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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러일전쟁
1894년 니콜라이 2세가 물려받은 러시아 제국은 부황의 암살과 함께 즉위한 알렉산더 1세나 알렉산더 3세 또는 즉위와 동시에 데카브리스트 난을 겪은 니콜라이 1세나 크림전쟁 와중 즉위한 알렉산더 2세 대비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었음.
그러나 이런 좋은 조건과 다르게 시작부터 불운의 징조. 즉위 당시 약 1,200명의 러시아 군중이 압사. 니콜라이는 위로 기도를 할려했으나, 당일 저녁 프랑스 대사가 방문했기에, 프랑스 대사를 접견하는걸로 결정. 이는 차르에 대한 여론을 악화.
니콜라이 2세 개인은 온화한 성격이라고 하나, 그는 전제 군주로서 가져야할 자신감도, 결단력도 없는 우유부단한 지도자의 전형. 이런 황실의 위상을 더 악화시킨것은 그의 부인으로 그녀는 내성적인 인물로 궁정을 주도할만한 카리스마가 없었음.
황실의 문제와 별개로 육군 규모는 러시아가 유럽 최대. 그러나 장교단 역량과 군 부패가 심각. 병력의 질 또한 처참했는데 독일군의 문해율이 90%였다면 러시아군은 고작 30~40%로 이는 근대 총력전에 중요.
또한 러시아는 인구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해 그 이탈리아보다 소득이 낮은데다 제조업 기반은 형편없었음. 그런만큼 러시아는 세르게이 비테 주도하 유럽보다는 동아시아 진출을 꾀함.
그의 주요 프로젝트중 하나는 시베리아 철도로 이는 무역과 식민화를 위한 도구. 그래서 블라디보스톡이 아니라 만주를 관통해 철도를 깔았는데 이는 비테가 말한 '평화적 침투'로 이를 통해 열강들중 동아시아에서 주도적 입지를 가져갈려 했음.
독일과 프랑스와 연합해 삼국간섭을 통해 청일전쟁때 얻은 일본의 입지를 훼손시켰고, 중국으로부터 여순항을 조차하는데 성공. 당연하게도 이는 일본과의 충돌을 가져올수 밖에 없었고.
일본은 신흥국으로서 러시아와 체급싸움이 안된다는걸 알았기에 만주까진 어느정도 타협할 용의가 있었으나, 한반도는 양보할수 없는 레드라인이라고 선을 그음.
사실 비테는 일본과 적당히 평화적 협상으로 끝내자고 했으나, 강경파들이 반대. 실제 러시아 외무상인 기어는 한반도가 제 2의 콘스탄티노플이 되어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진출을 막으면 안된다고 강조.
더해 니콜라이는 일본과 진지한 협상을 할 용의가 없었고, 일본은 포트 아서 (여순항)에 주둔해있는 러시아 함대에 기습공격을 시작. 약 5달을 버텼으나 결국 일본에게 넘어갔고,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패퇴.
그리고 결정적으로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거의 궤멸당하는등 이는 황실에 대한 여론이 썩 좋지 않은 시점에 치명적이었고, 1903년 전쟁부 장관이 예언했듯 불만은 그야말로 폭증.
결국 이 불만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이어졌고 대규모 파업으로 사실상 전쟁수행이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르러 평화협상에 사인. 일본이 한반도와 남사할린 지배권을 인정받고 만주에서 권리를 양도받음.
[ 1905년 유럽 ]
그러나 문제는 이미 러시아의 정통성이 금가버렸다는것. 비테가 헌법을 제정하고 두마를 설립하는등으로 진정시킨게 다행으로 만일에 러시아 제정의 붕괴란 결과라면 러일전쟁은 '따위'로 보일 유럽 체제 전체가 붕괴에 처할판.
유럽에서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던것이 빌헬름 2세는 러시아 제정 붕괴시에 발틱 거주 독일계를 보호하겠다고 선언. 실제 니콜라이 직속 연대중 대대 하나가 항명도 벌임.
이제 유럽 강대국들에게 하나는 명확해졌음. 러시아는 더 이상 유럽의 판을 주도할만한 역량을 가진 국가는 아니란것을. 그리고 이는 독일이 놓치기 힘든 기회.
10. 국제회담
러일전쟁 도중인 1905년 그 시점에 또하나의 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는데 동아시아가 아닌 북아프리카 모로코. 독일 증기선 함부르크가 모로코의 탕지에르에 오면서 시작.
선박에서 빌헬름 2세가 내려 술탄의 삼촌의 환대를 받고 탕지에르 순회. 원래 독일 정부의 의도는 영향력 확대 정도였으나 흥분한 빌헬름은 모로코는 독립국이고 프랑스가 독일이 가진 모로코 권익을 인정하라며 공개 선언.
그리고 프랑스는 물론 유럽열강들은 이를 독일이 프랑스의 모로코 장악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받아들임.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독일 정부는 당황했고 이제 마지막 희망은 영국과 프랑스 관계가 악화되는것.
독일의 셈법이란 독일이 강하게 나오면 영국은 독일과 충돌하기 싫어 영국-프랑스 연대가 붕괴.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 내부 문제로 자기 코가 석자인 상황인만큼 영국이 빠지면 프랑스 하나만 제압하면 된다는거였음.
빌헬름의 지지 아래 모로코 술탄은 프랑스의 정부 개혁 제안을 거부. 이에 독일은 모로코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국제 회담을 가지자 제안함.
그러면서 독일은 독일이 두려워했던 외교의 명수 델카세에 대해 프랑스 총리 마우리스 루비에에게 델카세를 쫓아내라며 종용. 전쟁으로 가는건 막자며 루비에는 델카세를 직위해제.
[ 에드워드 그레이 경 ]
사실 1905년 시점 독일은 러일전쟁 전훈을 도입하기 전인데다 프랑스의 75mm 야포는 독일 대포의 성능을 압도했음. 그럼에도 프랑스는 체급차에 따른 패배 가능성을 고려.
그래서 프랑스는 모로코 이외 지역에서 식민지를 얻을 기회를 제공할수 있다며 독일에게 운을 띄웠지만, 독일은 계속 '국제 회담'을 열라고 요구.
이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 관계 악화를 노렸는데 강경한 독일 반응에 영국-프랑스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고, 신임 외무장관인 에드워드 그레이는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며 비공식 노선으로 영국의 프랑스 파병 논의.
그리고 그토록 독일이 원했던 국제 회담 결과 미국, 영국, 러시아, 스페인 심지어 동맹인 이탈리아까지 프랑스를 지지했고 독일을 지지한 유일한 열강은 오스트리아 단 하나.
이것의 진정한 성과는 모로코가 아닌 독일의 고립과 독일을 바라보는 영국의 태도 급변. 영불협상의 회의론자들마저 독일에 대항해야한다 생각.
영국 외교관 세실 스프링 라이스가 " 카를 5세, 루이 14세와 나폴레옹과 같은 위협에 직면해있다. 저런 독재자에 굴복하느냐 아니면 방어 전쟁을 치루느냐 선택지만 남았다" 는 것이 영국 외무성 분위기를 시사.
그러나 독일은 알헤시라스 회담 이후 교훈을 배우기는 커녕 외교적으로는 항상 독일이 패배할테니 더 이상 외교로 문제해결이 아닌 무력으로 해결하자는 생각이 자리잡는데 이런 생각은 독일 포위망이 견고해짐에 따라 더욱 강화.
11. 영러협상
신임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는 독일의 의도에 대해 강한 의심과 불신을 품고 있었고 친-프랑스적인 인물로 영국 역사학자 트레빌리안이 지적하듯 프랑스와의 친선은 "그레이의 최우선 목표".
그리고 그에 의해 영불협상의 성격이 식민지 분쟁 조정의 성격에서 프랑스를 지원하는 반독일 동맹의 그것으로 변질하기 시작. 그는 사실상 영국의 국익과 프랑스의 국익은 합치한다고 보았음.
그 근거는 영국의 이익은 유럽 패권국 등장을 막는것이고 가장 유력한것이 독일이니 그 반대편인 프랑스와 같이 가는게 맞다는것. 그렇게 영불협상은 사실상 정식 동맹화.
그럼에도 독일의 군비증강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고 드레드노트 군함 경쟁까지 벌이기 시작. 그에 따라 그레이는 또 다른 과거의 적국인 러시아와 손잡기로 결정.
이는 유럽 외교 구도 자체를 바꾸는 결정. 19세기 내내 영국과 러시아는 페르시아, 오스만, 티베트 심지어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모든 곳을 두고 충돌했음을 감안하면.
또한 체제적으로도 러시아는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거대한 농업 위주 대륙국가였다면, 영국은 의회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해양 국가.
그야말로 도저히 어울릴수 없는 사이 같았음. 그러나 프랑스의 중재 , 러일전쟁 이후 하락한 러시아의 위상, 독일의 위협이 동시 발생. 그레이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영국에 유리한쪽으로 분쟁을 매듭짓고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 제안.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는 러시아의 인도 침공에 대한 우려를 덜어낼수 있음으로 인도에 배치한 병력자원을 유럽으로 돌려 독일에 대응을 가능케 했음.
그는 "이제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 협상이 되었고 독일로부터 안전해졌다. 독일 견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리 " 라고 하며 동아시아와 중동에서 분쟁을 마무리 짓고 독일 포위망을 견고하게 만듬.
이에 비해 러시아 니콜라이 2세는 이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음. 오히려 독일과 화해도 생각했는데 왜냐면 러일전쟁에서 영국이 위협한 반면 독일은 발틱 함대가 석탄 채우는것까지 허용.
그리고 니콜라이 3세는 자신의 요트에서 빌헬름 2세와 비요르크 조약이란 비밀 군사 협정을 맺음. 그러나 니콜라이는 장관들과 논의 없이 조약을 맺은것이었고, 프랑스 자본으로 러시아 산업화하는데 이러면 러시아 계획이 물거품된다고 퇴짜.
그러면서 러시아 외무상인 블라디미르 람즈도프는 " 비요르크 조약은 프랑스 동맹을 깨고 영국과 관계를 소원하게 하기 위한 독일의 속임수 " 라고 선언.
그 결과 1907년 영러협상은 맺어져 러시아는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영향권을 인정하고 티베트의 경우 중국 종주권을 인정하며 이란은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영국이 영향권을 가져가는걸로 인정.
이때까지만해도 러시아 입장에서 영러협상은 페르시아에 러시아의 권익 확보와 철도 건설등으로 보다 러시아의 영역을 확대하는것이 주안점이었으나 얼마 안가 러시아가 독일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눈을 돌리게 됨.
12. 보스니아
[ 에렌탈 ]
1897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발칸반도에 대한 변화 추구를 중단하는것에 합의하며 약 10년간 발칸반도는 유럽 열강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음.
그러나 이 데탕트의 전제조건은 러시아가 발칸보다 아시아에 집중하고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힘을 존중한다는것이었으나 러일전쟁과 영러협상으로 두가지 전제가 다 깨져버림.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에 대한 일시 점령이 아니라 아예 합병을 하고 싶어했는데 이때 주요 인물이 에렌탈로 그가 판단하기에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은 쇠락하는 제국 위신 증가.
그는 오스트리아의 독일에 대한 종속성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데에 대한 우려를 표했고 슬라브에 자치권을 줘서 민족 분쟁을 해결한다면 다시금 오스트리아가 1류 열강으로 등극할수 있을거라 믿었음.
그러나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이 개혁을 선언하면서 나온 루머는 여전히 법적으로 오스만의 지배하에 있는 보스니아에 대한 처분이 곧 내려질것이라는거였고 이에 에렌탈은 서둘러 보스니아 합병 실행 시도.
이를 위해선 러시아와 담판을 보아야했는데, 새로 취임한 러시아 외무장관인 알렉산더 이즈볼스키는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에 대해 딱히 반대하지 않았음.
대신 그 대가는 러시아 군함의 자유로운 보스포러스 해협 통과. 이를 통해 러일전쟁의 굴욕을 씻어낼뿐 아니라 러시아 수출의 40%가 통과하는 해협은 실질적으로도 중요.
그러나 이걸 넘어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에게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성지 그 자체였고. 그럼에도 콘스탄티노플 해방을 당장 외칠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던 이즈볼스키는 러시아 군함 통과 정도를 목표로 노림.
하지만 이는 유럽 열강들 모두가 동의해야하는 문제. 그럼에도 이즈볼스키는 오스트리아가 동의한다면 영국이나 프랑스도 마지못해 동의할거라고 생각.
사실 에렌탈은 이즈볼스키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그리고 이즈볼스키는 에렌탈이 회담 1년전에 발칸에 철도 까며 자신을 엿먹였다는점에서 상호 경멸.
허나, 사적 감정을 뒤로하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을 지지하고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해군의 보스포러스 해협 통과를 지지하며 이를 회담으로 공식 확인한다는 소위 Buchalu Bargain 이란 거래가 성사.
문제는 언제 이 사건들이 일어날거란걸 명시하지 않았음. 게다가 러시아 대중들이 같은 슬라브 국가를 게르만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집어삼키는것에 분개할거라는 가능성이 존재.
[ 알렉산더 이즈볼스키 ]
특히 오스트리아가 약속한 대가인 해협을 여는데 실패한다면. 그러나 최대 변수인 영국은 오랫동안 해협 개방을 반대해왔고. 이런 상황에서 이즈볼스키가 파리에 도착해 프랑스 의중을 떠보러 갔는데, 에렌탈의 편지를 발견.
그 편지 내용은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3일내 합병할것이라는것과 시기에 대해 이즈볼스키를 속인것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는것. 그리고 분노한 이즈볼스키는 영국과 프랑스에 거래 내용을 털어놓음.
영국 그레이 외무장관은 이즈볼스키를 동정해 해협 개방에 고려는 해보겠으나 확답은 줄 수 없다고 얘기. 특히 영국 여론이 보스니아 합병에 대해 들떠있는 상황인만큼.
그리고 이즈볼스키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회담 개최를 언급.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에렌탈은 회담 개최나 세르비아에 대한 보상 언급을 꺼려함. 독일은 영국과 편먹은 러시아를 엿먹일 좋은 기회라 생각했고 오스트리아를 지원.
그렇게 에렌탈은 보스니아를 사실상 공짜로 먹고, 러시아는 그 대가로 어떤것도 받지 않는 상황이 연출됨. 즉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 국가인 보스니아만 오스트리아가 먹게 해주고 러시아는 어떤 실익도 못챙긴 꼴.
당시 러시아 총리인 스톨리핀은 격노했고, 러시아 언론들도 연일 오스트리아에 호구잡히고 슬라브 형제를 버린 이즈볼스키를 맹비난. 1908년 장관회의에서 이즈볼스키는 러시아 대중이 이렇게 분노할지 몰랐다며 시인.
설령 해협 개방을 해냈다 하더라도 범슬라브주의가 강해지던 러시아에서 슬라브 동포를 팔아 넘겼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텐데, 그것조차 얻지 못했으니 분노는 극도에 달할수 밖에 없었던것.
이즈볼스키의 유일한 희망은 국제회담 개최를 통해 실익이라도 얻어내는거였으나 이미 앞에서 다뤘듯 국제회담에서 어차피 패배할거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회담을 한사코 거부.
러시아는 계속 압력을 넣었으나 1909년 에렌탈이 계속 이리 나오면 러시아측이 보스니아를 팔아넘겼다는 외교문서를 전부 공개할거라며 역으로 겁박.
더해 1909년 3월 22일, 독일이 개입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날림. 오스트리아 보스니아 합병을 얌전히 인정하거나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하라는 것.
아직 러일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고 독일이 더 우수한 포병 전력을 갖춘 1909년 이 시점에서 그 최후통첩을 무시할수는 없었음. 결국 러시아는 이를 어쩔수없이 수용하고 보스포러스 해협은 여전히 러시아 군함 통과를 거부.
이제 더 이상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의 관계는 돌이킬수 없을 지경이 되어 1909년 니콜라이 3세는 분노해 그의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씀.
" 어머니, 독일이 러시아를 대한 방식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고 러시아는 이걸 잊지 않을것입니다. 제 생각에 독일이 다시 한번 러시아와 영국-프랑스 관계를 갈라놓으려 했던거 같은데, 또 실패했군요. 그런 분열 책동은 보통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죠. "
이 사건이 터지고 18개월 이후 이즈볼스키는 외무장관에서 내려와 프랑스 대사로 가게 되었으나, 그가 추구하던 영국-프랑스와 연대 노선은 러시아 외교부 관료들 사이 더 강화되었고 다음 충돌에서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굴욕당하지 않으리라 결심.
그리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전 유럽이 총을 집어들자 이즈볼스키는 외쳤음. " 이 전쟁은 나의 전쟁이오 " 라고.
1차세계대전 3부작 완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