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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의 사진기행(18) : "분단의 경계 위에서"

작성자한 길|작성시간13.10.23|조회수200 목록 댓글 1

196778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사건 관련자 중에는 오늘날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위대한 예술가 이응노(화가), 윤이상(음악가), 천상병(시인)이 포함돼 있다. 이 세명의 예술가들은 이제 모두 작고했지만, 우리의 귀중한 문화자산으로서 그들의 예술혼은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제 포스터  

 

윤이상(尹伊桑 ; 1917~1995),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 통영에서 성장하였다. 한국출신의 현대음악 작곡가. 14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 일본에서 작곡수업을 하였고, 1946년부터 통영과 서울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 뒤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음악학원에서 공부하고(195657) 이어 베를린에서 블라허에게 사사하였다(195859).

 

그런데 1967617일 윤이상 선생과 부인 이수자 여사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소환된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구금된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희곡 오페라 나비의 꿈을 쓴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2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나비의 미망인 악보

  

한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은 동백림 사건으로 구금된 윤이상 선생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엄중 항의한다.

 

19671213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받고, 19692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다. 석방후 독일로 돌아간 윤이상은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서독 국적을 취득한다. 그 뒤로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윤이상선생 작품 연주를 금지했다.

 

 

 

1990, 윤이상 선생은 북한을 방문, 남북문화교류의 첫 장을 연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한편 북한은 19849월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설립해 윤이상음악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연주할 수 있도록 했고, 매년 윤이상음악회를 여는 등 그를 예우해 왔다.

 

그후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19949월 드디어 서울·부산·광주 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다. 윤이상 선생은 건강이 악화되어 참석하지 못했다. 그후 199511월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20061월 국가정보원은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한다. 1년 뒤 2007914, 드디어 미망인 이수자 여사가 윤이상 선생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한다.

 

결혼을 제외하고 내 생애는 언제나 분단의 경계 위에 선 것이었다. 내 음악의 대부분은 그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바쳐졌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선 여전히 윤이상의 이런 삶과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분단 60년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장벽의 문턱을 넘기가 그리 만만치가 않은가 보다.

 

3년전 비로소 남쪽에 북의 윤이상연구소와 비견될 수 있는 윤이상평화재단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윤이상국제음악제도 준비가 되었다. 윤이상선생을 추모하고 그의 음악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시작한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어느새 윤이상이란 이름은 슬며시 자즈러들고 통영국제음악제라는 이름으로 변해버렸다.

  

 

 

통영의 '도천야외극장'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동안 길거리 음악제가 여기저기서 열립니다.

 

윤이상은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생전에 유럽의 현존 5대 작곡가로 꼽히기도 했다. 또한 그로브 음악사전은 윤이상을 현대적인 서양 음악의 기법 안에서 아시아의 상상력을 표현하는 데 성공한 작곡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정치적 이유로 여전히 지나치게 왜곡된 모습으로만 각인되고 있다.

 

언덕위에서 내려다 본 통영 강구안 풍경,

 

밤이 깊어가면서 강구안의 경치는 더 멋있어 집니다.

 

어둠이 내린 길거리에서 고등학생들의 멋진 프린지 공연중

 

통영의 밤바다

 

 

 

 

통영의 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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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달깍발이 | 작성시간 13.10.23 김화숙 음대 학장은 사회문제, 학교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나 봅니다.
    총장이 학장들에게 교협대표 항의방문하라고 지시하니 제일 먼저 나섰지요.
    음대교수들에게 교협가입하지 말라고 종용하고요.
    험난했던 윤이상 선생의 생애에서 무언가 느끼는 것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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