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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할매의 속삭임

[소설]절대로 멈추지 마라. 계속 걸어가.

작성자셜록홀즈|작성시간24.12.29|조회수7,675 목록 댓글 26

 
출처 : https://m.dcinside.com/board/napolitan/10835




이 안개낀 도시에 오게 된 불쌍한 이를 위해 이 쪽지를 남긴다.

부디 이 글에 적힌 정보를 이용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겠다.




너는 아마도 평범하게 길을 걷다가 주변 풍경이 이상해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곳에 뿌연 안개가 들어찬 모르는 도시 속을 걷고 있었을 거다.



이곳에선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안개가 네 눈을 가릴 거다.

안개 속을 걷는 것이 두려워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간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안개는 단 한번도 걷힌 적이 없었다.



안개 속에서도 가까이에 있는 것이나, 커다란 건물의 윤곽은 흐릿하게나마 보인다.

흐릿해진 시야에 적응해서라도 걸어가라.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안개 속을 걸어서는 안 된다.

이 안개 속에는 괴물이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이 안개 속에선 네가 향하고 있는 곳이 괴물의 뱃속인지 아닌지, 그 괴물의 아가리 바로 앞까지 가기 전까진 모를 것이다.



언젠가 안개 속을 걷다가 빠르게 달려가는 거대하고 육중한 그림자가 괴성을 내며 내 코끝을 스쳐간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 괴물이 나를 놓치자마자 반대편으로 달려가 겨우 살 수 있었다.



이런 괴물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너보다 신장이 몇 뼘정도 크고,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생명체를 찾아야 한다.


나는 그 생명체를 이 도시의 '주민' 이라고 부른다.

이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니, 너도 아마 이 글을 읽기도 전에 한두번 봤으리라 생각한다.



주민들은 괴물들을 피하는 법을 안다. 괴물들은 항상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이기에, 주민들은 그 길을 벗어난 경로로만 움직인다.



너가 해야 할 것은 그 녀석들의 발걸음을 읽고, 그들이 가는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다.



주민들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녀석들은 대부분 너에게 관심이 없으며, 네가 그들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지 않는 한 그들의 불쾌감을 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빠르다. 딱히 달리기를 하면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녀석들의 보폭은 넓고, 빠르다.


아마 너가 걷는 속도보다 두 배는 넘는 속도로 움직일 것이다.



길에 녀석들이 별로 없는 경우엔 괜찮다.


녀석들은 네가 길을 막고 있더라도 알아서 너를 비켜서 걸어갈 것이다.



하지만 길에 녀석들이 꽉꽉 들어찼을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녀석들이 모이고 모여서 길을 빈틈없이 채웠을 때,

그들 사이에 끼인 너는 파도에 휩쓸려가는 어린아이처럼 연약하다.



녀석들은 그 인파 속에서도 빠른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서로를 밀어가며 걸어간다.

너는 이리저리 그들에게 밀쳐지다가, 만일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곳이 너의 묫자리가 될 거다.



그러니 주민들이 점점 모이는 기색이 보인다면 다른 길을 찾거나, 길의 가장자리로 피해서 녀석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라.




전에 적어놨듯이, 대다수의 주민들은 너에게 무관심하다.



하지만, 극소수의 몇몇은 너에게 관심을 표하면서 너에게 말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 그들의 언어는 우리 인간의 언어를 아주 어설프게 모방한, 억양 정도만 비슷한 웅얼거림이지만,



일부 개체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너의 이름을 부르면서 멈춰세우고,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노이즈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는 녀석들을 마주칠 수도 있을 텐데,



속지 마라. 녀석들은 너를 홀리려고 그러는 거다.

처음 보는 도시에 네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사람 잘못 봤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지나가거나, 혹은 못 들은 척 하고 마저 걸어가면 그 녀석들도 너에게 관심을 끊고 가던 길을 갈 거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녀석들이 있다.


파란 옷을 입은 주민들. 녀석들은 사냥꾼이다.




다른 주민들과 다르게, 녀석들은 너를 발견하면 다가와서 끈질기게 너에게 말을 건다.

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면, 어깨나 팔을 붙잡아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녀석들에게서 도망쳐야만 한다고 생각이 들 땐, 잘 생각한 후 행동에 옮겨라.

사냥꾼이 아닌 놈들도 너보다 2배는 빠른 속도로 걸어다니는 것이 이곳의 주민이다.



그렇다면 뛰어서 도망가면 되지 않느냐? 그것도 틀린 말이다.



저 녀석들도 뛸 줄 안다. 그것도 엄청 빨리.



나는 해병대를 다녀왔었던 전직 군인이다.

거기서 배웠던 생존 감각이나, 단련시켰던 신체들 덕에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전력으로 뛰어서 도망치려 했건만, 녀석들은 내가 뛰기 시작한 지 5초도 채 걸리지 않아서 나의 뒷덜미를 붙잡고 끌고 갔다.



녀석들이 방심하고 있었을 때, 녀석들의 눈을 피해 몰래 도망쳐 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다음은 없을 것이다.




녀석들에게 걸리면 차라리 일반 주민들이 많은 인파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정답이 될 수도 있다.



녀석들은 그 혼란스런 파도 속에서 너를 찾아낼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폐가 짓눌리고, 이리저리 몸이 부딪히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그저 넘어지지만 않게 버티면서 녀석들이 사라질 때 까지 숨어있어라.

녀석들에게 붙잡혀선 안 된다.




만일 녀석들에게 걸리거나, 잡혔을 때, 녀석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그 사냥꾼들은 먹잇감을 잡는 것 뿐만이 아닌, 먹잇감을 유혹하는 미끼를 뿌리는 것에도 선수다.



녀석들은 네 머릿속을 읽고 네 가족, 친구와 같은 사람들의 이름을 대고는 말할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와 함께 가자'고.



녀석들이 하는 말에 절대, 절대 귀를 기울여선 안 된다.

이 염병할 도시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은 나조차도 이 녀석들의 홀림에는 몇 번이고 넘어갈 뻔 했다.




마음을 굳게 먹어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절대로 녀석들을 따라가선 안 된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지면 한번 확인해봐라.



언제 주웠는지 모를 전화기가 들어가 있을 것이다.


만일 없다면 내 것을 가져가도 좋다.



전화기의 화면을 켜서 적혀있는 글자를 확인해봐라.


대다수의 경우, 너와는 상관없는 무의미한 문장들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곳에 네 이름과 옷의 색깔들, 그리고 네가 지금 입고있는 옷의 색깔이 거기 적혀있는 색깔과 일치한다면, 바로 겉옷을 벗어라.



사냥꾼들이 너에게 현상금을 부과했다는 뜻이다.


그 진동이 왔다면, 당분간은 주민들의 왕래가 적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길 조언이 있다.


절대로 걷는 것을 멈추지 말아라.



너는 이 안개 속 도시 속을 걷다 보면, 몸이 점점 무거워지거나, 바람이 점점 춥고 거세지거나,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또다른 도시 속 어딘가를 걷고 있다거나 하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올 것이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가고, 주저앉고 싶단 마음이 될 때마다,


걷다 보면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되뇌어라.



피곤하다면 사람이 없는 골목에 몸을 숨기고, 골판지를 이불 삼아 덮고 쪽잠을 자고 일어나, 마저 나아가라.



배고프다면 녀석들이 먹고 남긴 음식물들을 주워 먹어서라도 배를 채우고, 앞으로 나아가라.



끊임없이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믿어라.




나는 그저께 발목을 접질렀다.


단순히 삐기만 한 것은 아닌지, 보라색으로 부풀어 오르더니 이제는 발목에 힘조차 들어가지가 않는다.



땅바닥을 기면서 나아가고 있자니 도시의 주민들 수십 명이 이쪽을 멀찍이서 쳐다보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녀석들의 주목을 끌어 버린 것 같다.



녀석들의 주의가 흩어질 때까지, 당분간 다시 골목에 숨어있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지금 버려진 놀이터로 보이는 공터에서 글울 쓰고 있다.



이제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안개는 점점 더 흐릿해지고, 바람은 점점 더 추워져갔다.


이 도시에도 겨울이라는 개념이 있나 보다.



이 도시 속에서는 기억이 점점 흐릿해진다.

이제 내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심지어는 내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 없는 도시다.



이 쪽지를 보게 된 불쌍한 이에게 전한다.

부디 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겠다.



그리고 만약, 이 도시 속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는 것에 성공한다면.






내 손녀딸 은서는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해 주기를 바란다.


내 마지막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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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Benicio del toro | 작성시간 25.01.11 은서할아버지 집으로 가시라구요 ꒦ິ⌓꒦ີ
  • 작성자Iwannadash | 작성시간 25.01.11 ㅠㅠㅠㅠㅠㅠㅠ
  • 작성자정핫윙 | 작성시간 25.02.07 집에 가시라구요ㅠㅠ
  • 작성자검은고양에 | 작성시간 25.02.19 아ㅜㅜㅜㅜ
  • 작성자이만보걷기 | 작성시간 25.03.09 ㅠㅠ슬픈 내용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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