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불에 절인 위스키
“한 뼘 한 뼘 원래 내 것이던 내면의 땅을 정복해나갔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언니, 괜찮아?”
넋이 나간 듯한 나를 걱정하는 듯 동생이 물었다.
“아. 미안. 언니 요새 정신이 좀 나가있지. 미안.”
“엄마가 밥 먹으래.”
생각의 고리를 끊고 밥 먹는 것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머릿 속에서 계속해서 끊이지 않는 생각들이 맴돌았다. 온누리의 인생이 모조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파는 40만원짜리 짝퉁 샤넬백처럼, 아무리 진짜를 따라가려 해도 결국은 따라갈 수 없는. 겉모습은 진짜처럼 그럴 싸 해보이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텅 빈 가짜 원단. 촘촘한 내실 따윈 없는 공장에서 찍어낸 모조품. 그렇다면 내 인생은 뭐지? 내 인생도 가짜인가? 이렇게 살다가는 내 삶도 가짜가 되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바뀌어야만 했다. 이따금 시시콜콜하게 연락해오던 부잣집 남자 애들과는 연락을 끊었다. 한 달동안 새로운 옷을 사지 않고 돌려입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지만 그러니까, 나는 어떠한 도전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치장이 없어도 오롯이 빛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아! 추악해. 울고 싶을 정도로 알맹이가 없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 세상 사람들은 정말로 무슨 공장에서 쩍어낸 기성품같다. 대부분 금수저를 선망하고 찬양해. 별 것 아닌 사람이 좋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알게되면 사람들의 태도가 변한다. 놀랍도록 친절하게.그야말로 천민 자본주의, 버리지 못하는 노예 근성.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잃어버리고 있다. 가짜에 눈이 멀어 자신의 진정한 삶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이런 사회가 계속된다면 제대로된 문학가나 학자들, 철학가가 나올 수 있을까? 왜 다들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대로 믿지? 그 환상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너무나 큰 문제다. 자본과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결합만큼 무서운 일도 없는데. 사람들은 그런다. 마치 그렇게 사는게 정답이라는 듯 함부로 선망하게 만들고 그걸로 브랜딩하고 돈을 벌어들인다. 그런 것들에 사람들은 쉽게 현혹되고 소비한다. 마치 그게 맞는 인생이라는 듯.
하지만 언제나 그 이면에는 추악한 게 존재한다. 가짜인 것. 자꾸 그렇게 가짜인 것들에 눈이 멀어버리니 우리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혁명을 일으켜도 모자랄 판에 금수저를 선망하고 ,휩쓸리고 … 주어진 생에서 최선을 다해서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왜 무기력하게 받아들이지? 어찌보면 그건 내 모습이었다. 함부로 선망하고, 애쓰고, 내 자신을 숨겼던 나날들. 그러나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갑자기 과거의 내 자신이 믿을 수 없을정도로 한심하고 유치하게 느껴졌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남들처럼 살면될까? 대학 나오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뭐 그러면 되나? 아니다. 그건 아니다. 남들이 사는대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내게는 불안정하더라도 내가 맞다고 믿는 삶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조금이라도 자아있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평가는 ‘자신을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에게 군림받고 있는 느낌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을 수 없어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이 <순종적인 여성상>이라는 환상적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심기가 불편해진다. 사랑이 없다고 간주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사랑이란 말인가! 그들은 사랑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과시를 위한 트로피, 자신의 욕구를 풀 수 있는 도구, 집안일을 해주는 노예다.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결코 그런 것에 호락호락 넘어가는 여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온누리의 일이 있고 난 뒤 며칠은 머리가 멍했다. 이미 멈출 수 없는 질주를 시작한 그녀의 폭주는 오직 그녀만이 감당하고 책임을 져야할 문제였다. 우선 차근 차근 해야할 목록들을 생각했다. 내 인생을 위해 이뤄야 할 지대한 목표가 무엇인가. 첫째는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그 잘난 놈들의 엘리트 주의를 짓눌러 주기 위해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난 돈이 없다. 우리 집은 돈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존나게 돈을 모아야 한다는 소리다. 그 말은 즉슨 연애든 결혼이든 어느 정도 포기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포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한심한 놈을 만날 바에는 안 하는 게 낫고, 잘난 놈들은 간을 보다가 금방 차버리기 일쑤였으니까. 내 자신을 어느 정도 포기해서 다운그레이드 한 놈을 만나느냐, 혹은 잘난 놈을 만나다가 버려지거나. 둘 중 하나였기에 빠른 결정을 내리는 데는 쉬운 일이었다. 내 인생을 살아야 했다.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해야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 자신에게 화가날 것 같았다. 내가 내 삶을 사랑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은 가짜다. 타인을 욕망하고 원하고 집착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진짜 사랑은 아니다. 내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돌과 물처럼 생명이 없는 것 조차 살아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헤밍웨이는 바다는 비에 젖이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은 즉슨 내가 넓은 바다가 된 한 그 어떤 타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더 이상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
갑자기 꿈을 꾸는 듯 모든게 새하얘졌다. 정말로 꿈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 잠에 들고 만 것이었다. 꿈 속에서는 내가 살랑 거리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대충 에릭 로메르의 여름 영화에 나오는 듯한 조그마한 해변 마을이었다. 흰색의 주택 집에는 푸른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빨랫줄 위에는 수영복들이 펼쳐져 있었고, 내가 자연에서 직접 채집해서 만들어낸 꽃꽂이 병들이 집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마치 소라 속에 갇혀있는 듯 웅웅 거리는 소리만 웃돌 뿐이었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소라에 귀를 대면 바다 소리가 난다는 말을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바다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소라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웅웅 거리는 파도 소리, 떠들고 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 살이 살짝 비치는 레이스 원피스는 바다의 푸른 빛과 대조되어 더욱 나를 빛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고 붕 뜬 느낌이었다. 책을 읽던 나는 그를 멈추고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햇빛이 부딪혀 더욱 밝은 갈색으로 빛났다. 그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되뇌이고 있었다. ‘이렇게 살고 싶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
해변의 폴린느, (1983)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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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불에 절인 위스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8.05 여샤 답변이 많이 늦었다! 고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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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때뵤미 작성시간 22.08.04 와 잘 읽었어 !̆̈ 더 읽고 싶다 몰입감 너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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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불에 절인 위스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8.05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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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야호야호얏호얏호 작성시간 23.05.18 잘읽었어 실제 있었던 일들 풀어서 적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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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세상에나 마상에 작성시간 23.12.18 오랜만에 여시 글이 생각나서 검색해서 들어왔어 ㅎㅎ 좋은 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