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크랩] [흥미돋]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작성자뿔버섣|작성시간23.12.28|조회수7,473 목록 댓글 17

출처 : 여성시대 아이고허리야다리야

조선 역사를 통틀어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람은 영조 단 한 명 뿐임

영조가 얼마나 지독한 아버지였는지는 차치하고
(내가 사도세자였어도 온전히 버티지 못할법 한..)

정치적으로 임금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려도 함


먼저 영조는 여시들도 잘 알다시피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이고
형인 경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음

그리고 즉위 기간 내내 숙종의 씨가 아니다, 경종을 죽였다는 왕위 정통성을 건드리는 헛소문의 주인공임

이런 루머에 시달린 왕은 조선 내내 더 찾아봐도 없음...

다만 이런 정통성의 취약성과는 별개로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훌륭하게 정권을 장악한 강한 왕권의 소유자임

이건 즉위 후반부, 사도세자가 죽었을 쯤엔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였음

영조에겐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아들은 바로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얻은 효장세자 이행임

효장세자는 숙종이 생전에 본 유일한 손자
영조가 스물 다섯에 본 아들이므로 그 때 당시 빠른 건 아니지만 적당한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음

하지만 이 아들은 영조가 즉위한 후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0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음

근데 이 죽음이야말로 몇 안되게 조선왕실에 찐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임
당시 대비 어씨를 중심으로 한 남은 경종 지지세력이 영조에게 한 짓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함

(사족으로 영조가 그 당시 무려 81세까지 살았기 때문에 효장세자가 살아있었어도 당시 평균수명을 웃도는 50대 중반이라 아버지보다 먼저 자연사했거나...몇 년 왕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을 듯...)



그 이후로 7년간 영조는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총애하던 궁인 출신 후궁 이씨에게서 드디어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얻음




세상에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있겠냐만은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유일한 후계자임과 동시에 그보다 더한 정치적 가치가 있었음

바로 삼종의 혈맥이라는 것 ㅇㅇ

삼종의 혈맥이 뭐냐면 바로
영조의 아빠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3대를 말하는데

효종 현종 숙종임

즉 소현세자 사망 후 형 대신 세자가 되고 왕이 된 효종의 후손이라는 것

현종 숙종 대에 불거진 예송논쟁을 정말로 러프하게 요약하자면
왕위 정통성이 효종의 후손에게 있느냐, 소현세자에게 있느냐고 묻는 논쟁이기도 했음

그렇기에 효종의 후손들에게 이 삼종의 혈맥으로 왕위를 잇는 건 너무도 중요한 가치이고 이건 영조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단서이기도 함


영조는 세제이던 시절 역모에 연루되어 죽을 뻔 한 적 있음
이 때 영조를 구해준게 당시 대비이던 인원왕후인데 영조가 자신을 구해달라며 그 명분으로 내세운게 바로

제가 죽으면 삼종의 혈맥은 어찌 잇겠습니까? 였음 ㅇㅇ

맞음 영조는 경종을 제외하면 당시 유일하게 살아있던 효종의 직계였음

효종은 아들이 현종 하나뿐이었고
현종은 아들이 숙종 하나뿐이었음
숙종도 아들이 여럿 있었으나 장성한 건 경종, 영조 둘 뿐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가 소현세자의 후손이 되는 왕손을 자기 양자로 들여 세자로 삼으려 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실제 실행되지 못했던 건 삼종의 혈맥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ㅇㅇ

그만큼 당시 왕실 직계에게 효종/소현세자 정통성 문제는 중요했음



당시 사도세자가 없었더라면 왕족 누군가를 입적해서 왕위를 잇게 했을텐데
가장 가까운 왕족이 바로 소현세자의 후손들이었고 이로 인해 나중에 정치적 대혼란이 올게 당연했던 상황

그런데 사도세자가 태어나 드디어 삼종의 혈맥을 이을 수 있었음

하지만 어린시절 영특했던 사도세자는
영조의 바람만큼은 자라나지 못했고
이로인한 아버지의 미움에 압박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어떤 기질이 있어서인지, 혹은 둘 다인지

사도세자는 역대 세자들 가운데 있었던 적 없는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름

내관의 목을 잘라 들고 다니며 궁인들을 겁주고
후궁을 때려죽였으며(이 때 자기 자식도 죽일 뻔함)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이 백여명에 달했음




문제는 당시 영조가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었다는 것
(물론 수 년 후에 죽지만...)

내일 왕이 될지도 모르는 세자의 눈치를 보느라 누구도 제대로 영조에게 세자의 저지른 짓을 알리지 않았음

나경언의 고변 등을 통해 결국 영조가 알게 되긴 함

내가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에,
광인이자 살인을 저지르는 세자를 후계로 놔둘 수 있었을까?

사도세자에엔 당시 네명의 아들이 있었음
그 중 적자이자 차남인(장남은 요절) 세손은 매우 영특했고

따라서 이제 더이상 사도세자는 유일한 삼종의 혈맥을 가진 후계가 아님

다만 문제는 세자를 살려둘 경우, 세자의 아들 중 하나가 왕이 되었을 때 그를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

임금도 불효를 해선 안되는게 조선의 성리학 질서였고 세자의 광증이 끝나지 않는다면 이를 세자의 아들이 컨트롤 할 수는 없게 되어 버리기에 결국 죽일 결심을 했다고 봄

그리고 아무리 세자가 광인이라고 한들 세자의 아들들이 나중에 그의 죽음에 일조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들 가능성이 있음

이러면 연산군 때처럼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것..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의 죄를 고한 사람으로 두 명을 내세움
바로 사도의 두 명의 어머니



첫번째는 바로 죽은 정성왕후 서씨
세자의 법모임

영조는 정성왕후가 꿈에서 나타나 세자의 죄를 알려줬다고 함





두번째는 세자의 생모 영빈이씨

세자가 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을 고변함



즉,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된다고 해도
죽게한 사람이 자신의 할아버지/할머니이기 때문에 새로운 왕의 즉위 후 다가올 정치적 파장을 줄이려 한 것


뒤주라는 그로테스크한 방식을 쓴 것도 최대한 남의 손이 개입되지 않게 하려한 것으로 추측됨...


이상....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레스타드 | 작성시간 23.12.28 영조가 진짜 개 독해서 아들이 버티질 못 한것도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궁인들 백여명 죽인거면 사도세자 자체도 문제였다 생각함.. 정신이 멀쩡한 사람인데 상처받고 압박에 멘탈이 아무리 흔들렸어도 어떻게 머리들고 돌아다니고 패죽이고 그런단 말임.. 영조도 맘에 안든것도 있을거고 그러고 돌아다니는 세자라는게.. 손자(정조)까지도 저 손에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음
  • 답댓글 작성자비옙 | 작성시간 23.12.28 22
  • 작성자대출갚고팡 | 작성시간 23.12.28 100명을 죽이다니.. 진짜 미친놈이었네
  • 작성자코막 | 작성시간 23.12.28 흥미롭군 흥미로워….
  • 작성자graph | 작성시간 23.12.28 와우,,,나름 정치적으로 계산 많이 한 죽음이었구나...뒤주에 가둔게.. 누군가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며 정조에게 흠집이 가지 않고 잡음이 생기지 않을 최선이었구만...영조는 진짜 정치인 그 자체였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