적 수탈을 하는 곳이 아니었단 말인가요?


북한이라는 무시무시한 "폭압적 독재정치" 체제에서는 

생산물 등을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등에 국가에서 강제로 생산량을 할당해주고

나아가 생산물도 나중에 국가에서 강압적으로 징발해가는 시스템이 

아니었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어떻게 생산물을 몰래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다는 말인지?

안전원이나 보위부 요원들은 모두 있으나마나한 허수아비 조직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그런 정도로 허술한 사회라면....북한은 망해도 이미 진즉에

망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공개총살 당할 그런 짓을 태연히 감행할 정도로

북한사회 자체가 매우 열악한 식량상황에 있던가.....


그렇다면, 북한사회는 이미 진즉에 무너졌어야 할 것인데...



정부 수매가격을 시장가격에 맞추고....

공장과 기업소 판매수입을 국가와 생산단위가 일정 비율로 나눠 갖기로


위 얘기들은 또 무슨 도깨비 같은 소리들인지....

어안이 벙벙해지네요.


아니, 얼핏보면 남한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 아닐까요?


남한의 농민들도 정부 쌀수매 가격이 낮다고 맨날 볼멘 소리를

하지 않나요? 즉, 남한 쌀농사 농민들이 현재 정부에 불만인 이유는

쌀수매 가격이 시장 가격 보다도 지나치게 낮아서 수지타산이

도무지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지요.


그런데....북한당국이 협동농장, 공장, 기업소 생산물들을

시장가격에 수매해 가다니요?


아니, 무시무시한 폭압적 독재정치 국가라는 북한에서는

그저 당국이 강제로 수탈해가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저 최소한으로 목숨을 연명할 분량만 농민, 공장노동자, 기업소 직원들에게

남겨주고, 나머지는 모두 보위부 등 북한당국이 수탈해가는 체제가 아니었나요?


그런데....위 언술을 보면....자본주의 사회라는 남한사회와

별로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보이니....그저 놀랍기만 하네요.


정부가 시장가격으로 수매해 준다고를 하지 않나....

또는 판매수익을 정부와 생산단체와 일정비율로 나누어 뿜빠이(=분배)

한다고를 하지 않나.....


이거....반공교육 내용과는 뭔가 너무 다른 내용이로군요.


그래서.....북한 협동농장이라고 하는 곳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약간 더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협동농장  

   

  토지와 기타 생산수단을 통합하고 농민들의 공동노동에 기초하여 농업생산을 진행하는 집단농장을 말한다. 북한은 1953년 8월 로동당 제6차 전원회의에서 농업협동화 방침을 채택하고 농민들을 자연부락 단위의 「협동조합」에 강제 편입시키기 시작해 1958년 8월에 이르러 이를 마무리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소유」 형태를 갖추게 됐다. 


그후 자연부락 단위의 농업 협동조합은 「리」 단위로 확대통합되었으며 1962년에는 그 명칭이 「협동농장」으로 개칭됐다. 


따라서 현재 북한의 농업 생산체계는 토지 및 생산수단의 「협동적 소유」에 바탕을 둔 협동농장과 국유에 바탕을 둔 국영 농·목장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은 1964년에 채택된 「농촌테제」에서 그리고 1980년 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협동농장의 「협동적 소유」를 「전인민적 소유」로 전환할 것에 대한 방침을 제시하는 등 협동농장을 전인민적 소유 형태로 전환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협동농장 규모는 보통 농가호수 80호 내지 300호까지로, 경지면적 1백30정보 내지 5백정보로 되어있다. 


그리고 협동농장은 형식상 농업관리위원회의 자율적 경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선전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정무원의 농업위원회, 도 농촌경리위원회, 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의 지도에 따라 운영된다. 협동농장관리위원장은 리 인민위원장이 겸하고 있다.


http://www.kplibrary.com/nkterm/read.aspx?num=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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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농장

協同農場


농민들이 자원적인 원칙에서 토지와 그밖의 생산수단을 통합하고 농장원들의 공동 노동에 기초하는 북한의 집단농장.


6·25전쟁 직후인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차 전원회의에서 전후 복구건설의 일환으로 농촌지역에 농업협동화가 결정되었다. 1954~55년 일부지역에서 경험적인 협동화 단계를 거쳐 1956년 북한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58년에 이르러 북한의 모든 농촌이 3,800개의 협동농장으로 재편되었다. 


초기에 협동농장의 관리는 농업성이 맡았으나, 1962년 2월 이후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의 협동농장에 대한 직접적 지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업적 방식으로 전환했다. 


협동농장의 주요기구로는 최고기관인 농장총회·대표자회·관리위원회·검사위원회 등이 있으며 필수적인 부대시설로는 탁아소·신용조합·학교·진료소 등이 있다. 


협동농장의 관리위원장은 그 지방의 행정위원장을 겸직하도록 되어 있다. 관리위원회 밑에는 약 100여 명으로 구성되는 작업반이 있으며, 작업반 아래는 작업의 기초단위인 분조가 있다. 


협동농장의 관리·분배 방식으로는 1966년부터 지금까지 '분조'를 기초로 한 분조관리제분조도급제가 실시되고 있다.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106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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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北 황북 사리원시 미곡리 '부유한 농촌' 모델 각광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7-06-24 조회수 : 84

2007-06-24


북한의 황해북도 사리원시 미곡리가 도시 부럽지 않은 ’부유한 농촌’의 본보기로 각광받고 있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23일 평양발 기사에서 1970년대에는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리가, 1990 년대에는 량강도 대홍단군이 “사회주의 이상촌 건설의 본보기 단위”로 불리었다면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미곡리가 전형으로 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미곡리가 ’21세기의 사회주의 이상촌’의 본보기로 떠오른 것은 2002년 7.1경제관리개선 조치에 따라 열심히 일한 만큼 그에 따른 수입이 확실이 보장되고 그것이 윤택하고 부유한 생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농장에서는 농업 전문가들과의 긴밀한 연계하에 과학적인 영농방법을 도입, 작물 종자를 흙의 성질에 맞게 바꿨으며 새로운 모 기르기 방법을 개발하는 등으로 곡물 생산량을 늘림으로써 1인당 소득을 대폭 올릴 수 있게 됐다.


결국 “일한 만큼, 번 것만큼”의 원칙에 따라 수입이 늘어나면서 농민들의 삶의 질에 대한 욕구도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욕구는 농사일에 바쁜 속에서도 도시 부럽지 않은 살림집 60채를 자체적으로 건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종전 같으면 방 2개의 주택에 만족했던 이곳 농민들은 소득이 늘면서 넓은 거실과 방이 3개 이상 달린 도시풍의 현대적인 살림집에서 살고 싶어진 것.


단독주택의 형식에 맞게 현관도 현대적이고 ’무게’가 있게 설계했고 심지어 신혼부부 살림방에는 별도의 화장실까지 갖추는, 과거 농촌은 물론 도시에서도 고위간부 주택 외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꿈의 집을 갖게 됐다. 


조선신보는 미곡리 농장의 살림집은 전국에서 ’새세기 사회주의 농촌 살림집 건설의 본보기’, ’미래의 농촌 문화주택’이라고 평가받고 있다며 “분배 몫과 쌀독이 넘쳐나게 되면서 농민들의 욕구가 실현되고 있다”고 전했다./연 


http://www.nkland.org/NOS-Board/bbs.php?uid=3982&key=&keyfield=&idx=

inform&retype=view&page=56&articlenum=3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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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보, "北우수농민 연간수입은 약 20만원"

2006.04.20 14:06


최근 북한에서 수입이 높은 협동농장의 경우 농민 1인당 연간 수입은 20만원(북한돈, 1천400달러.1달러=143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 인터넷 판은 20일 강원도 원산시 시루봉협동농장이 전국에서 현금수입이 높은 농장 중 하나로 유명하다며 지난해 이 농장 농민의 현금 수입은 1인당 20만원 수준에 올랐다고 밝혔다.


도시 노동자 1인당 평균 월급 3천원, 연 수입 3만6천원으로 환산할 때 이 곳 농민의 수입은 5.5배나 많은 셈이다. 


시루봉협동농장은 15개 작업반에 1천300명이 일하는 규모가 큰 농장으로 원산시민들에 대한 채소공급을 전담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이 농장이 알곡과 함께 과일.채소 생산량을 늘려 해마다 높은 현금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며 이는 2002년 7월 '사회주의 경제관리 개선조치'(7.1경제관리 개선조치)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7.1조치로 농민들의 현금수입이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농장의 공동자금도 늘어나면서 이 농장에서는 농민들에게 더 좋은 생활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공동자금으로 살림집 건설에 나섰다.


지난해 이미 28가구를 건설한 데 이어 지난 3월 초부터 40가구를 건설하기 시작, 본격적인 영농기 전으로 끝낸다는 방침이다.


이 살림집이 완공되면 최근 결혼한 신혼 부부들이 분가해 새집에서 살 수 있게 된다.


살림집도 과거와 달리 나름대로 현대적이고 실용성 있게 건설해 살림방 2개와 거실, 부엌과 세면장, 창고, 가축 우리와 야외창고 등을 갖췄다. (서울=연합뉴스) 


http://nk.joins.com/news/view.asp?aid=2713178&cont=news_econo



http://cafe.daum.net/sisa-1/dtCc/349




기타, 찌라시들의 기사를 통해서 북한 협동농장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약간 더 알아보기로 하지요. (당연히 내용의 상당 부분은 진실왜곡적으로

묘사되어 있겠지요. 따라서 그 점을 감안하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北, 집단농업제도가 무너지나?…"협동농장 직판 성행"

"국가가 지원 못 하자 스스로 작업반 통해 현물 판매"

2012-06-15 07:55 | 노컷뉴스 안윤석 대기자





일본의 대북매체인 '아시아프레스' 오사카 사무소의 이시마루 지로 대표는 14일 황해도 소식통을 인용해 "최근 협동농장에서 남새(채소)를 중심으로 재배한 농작물을 국가에 바치지 않고 시장가격으로 군 부대에 팔아 현금수입을 얻는 경우가 일반화됐다"고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다.


자신의 가족이 황해도 농장의 '현금벌이 조'에 있다는 소식통은 "군대가 부대단위로 배추와 무, 시금치, 오이 등을 많이 사가고 개인으로도 팔기 때문에 수입이 많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또 "군대의 부업지에서 남새(채소)류 생산이 잘 안 되고 많은 인원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협동농장에서 구매한다"면서 주로 현금이나 때로는 행표(군대가 차후 현금지급을 보증하는 증표로 추정)로 지급해 개인에게 판매하는 것보다 수입에 좋다"고 설명했다. 


소식통은 "쌀이나 옥수수 등 식량을 생산하는 작업반에서 일을 해도 식량 분배나 월급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젊은 남성들은 농사 대신 돈을 주고서라도 '현금벌이 작업반'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현금벌이 작업반은 농장에 한 달에 일정액을 바쳐야 하는데다 목표액 달성도 쉽지 않지만, 현금이 남으면 자신들의 직접적인 수입이 되기 때문에 판매도 열심히 한다"고 전했다. 

이시마루 대표는 "북한 전역에 시장경제가 급속히 확산됐지만, 관리와 통제가 엄격한 협동농장에까지 미치는 것은 이례적으로 북한의 집단농업제도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시마루 대표는 "조직규율이 강한 협동농장에서 이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국가의 재정상태가 악화하면서 기계부속품과 기름, 비료와 농약 등 농사에 필요한 자재들을 농장에 직접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지방 도시의 일반 기업소에서는 농사로 돈을 버는 부서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프레스'가 지난 3월, 중국에서 접촉한 황해도의 30대 건설기업소 노동자는 "건설기업소 규모가 300명 정도로 이 가운데 20명이 온실에서 일하면서 오이와 토마토 같은 작물을 재배해 장마당에 내다 팔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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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北협동농장 운영하는,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 김필주씨
입력 : 2011.06.27 03:07 | 수정 : 2011.06.27 03:37

“난 혁명가 아니다… 북한주민 한 명이라도 덜 굶게 만들고 싶을 뿐

매달 한 번 방북, 총 100여회… 北협동농장 5곳 임대 운영 '은파산 무역총회사'와 합작
'남쪽의 가축똥까지 받겠느냐' 자존심으로 거절하는 北 달래, 운송료 부담으로 보내기 불발

 협동농장의 농업지도원들과 함께.



     김필주씨는 '농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올해 북한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하드(hard)한 질문은 안 된다."

"하드한 게 뭔가?"

"난 정치 같은 것은 모른다. 인도주의와 농사밖에 모른다."

"하지만 정치와 체제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통화를 한 뒤 김필주(74)씨를 만났다. 엷은 꽃무늬 챙모자를 쓴 노인이었다. 말씨가 조근조근했다.

재미(在美) 농학박사인 그녀는 북한에 이모작을 전파했고, 북한 내 협동농장 5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활동으로 미(美)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에 뽑혔다. 그녀는 지난주 또 북한을 다녀왔다. 지금껏 방북횟수는 100회가 훨씬 넘을 것이다.

―북한에서의 일정은 어떻게 되나?

"매달 한 번꼴로 들어가 일주일쯤 머문다. 평양의 호텔에 묵으면서 농장까지 왕래한다. 농장이 다섯 곳인데, 자동차로 각각 50분과 1시간 반쯤 걸린다. 나는 농사짓는 사람이니까, 농장에서 작물 생육을 보면서 기후·비료·병충해 등을 상의한다."

―체류 경비는?

"본인 부담이다. 평양에서는 유로(euro) 베이스로 달러와 중국돈이 통용된다. 하루 숙박비가 120유로쯤 되고, 자동차와 운전수 비용도 든다."

―합작회사라고 들었다. 농장을 어떻게 운영하고 수익을 배분하나?

"북한 행정단위에서 리(里)가 하나의 '협동농장'으로 되어 있다. 국가 소유여서 50년간 임대했다. 외국인은 계약 주체가 될 수 없어, 북한의 '은파산 무역총회사'와 합작한 것이다. 내가 합작회사의 회장으로 되어 있다. 10년마다 재계약을 한다."

그녀는 황해도 봉산군과 삼천군 내 5개 협동농장을 임대했다.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는 6500명이다.

―계약 조건은?

"내가 비료 및 종자, 농업 기술 등을 제공하고, 내 수익금을 갖고 나가지 않고 농장에 재투자하는 조건이다."

―선생의 수익금은 얼마나 되나?

"지금까지 흑자가 아니어서 내 수익금이 책정된 적이 없다. 구두로 보고만 받을 뿐이다. 사실 나는 돈 계산을 잘 못한다. 당초 자선사업 성격으로 한 것이다. 내 집도 주식도 다 팔았다."

―어느 쪽의 제안으로 시작됐나?

"1989년부터 나는 북한의 농업을 도왔다. 우리 민족이 한 사람이라도 덜 굶어 죽게 하고 싶었다. 2003년쯤 내가 '농장을 하나만 맡겨달라. 정말 수익성 있게 운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쪽에서 '4곳을 맡아달라. 대신 목화를 재배해 달라. 중국에서 목화솜을 사오는데 너무 비싸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2002년 목화솜 1t당 1060달러를 받다가 2005년 2500달러로 올렸다. 나는 중국을 돌아다니며 북한에 심을 만한 목화 종자를 찾았다. 그렇게 시작됐다. 지금 농장작물 중 3분의 1은 목화, 나머지는 옥수수, 벼, 감자 등으로 이뤄져 있다. 농장 4곳을 하다가 금년에 하나 더 맡았다."

―북한에는 목화 종자가 없었나?

"재래종은 1ha당 목화솜이 0.5t밖에 나오지 않는다. 1t쯤 나와야 겨우 경제성이 있다. 처음 재배 했을 때 0.72t이 소출됐고, 지금은 1.5~3t 나온다."

―수확한 목화의 판로는 어떻게 되나?

"국가에서 1t당 1100달러로 수매했다고 들은 것 같다. 이를 북한 인민폐로 농장에 지불한다. 사실 북한 돈으로 살 게 없다. 대외 구매력이 없어 외국에서 비료나 농기계 등을 사들여올 수도 없다. 농장에서 일한 주민들의 인건비로 돈과 작물을 배급해준다."

―선생이 직접 나눠주나?

"농장관리위원장과 농업지도원들이 분배한다."

―주민들에게 직접 혜택이 됐는지 알 수가 있나?

"주민들이 받았다고 한다. 입성이나 낯빛을 보면 많이 나아졌다. 옛날에는 내가 지나가도 그냥 쳐다봤다. 요즘은 달려와서 인사하고 사진도 같이 찍자고 한다."

함경도 출생인 그녀는 8·15 해방 때 남하했다. 여덟살 때였다. 서울대 농대를 나온 그녀는 1962년 미국으로 유학했다. 코넬대에서 작물생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유명 종자회사에서 옥수수종자 생산기술을 담당했다. 그 시절 뉴욕의 북한대표부로부터 '강냉이 품종 개발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89년 3월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남편과 함께 평양에 갔다.

―북한을 방문해 농업을 도운 지 22년이 됐다. 북한 주민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느끼나?

"많이 자유스러워진 것 같다. 과거에는 바깥사람을 피하고 같이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했다. 이제는 그런 두려움이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요즘에는 '수익성'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내게 찾아와 '수익성 작물을 알려달라' '수익성 판로를 소개해 달라' 한다."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주민들은 따로 개인 텃밭이 있나?

"농장에서는 자기에게 할당된 몫을 일한다. 각자 집에는 텃밭이 있다. 또 우리가 과일나무 다섯 그루, 돼지 두 마리, 닭 열 마리씩을 지원해줬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생산한 것을 장마당에 판다고 들었다. 실제 농장으로 가는 도로변에서 그렇게 파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선생은 얼마 전 북한지원을 촉구하는 모임에서 "당장 150만t의 식량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할 것"이라고 했다.

"아사자 속출보다는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뜻으로 말했다."

―우리 정보당국에서는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 다르게 판단한다.

"농학자의 입장에서는 식량이 부족하다. 북한에서는 풍작이 좋아도 외부로부터 일년에 60만t쯤 작물이 들어가야 여유가 있다. 특히 작년에는 냉해와 홍수, 비료 부족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벼를 베어서 논에 말렸다가 탈곡하는데, 가뜩이나 그 시기에 비가 많이 내렸다. 수확한 벼에는 쭉정이가 많았다. 식량 부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전까지는 체면 때문에 내게 식량 달라는 소리는 안 했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가니 '심각하다.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쪽 지원이 막힌 상태라, 미국 내 교단 쪽에 연락하고 있다."

―선생은 '식량 지원은 한계가 있다. 종자 보급이나 농업기술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이번엔 사정이 워낙 급해 그렇지만, 식량 지원으로 해결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맞다."

―근본적인 문제가 종자 보급이나 농업기술 지원인가?

"그렇다."

―북한농업과학원의 전문연구원이었던 이민복씨가 있다. 그도 증산 연구를 했다. 그의 결론은 '종자 잘못이 아니라 체제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식 개인농(個人農)을 전국적으로 행하면 수확이 두 배 올라간다. 북한 주민들이 굶게 된 것은 정치 문제지,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해결될 수 없다는 걸 알자 1995년 그는 탈북했다.

"…그가 어떤 압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것에는 토양 문제도 있다. 토양 속에 미생물이 적어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 연료(燃料)가 없어 풀이나 강냉이, 목화대를 모두 땔감으로 쓴다. 토양으로 다시 들어가야 할 유기물질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비료로 쓸 가축의 똥도 부족하다."

―가축 똥까지 왜 부족한가?

"가축에게 먹일 사료가 모자라고 식량도 부족하니, 가축을 잡아먹어 버린다. 우리가 농가에 돼지를 줘 기르게 해서 퇴비를 넣는 걸 막 시작했다. 나는 경기도를 찾아가 '북에 축분(畜糞)을 보내자'고 했다. 북쪽에서는 자존심이 상해 '남쪽의 축분까지 받겠느냐'고 했다. 내가 축분으로 만든 유기질 비료를 들고가 실험을 해보였더니, 토양이 개선됐다. 그렇게 북쪽을 달래 축분 1만t까지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 남쪽 사정으로 불발이 됐다. 축분비료 값은 싼데 배 운송료가 너무 많이 들었다."

―다시 묻지만, 북한의 식량난은 농업의 문제라기보다 체제의 문제가 아닌가?

"어느 나라에 가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우리 민족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식량이 부족하다고 하니까, 될 수만 있다면 한 명도 굶지 않게 해주고 싶다."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외국구호단체의 트럭이 오면 주민들은 식량을 받고서 사인한다. 하지만 그 트럭이 떠나면 군대가 와서 몽땅 도로 거둬간다고 했다.

"믿을 수 없다."

―미 의회에서 한 증언이다. 그런 인도적 지원이 독재정권만 연명시킨다. 선의가 악용되는 것이다. 정권의 주민 통제를 약화시키려면 시장(장마당)을 활성화시키는 쪽으로 돕는 게 옳다.

"나는 믿기 어렵다. 농장 주민들은 우리가 지원한 물품을 먹고 입고 있다. 굶는 사람의 입에서 먹을 것을 다시 빼앗아가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난리가 난다. 순박한 북한 주민들도 먹는 것에는 이악스럽다."

―북한의 다른 지역을 자유롭게 가봤는가?

"1997년부터 미국에서 봄보리 종자 120t을 갖고 들어가 북한의 안주·함흥 이남으로 이모작을 지도했다. 그래서 여러 곳을 다녀봤다. 물론 북측에서 안내해준 것만 봤다. 시골도 생각보다 잘 정돈돼 있었다. 원산이나 해주에 가도 고층 건물과 호텔이 있다는 데 놀랐다. 무엇보다 주민들이 행복해 보이는 데 놀랐다."

―행복해 보였다고?

"몹시 불행하리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 않았다는 뜻이다. 행복지수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생각도 해봤다."

―선생의 눈에는 독재 치하에 순치된 노예의 행복이 좋게 보였는가?

"미국에 유학가기 전까지 남쪽에서 1년 반 동안 농촌지도원을 했다. 그때 남한의 농촌은 지금 북쪽보다 더 어려웠다. 춘궁기면 사람들이 누렇게 떴다. 이런 기억 때문에 북쪽에 갔을 때 별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 세월 동안 남쪽은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북쪽은 왜 똑같이 머물러 있는가 하는 생각은 안 해봤나?

"난 혁명가가 아니다. 내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내 민족을 돕고 싶을 뿐이다."

―같은 동포를 굶주리게 하고 탄압하는 독재자에 대한 분노는 없었나?

"…."

―선생으로서는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불만이 많을 것이다.

"여유있는 남한이 좀 더 대범했으면 한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하지 않는가."

―지난 정권 10년 동안 그렇게 했지만 돌아온 것은 핵무기 개발이었다.

"북쪽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겠지만…, 한 민족으로서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면, 서로 협력하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 내가 정치가가 아닌 게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북한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통상 '북쪽 인사'가 된다. 독재 정권의 입장을 그대로 표방하거나 옹호한다. 이 때문에 나는 당초 인터뷰를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도주의에는 한 점 의심이 없다. 북한 주민 한 명이라도 덜 굶기겠다는 마음은 고귀한 것이다. 비록 북한 체제를 보는 입장이 달라도, 우리 사회에 그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에 선정됐을 때 국적이 '북한'으로 표기됐다.

"나는 미국시민인데 왜 이렇게 됐는지 추천한 쪽에 전화를 했다. 그쪽에서 '뉴스위크가 조크(농담)를 했나 보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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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참고 기사들

키부츠와 북한 협동농장(1월 28일 방송) (17)
by 주성하기자   2010/02/09 8:51 pm



2010.07.01 통권 610호(p312~323)    
[김일성대 출신 주성하 기자의 북한 잠망경 <마지막 회>]
북한 협동농장의 어두운 오늘
농민, 군인 가릴 것 없이 농장 곡식 훔쳐가기 바빠 … 
전기 없어 탈곡 못한 벼이삭, 겨우내 절구로 찧어 먹어
주성하|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1946년 北 토지개혁령은 '협동농장'으로 변질됐다

농지 개인소유화 최대숙원…식량난 해결 쉽고 빠른 길
유관희 기자 | 2010-03-04 16:59 



북한 협동농장의 운영 실태와 개편 방향





조직규율이 강한 협동농장에서 이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기계부속품과 기름, 비료와 농약 등 농사에 필요한 자재들을 

농장에 직접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



그런데.....저 위의 기사에서는 이제 북한당국이

그런 부품 등을 공급하고 생산물을 적당한 비율로 나누기로 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의미는 북한정부가 이제 그런 공급능력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즉, 북한의 현재 상황은 매우 호전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ㅈㅅ닐보 기자)

우리 사회에 그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온갖 사악하고 악의적 질문들을 해대더니만.....마지막엔 위와 같은 언급을 하는군요.

그런데....무조건 북한이 망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ㅈㅅ닐보 찌라시가 과연

진정으로 위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만일 그렇다면.....이제 북한에 대규모 식량지원을 하자고 주장해야 될테니 말입니다.



암튼, 왜곡된 내용이긴 하겠지만.....위 여러 기사들을 통해서

북한 협동농장이 무엇인지.....약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저 위 사진에 나오는 사리원의 "미곡협동농장"에 대해서

검색해 보려하니....정보 차단이 되어 있군요.


그것이 북한에서 매우 모범적 협동농장이라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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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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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무리힘들어도 | 작성시간 12.07.12 김필주 씨와의 인터뷰 목적은, 북측의 식량난이 체제문제라는 증언을 유도하기 위한 것인데,
    김필주 씨는 "완곡"하지만 실제로는 단호하게 "토양문제"라고 하네요.

    토양문제는 북쪽의 지리, 지질의 문제이고, 유기질 퇴비를 만들기 어려웠던 이유는 6.25 때의 극심한 전란과 폭격도 한 이유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금 남쪽의 평야지대는 풍요로운 땅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토양의 지력이 쇠약해져서 비료를 퍼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북쪽은 원래 척박한 땅이었고, 남쪽은 지력이 쇠퇴해 있고....
  • 작성자아무리힘들어도 | 작성시간 12.07.12 남한의 산이 울창해지고 산하의 지력이 회복하게된 중요한 계기가 가정의 땔감이 바뀐 탓입니다.

    시골 집들이 낙엽을 끍고 나무를 잘라다가 아궁이 불을 때다가
    "프로판 가스"로 건너 뛰었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낙엽, 나무를 해다 태울 일이 많이 줄었죠.
    그렇게 20년쯤 지나고 나니
    최근에는 산불이 많아졌고, 산 아래에 수풀이 우거져 입산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치체제보다는 생활 "시스템"이 매우 중요합니다.
    김필주씨가 은연중에, 이 방향으로 의견을 제시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정론직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7.12 북측의 식량생산 문제, 민둥산 문제가 해결되려면 결국
    러시아산 가스가 북측에 공급되는 방법 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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