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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사] 3. (쉬어가기) 기자조선은 정말로 존재했을까?
오늘부터 고조선을 신화에서 역사로 끌어올립니다!!!!
1. 그간의 내용 정리
고고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에 요동반도 북부에서 '정가와자 문화'가 발생하고,
기원전 4세기가 되면 정가와자 문화가 요동반도를 통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전국책>이란 책에 기원전 4세기에
요동에 고조선이 있었다고 하니
'정가와자 문화'가 바로 고조선의 문화이고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면 요동을 통일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기원전 4세기부터 고조선의 행적을 살펴 보면 좋겠지요?!
가시죠!
2. 중국의 전국시대
기원전 4세기 중반에 중국은 전국시대 한창이었습니다.
주나라가 무너지자 각 지방의 제후들은 너도 나도 '왕'을 칭하였습니다.
원래 '왕(王)'은 주나라의 지도자만 사용하였고,
각 지방의 유력자들은 '후(侯)'에 불과했습니다.
당시에는 왕(王)이라는 명칭 자체가
세상의 유일한 지도자란 뜻이므로
대단히 권위가 있는 칭호였습니다.
하지만 주나라가 무너지자 '후(侯)'들이 '왕(王)'이라고 칭하면서
중국을 통일하려 들었습니다.
이것이 중국의 전국시대입니다.
3. 고조선 임금, 왕(王)을 칭하다.
중국이 전쟁으로 얼룩진 기원전 4세기..
고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위략>이라는 책을 통해 고조선의 행적을 간략하게나마 알 수가 있습니다.
<위략>은 어환이란 사람이 서기 3세기에 저술한 위나라의 역사서인데요.
위나라의 역사서지만 부분적으로 고조선의 역사가 실려 있습니다.
고조선에 대한 정보를 주는 몇 안되는 책이므로 유심히 봐야 하는데,
문제는 거짓 정보도 많아서 잘 가려봐야 한다는 겁니다.
일단 <위략>을 살펴보시죠.
<위략>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王)이라 칭하고
동(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燕)나라를 역습(逆擊)하여 주(周) 왕실(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諫)하므로 중지하였다.
<위략>에 따르면 중국 연나라가 왕(王)을 칭하면서 고조선을 치려고 하자
고조선의 지도자도 '왕(王)'을 칭한 다음 연나라를 선공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에는 살펴볼 것이 굉장히 많은데요.
첫째, 고조선 지도자가 왕을 칭한 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연나라에서 왕을 칭한 사람은 역왕입니다.
그는 기원전 323년에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고조선도 이와 멀지 않은 시기에 왕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연나라의 칭왕과 멀지 않은 시기인
기원전 4세기 중후반에 고조선이 스스로 '왕국'을 선포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둘째, 이 기록에 깔린 중국적 관점을 걷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화에서 말씀드렸듯이 학계 통설은 기자가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거짓으로 봅니다.
그래서 고조선의 임금을 '기자의 후예'라고 적은 것은 사실이 아니며,
고조선의 임금은 기자와 무관합니다.
또한 중국인들은 만연하게 '왕 아래는 후이지!'라는 생각에서
당시 칭왕을 하기 전의 고조선 임금을 '조선후'라고 적어놨는데요.
정작 칭왕 전의 고조선 임금이 자기 자신을 '후'라고 불렀을지는 매우 의문입니다.
'후'라는 말 자체가 중국의 지방 유력자에게 쓰는 것에 불과한데
고조선 임금이 과연 그런 호칭을 자기 자신에게 썼을까요?
아마도 고조선 임금에겐 자기 자신을 칭하는 별도의 명칭이 있었을텐데(사견),
그것이 무엇인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조선 임금이 그 호칭을 쓰다가 변경하여
세상의 유일한 지배자라는 '왕'이란 호칭을 쓰게 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셋째, 고조선 임금이 칭왕을 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왕(王)이란 호칭 자체가 세상의 유일한 지배자란 뜻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비록 전국시대가 되면서 너도 나도 왕을 칭하면서 왕호의 가치가 낮아지고,
심지어 훗날 진시황은 왕 위에 '황제'라는 존재를 만들어서
오늘날에는 왕의 가치가 많이 절하가 되었지만,
이 시절만 하더라도 '왕'이 바로 세상의 지배자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조선 임금이 왕을 칭했다는 것은
그만큼 국력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중국적 관념을 받아들여 중화세상의 일원이 되겠단 것이 아니라,
요하 건너 세상에 '왕'이란 호칭이 있는데 그 내용이 그럴듯 하니
자신에게 걸맞는 칭호라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사견).
(그림을 예쁘게 그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여는 잘못 그렸으니 무시해주세요;;)
어쨌거나 기원전 4세기!
고조선의 임금은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면서
고조선이 왕국이 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이 당시 고조선왕이 누구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분은 우리 역사 최초로 칭왕을 하신 분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4. 연나라와의 갈등과 봉합
고조선의 칭왕은 연나라의 침공 위협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한 번 위에서 말씀드린 기록을 보여드리고자 하는데요.
<위략>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王)이라 칭하고
동(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燕)나라를 역습(逆擊)하여 주(周) 왕실(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諫)하므로 중지하였다.
이 기록을 보시면,
연나라는 고조선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고조선 임금은 그것을 알고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한 다음
연나라를 선공하려고 하였다는데요.
여기서 유의할 것은 <위략>은 고조선이 '주 왕실을 받을려고' 연을 치려했다는데,
이것이야 말로 지극히 중국적인 관점으로 취할 게 못되구요.
연의 입장에선 중원을 진출해야 할 상황에서
후방의 고조선이 성장하니 고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고조선의 입장에선 연이 위협을 가하니 이를 제지할 필요가 있었으니,
둘 사이의 긴장관계는 피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시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사견).
다만 고조선의 대부(大夫) 예(禮)가 고조선왕을 말려 고조선왕이 침공 계획을 중단했다고 하네요.
참고로 예(禮)는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이름이 기록된 인물입니다.
임금보다 신하의 이름이 먼저 기록이 된 것이 재미있네요.
예가 어떠한 이유로 고조선왕을 말렸는지는 불명입니다.
고조선 내부의 사정이 안 좋다고 본 것인지,
연과의 싸움이 이득이 없다고 본 것인지,
연과 싸우면 질 것이라고 본 것인지,
자연재해가 있었던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기록의 부족이란 게 현대인에게 참으로 아쉽습니다.
어쨌거나 이후 고조선왕은 예의 간언을 듣고 아래와 같이 조치를 취하는데요.
<위략>
그리하여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고조선왕은 예를 연나라로 보냈고,
예는 연나라를 설득해 화친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렇게 예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외교성과를 이끌어낸 인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예가 어떤 말로 연나라를 설득했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의 외교성과로 인하여 양국의 전쟁위험이 풀린 것은 사실입니다.
이후 고조선과 연은 기원전 4세기가 끝날 때까지 무력으로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예의 활약으로 고조선은 장기간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지요.
5. 기원전 4세기의 고조선은 패기가 넘쳤다.
기원전 4세기의 고조선은 칭왕을 하고
연나라를 선공하려고 하는 등 매우 패기가 넘쳤습니다.
아마도 이는 그 이전 200년간 요동반도를 통일하며 얻은 국력 상승에서 비롯한 자신감으로 보이는데요.
예의 활약으로 장기간 평화를 얻으면서 그 국력을 온존하게 유지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기원전 3세기가 되자마자
고조선은 대몰락을 하게 되는데요.
다음화에서 계속..
한울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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