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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나는 가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꽃과 줄기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나 생각한다.txt

작성자빠라파라바|작성시간22.01.12|조회수4,843 목록 댓글 14

출처 : https://blog.naver.com/luciatune/222587497509
 
 
 
 

 
 
 
내일부터 비가 내릴 것이고 앞으로 사흘 내내 올 것이므로
초여름 땡볕에 축축 처진 수국 잎사귀들을 그대로 두고 말린다.
모른 척 두고 보기가 영 불편하지만
조금만 힘내라고 마음속으로 덧붙여둔다.
오늘 물을 축이면 당장은 숙인 고개를 들겠지만
젖은 흙에 장맛비가 더해 과습해지면
뿌리가 견디기 힘들 것이다.
지난날 식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그저 예쁘다고 매일 물을 주다
과습으로 죽인 식물이 한두 그루였던가.
꽃과 잎이 좀 쳐진다고 식물이 죽지 않지만
뿌리가 썩으면 돌이킬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꽃잎보다
흙 속에 감춰져 있는 뿌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던
한 여름의 어느 낮에 태어났다고 한다.
폭우와 동시에 앞으로 영원히
보호자이자 아버지가 된 26살의 앳된 청년은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달리면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붙잡고 감사하다고 외쳤다고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를 뚫고
근처의 유아용품 가게로 달려들어가서
여자아이에게 안겨줄 만한 작은 인형을 급히 집어 든 그는
다시 병원으로 뛰어들면서 그만 빗물에 미끄러져,
크게 반원을 그리며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한다.
그런데 바닥에 쓰러진 채로도 계속 웃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기뻤기에, 아픈 줄도 몰랐다 한다.
 

아빠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폭우가 내릴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하고 또 하신다.
그래서 나는 나의 탄생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마치 극장에 앉아 스크린으로 지켜본 것처럼 떠올릴 수 있다.
큰 비와 함께 태어난 딸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고 점점 나이 먹어가는데도,
여름비는 몇십 년의 세월을 우습게 거슬러 올라
나와 내 아빠를 언제나 그 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내가 자라는 동안 우리 부녀는 함께 살지 못했다.
그래도 아빠는 늘 멀지 않은 곁에 있었다.
그러다 우리 부녀가 여러 달 동안,
24시간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나는 17세가 되던 봄 고등학교 입학식을 며칠 앞두고
길을 건너다 달려온 트럭에 부딪혔다.
뇌출혈이 일어나 두개골을 여는 큰 수술을 받았고
수술 직전 잠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머리카락이 없었다.
마취에서 깨 서서히 정신이 돌아올 때는
눕혀진 채로 수술실에서 밀려나오고 있었는데,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달려오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열 시간 내내 우셨는지 퉁퉁 부은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막 수술을 마친 내 뇌는
그 즉시 용감하고 다정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누운 채로 챔피언처럼 두 손을 맞잡고
허공에 마구 흔들어 보인 것이다.
그 행동으로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이러한 뜻이었을 것이다.
딸은 잘 싸웠고 살아남았어.
이제 안심해도 돼. 전투는 끝났어 아빠.

 
아빠는 젖은 얼굴로 다가와서
까불고 있다며 내 어깨를 퍽 하고 쳤다.
간호사와 의사들이 일순 기겁을 하며 아빠를 말렸다.
아버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버님!
우리는 웃었고 나는 곧바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17살의 나는 수술 자체가 끝이 아니라
사실은 그 이튿날부터
진짜 전투가 시작된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미음도 삼키지 못했고
기대서 잠시 앉아 있는 것도 불가능했다.
머리는 항상 붕대로 두껍게 칭칭 감겨있었는데
미간 위로는 감각이 없었고
내 코 끝에서는 늘 소독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혈관으로 투여되는 항생제는 너무 독해서
맞는 순간 온몸의 구멍이 뜨끈해지면서
입과 코에서도 내내 쇠 같은 약 맛이 맴돌았다.


아빠는 절대로 거울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진통 주사를 더 놓아달라는 말만 겨우 할 정도로
쇠약해진 채 고통과 싸우는 몇 주를 보냈다.
그때 얄궂게도 병실 창밖의 오래된 벚나무가 만개하여
창 너머 세상으로 하얀 꽃비가 펄펄 나렸다.
내 침대 머리 맡에는 벚꽃 속보다 더 붉은색으로 쓰여진
'절대안정'이라는 팻말이 이름표처럼 걸려있었다.

 
내가 다친 뇌의 부분은
언어능력을 관장하는 영역이라고 했다.
같은 부분을 다쳐 함께 입원실을 쓰던 작은 꼬마 친구는
말하고 쓰는 법을 잊어버려 재활 치료를 받고 있었다.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일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매일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선생님과 간호사 언니들이
내 머리를 조여 맨 붕대를 새것으로 갈아주고,
회진을 돌 때마다 나를 면밀하게 살펴주었다.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경과도 좋습니다.
그래도 나는 너무너무 아파서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또 침대 위에서의 몇 주가 흐리게 지나갔다.

 
아빠에게는 유머가 있었다.
기질이 호쾌하고 천성이 다정한 아빠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주변 사람들을 웃게 하는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오늘 조용하면 내일은 곡 소리가 나는
대학병원의 입원병동에서도
아빠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웃음을 짓도록 만들어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나 오랜 병간호에 지친 사람이나,
간호사나 환자나 가릴 것 없이
아빠는 언제나 말을 건넸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늘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누구나 아빠에게 쉽게 경계를 풀었고
그런 재능이 없었던 나는 그 모든 게 참 신기했다.
죽음과 고통으로 마비된 병동에서도
아빠 주위로 따뜻한 공기가 감도는 것이 말이다.
아마 그러한 재능은 인정과 공감과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를
전부 '한, 사람'으로 보는 데에서 비롯된
특별한 무엇이었던 것 같다.

 
 
토요일 특식이라는 게 있었다.
간이 없어 밍밍한 매일의 병원식 대신,
토요일의 점심 식사 단 한 끼만
일반식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준
병원의 배려 같은 것이었다.
우리 부녀에게는 대단한 이벤트였다.
왜냐면 돈가스 or 짜장면 같은 식으로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는데,
아빠가 결코 양보해 주지 않아서
늘 가위바위보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기다린, 토요일에 단 한 번만 먹을 수 있는
'맛'이 있는 음식을 위해 펼치는 운명의 승부였다.
어찌나 떠들썩했던지 다른 환우들과 간호사 언니들도 와서
웃으며 구경을 할 정도였다.

 
그때는 아빠가 왜 아픈 나에게 그냥 양보해 주지 않는지,
왜 항상 내가 먹고 싶다고 한 것과
다른 메뉴를 주장하는지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재미있었다. 슬그머니 없던 활기도 생겨났다.

 
아빠는 나를 너무나 평소처럼,
마치 전혀 아프지 않은 아이처럼 대했다.
절대안정이 내 이름표이고,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분들도 모두 나를
손안의 새끼 새처럼 대하는데 말이다.
아빠는 나를 툭 치거나 슥 밀거나,
부아가 날 때까지 놀리거나 심지어는
내리막 복도에서 휠체어를 놔버리기도 했다.
(그때 나는 닫히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끼면서 정지했다.)

 
어린 마음에 아빠가 날 조금은 막 대하는 모습을 보니,
내 상태가 썩 괜찮은가 보다, 하고 자연스레 믿게 되었다.
내 상태가 중하다면 부모로서
이렇게 막 대하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한번 일어나서 걸어볼까,
벽을 짚고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을까 하는
도전의식도 조금씩 생겨났다.
아빠는 내가 '아프다'라는 인식에 사로잡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짓궂은 장난을 걸어왔고
그 때문에 '아프다는 인식의 병실'에서만큼은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주 뒤에
'복도를 뛰어다닐 정도로 건강하다'라는 이유로
병원에서 쫓겨났다.
심지어 입원하기 전보다 더 살이 올라
통통해진 두 볼을 하고 말이다.
머리 전체를 가로지르는 엄청난 흉터를 얻었고
가발을 쓰긴 했지만 곧바로 학교도 다니게 되었다.



 
장마의 시작이 예고되었고 벌써부터 신선한 비 내음이
내가 사는 골목과 마을 어귀를 달큼하게 감싸고돈다.
아끼는 수국과 야생화 포기들이
목이 말라 축축 처진 것을 보고도
물을 주지 않으려 참는 것이 쉽지 않다.
비에 꺾이지 않도록 수형을 잡아주고
상한 잎도 골라준다.
그래도 물은 주지 않는다.
뿌리가 과습 하면 꽃도 줄기도 전부 죽는다.


입원해 있던 시절 아빠는 한 달이 넘도록
절대 거울을 보여주지 않았다.
조르고 졸라 겨우 거울을 한번 보게 되었을 때,
비친 내 얼굴은 콰지모도나 프랑켄슈타인
아니면 그 둘을 더 끔찍하게 합쳐놓은 것처럼
못 볼 꼴이 되어 있었다.
머리를 수술하니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올라
엉겨 붙은 피딱지와 함께 잔뜩 일그러진 채였는데,
붕대 아래로 불거져있는 것들이 절대
17살 여자아이의 얼굴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낫고 나면 다시 예전의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의 어린 나는
보통 여자로서의 내 인생이 다 끝난 줄 알았다.

 
충격받은 나에게 아빠는 슬며시
'많이 좋아진 것'이라고 했다.
그럼 한 달 전에는 대체 어땠다는 말인가?
아빠는 꽃잎 같은 나이대 딸아이의
그런 얼굴을 보면서도 웃고,
쉴 틈 없이 장난을 걸며 일말의 내색 없이
그저 속으로만 견딘 것이다.


나의 뿌리를 붙잡고,
과습 하여 썩어 버리지 않도록
물을 주고 또 주고 싶은 마음을 무던히 견디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딸을 대하고,
제 스스로 굳센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우울함과 눈물로 질척해진 땅을
농담과 장난으로 부지런히 불어 말리면서.
꽃과 줄기가 아주 상해
보기에 끔찍한 몰골이 되었어도,
물 주기를 참고 참으며
내 뿌리를 살리려,
내 정신을 계속 붙잡고 있어 주신 것이다.

 
당신이 만약 내 콘서트에 온 적이 있다면
나의 아빠를 만난 적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로비에 서서 모든 사람들을 맞이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전부 외우고자 한다.
몰래 포스터 같은 걸 빼돌려 건네주거나,
나 대신 본인이 싸인을 해준다거나,
뮤지션에게 지급되는 간식을 가져가서
같이 나눠먹자며 슬그머니 건넨다거나
혹은 당신과 담배 한 대를 같이 태우기 위해
꽤 긴 거리를 함께 산책하기도 한다.
당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에게 하면,
그는 분명히 눈물을 조금 글썽이면서
굳은살 박힌 큰 손으로 당신의 등을
퍽퍽 소리 나게 두드렸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는 팬분이라면
무서울 정도로 전부 기억하는 아빠는
대기실에 십여 분 주기로 찾아와 오늘은 누가 왔고,
어떤 옷을 입고 왔는지 어디쯤에 앉아있는지
그리고 함께 서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를
끊임없이 나에게 전해 주신다.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제 여름을 알리는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아빠는 또
내 태어난 날 이야기를 버릇처럼 시작하실 것이다.
비가 한차례 시원하게 내리고 나면 내 꽃들도 고개를 들고,
나도 내린 비만큼 더 깊이 뿌리 뻗을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꽃과 줄기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나 생각한다.
아니면 그가 고개 숙이고 아플 때,
그를 당장 일으키겠노라며 원치도 않은 사랑을
물처럼 내리붓지는 않았는지 생각한다.
우리의 젖은 뿌리를 잘 마른 흙처럼
부드럽게 감싸줄 수 있는 노래들을 생각한다.
비 내음이 난다. 아빠를 생각한다.
나도 내 수국들처럼 약간은 목이 마른 채로,
이제부터 내내 내릴 여름 비를 기다릴 것이다.



<21. 7월 10일의 일기 중에서>
 
 
 
 
 
 
 
 
 
 

싱어송라이터 심규선 님 글이야
(과거에는 루시아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었음
대표곡: 선인장,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최근엔 옷소매 ost 등등)
 
 
글이 너무 좋아서 여시들이랑 같이 보고 싶어서 퍼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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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 눈물한방울 달고 싶었는데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서 일단 흥미돋 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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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교 | 작성시간 22.01.12 눈물나네 좋은 글 소개해줘서 고마워
  • 작성자운좋은아이 | 작성시간 22.01.12 우와..
  • 작성자주체적으로 살기 | 작성시간 22.01.12 와... 진짜담담하고 감동적인 글이다..눈물나
  • 작성자태리여신 | 작성시간 22.01.12 책으로도 있나 글 너무 좋다
  • 작성자산책광인 | 작성시간 22.02.23 와 이거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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