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일베 초등교사 후배에게

작성자캡틴쌤|작성시간13.06.04|조회수996 목록 댓글 5

얼마 전 일베에서 한 초등교사와 관련하여 난리가 났습니다.

신상까지 털려 알고 대구교대 후배더라구요.

그 후배가 읽을 가능성은 없지만, 몇몇 교사커뮤니티와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글이지만 함게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며 사과하고 싶습니다.

 

******************************************************************************************* 

 

대구교대 후배에게...

 

내가 당신에게 이런 글을 써도 될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는 당신이 다닌 학교를 10년 전(대구교대 98학번)에 다녔던 선배 교사로 지금 이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을 가능성은 없을테지만요.

 

처음 이 사건을 며칠 전 출근하는 차 안에서 각시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로린이'라는 낱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사실 일베라는 것도 그냥 이름만 들어봤지 뭐 하는 곳인지 몰랐습니다.

 

그 뒤에 학교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을 듣고 오후에 검색을 한번 해봤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신은 본인도 너무 힘들다고 항변하지만, 당신이 전국의 많은 초등교사들에게 준 충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십 년 넘게 교직생활을 하면서 초등교사가 주인공인 사건을 여럿 보았지만 이렇게 선생님들의 공분을 사는 것은 처음 봅니다.

 

당신은 교실에서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친다고 말하겠지만, 교사는 자기 삶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걸 솔선수범이라고 하지요. 당신 개인 삶의 문제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동료교사들도 학부모도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삶은 학교 안과 밖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이지 않습니까?

 

임용준비를 하면서 공부했겠지만, 교직을 보는 여러 관점들이 있지 않습니다. 노동자관, 전문직관 그리고 성직자관... 이렇게 교직을 보는 관점이 다양하고 폭넓은 것은 교직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건 바로 교직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정신적 성장을 주 목적으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이 거친 비난 받는 것은 그간 당신이 해온 행동들이 여기에 부합하지 못하다는 까닭입니다. 나는 일베 죽이기(?) 그런 거 모릅니다.

 

나는 당신과 교육관이 많이 다릅니다. 나도 실수가 많은 허점투성이 사람이지만, 날마다 아이들 앞에 죄를 덜 짓는 마음으로 다가섭니다. 그리고 우리 교사는 '진보'적으로 생각하고 '보수'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반드시 지키되, 늘 변화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신도 무척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남탓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모자랍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시작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지는 순수한 마음으로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주어지는 책임들은 기꺼이 받으십시오. 숨지도 피하지도 말고...

 

책 읽을 여유가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책을 한 권 당신께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이오덕, 삼인)

당신의 내일이 어찌 될 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선배로서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이 교대를 다니는 동안 초등교사로 올곧게 설 수 있도록 아무 도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학교도, 교수님들도, 대학선배도 그리고 선배교사들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주제넘는 말이지만, 정말 미안합니다. 선배 노릇을 잘 못했습니다.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아이들 앞에 서게 된다면,

그땐 아이들에게 그리고 당신 스스로에게 미안하지 않는 그런 교사가 되시길 바랍니다.

또 미안합니다.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는 선배가 답답한 마음에 글을 썼습니다.

 

당신이 읽을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2013년 6월 2일

박준형 올림 

  

덧붙임. 혹 이 잡글을 읽고 계신 선생님들 둘레에 교직에 어려움을 겪는 후배나 동료교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읽었던 책 가운데, 교사로서 고민하게 만들고 감동을 준 책이 있다면 한 권 선물하시면 어떨까요? 전 그게 동료교사이자 선배교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다른 사람을 욕하기엔 우리 한 배를 탄 사람입니다. 그들이 올곧게 설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교사가 할 일 아닐까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오드리 | 작성시간 13.06.04 일베는 제 고딩아들로부터 몇년전부터 들었던 곳인데 아이들에게도 그곳 이용자는 일베충으로 불린다고 하더라구요. 고딩의 말에 의하면 사람도 아니라며 ㅜ 저는 분개만 했지 선생님처럼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이렇게 끌어안을 생각은 결코 못했네요. 선생님의 깊은 뜻 다시 한번 생각하는 새벽입니다.
  • 작성자leastory | 작성시간 13.06.04 쌤, 역시 캡틴입니다. 훌륭하세요.^^ 그 후배교사가 자신이 한 때 뭘 잘못했는지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수를 반성하고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에... 두 분 모두 응원합니다.
  • 작성자튼튼이 | 작성시간 13.06.04 글 읽는 내내 코끝이 찡해집니다. 일베사건 자체를 잘 몰랐다 오늘 팟케스트 듣다가 조금 내용이 나오더군요. 철없는 초보교사거나 아니면 누군가 교사를 사칭했을거란 추측을 했었습니다. 일베를 알거나 드나드는 사람들과 일베충은 구분이 됩니다. 잘 모르는 어린벗들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형성을 하려한 충, 사이트의 성격을 알고도 거액에 판매한 의사가 진짜 충이죠. 나머진..... 어떻게든 제대로 알리고 교육시켜야할 존재들같네요. 독립운동가들이 해방후 왜 그리 교육에 힘썼을까? 그마음의 천분의 1은 알것 같네요.
  • 작성자s_goose | 작성시간 13.06.06 아.. 멋지세요ㅠ 다수의 멋진교사분들이 있어 다행이고 그래도 희망을버리지않습니다~
  • 작성자신념에찬곧은길 | 작성시간 13.08.30 가입후 여기저기 둘러보다 캡틴샘 글을 봅니다.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우째 이리도 멋지신가요...
    두고두고 캡틴쌤을 기억할것입니다. ^^
    가슴이 마구 뜁니다.
    캡틴쌤이 계신 대한민국의 미래,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를 맡겨도 충분하겠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