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계량
당시 변계량 50대
세종 48권,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4월 일(정해) 3번째기사
변계량이 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들어 주다
변계량이 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들어 주다
“경이 중한 책임을 받고 병으로 말미암아 일을 다스리지 못하는 까닭으로 직무를 사면하고자 하니, 내가 어찌 경을 인원수만 채웠다고 하여 사직을 윤허했으리요. 경은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라."
하였다.
이 경우는 아주 운이 좋은 경우
조말생
세종 23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1월 4일(신사) 7번째기사
병조 판서 조말생의 칭병 사직의 상서문
병조 판서 조말생의 칭병 사직의 상서문
“신은 재목이 되지 못하는 몸으로 성명(聖明)을 만나, 여러 번 은총을 입어 내직에 뽑혀서 있다가, 10년이 못되어 빠르게 정경(正卿)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차서를 뛰어넘어 등용하여 주신 은혜는 실로 천지와 같습니다. 아무쪼록 신하된 충절을 다하여 조심하여 성군의 은덕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 하였으나, 신이 일찍부터 풍병(風病)을 앓게 되어, 나이 늙어 갈수록 더욱 심하여 지금에 이르렀사오니, 기력이 천급(喘急)하고 곤핍하거니와, 보는 것과 듣는 것도 다 쇠퇴하였나이다. 병무(兵務)를 다스리는 중대한 책임을 실로 제대로 행하기가 어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직사(職事)를 거두어 주시어, 신에게 약을 먹고 치료할 겨를을 주시면, 신은 마땅히 다시 생성(生成)하여 주시는 은덕을 입게 될 것이니, 만 번 죽음으로 맹서하여 그 은혜를 갚으려 하나이다. 신은 못내 황송한 마음을 무어라 아뢸 수 없나이다.”
세종 24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4월 25일(경오) 2번째기사
“신이 외람하게 용렬(庸劣)한 자질로 성명(聖明)한 임금을 만나 오랫동안 재사(宰司)에 있었으나, 한 치[寸]의 공효(功效)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풍질(風疾)이 날마다 심하여져서 중임(重任)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우러러 저의 회포(懷抱)를 말씀드리고 본직을 면하기를 청합니다. 하고자 함을 따라서 다스림을 하는 것은 오직 성주(聖主)의 지극한 인(仁)이요, 회포가 있으면 반드시 말씀하는 것은 신하의 떳떳한 예입니다. 감히 위태로운 간청을 펴 올려 성총(聖聰)을 더럽힙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강해(江海)의 외로운 발자취이며, 장귀(章句)에 매달린 말학(末學)이온데, 선왕께 높이 발탁하심을 받자왔으며, 전하의 넓으신 은혜를 입어 오매(窹寐)에 잊지 못하와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기를 원하였으나, 〈학문과 재주가〉 매우 공소(空疎)하여서 일찍이 한 자 한 치의 공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질병이 몹시 중하고 마음과 힘이 닳아 쇠약하여, 비록 힘써 종사(從仕)하고 싶어도 거의 쇠폐(衰廢)한 몸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마침 밝은 시대를 만나, 감히 권련(眷戀)하시는 뜻을 잊을 수 없겠는데, 오히려 후한 녹만 먹게 되니 실로 염양(廉讓)하는 풍속을 더럽혔습니다. 하물며 분수에 넘치는 영화는 반드시 빨리 전복(顚覆)하는 화(禍)를 부르는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신의 책임은 무거운데 기국(器局)이 얕음을 헤아리시고, 신의 병이 위독하고 힘이 피곤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따로 현능(賢能)한 사람을 구해서 병조의 임무를 맡기시면, 신은 다시 생성(生成)의 덕을 입어 여령(餘齡)을 보전하고, 견마(犬馬) 같은 마음이나마 갑절로 더해서 항상 예산(睿算)을 빌겠습니다.”
세종 30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10월 5일(경오) 1번째기사
“신은 못난 재질로 거룩한 시대를 만나서, 특별히 부당하온 은총을 입사와 외람되게 정승의 직위에 있었으나, 8년 동안 헛되이 녹만 먹고 조금도 공효가 없었으니 하늘과 땅에 부끄러우며, 아침에나 저녁에나 미안할 뿐입니다. 더구나 요즈음은 풍병[風疾]마저 더욱 심하고, 또 두 번이나 낙상을 하여 기력이 쇠진하였사오니, 더욱 중임을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벼슬 보는 일을 거두어 주시고 약으로 치료하는 여가를 주시오면, 신은 응당 재생의 은덕을 입사와 항상 하늘 같은 성수(聖壽)를 비옵겠사오니, 엎드려 성상의 사랑하심을 바라나이다.”
“다행히 지금 국가에 일이 없어 한가하니, 만약 병이 낫지 아니하거든 편하게 조리하고 간간이 일을 보라.”
하였다.
세종 62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11월 17일 1번째기사
함길도 관찰사 조말생이 병으로 사직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다
세종 78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9월 4일(신묘) 1번째기사
세종 90권,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8월 10일(기묘) 1번째기사
판중추원사 조말생이 하직하다
판중추원사 조말생이 하직하다
“족(足)한 줄을 알고 그만둔다는 것은 선철(先哲)의 격언(格言)이오며, 늙었음을 고(告)하고 돌아감은 예경(禮經)의 떳떳한 법입니다.(생략)"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94권, 23년(1441 신유 / 명 정통(正統) 6년) 10월 27일(경인) 1번째기사
예문관 대제학 조말생이 사직을 청하다
예문관 대제학 조말생이 사직을 청하다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하였다.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조말생(趙末生)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재주롭지 못한데도 지나치게 성은(聖恩)을 입었고, 겸하고 늙고 병들어서 여러 차례 상언(上言)하여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유윤(兪允)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나이 77세인데, 본래 풍질(風疾)이 있어 잡아 켕기는 것이 날로 심하옵고, 하물며 근년 이래로 매양 한재(旱災)를 만나 화곡(禾穀)이 풍등(風登)하지 못하여, 백성의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여 창고를 열러 진휼(賑恤)하매 국고(國庫)가 텅 비었는데, 지금 농삿달을 당하여 비가 시기를 어기니, 신이 장래를 헤아리매 마음이 두렵습니다. 하늘이 견책을 보이는 것은 반드시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일을 위하여 벼슬을 베풀었고, 사람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영중추(領中樞)는 인신(人臣)의 극품(極品)이온데 사람을 위하여 베푼 것이니, 신이 이 직책을 받아 헛되게 천록(天祿)을 먹으니 한재가 일어나는 것이 두렵건대, 반드시 이것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직책을 면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인하여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소서.”
세종 114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11월 28일(임진) 1번째기사
영중추원사 조말생이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상서하였다
영중추원사 조말생이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상서하였다
“신(臣)은 본디부터 풍질(風疾)을 앓고 있사온데, 나이 70세가 되매 이미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었는데도 특별히 성은(聖恩)을 입사와 관위가 신하의 극상(極上)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평생의 소망이겠습니까. 체력(體力)이 한창 왕성할 때에도 망극(罔極)한 은혜를 갚을 길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겼사온데, 하물며 지금 기력이 쇠약해졌으니 어찌 큰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우러러 보답하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니 눈물이 흐름을 견딜 수 없습니다. 옛날 한(漢)나라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는 나이 70세가 되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는데, 저 소광과 소수는 나이 70세 이상의 노인도 아니며, 몸에 질병도 있지 않고, 태부(太傅)와 소부(少傅)는 임무도 또한 청간(淸簡)하여 조석으로 분주하는 노고도 없는데, 다만 나이가 차므로써 예의에 의거하여 떠나가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신(臣)과 같은 사람은 나이가 지금 77세이며, 금년 5월에는 풍질(風疾)이 점점 더하여 거동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늙고 병든 신하가 녹(祿)을 생각하고 돌아가기를 잊어버려 관청(官廳)으로써 자기 집을 삼는다면 어찌 옳겠습니까. 시위 소찬(尸位素餐)한 지가 여러 해 되었으니 부끄러워서 땀이 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신(臣)의 지극한 심정을 살피시와 전리(田里)에 돌아가기를 허가해 주시옵소서.”
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당시 조말생 나이는 77세
본인이 절절하게 말했다 시피 풍질까지 앓고 있는 상태
그래서 제발 좀 그만 집에서 쉬게 해주라고 권했으나
나오는 답은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결국 조말생은 5개월뒤에 사망
최윤덕
세종 68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6월 24일(갑자) 1번째기사
최윤덕 당시 59세
유의손
세종 112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4월 25일(임술) 2번째기사
박안신
세종 80권,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3월 3일(정해) 4번째기사
남간
세종 89권,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5월 1일(임인) 3번째기사
예문 직제학 남간이 사직을 청하다
“이제 신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제수하시었는데, 신이 한열(寒熱)이 오가는 병을 앓아서 날로 더욱 심중하여 종사(從仕)할 수가 없습니다. 약은 효력이 없고 병 증세는 더욱 심하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하건대, 신의 직책을 해면하여 주옵소서.”
유관
세종 24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5월 12일(병술) 3번째기사
의정부 찬성 유관이 사직을 청하는 전문을 올리다
의정부 찬성 유관이 사직을 청하는 전문을 올리다
“늙으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 예(禮)는 옛글에 남아 있고, 병들면 한가한 데로 가는데 실정(實情)을 어찌 거짓으로 꾸미리까. 문득 성간(誠墾)을 다해서 우러러 고명(高明)하신 청문(聽聞)을 더럽힙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학술이 소루(疏漏)하고 자성(資性)이 천박하여, 《시경》·《서경》의 온오(蘊奧)한 뜻은 알지 못하고 한갓 자사(子史)의 말단 글귀만 훔쳤습니다. 세 조정을 섬겼으나, 이제 회고하여 보니 털끝만큼의 갚음도 없었으며, 성상을 만나 치우치게 우로(雨露)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강독하는 연석(筵席)에 참석하게 하시고, 편수하는 직사(職事)를 겸해서 맡기셨습니다. 〈신의〉 근력(筋力)이 쇠미(衰微)함을 민망하게 여기시고 궤장(几杖)을 내리사 총애도 하셨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살얼음이 언 못[淵]처럼 두렵기만 합니다. 정신이 벌써 쇠하여서 비록 상고하고 궁구하는 데에 어긋남은 있으나, 세월이 여러 번 바뀌어서 편찬하고 마탁(磨琢)하는 일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직무를 사퇴하지 않으면 〈남들의〉 꾸지람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력(樗櫟) 같은 쓸모없는 재질은 상유(桑楡)에 저문 빛이 다가 왔습니다. 귀는 이미 듣기 어렵고 눈도 점점 어둡습니다. 병이 사지(四肢)를 동이었으나 치료하지 못하여 소찬(素餐)하는 것만 심합니다. 나이 거의 팔순(八旬)인데 〈벼슬에서〉 떠나지 않아 청론(淸論)이 늠연(澟然)하니, 쳐다보아 조정에 부끄럽고, 굽어보아 벗들에게 부끄럽습니다. 바라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일월 같은 밝으심을 드리우시고, 천지 같은 어지심을 옮기시어, 신의 마음에 딴 뜻이 없음을 살피시고, 신의 병이 심한 것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구학(溝壑)을 메우는 꼴이 되기 전에 전려(田廬)에 돌아가게 하시면, 신은 더욱 치세(治世)의 평화 속에 편하게 지내고 길이 종신토록 내리신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당시 유관 78세
"신이 나이 늙고 기운이 쇠하여 일을 맡기가 난감합니다. 지금 한재를 만났음은 실로 천지 원기를 조화(調和)하는 직임(職任)을 어기었음이니, 업신여김을 받음이 이미 많은지라, 물러나기를 청함이 당연합니다. 신 관(觀)은 황공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려 아룁니다. 늙어 벼슬 자리에 있으면 나무람만 더 당할 뿐이고,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함은 실상 가식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정성스런 마음을 다하와, 감히 높으신 총명에 들음을 하소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기질이 어리석고 말이 어눌(語訥)하여, 행신(行身)은 나아감과 물러남에 실수하고, 논리(論理)는 정밀함과 조잡함에 어둡습니다. 참으로 버리기에 합당한데, 어찌 등용되기에 가당합니까. 마침 융성한 때를 만나 외람히 어진 신하들 곁에 끼여서, 오래 여러 조(曹)에 섞였으나 용렬한 태도를 면하지 못하였고, 이제 우의정에 있사오나 변변한 기풍이 조금도 없습니다. 놀고 먹는다는 조롱 받기가 부끄럽기만 하고, 눈치만 보면서 일한다는 것이 깊이 걱정만 됩니다. 더구나 관직은 1품이고, 나이는 팔순이니, 항상 앙화가 얽혀들까 두려운데 과연 질병이 덮쳐 오고 있습니다. 허리와 무릎이 시고 아파서 걸음걷기가 어렵삽고, 귀와 눈이 먹고 어두워서 보고 듣기가 어지럽습니다. 이 의정부가 어찌 병을 요양하는 곳이겠습니까. 하물며 한재를 만났으나 음양을 조화시키는 공이 없었으니, 이 직위를 사퇴하여 모든 말썽을 없게 함이 마땅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만물을 품어주시는 인자하심을 미루시고 관원을 임용하는 옳은 뜻을 펴셔서, 준수하고 유능한 이를 뽑아서 이 쇠잔하고 무력한 자를 대신하면, 신은 삼가 자손을 가르쳐서 적이 성덕에 보답하고, 초야에 살면서 여생을 보전 할수 있을까 합니다.”
임금이 허락치 아니하고, 회답하기를,
“조정에서 존중하는 것은 작위와 덕망을 겸비한 사람이라. 법률 제도가 비록 중하나 노성(老成)한 사람보다 못하니, 은(殷) 나라와 주(周)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임명을 하는 데에 반드시 오래된 사람을 말했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도 반드시 기로(耆老)를 일컬었으니, 노성한 신하를 나라에서 중하게 여기게 됨이 오래인지라, 그 거취를 어찌 가볍게 하겠는가. 경은 천품의 자질이 순후하고 깨끗하여, 규모와 도량이 너르고 깊으며, 학문도 이미 정자·주자에 이르렀고, 재능은 또한 반고·사마천을 능가하며, 마음가짐은 충직한 데에 근본하고
(중략)옛적에 주나라 태공(太公)은 다 늙어 가지고 오히려 바닷가에서 일어났고, 유후(留侯)1019) 는 비록 병들었으나 꿋꿋이 한나라를 보좌하였다. 초야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것은 경의 처지로서는 좋겠지만, 조정에서 일을 의논함에는 내가 힘입을 사람이 누구이겠소. 아직 그 직위에 안심하여 나의 정치를 돕게 하라. 청한 바는 허락할 수 없다.”
당시 유관 79세
곽존중
이맹균
세종 70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11월 25일(임진) 1번째기사
이조 판서 이맹균이 사직하려 하나 허락하지 않다
이조 판서 이맹균이 사직하려 하나 허락하지 않다
"(생략)감히 갑자기 사직(辭職)하기를 청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은 지금 나이 70에 가까우니 노병(老病)이 번갈아 일어나서, 형체는 파리하고 기운은 피곤하며, 눈은 어둡고 귀는 먹어, 정신이 밝지 못하여 잊어버리기를 잘하니, 그 쇠한 것이 심한 편입니다. 한편으로는 직사(職事)를 버리고 돌보지 못할까 근심스럽고, 한편으로는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까 두려우니(생략)
이직
“신은 천품의 성질이 노둔(駑鈍)하고, 학술(學術)은 부족하며, 체질(體質)이 잔약하여 풍(風)과 기(氣)에서 오는 병이 겸하여 침공(侵攻)하고, 더욱이 나이도 노쇠하여 잊기를 잘하며, 일을 생각하는 것이 정밀하지 못합니다. 특별하신 성은(聖恩)을 입어 신의 옛 공로를 기억하셔서 모든 관료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셨으니, 은총의 두터움이 지중합니다. 오직 노둔하여서 물방울과 티끌만큼도 은혜를 본받지 못하와 항상 직무를 다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요사이 음양(陰陽)이 순서를 잃고 달과 별이 이변(異變)을 보이나, 신은 어리석어서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오니, 다만 근심과 두려움이 깊을 뿐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육기(六氣)1062) 가 화순(和順)하지 아니하면 재앙이 이르는 것이니, 벼슬 자리를 피하여 기도(祈禱)한다. ’고 하였습니다. 신이 우둔하와 맹동(萌動)하기 전에 미리 밝게 보아서 선후(善後)의 방법을 잘 꾀하지 못하였으며, 또 벼슬 자리를 피하여 어진 이가 승진할 길을 열어 주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면서 외람됨을 무릅쓰고 있음을 신이 진실로 부끄럽게 여깁니다. 더구나 신과 같은 자가 개국 공신(開國功臣)이라는 이름을 더럽히고 있으니, 감히 나아가나 물러가나 국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착하신 자애(慈愛)로써 신의 노쇠함을 알아 살피시고 신의 못난 계책을 연민하게 여기시어, 널리 어질고 지혜 있는 이를 찾아 신의 직책을 대체(代替)함으로써 하늘의 꾸짖음에 사과하게 하소서.”
“경의 자처(自處)함은 그러하나, 하늘의 기운이 불순(不順)한 것은 실로 과인(寡人)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신이 한 집의 일로 살펴보옵건대 가장(家長)과 하인들이 다 착하면 만사(萬事)가 옳게 되지만, 가장이 비록 착하나 하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선량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만사가 어긋나고 잘못됩니다. 이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신이 노둔하고 노쇠한 몸으로서 모든 관료(官僚)의 우두머리 자리를 더럽히고 조금도 재능과 공효(功効)가 없으니, 널리 나이 젊고 덕(德)이 있는 자를 찾아서 신의 직책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삐 뛰어다니고 체력(體力)을 써야 하는 일이라면 나이 젊은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옳지만, 앉아서 도리를 논(論)하는 일이라면 경을 버리고 누가 있겠소. 갑자기 굳이 사퇴하여서 나의 근심을 더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당시 이직 63세
권진
.“신이 늙고 둔하며, 잊기를 잘하고 정신이 몽매하오며, 또한 재주와 덕이 없어서 재상(宰相)의 직임에 적합하지 아니하기에, 지금의 심한 한재는 신 같은 불초한 사람이 어진 이를 방해한 소치이오니, 원컨대 신의 관직을 파면시켜 주소서.”
당시 권진 70세
“신은 나이 75세로 노둔(老鈍)하고 혼매(昏昧)하여, 하는 일마다 실수하고 움직일 때마다 허물만 얻으므로 청의(淸議)에 부끄럽사온데, 더구나 농사철을 당하여 한재가 심하오니 실로 불초한 신이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진 이의 등용을 막습니다. 청컨대 신의 벼슬을 거두소서.”
세종 56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6월 22일(기유) 1번째기사
우의정 권진이 노병으로 사임하고자 하나 윤허하지 않다
우의정 권진이 노병으로 사임하고자 하나 윤허하지 않다
최부
당시 최부 58세
안순
세종 69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9월 6일(갑술) 3번째기사
호조 판서 안순이 사직하나 허락하지 않다
호조 판서 안순이 사직하나 허락하지 않다
“신은 본디 용렬하고 어리석으며, 또한 조금도 보답함이 없는데도 지나치게 임금의 은혜를 입었으니, 실로 분수에 넘은 일입니다. 아주 적은 공로로써 보답하고자 하여,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게으르지 아니하여 성은(聖恩)을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도모했은나, 체질이 본래부터 병이 많아서 때때로 병이 일어나더니, 지금 또 더 발작하여 사지와 몸이 피곤하고, 머리와 눈이 어지럽고 귀가 먹은데다가 먹는 것도 적으며, 다리와 무릎이 차서 약하기가 힘줄과 같습니다. 이러한 병든 몸으로써 편안히 있으면서 수양하더라도 오히려 치료되지 않을까 염려되는데, 힘써서 복무한다면 반드시 죽음을 재촉함이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신의 노쇠하여 병든 것을 불쌍히 여겨, 신의 직사(職事)를 갈아서 특별히 노신(老臣)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병을 치료하도록 하여, 얼마 동안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안순 당시 64세
신개
당시 신개 58세
성업
이심
"(중략)공무가 있으면 동료들에게 강론하여 직책을 다하지 못하는 꾸지람을 조금이라도 사례하고자 하오나, 나이가 50이 넘고 쇠함이 날마다 심하여, 책을 덮으면 잊는데, 종친의 학문은 날과 달로 진취하오니, 신이 어두운 정신으로서 가르치는 책임을 맡기가 어렵습니다. 어찌 한갓 소신(小臣)의 부당함을 무릅쓰고 벼슬에 있는 부끄러움을 품게 할 뿐이오리까. 또한 성조(聖朝)에 사람 쓰는 밝음에도 흠이 될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지극한 정을 양해하시고 어둡고 어지러운 마음을 편하게 하옵소서.”
권제
“신은 어려서부터 병이 많았는데, 이제 50이 넘어서 몸이 쇠약하고 피곤함이 더욱 심하옵니다. 지난 여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로 병을 무릅쓰고 직무에 봉사하였사오나, 또 식상(食傷)2928) 하는 병을 얻어 증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매, 의원에게 명하시와 약을 내려 주시고 여러가지로 구료하게 하시어 평안(平安)함을 얻었사옵니다. 출사(出仕)한 지 사날 만에 또 다시 발작하여 이같이 하기를 두세 번 거듭하기에 이르러, 병세가 점점 더 악화되어 온전히 먹지를 못하옵고 날로 더욱 노곤하와, 매우 고치기 어려울까 두렵사옵니다. 청하옵건대, 신의 관직을 파면하옵시와, 안심하고 약과 음식을 먹게 하여 길이 성상의 은덕을 입게 하옵소서.”
허조
세종 87권, 21년(1439 기미 / 명 정통(正統) 4년) 11월 21일(을축) 3번째기사
좌의정 허조가 위독하여 사직을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다
좌의정 허조가 위독하여 사직을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다
“경은 본래 나이가 많고 또 오래된 병이 있으나, 다만 큰 일을 재결(裁決)하고자 할 뿐이었소. 근래에 밤낮으로 근고(勤苦)하므로 내가 그 숙질(宿疾)이 나은 것을 기뻐하였더니, 이로 인하여 병이 될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었소. 내가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오. 경은 안심하고 병이나 조섭하오.”
하였다.
황희
“신이 도량이 좁고 지식이 얕아 재상감으로는 적당하지 못하면서 국정을 다스리는 직위에 몸을 담고 있사온대, 기력이 날로 쇠퇴하여 흐릿하게 잊기를 잘하고 아무것도 세우고 밝히는 힘이 없사와, 진실로 조그마한 도움도 되지 못하옵니다. 이번 같은 한재는 예년보다 몇 갑절 되오니 이는 실로 신하된 자가 그 직분에 알맞지 못한 소치이오니, 신의 관직을 파면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누가 능히 제 직분을 다했노라고 말할 것인가. 이와 같이 나간다면 조정이 아주 비게 되리로다.”
하고, 집현전 관원을 시켜 이 뜻을 가지고 그의 집에 가서 설유하게 하였다.
세종 56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4월 20일(무신) 3번째기사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중략)그래서 그대로 우물쭈물하며 지금에 이르도록 애써서 관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귀는 멀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는 일이 어려우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부자유하여 걸음을 걸으면 곧 쓰러집니다. 대체로 원기가 쇠약하여진 것이 원인이 되어 드디어 온갖 병이 침노하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은 금년의 생일로 이미 만 70세가 됩니다. 늙으면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은 나라에 떳떳한 규정(規定)에 있고, 병들어서 한가롭기를 바라는 것은 그 심정이 꾸민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나이가 노쇠에 이른 것을 가엾게 여기시며, 신의 정성이 깊은 충정에서 나온 것을 살피시고,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직위의 해면을 허락하소서. 신은 마땅히 삼가 착하신 은택에 편안히 무자멱질하면서 남은 해[餘年]의 생명을 조금 연장하며, 항상 성상의 장수를 송축(頌祝)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천지의〉 큰 조화(造化)와 〈같은 임금의 교화(敎化)에〉 보답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어려운 것을 극복(克服)하는 임금은 보필(輔弼)하는 재상의 어짐에 힘입는 것이니, 도모하여 임용한 옛 사람을 어찌 그 물러가고 나아가는 일이 용이(容易)하게 할 수 있겠는가.(생략)
세종 58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12월 7일(임진) 2번째기사
“신의 노병[老疾]이 갈마들어 공격하옵고, 귀와 눈은 날로 더 어두워지옵니다. 더군다나, 올겨울에는 날이 따뜻하여 물도 얼지 않사오매, 실로 신이 재능이 없이 인원수만 채우고 있으므로 그러한 것인가 하오니, 신의 직(職)을 파하여 주시기를 비나이다.”
세종 67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3월 29일(신축) 5번째기사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하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좇아 주심은 오직 성인(聖人)의 큰 덕량(德量)이요, 능하지 못하여 이에서 그치려는 것은 곧 미신(微臣)의 간곡한 회포입니다.(중략)이제까지 힘써 종사해 왔사오나, 귀가 먹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기가 어려우며,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따르지 못하여 걸음을 걸을 때마다 쓰러지곤 하니, 이는 대개 원기가 쇠약함에 따라, 백병이 마구 침범해 오는게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신은 출생한 그날부터 이미 70년의 세월이 찻사온즉, 늙어 치사(致仕)함은 나라에 상례가 있는 법이요, 병으로 인하여 한가함을 구하는 것 역시 진정 허식(虛飾)이 아니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생략)
세종 72권, 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6월 2일(정유) 1번째기사
“신은 천성이 원래 용렬하고 어두운데다가 학술조차 거칠고 엉성하온데, 근일에는 귀마저 어둡고, 노병(老病)이 갈마들어 공격하오며, 오랜 종기로 피가 그치지 아니하고 현운증(眩暈症)이 더하여, 생각하는 것이 흐리멍덩하고, 정사를 밝게 하는 바가 없이 외람되게 모두 쳐다보는 자리에 있어, 특히 대신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도리어 재이(災異)를 부르게 하고, 주야로 걱정하심을 드리게 되오니 참으로 황공하와 몸둘 바를 알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신의 직(職)을 파(罷)하여 주소서.”
세종 81권,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4월 14일(정묘) 1번째기사
황희가 사직전을 올리다
황희가 사직전을 올리다
(생략)
세종 85권, 21년(1439 기미 / 명 정통(正統) 4년) 6월 11일(정해) 2번째기사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희(喜)가 하혈병(下血病)이 일찍이 있었는데, 근래에 다시 일어나서 귀와 눈의 어두움이 날마다 더하여 임무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전(箋)을 올려 사면(辭免)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전(年前)에 여러 번 사전(辭箋)을 올렸으나 모두 윤허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감(聖鑑)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한다.”
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희(喜)가 시(詩)를 지어 돈에게 부치기를,“내가 진실로 나라에 털끝만한 도움이 없음은 행인(行人)도 아는 바인데, 근래에 노병(老病)이 더욱 심하고 몸이 구부러져서 수반(隨班)하여 걸으면 넘어지며, 귀가 어둡고 잊음이 많으며 정신이 혼매(昏昧)합니다. 한산직(閑散職)에 버려둠이 분수에 마땅하건마는, 다만 상달(上達)할 길이 없어 부끄러운 얼굴로 따라 다니다가, 감히 속된 글로써 고명(高明)3043) 께 우러러 올리오니 한 번 보시고 웃으시기를 바랍니다. 벼슬을사직(辭職)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나이에, 벼슬에 머물면서 일없이 도당(都堂)3044) 에서 밥 먹으니 얼마나 뻔뻔스러운 얼굴인가. 향안(香案)에 임 모시고 나의 노병(老病)아뢰어 백발(白髮) 늙은이 고향 산천 대하게 하오.”
“명일에 다시 아뢰어라. 영의정이 과연 정신이 흐리고 눈이 어두운가. 너의 보는 바는 어떠하냐. 모름지기 치사(致仕)하여야 마땅하겠느냐.”
“신의 소견으로는 귀가 어두움은 사실이오나, 정신은 혼매한 데 이르지는 아니하였사옵니다. 도덕(道德)과 지량(智量)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바이오니, 비록 늙고 병들어 허리가 굽었을지라도 치사(致仕)함은 마땅하지 아니하옵니다. 집에 누워서 대사(大事)를 처결하게 함이 또한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도다.”
하였다.
세종 124권, 31년(1449 기사 / 명 정통(正統) 14년) 5월 27일(병오) 1번째기사
한재로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한재로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신의 나이가 90에 가까운데, 공이 없이 녹을 먹으오니, 청하옵건대, 신의 직책을 파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소서.”
"뭘 어쩌라고 ㅆ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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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OTAL WAR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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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달달해요 작성시간 13.01.14 (가혹한대왕님)컴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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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니가?ㅋㅋ 작성시간 13.01.14 제발 짤라주세요 흑흑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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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아멜리에뿔랑 작성시간 13.01.1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발 짤라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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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리암 페인 작성시간 13.01.14 너무하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요즘시대에도 저나이에 일하려면 힘들껀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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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6등급 (23, 잉여아님) 작성시간 13.03.09 [조선 노인사냥꾼세종] 아ㅋㅋ웃으면안되는데왜이리웃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