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쉬어 가는 곳

한길의 사진기행(13) : 바르셀로나와 피카소

작성자한 길|작성시간13.10.07|조회수207 목록 댓글 2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로 불리길 좋아하는 사람들.

지금도 카탈루냐는 그들만의 문화를 창출하며 독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서있는 바르셀로나의 인물들,  

파블로 카잘스,

파블로 피카소,

달리,

가우디,

미로,

특별히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들이지요.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

  

도시가 자랑할수 있는 것이 제대로 된 어느 한가지라도 있다면 그건 이미 성공한 도시겠지요.

헌데 바르셀로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바르셀로나에 서게되면 모든 것이 자유로운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자유로운 바람.

아름다운 옷자락의 나풀거림이 내 머리카락과 부딪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도시.

바다내음과 땀냄새가 한데 어울어져 묘한 악취도 향내가 되는 그런 도시.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시내중심거리에서

  

천천히 시내를 걸으며 광장을 한바퀴 돌아 컬럼부스 동상이 있는 포트벨항구로 향합니다.

탑이 있는 광장에서 사람들은 모두 눈앞에 있는 바다로 향합니다.

마치 컬럼부스가 했던 것처럼...

컬럼부스동상의 주인공은 오른쪽 팔을 내밀어 정확히 대서양방향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14928, 컬럼부스는 드디어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바르셀로나 포트벨항구를 출발해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합니다.

 

포트벨항구, 왼편에 산타마리아호가 보인다.

 

 

컬럼부스 동상

  

바르셀로나 중심가에는 피카소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피카소박물관은 파리에도 있고 니스에도 있고 유럽의 웬만한 도시에는 피카소 그림 한 점 없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화가중 가장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로 알려졌으니 그럴만도 하겠습니다.

 

아무튼 바르셀로나 피카소 박물관에는 그의 어린시절부터 파리로 갈때까지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작품들이 웬만큼 보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해서 여기서는 파리의 퐁피두센터에 전시된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퐁피두센터는 전혀 사진촬영에 제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혹 파리에 가실일 있음 퐁피두센테에 가셔서 마음껏 찍어오세요.

 

파리 몽마르뜨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아뜨리에 '르바또라브와르'

이곳에서 피카소는 여러 동료화가들과 큐비즘을 만들어나간다.

 

 

 

아무튼 파리로 간 피카소는 파리에 머물며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나갑니다.

1912년 가을은 파블로 피카소(당시 31)의 미술 인생에서 분수령을 이뤘던 시점입니다.

피카소와 그의 동료 조르주 브라크는 큐비즘(cubism: 입체주의)을 창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의 사실주의에 필적할 만한 새로운 묘사법을 발견했다고 잠시 생각했을 겁니다.

초기 포비즘에 머물다 큐비즘으로 돌아선 브라크의 바이얼린과 촛대 작품에서 사물은 거의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해체되는데, 대상과 공간의 구분도 사라집니다.

큐비즘의 대표적인 이작품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예시한듯한 과감한 시각적 해석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제 화가들은 대상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래서 1910년대 이후의 화가들에게 큐비즘은 하나의 탈출구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화가들이 큐비즘 양식을 수용하여 개성있는 추상 미술로 발전시키게 됩니다.

 

화가가 그리는 세상...

빛의 세계와 색조...

그것이 전부가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의 전환...

그래서 큐비즘은 의미가 있겠지요.

그리려는 대상에 대한 분석과 해체.

그리고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이해.

이 과정을 통해 이들이 보여준 것은, 그야말로 서양미술의 거의 모든 타부와 전통을 파괴하고 모든 미술가들에게 그림에는 특정의 규칙이 없다는 자유와 불확실성을 알게 해준데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1937426,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 전선(공화군)의 세력권에 있던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가 당시 프랑코정권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프랑코정권은 나치 독일의 도움으로 게르니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폭격을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도시인구의 1/3에 달하는 1,65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참사이지요.

이 비극에 분노한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립니다.

 

피카소가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단지 폭격의 공포 뿐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의 프랑코(F. Franco)가 이끄는 독재 체제에 대해 피카소가 느낀 비애가 그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힘 센 자의 폭력과 힘없는 자의 울분의 관계를 무의식중에 느낄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라고 칭송을 받는가 봅니다.

  

 

인간이 가장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는 때가 언제일까요?

어쩌면 그건 바로 그림속 여인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기가 막힌 상실의 한 가운데에 서 있을 때가 아닐까요?

 

전쟁이 모든 것을 삽시간에 빼앗아간 그 자리에서,

아무도 위로할 수가 없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주저앉아 신음하고 오열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빼앗길게 없는 그 자리에서,

게르니카의 여인처럼 망연자실하게 서있을 때 우리는 비로서 인생의 참 모습을 보게 되는게 아닐까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한 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0.08 이총장이 가장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가까이 보게될 때가 언제일까요?
    어쩌면 그건 바로 그림속 여인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기가 막힌 상실의 한 가운데에 서 있게 될 때가 아닐까요?

    모든 것을 삽시간에 빼앗긴 그 자리에서,
    아무도 위로해줄 이가 없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주저앉아 신음하고 오열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빼앗길게 없는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하게 서있을 때 그는 비로서 자기 인생의 참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 작성자마중물 한방울 | 작성시간 13.10.08 당시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참상을 몸으로 겪어야 했던 보통 사람들의 고통이 보이고 절규가 들립니다.
    수원대에서도 많은 동료, 학생과 직원들이 마음의 고통을 안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민주화된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전근대적인 체제에서나 있을 법한 고통과 비애를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 더욱 서글픕니다.
    피카소가 수원대의 현실을 깊이 알았다면 분명 감동의 역작을 그려 냈을 것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