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돋]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 (그대의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집필자 홍세화 에세이)
작성자이든작성시간15.02.27조회수2,020 목록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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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던 때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며 가슴 뭉클해했다.
선열들의 나라를 위한 희생이 강조되는 수업이 있던 날은 더욱 그러했다.
어린 가슴을 울컥하게 하고 잠깐이나마 어린 눈에 힘을 주게 했던 애국이었고 국가였다.
든든하게 우리를 보호하고 어머니의 마음만큼이나 따뜻하고 극진한 보살핌을 주는 것이 국가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보호자인 나라가 있어 기를 펼 수 있으니 우리 또한 나라를 아끼고 사랑해야 마땅하다고 당연히 배웠다.
그러나 우리의 보호자이어야 할 국가가 국민을 유기하고 이간질시켜 서로 욕보이게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그 속에 또 다른 나를 증오했던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내가 있었다.
내 안에 있던 인간과 국가가 부서졌다.
졸지에 고아가 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는 어린 고아였다.
우선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야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가, 왜 하필 여기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다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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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하여, 죽었다고도, 죽어야 한다고도, 죽어간다고도 말할 수 없듯이,
살아야 할 이유는 유일하게 심장의 박동소리와 연관되어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더군다나 절망적이라고 해도 절망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기는커녕 거부할 수없는 존재의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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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고민은 비로소 이 땅의 배반과 증오,
그리고 절망의 역사 속 인간을 사랑하게 했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억압하는 것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삶은 내가 선택해야 할 당연한 것이 되었다.
내가 선택한 바 없을뿐더러 외려 부정하고 싶었던 이 땅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했다. 이 땅은 나에게 실존적 고민의 한가운데서 선택한 시저프스의 바위였다.
한때 자조 섞인 표현으로 우골탑이라 불리던 대학.
그러나 가난한 부모들은 팔아치울 소마저 없었으니 분명 그들의 등골이 소를 대신 했을 터였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거기 있었다.
그만큼 가난한 부모나 그의 자식들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거부할 수 없었다.
수많은 학생들에게 대학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고통을 감내한 부모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희망이어야 했다.
가난의 질곡에서 빠져나와 신분상승을 꾀하려 선택한 곳이었다.
그곳은 그러나 우리 사회의 어두운 진실과 대면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한 민주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은 젊은이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실제로 미쳐갔다.
절박한 부모들의 바람을 외면하게 되리라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그들은 이 땅을 끌어안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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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는 성과에 대한 조급성과 일에 대한
전문성과 지적, 논리적인 취약함을 은폐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풍조가 자리 잡는데 기여한 것은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떳떳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이들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느닷없는 총부리에 놀라 밥 한 그릇 퍼준 것은 부역죄가 되어 온갖 고초를 겪게 되지만,
독립이 물 건너가기를 바라듯 일제에 붙어먹던 자들은 주인을 바꿔가며 배를 불리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
부도덕한 사회의 도덕적 인간에게 남는 건 낭패감과 박탈감뿐이다.
정신적 공항을 피할 수 없었고 올바른 생활은 개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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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역시 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에 품었던 의식과 이념은 세월과 함께 그 빛이 바랬다.
그 빛바램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 세월은 또한 자유, 민주, 인간의 자리에 토익점수, 학점, 취업준비가 들어앉도록 했다.
20년을 사이에 두고 잘들 먹어서인지 갸름했던 얼굴형이 통통해졌다.
잘못된 선입관 탓이리라, 기름진 얼굴들이 ‘교양이 밥 먹여주나?’라고 말하는 듯하다.
예술도 장르를 불문하고 간소하고 간편하고 감성적인 것이 선택된다.
남에게 뒤지지 않는 발 빠른 트랜드 따라잡기가 문화인 듯 행세한다.
심각하게 살기 싫다고 한다.
진지하게 살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세속적으로 남보다 잘사는 확률은 언제나 마찬가지인데 온 사회가 호들갑을 떨며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내달린다.
음악에 심취하고 문학을 얘기하고 철학에 몰두하면서도 가질 수 있었던 확률이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야 가질 수 있는 확률로 되었다.
이상한 현상이다.
모두를 위해 모두가 노력하자는 것도 아니고,
작은 수를 조금이라도 늘려 확률을 높이자는 것도 아닌,
확률은 그대로 둔 채 모두가 모든 걸 버리고 전력 질주하는 것이다.
설사 그 확률 안에 들어 남보다 조금이나마 잘살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올인’한 결과 얻었다 하더라도
단 한 가지 예기치 못한 불행만으로도 일시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설령 경쟁을 하더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을까 불안케 하는 기본 요인들을 해결하고 난 뒤에 하면 안 될까?
우리를 불안케 하는 구체적 요인은 교육, 의료, 주거, 실업, 노후 문제다.
실제로 이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갖춰지지 않는 한,
우리는 평생을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살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소득 100만 원과 유럽 사회의 소득 100만 원은 그 가치가 다르다.
주택, 의료, 교육 등 거의 모든 걸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사회와
소득의 대부분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제도와 차이에서 비롯된다.
힘을 모아 크고 안전한 다리를 놓으려 하지 않고 외나무다리에서 연연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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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적 가치가 실종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싹틀 수 없는 사회는
‘나 먼저 살고 보자’,
‘내 것은 무조건 지키고 보자’는
이전투구의 풍토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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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본원적 질문과 고민을 주저없이 할 수 있게 한 것 또한 젊음이었다.
엄혹한 상황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차라리 낭만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능청스러움이 젊은 패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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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선에 선 내게 주어졌던 삶의 얼개가 아무리 형편없었다고 한들
결코 주저앉지 않게 한 것 역시 젊음과 무관하지 않다.
나에게 젊음.
그것은 항상 저항이라는 단어와 함께 한다.
애당초 ‘사는 게 다 그렇지 별거겠어’, ‘둥글둥글 살아야지’라는
기성세대들의 서글픈 비책에 나는 죽는 날까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기성세대들의 말처럼 결코 한번쯤은 마음 가는 대로 살아봐도 될 만한
물리적 여유에서 나오는 객기가 아니다.
기성세대들이 소시민적 일상에 타협하고 매몰되면서
잃어버린 인간의 자유로움을 향한 열정 때문이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자아실현에 있지 기름진 생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인에게 자유는
마지막 눈동자를 그려넣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초상화처럼
모든 생명을 진정 살아 있는 것으로 완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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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류를 억압하는 사회는 곧 나를 억압하는 사회다.
개인은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사회가 어떻든 나만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런 자유는 지금의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대해
‘도대체 그 법이 있든 없든 아무런 불편이 없는데 왜 이 소란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자유처럼 수상한 것이다.
자유란 무엇으로 벗어나기 위해서이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로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된 사람을 보고 완벽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축하하지 않는다.
이는 자유의 상대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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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악스럽지는 못했지만 이 세상에서 반인간의 수상쩍은 기미를 알아챌 수 있는 맑은 영혼이 남아 있기를 바랐다.
불의를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모한 저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살았다. 영혼을 떠나보내지 않고.
그래서 아픔은 있었지만 후회는 없다.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 남을 것이지만.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올 것이다.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기성숙의 모색을 게을리 하지 말라.
자아 실현을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 이성의 성숙단계가 늦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가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번 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다시금 강조하건대,
그것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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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또로리또롱 작성시간 15.02.27 생각하는계기가 되어땅... 좋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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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앗!시리즈 작성시간 15.02.27 프린트해서 정독할거야! 이런 좋은 글 올려줘서 고마워, 여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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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여시 만원빵 작성시간 15.02.27 좋은글인데 나는 어릴때부터 너무 지쳤어 회복의 길을 자아실현과 인문학에서 찾고자 했지만 이미 생명력이 고갈된 내 안위를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물신과 타협할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속에서 인문학을 공부할수록 나는 자괴감이랑 이상과의 괴리 때문에 더욱 허덕이고...
몰라 자살하고싶다 ㅋㅋㅋㅋㅋㅋ... 내가 타성에 너무 젖어버려서 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조차 너무 괴롭고 눈물나 -
작성자성식이형 작성시간 15.02.27 계속 읽게 된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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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Alisa 작성시간 15.03.03 멋있는 생각이야. 자꾸 읽게 만드는, 더 읽고싶게 만드는 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