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743190267
이전편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이동경로를 보면
내성-죽주-북원경-명주-철원-송악-철원 정도임.
현대식 이름으로는 영월-안성-원주-강릉-철원-개성-철원.
내성은 땡중 시절 머무르던 곳이며
죽주는 약 1년 간 기훤 휘하에서 있었던 곳이고
원주는 양길 휘하에서 있던 곳임.
이후 궁예는 명주를 세력 근거지로 삼아 양길로부터 독립,
896년 철원에 도읍했다가 898년 송악으로 천도하며
칭왕하고 901년에 공식적으로 고려를 건국함.
그런데 904년을 기점으로
고구려의 부활을 열망하던 패서 호족들의 통수를 후리고
궁예가 고구려색 빼기에 열중하며
폭력적인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고구려계이며 태봉의 핵심 세력 중 하나인
왕건을 비롯, 현 황해도인 패서 호족들이 반발하자
이에 궁예는 서원경(청주)을 친위세력으로 삼으며
이들을 꾸준히 견제했고 양 측이 정치싸움을 벌임.
그래서 태봉의 주요 정치세력은
고구려계인 왕건을 지지하는 패서·나주 등
VS
궁예를 지지하는 명주·서원경 등으로 나뉨.
친궁예파 vs 친왕건파
우선 친궁예파는 김순식으로 대표되는 명주와
견금, 임춘길, 배총규, 아지태 등의 서원경,
환선길, 이흔암, 은부, 종간 등의 최측근 무장·관료들.
이 중 명주는 궁예의 세력 근거지이고
서원경은 궁예가 즉위 후 친위세력으로 키우던 곳임.
친왕건파는 왕건을 추대한 사기장 등의 태봉 중앙무장들,
류차달, 박지윤, 황보제공, 류천궁 등의 패서 호족,
오희, 나총례, 최상흔 등 나주를 위시한 영산강 유역 호족,
왕건과 함께 외지에서 활약한 강공훤, 김언, 태평 등임.
궁예는 896년 철원을 도읍으로 했다가
대가리 큰 패서 호족들에 의해 898년 송악으로 천도했는데
904년 국호를 대동방국이란 뜻의 마진으로 변경하고
이듬해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한 뒤
청주인 1천 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킴.
그러면서 궁예는 꾸준히 패서 호족들을 견제했고
특히 위험한 패서 호족 출신으로, 많은 군공을 세운
왕건을 백관의 으뜸으로 삼으면서도 꾸준히 견제함.
누구든 지한테 방해되는 놈은 골통을 클린히트치는
대머리 성격상 왕건을 쳐내려면 쳐낼 수 있었지만
이 대머리는 왕건을 견제하면서 한편으론
문·무 양쪽으로 최고위직에 앉히는 등 신뢰도 했음.
특히 해군과 관련된 일은 모두 왕건에게 맡길 정도.
대머리는 폭력적인 왕권 강화를 시도하며
민심도 잡지 못한 편이었고 상술했듯
호족, 특히 패서 호족들을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봤음.
미륵불이라 자칭하며 시이비 제정일치 국가 만든거나
패서 호족 출신 아내의 음부를 달군 쇠봉으로 쑤셔 죽인거,
지가 쓴 불경 욕했다고 철퇴샷으로 석총 죽인건..
왕건은 궁예가 이럴 때마다 예전에 지가 대활약했었고
자신의 두번째 세력 근거지인 바다 건너 나주로 대피함.
(https://m.fmkorea.com/6679306188)
또, 왕건이 오랜 기간 나주에 큰 영향력을 끼쳤기에
이들도 훗날 왕건이 왕위를 찬탈하자 왕건을 지지함.
암튼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축출함.
왕건의 반란은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의 사기장 등
최측근 무장들과 일으킨 군부 쿠데타였음.
이후 왕건은 빠른 속도로 친궁예파들을 제거했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들도 빠르게 진압함.
특히 청주에서는 반란이 거의 유행해서 ㅈㄴ 많이 일어남
하지만 그 많은 친궁예파를 다 처리하진 못했음.
904년, 이흔암이 마군대장군으로서
웅주를 점령하고 쭉 주둔 중이었는데
왕건이 이흔암을 누명 씌워 제거하자
웅주와 운주 등은 빡돌아서 백제에 귀부함
궁예가 양길 따까리였던 시절부터 그를 지지한
명주의 김순식은 아예 독립해서 독자노선을 타버림.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킨 결과 웅주와 운주 등은
오랜 기간 백제의 대고려 최전선으로써 왕건을 괴롭혔고
김순식은 10여 년 뒤에야 고려로 귀부하고 나서도
중앙에 크게 호응하지 않다가
일리천 전투가 되어서야 막타 치러 사병을 이끌고 나타남.
이건 글로 쓰려다가 좀 뭐해서 뜬금없이 적는건데
왕건의 성인 왕은 아무리 빨라도 왕건 대에 칭했을 거라는 추측이 세간에 널리 퍼져있는데
왕건 가문은 왕건 이전부터 왕 씨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음. 아무리 늦어도 왕건의 조부 때부터.
또한 왕건 가문은 고구려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보이는데 고구려에 이미 왕 씨를 사용하는 귀족 가문이 존재했었음. 왕고로, 왕산악, 왕고덕 등.
즉 조부·증조부 수준이 아니라 아니라 아예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왕 씨를 최초로 사용한 시조가 나올 가능성도 있음.
후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6두품 등 외에도 지방 곳곳의 돈 많고 세력 큰 가문들은 성씨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당시 대호족이었던 왕건 가문 역시 성씨를 쓰고 있었다 해서 이상할게 없음.
또한 왕건 가문 외에도 신라 말 당시 왕을 성으로 하는 가문들은 여럿 존재했었음. 왕지본, 왕충, 왕봉규 등.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걸 잊으면 안된다" 이 말을 들을때마다 궁예가 생각남
가끔 진짜 궁예가 미쳐날뛴게 맞을까????생각이들긴함
어차피 역사는 왕건쪽에서 기록했을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