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2-3)
바울의 편지를 읽은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여전히 바울을 불신하고 험담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이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에 집중적으로 다니면서 했던 작업이 바울 개인에 대한 공격이었던 거에요. 오죽하면 바울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이라고 갈라디아서를 시작했겠습니까? 바울의 사도권을 두고 얼마나 모함을 하고 험담을 했으면 이랬겠어요? 바울더러 사도가 아니라고 하고, 예루살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자라고 하고, 예수살렘 사도들에게 인정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바울의 사도성을 부정함으로 그가 전한 복음까지 훼손되도록 한 것이지요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훼방하는 방법은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동일합니다. 개인에 대한 공격, 사람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그 사람이 전한 복음에 대한 권위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이 반드시 있어야 복음은 복음대로 증거가 됩니다. 복음은 복음의 능력으로만 전파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부정적이다, 비판만 하고 지적질만 하는데, 그거 말고 긍정적이고 위로가 되는 말, 희망을 주는 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말 좀 하면 안 되느냐는 거에요. 그러나 이일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도 하기 싫습니다. 십자가 복음 때문에 인간관계가 다 끊어지고 좋은 소리 듣지 못하는 거 저도 압니다. 그러나 복음은 있음의 흉내를 내는 모든 죄인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되는 복음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을 잘 가르치고 교육시켜서 신자되게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것이란 것을 알아야 하는 거에요. 왜 십자가인지, 왜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야 할만큼 우리는 불가능한 죄인인지를 정직하게 전하는 것이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만 고집하는 전도자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못 박히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 고
지상 교회는 말씀의 사건들로 발생되는 교회입니다. 이것을 사건으로서의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씀에 의해 해체된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지면서 비로소 두이레 강아지만큼 예수님의 주되심에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당초 하나님의 말씀을 담을 그릇조차 안 된단 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그래요. 이 세상은 묵시, 하늘의 것을 담으면 녹아버립니다. 감당이 안돼요. 그래서 영원전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새창조가 실행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새창조에 우린 어떤 요청도 한 적이 없고 어떤 협조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게 새피조물이에요.
그럼 어떻게 주님을 알 수 있습니까? 죄인들은 하나님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잖아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을 주셨지만 이 책의 내용들을 제대로 읽어낼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서, 진리의 사랑을 받은 자들을 보내셔서 (이를 직분자라고 합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게 되면 세상은 반드시 복음 아닌 것들의 공격이 같이 나타납니다. 이런 충돌 가운데서 세상과 분리된 교회의 거룩이 잠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이런 것이며,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 이런 것이고, 세상에 없는 생명은 이것이며, 믿음은 이런 것이고, 은혜의 필연성이 이런 것이었구나... 라고 진리에 속한 자들은 동일한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왕십리 교회 쫑파티를 했다는데요, 불과 6년 정도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는지 몰라요 물론 당사자들은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런 복음의 사건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참된 교회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이 있는 교회는 반드시 그런 사건들로 이루어집니다. 세상 교회들처럼 말썽 안 나게 ‘은혜롭게 합시다~’ 하는 것은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하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그거야 말로 은혜를 대적하는 목사 장로의 욕심이란 말에요
사도들이 서신을 보낸 교회들을 보세요.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에베소 교회... 문제가 없는 교회가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에는 좋은 교회란 없습니다. 교회이거나 교회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담은 교회는 성도가 외치는 ‘아니오’라는 영적 싸움을 통해서 세상과의 경계가 생길 때 그때 교회인 겁니다.
우리는 자꾸 교회를 고정화, 형식화, 역사화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아시겠지만 대형 교회 당회장실에는 1대 당회장 사진부터 현재까지 쭉 걸어놓고 긴 역사를 자랑합니다. 심지어 백주년 교회까지 생겼어요. 그런 사람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거 하려면 가톨릭 앞에선 깨갱해야 합니다. 가톨릭은 역사가 이천년이에요. 그들이 과연 하나님이 보우하사 이쳔년의 역사가 이어진 겁니까? 그렇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개신교라면서 그런 짓 하면 안 되는 거에요. 모든 인간은 그렇게 자기 역사를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쫓아다니시면서 스스로 만든 역사를 토막을 내십니다. 땅에 뿌리 내리려는 모든 시도를 밑둥치부터 잘라내시는 거에요. 성경은 인간들에게 포착이 안되는 비 역사화 된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간을 빼야 읽을 수 있어요. 그런 능력은 성령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해석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예배형식이 언제 생겼는지 아세요? 종교개혁 당시에는 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설교자는 가운을 입지 않았고, 노래를 통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면 안 된다고 교회 안에서 성가도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상성 때문에 예배당 안에 십자가도 치워버렸다니까요. 그들은 차가운 이성으로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했어요. 예배당을 장식한 스테인드 글라스 모두 없앴습니다. 그런데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 인위적인 것으로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만큼이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복음의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개입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런 비정상적인 인간들을 내어버려 두시는 게 심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인간들 세상에 개입을 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대충돌이 일어나죠. 그게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분은 다시 오셔도 세상 교회에게 또 살해 당하실 거에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심판이 이미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참된 말을 함으로 너희에게 원수가 되었느냐.. 나에게 눈이라도 빼줄 만큼 사랑했던 너희들이었다.. 성령이 너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 사랑을 너희 가운데 부어주셨을 때 나를 예수처럼 천사처럼 영접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것이 본래 니들이 가졌던 사랑도 아니고 너희들의 믿음도 아니었단다.. 성령이 오셔서 성령이 주신 믿음이고 사랑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일을 위해 너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말씀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지상의 교회는 말씀의 사건으로서 교회입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곳에는 세상과의 경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했던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을 당하고 톱으로 켜이고 했습니다. 오늘날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오늘날에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워낙 없으니까 그럴 일도 없지만, 만일 누군가가 정말 복음을 전한다면 그곳에는 충돌이 반드시 일어날 겁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신부터 그러한 자기부정의 사건들로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일생 동안 여러분 안에서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족 안에서 일어나고 사업장에서도 일어나고 그래서 성도는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하늘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잠시 인생을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이란 말에요. 그렇게 성도는 인생살이가 발에 안 맞는 신발처럼 불편해야 정상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자니 참 불편한데, 여러분이 성도라면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알게 될 겁니다.
자 이렇게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갈라내심이 계속 있습니다. 복음이 있는 교회라면 그래요. 복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아직 인간의 자존심과 가능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목사 장로가 힘 겨루기 하고 돈 문제로 싸우고 계급투쟁 세력 다툼 하는 것은 이전투구지 진리의 전투가 아니에요. 영적 싸움이 아니라 세상처럼 힘의 균형을 위한 다툼입니다. 이런 싸움 말고 십자가로 말미암는 진리의 싸움이 있어야 참된 교회입니다. 그런 전투를 거치면서 성도는 복음의 군사로 성장을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논쟁이나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붙이심의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며 승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고집하다 장렬하게 전사하는 그런 싸움이에요 승리는 이미 주님께서 이루신 승리이기에 우리는 다만 그 승리를 증언하면 되는 겁니다.
구약의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전쟁하시는 여호와인 것처럼 하나님은 나와 전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차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아야 해요. 복음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80이 넘은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받은 성도의 인생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렇게 약속의 땅을 위한 전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전투를 통해 내가 죽어나간 후에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영적 전투를 거치지 않는 교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과의 경계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사단의 궤계입니다. 사단의 본무는 그것입니다. 교회의 거룩을 훼손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사단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인간의 자존심과 가치를 높여주는 다른 복음,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일을 사단이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펌프질합니다.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데려오는 것, 세상에 대한 봉사, 정의로운 사회 평등한 세상 만들기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교회 부흥이란 이름의 교회 확장....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협력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거짓 교사의 활동은 초대교회부터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에 물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바울이 더 이상 눈을 빼어주고 싶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참말을 함으로 원수가 된 대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도자와 교인을 갈라놓는 것 사단이 지금도 쉬지 않고 벌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성을 높이면서 말 합니다. 너희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 너희 안에 퍼져 있는 누룩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내가 다시 한 번 지적할거야.. 그리고 그것들을 밝혀내어 다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내가 해산의 수고를 할텐데.. 내가 너희들과 같은 이방인의 자리에 내려가서 하나님을 모르고 약속이 없는 너희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너희들도 나처럼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증인이 되길 원해서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 뿐이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교회야 예수 복음을 가지고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챙기는 일에 써먹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너희의 믿음 없음이고 율법행위로 돌아가는 저주이며 십자가의 원수 됨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같은 말을 쓴다는 말은 예수의 복음 외에 다른 말을 할 것이 없고 다른 관계를 가질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수사법입니다. 당시의 지식층들은 수사법을 배웠지요. 바울도 수사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라는 말은 복음을 자랑한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는 말은 몸에 할례를 강요하는 자들은 다 행악자요 개새끼라는 돌직구입니다. 신랄하죠?
이렇게 바울이 복음을 전한 교회에는 어김없이 반 복음의 행태들이 나타납니다. 거짓교사들이 나타나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부정하는, 율법 행위를 첨가한 의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자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교회가 그런 자들을 경계하고 쫒아낼 것을 주문합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성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많은 성인들을 교회가 만들어냅니다. 천사와 방불한 성품과 포용력을 가진 자로 신성시하면서 그런 신화를 만든 후에 다들 그런 자를 닮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나 행동을 보면 포용력 친화력 같은 훌륭한 성품이 없습니다. 심지어 목회서신에는 사람의 실명을 그대로 거론하면서 질책합니다. 후메네오, 알렉산더, 빌레도 등의 이름은 거론하면서 이들은 양심을 버렸다, 믿음에서 파선했다, 사단에게 내어주었다, 악성 종양이다... 등의 심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바울이 이들을 가리켜 이렇게 심한 말을 했던 것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진리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문제에서만큼은 조금도 양보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이 불가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바울에게서 흔히 말하는 인자하고 덕이 있는 성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그릇되게 읽고 결국 그것을 자기 다듬기에 사용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일에 써먹는 경전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자기 성찰의 종교가 아닙니다. 구도를 위하여 자기를 다듬고 수양하고 훈련하는 종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생명길이신 그분이 나를 찾아옴으로 나의 의지와 능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거룩 앞에 본의 아니게 죄인의 괴수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게 불려나온 자들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십자가 지신 예수가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 복음을 지식으로 머리에 쌓아놓으면 오히려 자기를 해치는 일이 됩니다. 입으로 나는 죄인입니다.. 내탓이요 내탓이요 반복하면 죄인이 되는 겁니까? 그렇게 죄인인 척하는 의인들이 오늘날 교회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문제, 구원의 문제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 이름으로 모여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분에 대해서 주신 것들을 서로 나눌 뿐입니다. 바울조차도 죄인 한 사람 구원할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말년에 로마감옥에서 쓴 편지에 보면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떠났다고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도 실패하셨어요. 열 두 제자 모두 실패하셨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의 결과물로 찾아오신 성령에 의해서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전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복음, 같은 믿음, 한 주, 한 성령 안에 있는 그 몸 된 교회들만 서로가 같은 것을 공유 할 수 있습니다. 한 몸으로서 같은 생명 현상이 나타나서 같은 것을 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곧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맞아 죽으신 그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고, 그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세상 교회 안에서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 역시 자기 역할을 하다가 갈 뿐입니다. 그러니까 왜 나는 아닌 거야..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겁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지옥을 가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인 겁니다.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역할대로 살다가 가면 됩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22:10-11)
진리의 문제, 교회의 문제에 있어 우리는 자기 자녀, 자기 남편이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원수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심해도 되는 것은 지상에서의 가족들 말고 창세전에 완성된 하늘의 가족이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늘의 가족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지상의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참 아프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현실은 세상 사람들처럼 돈, 건강, 가족, 인간관계, 종교 그런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도에게는 본의 아니게 살아내야 할 다른 현실 복음의 현실이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이천년전에 끝나버린 십자가가 아닌 지금 현실로 재생되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 모든 교회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그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서 본의 아니게 부득불 ‘아니요’를 하다가 큰성 길가로 쫒겨나게 됩니다. 그런 사건들을 통해 그들은 다 진리의 죽음을 맞게 되고 그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누어져서 거룩한 교회로 지어져 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이 지적하는 것들은 사람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와 비 진리의 문제이고 교회의 거룩을 해치는 비거룩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날도 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은 성도가 있다면 바울과 같은 시각과 분별을 통해서 다른 복음에 대해서 판단하고 권면하고 책망해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부정하고 변개하는 악한 영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런 분노가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때로 분노하고 때로는 열심하고 때로는 변증함을 통해서 (고후7:11)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
바울의 사랑과 원수 됨 사이에 있었던 거짓 교사들, 다른 복음의 사건까지 오늘날 우리를 위한 봉사인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율법 행위의 무가치함과 무능함을 우리에게 다시 환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자꾸 하지 않으면 불안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일을 쉬게 만드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자기 일을 쉬게 하는 믿음인 거에요.
그들이 바울의 사도권과 복음에 대해서 공격을 많이 했지만, 그 결과로 오늘 우리에게 갈라디아서가 주어진 것입니다. 또 바울의 신체적인 약점(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사랑한 교회들은 이 바울의 서신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울도 육을 가진 인간이니까 때로는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자기를 변명하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9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2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갈라디아 교회뿐 아니라 고린도교회 역시 바울이 그들을 복음으로 사랑하고 복음으로 섬긴 결과가 방금 읽은 내용과 같았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바울의 푸념과 분노가 묻어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세상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묵묵히 지키신 분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에게만 저는 하나님의 원수가 맞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이런 고백이 없는 자들에게는 바울이 아니라 바울 할아버지가 와서 복음을 전해도 그 복음은 그냥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원수였던 바울이 이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을 전하게 되자 거꾸로 세상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전도자)는 사람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전도는 가시적 결과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불신자의 설득도 아니며 다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자신의 신앙 고백입니다. 교회의 교회 됨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우리가 개입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는 다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원수가 되는 것이 예수의 증인들입니다. 반면 묵시 안에 완료된 거룩한 공회를 보여주기 위해 땅 위에 존재하는 종교인들의 교회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지상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에 인간의 율법행위, 종교행위를 보태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가 말한 십자가의 원수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모든 교회를 향해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복음으로 섬겼던 대 사도가 마지막 로마 감옥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는 바울의 어떠한 노력과 상관없이 이미 묵시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의 죽음을 통해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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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가브리엘 작성시간 24.12.02 아멘~
장로님에 말씀은 늘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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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위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2.02 잘 계시지요?
김태동 집사님 서울 모임에서 뵈었어요
히브리 집사님은 강화도로 가셨다던데 -
답댓글 작성자가브리엘 작성시간 24.12.02 위드 네 잘지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집사 가 아니고 제가 강화도로
이사 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위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2.02 가브리엘 아, 그러시구나...
시간 되실 때 한번 뵙지요 -
답댓글 작성자가브리엘 작성시간 24.12.03 위드 네 시간 맞추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