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격투기
종합격투기(綜合格鬪技, 영어: mixed martial arts, MMA)는 타격과 그래플링를 넘나들며 다양한 격투 기술이 사용되는 격투 스포츠다. 많은 격투 스포츠가 타격이나 관절기, 던지기 중 한 계열의 기술만을 채용하거나 어느 하나를 금지하는 것에 반해, 종합격투기는 급소 가격 등 생명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치명적인 공격 외에 거의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현대적인 MMA가 정립되기 이전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무술 간의 대결"이란 뜻의 이종 격투기(異種格鬪技)라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요즘에는 MMA또한 하나의 스포츠, 무도로서 독립하였기에 이종격투기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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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현대 이전
최소한의 규칙을 가지면서 맨몸으로 싸우는 초기의 격투 스포츠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의 하나는 기원전 648년 올림픽에 도입된 그리스의 판크라치온이다.[1]
권투와 레슬링 같은 이종 격투의 만남도 여러 번 있었다. 1887년에는 헤비급 권투 챔피언 존 설리번과 그레코로만 레슬링 챔피언 윌리엄 멀둔이 맞붙었고, 레슬링 챔피언이 2분 만에 권투 선수를 바닥에 내리치며 경기가 끝났다. 1890년대에는 헤비급 권투 선수 밥 피츠시몬스가 그레코로만 레슬링 챔피언 어니스트 로버를 만났는데, 로버가 광대뼈 골절을 당하고도 피츠시몬스를 바닥에 메치고 암 록을 걸어 승리했다고 알려졌다. 1936년에는 헤비급 권투 선수 킹피쉬 레빈스키가 프로레슬러 레이 스틸과 혼합 경기를 가졌고 35초 만에 스틸이 승리했다.[2]
초기 종합 격투기의 또 다른 예로는 1989년 런던에서 창시된 바티츠가 있다. 아시아와 유럽의 격투 스타일이 융합된 첫 무술로, 잉글랜드 전역에 걸쳐 종합격투기 방식의 경기를 가졌었다.[3]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프로 레슬링은 자취를 감추었다가 두 개로 갈라져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하나는 ‘쇼’로 현대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프로 레슬링으로 진화했고, 다른 하나는 격투가들이 실제로 싸우는‘슛’이다.[2]
여러 무술의 요소들을 혼합하는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소룡의 사상으로도 널리 퍼졌다. 그는 “최고의 격투가는 권투 선수나 공수가, 유도가가 아니라, 어떤 무술에도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다”고 믿었다. 그의 발상은 현재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의 사장인 데이나 화이트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그는 이소룡을 ‘종합격투기의 아버지’라고 부른다.[4]
현대
현대의 종합 격투기 대회는 두 개의 움직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는 일본의 슛 레슬링에 영향을 받아 브라질에서 열린 발리 투도 경기다. 발리 투도는 1920년대 카를로스 그레이시와 헬리오 그레이시가 ‘그레이시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시작했고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1] 일본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움직임으로 1970년대 안토니오 이노키가 일본 프로 레슬링의 슛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아 주최한 종합 격투기 경기들이 있었다. 이 경기들은 1985년 최초의 종합 격투기 단체 중 하나인 슈토를 조직하기까지 이른다.
종합 격투기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93년 미국의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 대회가 시작되고서 부터다.[5] 이 대회는 최소한의 규칙만을 가지고 서로 다른 격투기가 맞붙어 어느 쪽이 더 실전에서 쓸모가 있는지를 가리려는 발상으로 시작했고, 첫 대회에서 우승한 호이스 그레이시가 싸우는 방식은 무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6] 또한 일본에서는 슈토 이후에 종합 격투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 끝에 1997년 프라이드 파이팅 챔피언십이 탄생했다.[7]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은 이후 종합 격투기를 스포츠로서의 기준에 맞추고자 했고, 2006년 12월 척 리델과 티토 오티즈의 재대결이 거대한 복싱 이벤트와 맞먹을 정도의 인기를 자랑하며 스포츠로서의 인기를 반증했다.[8] 2007년에는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의 소유사인 주파가 프라이드 FC를 인수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두 대회가 강한 연대를 가지게 되었다.[7]
주요 단체
- 북미
- 일본
- 유럽
-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