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입니다.
남편은 일이 많아 1시는 넘어야 집에 들어올 수 있다고 전화가 왔어요.
나는 비 내리는 창밖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아무 말 없는 화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몇 마디 건네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이렇게 글을 끄적이게 되네요. ^^
신경림씨는 원래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데
이 책에서 위의 시를 발견하고는 감탄해 마지않았지요.
시인이 이 시에서 짚어주는 것은 아주 새롭다 할 얘기가 아니지만
우리는 자주 까먹고는 하잖아요.
시인의 낮은 읊조림을 듣고(?)있다 보면 내가 한때는 알았다가 잊어버린 것들,
분별이 부족해 그냥 흘려보내 버린 것들이 슬며시 의식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리고는 알 듯 말 듯 미소를 짓게 되는 거지요.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아주 먼 곳까지 여행을 하는 것도
사실은 발밑보다 지척에 있는, 하지만 별빛처럼 묘연한
제 속을 들여다보기 위한 걸 거예요.
사람의 일생이 10년이 아니라 70년이 넘는 까닭도 어쩌면
‘나’를 아는데 (적어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해서인지도 몰라요.
요행이 일찍이 세상 사는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에겐
‘길’이 보일 란가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반들반들하고 훤한 길이 아닌
제 안으로 들어가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보일 란가요. ^^
이 책의 저자인 김용규씨는 300페이지가 넘는 지면을 할애해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소외당하는 시(詩)에 대한 변론(?)을 펼칩니다.
돈이 안 될 것 같은 시에게 세상을 바꿀만한 힘을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지요.
네, 저에게는 그의 변론이 유효했습니다.
시와 철학, 모양새가 많이 다른 두 집안이 이물감 없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진풍경을 감상했답니다.
늦은 밤이고 비가 내려서 제가 감정과잉의 상태가 아니냐고요?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지금이 비가 내리는 늦은 밤이라서가 아니에요.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를 읽는 동안 내가 조금 변한 것 일수도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 무너지는 나를 잡아주었던 시,
이십대 후반 무너지는 나를 잡아주었던 철학-
잃어버렸던 열정을 되찾는 것 마냥 들뜨고 설레는 기분을 안고
책을 읽어나갔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저는 알 듯 말 듯 미소를 짓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창밖(세상)을 새삼스레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길 하나가 보일 것 같아서 말이에요. ^^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구름터(박운기) 작성시간 12.07.06 와아~~~
지선님의 길이 저의 길과 살짝 만나는 시기가 지금인건가요? 스쳐지나갈지 계속 해서 이어갈지 궁금한걸요.
책이 주는 즐거움을 잔뜩 머금고 빗길에 지각 출근합니다. -
작성자초이 작성시간 12.07.06 어제 서점에서 장석주 시인이 힐링을 목적으로 여러 시를 묶은 책을 보았어요. 왜 굳이 이 시인도 이 시점에 이런 책을 냈을까? 한참 생각을 했어요. 20대 다이어리에 깨알같이 옮겨 적었던 시들이 생각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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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별마루 작성시간 12.07.06 요즘 나도 시가 필요해 ~~
전에는 누가 자기 성격에 관해 말하라면... 이력서 같은 데서도 말이야.
외향적이라고 썼는데.
이제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작성자휴~~ 작성시간 12.07.10 느낌을 적어놓은 글을 읽고 신경림님의 시를 읽으니 시적 표현과 느낌이 너무 잘 맞아 들어가네요. 시를 써 보시는 것은 어떤신지~~ 상징과 응축 그리고 철학까지 시란 정말 현대인에게 필요한 생활의 기교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