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돋]아버지가 3kg짜리 소화기로 8살 아이를 때리려 했습니다 (내 앞에 나의 열세 살 언니가 있었다)
작성자비타민D챙겨먹자작성시간24.11.21조회수11,876 목록 댓글 50출처: https://m.pann.nate.com/talk/348079992
내가 7살에 겪은 일이다. 그날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열세 살짜리였던 나의 언니다.
지금 나는 20대고, 제목 같은 위협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럼에도 자극적인 과거 일을 표제삼은 것은 많은 여자들이 이 글을 읽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직까지 기억한다. 나는 일곱 살이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까닭으로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뻗쳐 걷어차이면서 대여섯시간 동안 폭언과 고함을 듣고 있었다. 이유를 알고 있다. 집 전화를 통해 몇만 원인가 하는 금액의 영문 모를 전자 결제가 진행되었다. 당시 집에서 전화를 이용해 인터넷 결제 같은 걸 할 줄 아는 사람이 나 뿐이었다.
7살짜리가 그러는 법을 어떻게 알았느냐, 아버지가 포커 게임을 좋아해 종종 캐시 아이템을 샀기 때문이다. 구매를 내게 시켜서 방법을 익혔다. 그러니, 가족 중 결제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나뿐이니까, 분명 네가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맹세컨대 나는 이유를 몰랐다. 몇 시간을 울며 빌었다. 내가 안 그랬어 나는 몰라…….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 내가 아무에게나 어머니의 주민번호를 알려 주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땐 보안 인식이 적을 때라 주민번호나 전화번호 정도만 알아도 그런 결제가 가능했다. 그러니 위험한 상황이었던 건 맞고, 호되게 야단을 쳐서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일부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7살이었다, 7살. 뭘 안다고. 그럴 수도 있는 나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때 당시에는 내가 원인을 전혀 몰랐다는 점이고, 아버지 역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른 채로 심증이 내게 있기에 쥐잡듯이 어린애를 잡았다. 너무 겁이 나서, 네가 했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벌을 그만 서게 해주겠다기에 나는 반억지로 ‘내가 했다’고 말하고 말았다. 숫제 고문이다. 갓 입학한 어린아이를 몇 시간 동안 으르고 체벌하며 사실조차 아닌 답을 이끌어냈는데 고문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나 그때 나는 정말 억울했고 요령을 몰랐기 때문에, ‘일단 지금 그런 것으로 넘어가고, 내일 통신사에 전화해서 진위를 물어보라’는 식의 답을 했다. 그러자 대노한 아버지가 소화기로 나를 때리려고 했다. 소화기, 진짜 소화기. 손바닥만한 걸 말하는 게 아니라 3.3kg짜리 규격인 그걸 말하는 것이다. 아파트 복도에 두는 그것. 아주 무겁고 철제로 만든, 맞으면 성인이라도 당연히 죽을 수 있는 그것.
언니가 내 앞으로 뛰어들어서 남자를 가로막았다. 그때 언니는 열세 살이었고 초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이었으며 아버지에게 시달리긴 나보다 더한 시기였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소화기를, 소화기를 들고 달려드는데 내 앞으로 뛰어와 양팔을 벌리고 앞에 섰다.
나는 그날 키가 150cm쯤 되었을까 싶은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보여 주었던 등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이후 상황이 다소 진정되고 이 모든 일이 내 고의가 아니라 그저 ‘7살짜리가 저지를 법한 실수’ 때문에 벌어졌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언니는 다시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사과를 하라고 외쳤다.
나는 20대 중반이 되어 그의 ‘남성성’과 성질머리가 함께 한풀 꺾인 지금까지도 아버지에게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 시절엔 더했다. 아버지는 방문을 때려 부수거나 선풍기를 집어 던져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술에 절어 들어와 새벽 네 시까지 난동을 부린 후에도 사과하는 법을 몰랐다.
그때 언니는 나보다도 아버지에게 자주 맞았다. 나는 당연히 아버지를 무서워했지만 그가 기분이 좋을 땐 또 살가운 아빠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뭘 알겠는가? 매일 윽박지르고 고함치던 사람이 한두 번 잘해 주면 내게 애정이 있다고 믿어 버리게 된다. 그러나 언니는 열세 살이었고, 어렸으되 아버지가 가정폭력의 가해자라는 사실은 알 법한 인지능력이 있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꼭지가 돈 아버지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언니는 나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소화기가 달려드는 내 앞을 가로막고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소리쳤다. 내가 알기로 아버지는 이 사건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나라면 내 손에 소화기가 들려 있는데 열세 살난 내 딸이 7살배기 동생을 감싸고 섰다면 그 순간의 기억이 눈꺼풀 안에 새겨져 평생 부끄러움을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그런 족속이다. 세상엔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 기억을 편리하게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인간들만이 청렴결백을 주장하고, 그렇지 못한 피해자들은 보통 정신과에 간다.
자라는 동안 언니는 착실하고 얌전한 모범생이었고 좋은 대학에 갔으며 번듯한 직업을 가졌다. 나는 중간부터 어디 한 군데가 어긋난 사람처럼 이런저런 사고를 쳤다. 세상은 분노와 공포로 직조된 거대한 수감시설 같은 것이었고 가슴으로부터 자라는 화는 아버지처럼 타인에게로 터뜨려지는 대신 내 안을 저미고 있었다. 내가 온전히 망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울증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을 때 이미 나는 나의 건강한 10대를 송두리째 어딘가에 뺏긴 후였다.
그러나 내 앞에 언니가 있었다.나보다 먼저 안락한 소녀 시절을 도난당한 그녀는 열세 살에 일곱 살 동생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내 언니는 나보다 몇 해 먼저 태어나 괴물 같은 아버지의 분노를 영문도 모른 채 걸머지고 질질 걸어갔다. 내가 걷지도 못하던 시절부터 그녀는 이미 스스로도 무엇인지 모르는 투쟁을 시작하였다. 누구도 길을 알려 주지 않고, 잊을 만하면 세상을 두들겨 패는 폭력으로부터 자아를 지키기 위해 무한한 싸움을 반복했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 그녀를 따라 걸으면서 ‘이미 아는 공포’와 싸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언니에게 산다는 것은 무수한 미답지의 반복이었으리라.
내가 열세 살이 되고, 열여섯 살이 되고, 다시 스무 살이 되는 동안 나는 언제나 언니의 열세 살과 열여섯 살과 스무 살을 생각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니에게 물어보았고 돈이 없어도 언니에게 빌렸다. 바짝바짝 가슴을 말리는 홧병 같은 것에 휩쓸릴 때에도 나보다 먼저 그 길 앞에 언니가 있었다.
나이차이가 나는 탓에 내가 기억하는 언니는 항상 어른이었다. 그녀가 중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도 내 눈에는 이미 완성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내가 자라며 앞으로 겪게 될 아버지보다 늘 여섯 살 젊어 더 기운이 넘치는 남자 앞에 서야 했을 때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어린 나이였던 것이다. 이십 대 중반이 된 지금 내가 나의 스무 살을 돌이켜 봐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리고 실수투성이인데, 심지어 이 앞에 어떤 시련이 있을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을 그녀에게는 어땠겠는가? 열세 살이었던 언니가 내 앞을 가로막을 때 그녀는 저 시뻘건 소화기를 자신이 정말로 대신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과하라고 외쳐도 듣지 않는다는 것 역시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언니는 내 앞에 섰고, 나 대신 사과를 요구했다.
나는 언니와 친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보통 자매들의 친밀함과 조금 다르다. 팔짱을 끼고 함께 쇼핑하거나 옷을 나누어 입는 대신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으로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신뢰를 나눠 가졌다. 자아가 일종의 철제 상자라면 우리는 언제나 상자 바깥에서 날아오는 폭탄 파편을 맞으며 살아갔기에 도저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서로 얽혀들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서, 우리는 비록 살갑게 인사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결코 서로 부딪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없이 증명하는 날로써 유대감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자매애라기보단 전우애라고 해야 옳을 애착이 있다. 미답지를 걷던 그녀의 투쟁이 유산으로 남아 나의 투쟁이 되었다.
여성들이 함께 싸우는 여성을 자매라고 부를 때 나는 나의 언니를 생각한다. 이제 나는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누군가에게 귀속될 필요가 없는 사회인이고, 아버지가 또다시 소화기를 들고 달려든다면 절대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만큼 자랐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중년 남성을 마주치면 거리를 두고, 어디서든 큰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다. 재해처럼 나를 할퀴고 지나간 여러 문제 까닭에 다양한 우울증약을 먹지만 큰 호전은 없다. 때때로 나는 내 인생이 좁고 기나긴 굴방 안에서 좀먹은 이불처럼 얌전하게 썩어 가리라고 여긴다.
그러나 내가 지금 헤쳐 걷는 이 괴로움을 나보다 앞서 나의 언니가 겪었다. 그녀에겐 편을 들어 싸워 줄 언니도, 날아오는 소화기를 막고 서서 대신 외쳐 줄 언니도 없었다. 나고 자라기를 당연하게 맏이였기에, 영문 모를 폭압에 맞서다 점차 망가져 가는 자신이 실은 옳은 것이라고 말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직업을 가졌다. 그녀는 아직도 나보다 여섯 해 먼저 수많은 ‘아버지들’과 싸운다. 나보다 먼저 대학생이 되었고 나보다 먼저 직장인이 되었기에 우리가 이 사회에서 얼마나 한없이 연약하고 작은 존재인지도 반드시 먼저 체감하게 된다. 그래도 내 자매는 걷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걸었다. 우리 앞에 먼저 걸어간 나혜석과 김지영이 그저 멈추는 방법을 몰라서 발걸음을 재촉했듯이 나의 언니 역시 쉬지 않고 걸었다. 그녀들이 먼저 헤쳐 걸은 방향이 내게로 와 길이 되었다.
그래서 여섯 해 뒤의 나는 폭세틴과 알프람을 양손에 쥐고서라도 따라 걷기로 한다. 내가 걷지 않으면 다음 여섯 해가 지났을 때 또다른 여성이 내 언니가 되어 누구도 답을 알려 주지 않는 수풀에 처음 길을 내는 역할을 짊어져야 하기에, 세상의 모든 개척지에 늘어선 여자들이 내 등을 보게 하기 위해 나는 걸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새로 태어날 나의 동생들에게 또다른 언니가 된다. 우리는 거대하게 순환하는 단 하나의 자매들이다.
내 앞에 나의 열세 살 언니가 있었다.
2019년 글인데 우연히 트위터에서 보고 출처찾아서 가져왔어
세상의 모든 자매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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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도슴도치삐 작성시간 24.11.22 눈물나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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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벌억이 작성시간 24.11.22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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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티타늄버드 작성시간 24.11.22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으로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신뢰를 나눠 가졌다. 자아가 일종의 철제 상자라면 우리는 언제나 상자 바깥에서 날아오는 폭탄 파편을 맞으며 살아갔기에 도저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서로 얽혀들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서, 우리는 비록 살갑게 인사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결코 서로 부딪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없이 증명하는 날로써 유대감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 부분이 특히 공감이 간다 -
작성자좀짱 작성시간 24.11.22 언니ㅠㅠ 눈물 나 글 진짜 잘쓰신다 사람같지도 않은 아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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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카카페존잼 세레나와불가사의한미궁 작성시간 24.11.22 읽다 울었어 글 진짜...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