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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국(胡安國) (1074-1138)

작성자수일재|작성시간15.08.27|조회수561 목록 댓글 1

호안국(胡安國) (1074-1138)

 

 

이정자(二 程子:程顥·程?) 중 특히 정이를 사숙(私淑)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을 귀중히 여겼으며, 정문(程門)의 제자인 사량좌(謝良佐)·양시(楊時)·유작(游酢) 등과 교유하였다. 정문의 학문을 명확히 구명하는 데에 힘썼으며, 송(宋)의 남도(南渡) 후 이락학파(伊洛學派)의 태두가 되었다.

그는 당시 왕안석(王安石)이 『춘추(春秋)』를 학관(學官)의 대열에서 폐하자 춘추학이 쇠퇴할 것을 탄식하고 『춘추』야말로 공자(孔子)가 필삭(筆削)한 것으로서 전심(傳心)의 요전(要典)이라고역설하였다.

그 후 30여 년 동안 『춘추』를 연구하여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송초(宋初) 손복(孫復)의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직접적으로는 정호의 『춘추해(春秋解)』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 대의(大義)는 맹자(孟子)를 근본으로 하고 포폄(褒貶)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과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근거를 두어, 『춘추』의 대의대법(大義大法)으로써 국론(國論)의 통일을 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쓴 것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외적(外敵:金)이 침입하는 국가 위기의 시기에 완성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으나, 경전(經典)에 대한 새로운 추구였으며 신경학(新經學)에 대한 기운을 촉구한 것이었다.

호안국(胡安國, 1074-1138).

호적(胡迪)으로도 불린다. 자는 강후(康侯)요, 호는 청산(靑山)이라 했으며, 배우는 사람들은 무이선생(武夷先生)으로 불렀고, 후세인들은 호문정공(胡文定公)이라 불렀다. 건녕(建寧) 숭안(崇安, 복건성 무이산시)사람으로 남송의 저명한 경학자로, 호상학파(湖湘學派)를 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소년 시절 정이(程頤)의 친구인 주장문(朱長文)과 영천(颍川)을 따라 정씨(程氏)의 이학(理學)을 수학했고, 양시(楊時), 유초(游酢)등과 교유하였다. 소성(紹聖) 4년(1097) 진사에 급제한 후로, 태학박사(太學博士)와 제거호남궁(提擧湖南宮)들을 지내면서 재야 선비인 왕회(王繪) 등장(鄧璋) 등을 천거하였으나 재상(宰相) 채경(蔡京)은 그들을 범순인(范純仁) 당파로 몰아감에 따라 파직되었다. 대관(大觀) 4년(1110) 복직된 이후로 제거강동로학사(提擧江東路學事)를 지냈으나 사직하고 선화(宣和) 5년(1123) 『춘추전(春秋傳)』을 찬술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급사중(給事中)으로 불려가 『좌전(左傳)』을 교점(校點)하였고, 시독(侍讀)을 겸하면서 『춘추(春秋)』를 전강(專講)했다. 나중에 주승비(朱勝非)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소흥(紹興) 원년(1131) 중서사인(中書舍人)겸 시강(侍講)을 맡았다. 당시 이정(二程)의 학설이 탄압을 받자, 호안국은 상소를 올려 “공맹의 도가 전해지지 않은지 오래 되었으나 정이(程頤) 형제에 이르러서 비로소 발양한 이후로 그 지식에 배워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요줌 학자들은 공맹(孔孟)을 배우나 이정(二程)의 학설을 금하니 실(室)에 들어가며 호(戶)를 거치지 않는 것이다.(孔孟之道不傳久矣, 自程頤兄弟始發明之, 然後知可學而至. 今學者師孔孟而禁程, 是入室而不由戶也.)”라고 하며 이정(二程)의 학설을 옹호하고 나섰다. 또한 「시정론(時政論)」 21편을 지어 항금(抗金)과 중원회복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잠시 급사중(給事中)을 맡았다가 그만두고 호북(湖北) 형문(荊門)에 물어나 살았으나 그곳에 병란(兵亂)이 발생하여 상담(湘潭)에 정착하여 벽천서당(碧泉書堂)을 세우고 강학하여 제자들을 배출했다.

소흥(紹興) 5년(1135) 조정에서는 그를 불러 『춘추전(春秋傳)』을 계속해서 찬술토록 하였는데, 8년(1138)년이 되어서야 『춘추전(春秋傳)』 30권이 완성되었다. 이에 고종(高宗)은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제수했다. 그해 4월, 병으로 죽어 은산(隱山)에 묻혔다고 한다. 『자치통감거요보유(資治通鑒擧要補遺)』 100권과 문집 15권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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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수일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23 송(宋)나라 호안국(胡安國)의 아들로 오봉 선생(五峯先生)이라고 일컬어졌던 호굉(胡宏)을 가리키는데, 그가 성(誠) 속에 이미 선과 악의 씨앗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석한 이른바 ‘천리인욕 동체이용(天理人欲 同體異用)’ 혹은 ‘천리인욕 동출일원(天理人欲 同出一源)’의 설을 가리킨다. 그는 이 밖에도 성무선악(性無善惡) 심무생사(心無生死) 등의 설을 주장하여 주희(朱熹)로부터 ‘의논다병(議論多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는데, 기선악(幾善惡)에 대한 그의 설을 비판한 내용이 《심경부주(心經附註)》 2권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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