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시 <가을날>은 내게는 의미 깊은 작품입니다. 젊은 시절 이 시 한편을 오래도록 감상하면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실존주의를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1975년 가을쯤인지... 나는 그때 송악산이 건너다보이는 임진강변 GOP부대 한 관측소에서 경계병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Herbsttag를 쪽지에 적어 들고 다니며 읽고 또 읽었었지요. 그리고는 스스로 감흥에 취해 짧은 독일어 실력으로 번역을 시도해보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주여, 때가 찼습니다.” 나는 첫 구절을 이렇게 옮겼습니다. Es ist Zeit가 내게는 마가복음 1장 1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외침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여름은 참으로 컸습니다.” 여름은 수고와 애씀의 계절입니다. 그 땀방울이 내게는 중생의 노력으로 읽혀졌습니다.
“님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놓으시고...” 아, 드디어 주님과 우리의 교통이 해와 해시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의 사건으로 묘사되는군요.
“들에는 바람을 풀어놓아 주십시오!” 종교인 니고데모가 알지 못했던 바람의 능력을 시인 릴케는 그 실체를 파악했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지만 심판의 계절이기도 하지요.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으로 들어가야 할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가을날....... 이 가을에 그것을 또 생각하게 되었군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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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terre 작성시간 06.09.20 Der Sommer war sehr Gross - 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Gross는 크다라는 뜻을 저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는위대하였다라고 번역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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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은경 작성시간 06.09.20 저도 20대초에 윤동주 시인 덕분에 릴케를 좋아했는데 87년엔가 <두이노의 비가>가 새로 번역되어 나와서 기존 릴케시집 번역과는 또다른 분위기 때문에 한동안 들고 다녔던 기억입니다. 지금 요안님 글을 읽고 보니 그때 과연 릴케 시의 의미를 제대로나 알고 좋아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면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와 이따금씩 절묘한 모순적 표현력을 막연하게 동경했었던 것 같아요. 장미 가시에 찔려서 라는 너무도 릴케 다운(?) 죽음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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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요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6.09.20 뭐에 빠져살던 시절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