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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크립트/ 단편

황혼녘

작성자백건|작성시간23.05.30|조회수1,580 목록 댓글 13

 

 

 

 

 

어미가 죽고나서, 상자 안에는 어리고 연약한 자식들만이 외로이 남겨졌다. 식어버린 몸뚱이에 아무리 말을 걸어보아도 돌아올 대답은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엔 시간이 꽤 걸렸다. 마지막까지 어미의 몸뚱이에 매달리며 울어대던 유약한 사녀와 응석꾸러기 십녀를 장녀가 제지한 끝에야 겨우 어미의 옷자락에서 손을 뗐다.

 

연약한 새끼들의 힘과 의지로는 묻어줄 땅을 파는 일도 할 수 없었기에 그저 조그만 혀로 어미의 차갑고 굳은 피부를 닦아낸 뒤, 골판지 하우스 구석에 방치해둘 뿐이었다. 새끼들은 그게 죽은 어미에 대한 최고의 예우라고 생각한걸까, 그런 처사에 토다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다른 개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먹히지 않고 조용히 썩어 문드러져 망각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은 들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겐 특별한 최후이긴 했다. 십녀는 한사코 어미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마치 죽음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어미에게 계속 들러붙으며 이리저리 말하고 좋을대로 안기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점차 어미에게서 풍겨나오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린 십녀는 다시는 어미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다.

 

 

자식들을 먹여줄 어미가 사라졌기에, 자식들은 그저 비축해둔 보존식을 먹으며 버틸 수 밖에 없었다, 버틴 끝에 희망이 오리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본능, 어미의 생전 교육에 따른 행동.

 

새끼들 중 가장 강인한 장녀는 어미의 일을 떠안았다. 장녀는 자매들을 앉힌 뒤, 먹이통을 뒤적였다. 떫은 맛을 내는 벌레 사체, 수풀 열매조각, 가끔씩 애호파가 뿌리고 가던 실장푸드를 나눈 일부분. 장녀는 차례대로 자매들에게 음식의 조각을 분배했다. 한창 먹어야 성장하는 자실장과 엄지실장에겐 턱없이 모자라는 빈약한 끼니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줄기만 하고 늘 일이 없는 식량을 최대한 아끼려면 그 방법 뿐인 것을...

 

분배의 차별이 없는것은 아니었다. 먹이의 배분을 맡는 장녀는 스스로 가장 많은 먹이를 가졌고 그 뒤로 차녀, 삼녀, 사녀... 먹이는 아래로 내려갈 수록 적어졌다.

 

장녀는 우월감이나 사적인 악의를 품고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일이었다. 몸집이 클 수록 많은 영양이 필요했다. 십녀에 들어서 엄지들에겐 그 작은 엄지의 손으로도 완전히 감싸지는 적은 먹이만을 받았고 구더기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자신의 몫이 없다는 걸 안 구더기는 꼬리를 흔들며 무어라 짖어대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시선을 감지한 십일녀가 간신히 프니프니를 약속하며 구더기를 달랬지만 구더기의 몫이 없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십일녀가 의아해하며 레치-레치 물었지만, 장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 상황에서 구더기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그렇게 되뇌이는 장녀는 눈이 시큰해졌다.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구더기 따위에 할애할 수 없다, 라고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구더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동생인 녀석은 굶긴다는 것을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먹이의 배분이 끝나자, 속으로 각자 이런 상황에서 할법한 불평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불만의 목소리는 용납되지 않았다. 장녀의 엄한 눈초리와 굳게 쥔 주먹 뿐만 아니라... 그냥 무언가 트집 잡을만한 거리를 기다리는 듯한 이 위태로운 분위기 자체가, 불만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유일하게 엄지 십녀는 대담하게도 먹이의 양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가 뺨을 한대 후려맞았다. 십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불만 제기에 폭력이 가해지자 우렁찬 울음을 터뜨렸지만 차녀가 한대 더 뺨을 후려치자 조용해졌다.

 

돌이켜보면 항상 철 없고, 생각 없이 구는 녀석이었다. 대책도 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결코 자신이 스스로 먹고, 싸고, 씻는 일도 없었으며 항상 어미의 뒷바라지가 필요했다. 식시 사긴마다 자신의 밥이 모자라다며 칭얼대서 자매들의 밥을 어미로 하여금 빼앗아 자신에게로 돌려지게 했다. 그러면 귀신같이 울음을 뚝 그치고 그릇에 게걸스레 얼굴을 파묻었다. 어미야 녀석이 귀여웠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겠지만 파멸을 향해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서고 있는 새끼들에겐 이런 관용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차녀는 생각 끝에, 내심 십녀가 역겨운 녀석이라 생각했다.

 

 

 

머릿수만 11에 달하는 새끼들이 원을 둘러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한다. 실장석의 식사란 게걸스럽고 소란스럽고 불결한 것이지만 이 일가의 모습은 더 없이 엄숙하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수저를 드는 조문객같다.  부분의 먹이를 조각내어 조금씩 씹는다, 아주 천천히, 그럼에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미가 살아있었을때도 그다지 배부르게 먹어본 기억은 없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빈곤하다.

 

가장 먼저 끼니를 마친 엄지 십일녀가 빈약한 찌꺼기가 묻은 손을 핥으며 언니들을 바라보고 있다. 십녀는 사녀에게 달라붙어 어리광을 부리며 여분의 밥을 졸랐다, 사녀는 곤란해하는 눈치이면서도, 자신의 밥을 조금 떼어주었다. 점점 식사를 마친 자매들의 시선을 느끼게 된 웃언니 실장들은, 허겁지겁 먹이를 먹어치웠다. 마치 빠르게 먹어치우지 않으면 빼앗기기라도 할 것처럼. 

 

구더기 십이녀는 원을 이룬 자매들의 등 뒤로 부지런히 기어다니며 배고프다며 울음소리를 높였다. 허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어미가 죽은 뒤로 막내로서 예쁨 받던 구더기는 무관심, 냉대를 받고 있었다. 평범한 일가에서 베풀 수 있었던 돌봄과 사랑이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 절망하고 있는 자매들에게 구더기는 철저히 무시, 배격의 대상. 아무것도 모르는 구더기로선 모든게 이해되지 않았다. 구더기는 슬펐지만, 그래도 견뎠다. 견뎌야 했다... 모두가... 구더기는 매몰된 운치굴의 흙더미 위로 올라가 흙에 반쯤 스며든 녹색 덩어리를 핥았다.

 

 

먹이통에 기대어 힘 없이 자고 있던 장녀는 소란에 깨어났다. 장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앞을 보니, 차녀와 오녀가 소리를 질러대며 싸우고 있었다. 장녀는 차녀가 오녀의 얼굴에 주먹을 내지르는 광경에 깜짝 놀라 앞으로 뛰쳐나가 둘의 사이를 밀어내며 고함을 쳤다. 코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오녀는 악을 써대며 차녀의 방향으로 주먹과 발을 내질러댔다.

 

어느 샌가 골판지 하우스 내에선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미의 죽음과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먹이통이 암시하는 불길한 미래에 스트레스를 받은 자매들 사이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친실장이 살아있을 때엔 한없이 사소했던 모든 일이, 미숙한 장녀에게 일가의 통제권이 쥐어지자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잠버릇이 고약하다는 이유, 식사할때 쩝쩝거리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 하품이 거슬린다는 이유, 괜히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으며, 언성을 높이고, 아랫동생일 경우엔 폭력도 서슴치 않았다. 차녀가 오녀를 때린 이유는 단지 자고 있던 자신의 발을 툭- 치고 지나갔다는 사소한 이유였다.

 

장녀는 차녀와 오녀를 간신히 떼어놓고 각자를 다그치지만 그런걸로 분위기가 풀어질 리는 없다. 장녀의 존재에도 집 안은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어미의 무덤이 되어버린 이 상자 안에 점차 쌓여가고 있는 분노와 절망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서로를 헐뜯으며 무의미하게 체력을 낭비한다. 중재에 힘을 쏟던 장녀조차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자신에게 끝까지 대드는 차녀에게 분개해 뺨을 때렸다.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졌던 장녀의 폭력이 신호탄이었는지... 실장석의 스트레스 해소법 중 하나인 폭력은 이 상자 안에서 공공연해졌다. 장녀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자매에게 손찌검을 했고, 차녀는 트집을 잡힌 자매를 때렸으며, 차녀에게 맞은 녀석들은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이 패륜의 사슬에 가장 밑에 있는 것은 구더기, 십녀가 구더기가 짖는 소리가 시끄러워 잠에서 깬 육녀에게 관리소홀이라는 명분으로 얻어맞자, 십녀는 자신의 동생이 죽을 듯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두들겨 주었다. 

 

시끄럽다.

 

조용히 좀 해라.

 

너 때문에 내가 맞았다.

 

너 같은 것은 그냥 구석에 박혀 쥐 죽은 듯이 있으면 좋다.

 

샌드백이 되어야 하는 구더기는 그저 몸을 둥글게 말며 서럽게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 퍽... 퍽... 꼬리를 힘껏 발로 밟고, 주먹으로 더이상 포동포동하지 않은 배를 두들긴다. 항상 맞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남을 때려보니, 기분이 썩 좋았다. 엄지의 분노가 점차 해갈되고 그 자리를 쾌감과 기쁨, 통쾌함이 채웠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열렬히, 난폭하게 구더기를 두들겼다.

 

엄지의 폭력이 끝날 기미가 없자 장녀는 조용히 십녀의 팔을 잡아끌며 단호히 제지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인 자매들의 상태를 이해한다더라도, 때리다가 죽이기라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십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콧방귀를 흥- 내쉬더니 구석에 가서  벽을 보며 누웠다. 장녀는 멍투성이에 찢어진 구더기를 조심스럽게 밀어 녀석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인 매몰된 운치굴 위로 돌려놓았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벌벌 떠는 구더기는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 않았다.

 

 

도저히 허기를 해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몇몇 녀석들이 대변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시고 쓴 맛에 속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배는 채울 수 있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식량마저 빼앗는 언니들의 모습을 본 구더기는 기나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항의했다. 육녀는 거칠게 꼬리를 흔들면서 눈물을 흘리고, 짖어대는 녀석의 모습이 썩 달갑지 않아 발로 녀석을 걷어차 구석으로 날려보냈다. 구더기는 움찔거리고 조금 경련하며 가냘프게 울었다. 십일녀는 구더기에게 다가와 녀석을 안아주며 달랬다. 이 모습을 장녀와 사녀만이 슬프게 바라보았다. 이 구더기는 스스로가 불행하다 생각하겠지만, 특이한 성정을 가진 자매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것으로 행운의 소유자라 할 만 했다...

 

녀석들이 어미를 먹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녀석들은 어미를 너무 사랑하기도 했고. 과거에는 어미를 따라 무언가 쓸모 있는 것을 주우러 나갔다가, 들실장 녀석들이 독라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일도 있었다. 혐오감도 혐오감대로 들었지만 포식자들이 갑자기 입에 고기를 문채로 칠공분혈하며 절명하는 모습을 보자 녀석들은 압도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독라는 단순히 실장석 구제용 독이 든 별사탕을 먹고 죽어 그것을 먹은 녀석들도 마찬가지로 죽었을 뿐이지만, 그날 일가에게는 동족식=죽음이라는 명확한 개념이 자리잡았다.

 

그 덕분에 어미의 시신은 지독한 부패를 허락받았고, 구더기에게는 약간의 연명이 허락된 것이다. 먹거나 싸우는 일을 제외하면 상자 안에서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그저 다들 오지 않는 잠을 자려고 누운 채로 자리를 뒤척이거나, 무언가 트집 잡을 거리를 찾아 상자 안을 응시했다.  삭막해진 자매들 간에 대화라 할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배고프다던지, 부패가 시작된 어미의 시체를 바라보며 친실장을 그리워하는 말만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왔을뿐. 마지막까지 이성의 끈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장녀는 자매들을 돌아가면서 보듬어주거나 조용히 어미에게서 배운 노래를 낮게 흥얼거렸다. 그것만으로 스스로의 정신을 붙잡고 모든게 괜찮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상자 안에서 활기를 띄는 경우라고 한다면, 가끔 행복회로가 돌아가 기분이 좀 풀린 엄지들이 구더기를 프니프니 해주는 일이다.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구더기가 오랜만에 주어진 애정과 체온의 행복함, 프니프니의 쾌감으로 교성을 높일때면, 숨죽이고 있던 자매들의 신경을 거슬려 무자비한 응징을 당했다. 차녀와 팔녀, 구녀가 달려들었다. 복부를 가격당하고, 등에 발길질을 당하고, 꼬리를 짓밟히고, 구더기 관리를 똑바로 안하냐는 트집으로 엄지들도 폭행당했다. 사녀의 머리카락을 손질해주던 장녀는 그 모든 광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게 꼴사나웠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구태여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 말릴 수 없었다... 말려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장녀는 다시 시작된 난투에 몸을 떨며 우는 사녀를 조용히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다소 거친 분풀이가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홀가분해졌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저녁밥 시간이었다. 장녀는 자신 앞에 선 구녀에게 마른 메뚜기의 조각을 주었다. 구녀가 자리로 돌아가자 십녀는 앞으로 다가섰다. 자신의 몫을 기다리던 십녀는 의아해했다. 장녀는 먹이통 안과 십녀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우울한 표정으로 그냥 먹이통의 뚜껑을 닫아버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장녀의 의중은 명확했다.

 

'엄지들, 너희들에게 줄 밥은 이제 없다.'

 

그날 저녁밥 시간은 어미의 죽음 이후 가장 활기찼다. 십녀와 십일녀는 울고, 소리 지르며, 바닥에 엎어져 마구 몸을 흔들었다. 둘은 얼마간 소리를 지르다 장녀에게 달려들어 몸을 붙잡고 횡설수설하며 울어댔지만 장녀는 매몰찼다. 눈을 꼭 감은 채 자신의 몫을 꼭 붙든다.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자신들은 구더기와 다르게 팔과 다리도 있으니 쓸모 있으며, 버려질 일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을까? 녀석들의 태도는 마치 믿을 수 없는, 일어날 수 없는 현실에 배신당한듯 분개하고 절망하고 있는 듯 했다. 엄지들은 반응하지 않는 장녀에게 끝까지 달라붙을 심산이었겠지만, 장녀는 참다못해 팔꿈치로 퍽-치며 둘을 밀어내었다, 둘은 비틀거리며 밀려나는 중에, 차녀에게 부딪혔다. 다혈질의 심성인 차녀는 갑작스러운 충돌을 용납할 수 없었다. 차녀는 이를 악물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둘의 머리카락을 잡아 바닥에 엎은 뒤 마구 짓밟아댔다.

 

닥쳐!

 

닥쳐!

 

꺼져!

 

꺼지라고!

 

여윈 채로 숨만 쉬고 있는 멍투성이 구더기는 그 광경을 그저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찔할 정도의 굶주림과 무관심, 냉대와 폭행에 조각날 대로 조각난 상태임에도 아직 구더기는 살아있었다. 무언가 강렬한 의지가 생명줄을 붙잡고 있었다. 탁해진 구더기의 두 눈알은 자신과 같은 신세로 떨어지고 있는 언니들을 담고 있다.

 

차녀가 씩씩대며 둘을 마지막으로 걷어 찬 후, 엄지들은 겨우 몸을 추스른 뒤 골판지 구석으로 피신했다. 확고하게 버려진 녀석들에게 이제 유일한 공간이라고는 구멍이 숭숭 뚫려  하우스 안에서 가장 모진 바람이 들어오는 그 곳 뿐이다. 악이 가득 찬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를 간다. 십녀는 식사중인 언니 자실장들을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시선에 유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장녀와 사녀였다. 사녀는 눈물 흘리고 있었다. 장녀도 눈물 흘리고 있었다... 십일녀도 눈물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식사 시간이 되면 구석에 박힌 엄지들은 먹이통 뚜껑을 여는 장녀에게 기대의 시선을 보냈다. 어쩌면 다시 밥을 받지 않을까... 용서받지 않을까? 장녀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자신의 몫이 없는 식사가 두 번 이어지자 엄지들은 확신하며 구슬피 울었다. 이제 녀석들은 장녀로부터 확실하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가증스럽게도 십녀는 쫒겨난 후에야 매몰차게 대했던 구더기를 다시 안기 시작했다. 위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약하고 자신보다 더 여윈 구더기를 안으며 위안을 얻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더 빨리 죽을 녀석의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경멸스러운 유대감이었다. 오랜만에 십녀에게 안겨본 구더기는 다시 언니가 자신을 사랑해준다고 생각했는지 힘겹게 레후- 울었다. 여위다 못해 말라 비틀어져버린 동생의 무게는 너무나 가벼웠다. 

 

어느날 아침, 장녀가 자매들의 상태를 살펴보자 구더기는 포대기가 사라져있었다. 아사 직전의 구더기는 자신이 소중히 하던 옷을 스스로 벗어 질겅질겅 씹었다, 반 정도 먹은 후로는, 턱에 들어갈 힘이 없었기에, 핥았다.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하던 꼬질꼬질한 피투성이, 오물투성이 포대기를 삼키며 구더기는 진한 잿빛의 눈물을 흘렸다. 턱받이도 없고 투박했지만 마마로부터 받은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 무엇을 준대도 바꾸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지금 스스로 씹어서 먹고 있다. 

 

포대기마저 먹어치운 후, 그 포대기를 소화한 끝에 배설한 찌꺼기까지 먹어치운 후로는 알몸으로 힘겹게 바닥을 기어다니며 먼지와 모래를 핥던 구더기는 하루 쯤 지났을까, 기력이 다해 죽었다. 구더기가 몇시간째 미동도 없이 바닥을 얼굴에 쳐박고 있자 십일녀가 이상하게 여겨 살펴보니, 눈에는 아무런 색과 빛이 없었고 오물 투성이 혀는 입밖으로 툭 튀어나와 뻗어있었다. 최초의 죽음. 모두에게 찾아올 사신의 첫번째 방문이었다. 장녀는 비통하게 우는 십일녀에게서 구더기를 조용히 떼어냈다. 장녀에게 안긴 구더기의 얼굴은 굶주림과 절망, 고통에 절어있었다. 한편으로는 희망과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장녀가 조금 더 살펴보자 녀석의 콧구멍에서 조그마한 녹색 실이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고치실이었다. 구더기가 다음 단계로 자라기 위한 유일한 희망. 지독한 영양실조에도 불과하고 마지막으로 짜낸 구더기의 구원의 동앗줄이었다.

 

그랬구나, 이것 덕분에 견딜 수 있었구나.

 

장녀는 묵묵히 생각했다. 녀석은 훌륭하게 자랄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이 짓누르는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의지의 힘은 위석의 붕괴를 막았다. 몸이 먼저 스러졌을지 언정 마음은 스러지지 않았다. 훌륭한 엄지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무사히 자라 성체가 되었다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갔을 것이다. 일가가 이런 꼴이 아니었다면... 필사적으로 삶을 붙들며 고통받는 모습에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하고 애를 태웠던 장녀는 마음 한 쪽이 찢겨져 나감을 느꼈다. 막내의 싸늘한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무언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힘내는레후 힘내는레후, 힘내서 우지차 실 잔뜩잔뜩 내는레후 손발 긴긴되서 다시 예쁨받는레후 밥 받는레후 오네차들이랑 다시 노는레후'

 

"다음 생에서는 세레브한 사육실장으로... 테에엥..."

 

-

 

장녀가 구더기의 몸을 깨끗히 핥아주는 동안, 사녀는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장난감 상자에서 조그만한 주황색 스펀지공을 꺼냈다. 구더기가 제일 좋아하던 장난감이었다. 십녀가 (괘씸하게도)귀찮아 하거나, 자고 있다면 그 공 위로 올라타서 자신의 배를 누르며 프니프니를 하면 그만이었다. 사녀는 고무공 위에 조심스럽게 동생의 시신을 올려놓았다. 서서히 굳어가고 있는 구더기의 몸은 고무공을 잘 붙들었다. 장녀는 구더기가 붙든 고무공을 썩어가는 어미의 몸 옆에 내려놓았다. 마치 장례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무시하던 구더기가 죽자 모두가 울었다. 차녀마저도 구더기의 죽음에 한때의 단란했던 가족의 모습을 회상하며 상념에 잠겼다. 자매들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고통받으며 죽어간 구더기는 마침내 구원받았다. 비록 녀석의 영혼이  원통함에 구천을 영원히 떠돌지 몰라도, 자매들의 마음 속에서 구더기는 구원받았다.

 

-

 

구더기의 죽음에 더더욱 자신들의 처지를 실감한 엄지들은 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허나 엄지가 생각해내는 방도라 해봐야 거기서 거기일뿐이다. 십녀 엄지는 결국 구석에 떨어져 있기를 그만두고 자매들에게 끝없이 아첨하고, 빌붙었다. 귀뚜라미의 다리 한 짝이라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어리광을 부리고, 애교를 떨었다.

 

아무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십일녀 엄지는 홀연히 사라졌다. 장녀가 가끔씩  환기를 위해 상자 뒷편을 살짝 열어두는 시기를 틈 타, 그 공간을 통해 상자를 나간 것이다. 장녀가 깨닫고 십일녀를 다급히 찾아봤을 때는, 십일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잘 살아가겠지.'

 

장녀는 그렇게 스스로 위안하며, 십일녀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함께했다면 좋았을걸.'

 

십녀는 구더기처럼 바보같이 조용히 죽길 원하지 않았다. 자매들이 신경질을 내도 아첨을 멈추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적개심 어린 반응 뿐임에도, 배가 고프다며 마구 들러 붙어댔다. 사녀가 한번은 십녀에게 푸드 조각을 주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장녀가 억지로 손을 붙잡으며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넣으며 제지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꼴을 두고보지 못한 차녀가 십녀의 얼굴에 주먹을 먹이는 것을 시발점으로, 분노가 폭발한 자매들이 십녀 엄지를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엄지를 둘러싸고 두들기는 자매들에의 머릿 속에는 과거가 상기되어 있었다.

 

삼녀는 십녀에게 밥을 억지로 양보한 적이 있었다.

 

오녀는 십녀의 대변 뒷바라지를 했다. '와타치는 그런거 할줄 모르는레치'라는 속 편한 말 한마디를 수긍한 어미가 시켰기 때문이었다.

 

육녀는 십녀와 놀다가 십녀가 스스로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에 상처를 난 것 때문에 어미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잘못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팔녀는 십녀의 빨래를 대신 해주어야 했다.

 

차녀는 그냥 십녀가 꼴 보기가 싫었다. 일가가 이 꼴이 나기 이전에도 이기적인 녀석이었다. 상냥한 마마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버려졌을 녀석이 꼴에 자매로 거두어져서 예쁨 받는것도 싫었는데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진 못할 망정 왜 이렇게 끈질기게 연명해서 눈에 밟히는 거지?

 

모두는 십녀가 싫었다. 

 

주먹질과 발길질에는 과거의 사소한 원한과 복수심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일격과 일격에 몸이 터져나가는 십녀는 비명을 지르며 애처롭게 장녀와 사녀를 불렀다. 사려깊은 장녀는 인자했고, 다정한 사녀는 십녀에게 남긴 밥을 몰래 챙겨주곤 했다. 그 둘은 멀찍이 떨어져서 동생이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장녀는 차라리 버리기로 결심한 십녀가 조금이라도 더 자매들의 스트레스를 많이 풀게 해줘서, 서로 싸우는 가슴 아픈 일을 막아줬으면 했다. 사녀는 험악한 자매들의 난동에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대로 장녀의 품에 안겨 얼굴을 파묻었다.

 

십녀는 자매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점차 분쇄되었다. 갈비뼈가 부서지고 목을 가격당해 괴로운 기침 이외는 아무것도 낼 수 없게된 후에야 집단구타는 멈췄다. 차녀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엉망이 된 엄지의 머리카락을 쥐고 골판지 구석에 내동댕이쳤다. 십녀 엄지는 다시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다.

 

 

반병신이 된 십녀 엄지는 체온을 나눌 자매가 사라진 후로 처음 밤을 맞았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밤의 추위는 혹독했다. 자매들은 신문지를 펼쳐서 각자 껴안고 자고 있었다. 그럼에도 녀석들은 한기에 떨고 있었는데 십녀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피투성이 십녀는 파열된 몸으로 억지로 웅크리며 추위를 이겨내려 노력 했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십녀는 점점 감각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공포에 질렸다. 손가락이 굳었다. 어깨가 뻣뻣해졌다. 입김을 불어가며 손을 녹이려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몸이 점점 얼어가고 있었다. 그 지경이 되서야, 십녀는 도움을 청하려 장녀를 불러보려 했다.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십녀는 하루 전만 해도, 자신은 바보같은 구더기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겠다고 결심했지만, 이제 녀석은 결국 비슷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십녀는 한때 따뜻했던 과거의 추억을 생각했다.

 

좋을대로 투정했고, 좋을대로 어리광을 부렸고, 좋을대로 억지를 부렸다.

 

상냥한 마마는 그러면 자신이 좋을대로 해주었다.

 

좋을대로 먹었고, 좋을대로 놀았고, 좋을대로 언니들이 자신이 할 일을 대신 해주었다.

 

'와타치는 이런거 먹기 싫은 레치이이이!'

무작위의 식사 배분에서, 귀뚜라미가 싫어서 떼를 쓰자, 마마는 삼녀 언니가 받은 쿠키 조각을 바꿔주었다.

 

빨래가 싫었다. 힘들고 귀찮았으니까, 깨끗한 옷은 너무 좋았지만 옷을 깨끗히 하는 일은 별개였다. 떼를 쓰면 마마는 자신의 옷을 팔녀 언니에게 주었다. 그럼 자신은 좋을대로 놀면 좋았다.

 

마마는 최고였고, 마마가 최고로 좋아하는 것이 확실한 자신도 최고였다.

 

그것이 정답이었다.

 

정답이었다.

 

십녀는 과거의 환상 속에서 깨어나자 다시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직면했다. 마치 방금전까지 꿈을 꾸었던듯 당황한 십녀는 현실을 직시하고 눈물을 흘렸다. 외롭다, 배고프다, 힘들다, 춥다. 언니들에게서 버림받은 십녀는 하다 못해 다시 한번 사랑했던 어미의 품 속에 안기기를 원하며, 맞은편에 누워있는 친실장을 향해 기어갔다. 어느 정도 기어가다가, 엄지는 전에 없던 끔찍한 악취를 맡고는 기겁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친실장의 몸뚱이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십녀는 단순히 자신의 안위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오랫동안 어미의 변화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마라고 해봐야 그 뿐, 엄지란 녀석은 그런 녀석이다.

 

십녀가 바람막이라도 되어줄 수 있을터인 어미의 몸뚱이에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는 사이 칼 같은 바람이 자비없이 닥쳐왔다.녀석의 몸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굳어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렛- 하는 나지막한 단말마와 함께 절명했다.

 

파킨-

 

장녀가 자고 일어나보니, 원래 자리에서 살짝 떨어진 채로 십녀가 죽어 있었다. 살아남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항상 자기 멋대로였고,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던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동생이었다. 장녀는 피투성이 십녀를 안아들어 친실장의 배 위에 올려주었다. 십이녀의 죽음과는 다르게, 분위기는 차분했다. 구더기를 냉대하긴 했지만 몸을 어루만져주며 슬퍼한 자매들은 피투성이 십녀의 시신을 마치 독라노예라도 보는마냥 보기에 거북하다는 이유로 눈에도 담으려 하지 않았다. 사녀만이 조용히 십녀의 몸뚱이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장녀는 화목함이란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붕괴해버린 일가의 모습에 속으로 한탄했다. 아무리 속을 썩이던 녀석일지라도 자매였는데...

 

가족이었는데... 

 

 

-

 

 

며칠이나 좀 지났을까, 항상 중압감에 시달리던 장녀의 어깨는 마침내 가벼워졌다.

 

먹이가 바닥나, 배분하는 일을 더이상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식사를 기다리며 자리에 앉은 동생들에게 장녀는 아주 홀가분하게, 개운한 듯한 동작으로 뚜껑 연 먹이통을 들어올리며 바닥을 향해 탁-탁 털어보였다. 먹이통에서 나오는 것은 약간의 부스러기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 장녀는 자매들이 알면 좋을게 없다고 생각해 먹을것이 얼마나 남았는지 철저히 숨겨왔다. 하지만 그런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장녀의 강렬한 퍼포먼스는 아주 뚜렷한 미래를 보여주었다.

 

죽음, 종말, 파멸, 몰살.

 

파랗게 질린채로 소리를 지르고, 방방 뛰고, 울부짖는 여동생들을 바라보며 장녀는 그저 미소지었다. 슬픔, 허탈함, 개운함... 모든 종류의 감정들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뒤섞여 휘몰아치는 것을 느끼고 그저 자리에 주저 앉으며 고개를 떨궜다. 사녀가 울면서 달려와 장녀에게 안겼다.

 

'이 철부지, 밑으로 동생만 몇 명인데 어쩜 이리 어리숙할까...'

 

장녀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으며 우는 사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이 여기 있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는 듯이. 

 

...얼마 안 가 마지막 발버둥이라도 쳐 볼 심산인 행동이 시작되었다, 차녀의 선동에 오녀와 육녀, 칠녀, 팔녀가 가세해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가기로 한 것이다. 바깥에 대한 공포감이 이들을 상자 안에 강력하게 묶어놓고 있었지만 먹을 것이 없다는 절망적인 현실이 이들을 바깥으로 내몰게끔 하였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차녀조차 계획의 무모함에 절망하고 겁에 질렸다. 바깥에 나가서 먹을 것을 찾으면 좋다, 더 운이 좋으면... 인간을 만나서...

 

차녀가 열심히 떠들고 동생들이 열심히 듣는 모습을 바라보는 장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나마 자매들중에서 현실감각이 있고 가장 어미로부터 가르침 받은게 많은  녀석이여서 그랬을까, 자매들을 향한 그 미소엔 어쩌면 조소라고 할만한 면이 엿보였다. 이미 본인들 스스로 계획의 허술함을 알고 있는것 같고, 그럼에도 굳이 노력하는 이를 비웃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장녀는 침묵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결국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다. 무력하다 해도 무의미하다며 깎아내릴 일이 아니다. 얻어맞고, 때리는 관계였던 자매들이 처음으로 화합을 이루었다. 텟치-텟치 하며 서로 돌발상황을 가정하고 행동요령을 정하는 이들의 모습은 기이할 정도로 조화로웠다.

 

곧 다섯 자매는 하우스 안에 남기로 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허례허식의 인사를 한 뒤, 하우스 밖으로 떠나갔다. 텟치텟치 하는 구령소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그에 맞춰 장녀는 마지막으로 떠난 팔녀를 배웅한 뒤, 다시 골판지 하우스의 문을 단단히 걸어잠갔다. 

 

 

 

조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서부터 점점 비명소리가 들려오더니, 골판지 하우스로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자매들을 진정시키는 장녀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이런 소리가 날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 비명의 주인공은 하우스를 나간 자매들이었다. 장녀는 혀를 찼다, 기대도 안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끝났다는 말인가...

 

얼마 안 가 문 밖에서는 세 마리 정도의 자매들의 헉헉 거림과 처절하게 문을 열어달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이에 반응한 것은 사녀였다, 자매들의 위기에 도움을 주기 위해 힘없는 몸을 일으켜 다급하게 문을 향해 달려갔다. 사녀는 응석꾸러기임과 동시에 정이 많았다, 십녀에게 자신의 식사도 조금 양보했을 정도로. 그 정은 아직까지도 사녀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을 단단히 걸어두고 있던 쇠젓가락을 빼려던 사녀였으나, 이내 장녀에게 제지당했다. 사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장녀를 올려다보자, 장녀는 고개를 저으며 사녀를 문에서 떼어냈다. 이 문을 열어제낀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한 장녀의 결단이었다. 죽으면 죽는거지만, 행복했던 우리 일가의 집 안에서 다른 분충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라고 장녀는 생각했다.

 

녀석들도 각오했던 일이다, 실패하면 죽는 일을 실패했다면, 그저 죽을 뿐이다...

 

사녀는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장녀의 완력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사녀는 장녀에게 끌려가며 눈물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문이 열리지 않자 세 자매들의 외침은 점점 다급해져갔다. 그리고 이윽고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정말 엄청난 기세로 비명을 질러대며 문을 부서져라 두들기기 시작했다.

 

왜 열어주지 않는 것이냐, 너희의 소중한 자매가 위기다, 빨리 문을 열어줘라, 우리들을 버릴 셈이냐.

 

절박한 호소는 이내 모멸적인 저주로 변했다. 자신들을 버리기로 한 골판지 상자 안 자매들의 의중을 눈치 챈 모양이다. 

 

텟챠아아아-

텟챠아아아-

 

자신들은 자매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밖으로 나갔건만, 속 편하게 안에 남아있던 녀석들은... 그냥 우리를 버렸다. 마지막까지 문을 두들기던 차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저 상자 안의 쓰레기들을 저주했다.

 

곧, 성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비명소리,살점 뜯기는 소리, 기괴하게 꺽꺽대는 자매의 신음이 얼마간 들리더니 무시무시할 정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바탕의 살육극에 동생들은 마지막 기둥인 장녀에게 몰려들어 그저 하염없이 울어댔다. 그런 여동생들을 어루 달래며 진정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진정된 여동생들은 바깥의 자매가 어찌 되었는지 알아채곤 비통한 울음소리를 높였다. 자기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였을까,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혈연의 정 때문이였을까.

 

아마 후자였을 것이다.

 

 

이후로 길지는 않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이 흘렀다.

 

썩어가는 상자 안에서, 장녀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녀의 앞머리를 만져주고 있었다. 사녀는 미동도 없이 누운채로 가끔 기침만 할 뿐이었다. 장녀는 사녀가 좋았다, 겁 많고 어리숙했지만 다정했고 다른 자매들을 아낄 줄 알았다. 그래서 더 많은 먹이를 주었다. 그게 사녀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유였다. 마지막까지, 자신이 곁에 두고 싶은 녀석이었다. 다른 자매들의 시신은 장녀가 어미의 곁에 안치했다. 잡아먹힌 자매들은 장녀가 밤중에 몰래 밖으로 나와 녀석들의 잔해를 물병 뚜껑에 모아서 안으로 가져왔다. 시신 더미에선 지독한 냄새가 났고,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였다. 

 

가족이 함께였다는 것에 충분했다.

 

홀로 생각하던 장녀는 자신을 부르는 사녀의 목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엾은 여동생은 여윌대로 여위어 이제 죽음만을 앞두고 있었다. 사녀는 예정된 파멸 앞에 겁을 먹고, 가엾게도 떨고 있었다. 장녀는 사녀 옆에 조심스럽게 누우면서 팔베개를 해주었다, 사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라버린 장녀의 품속으로 안겼다. 장녀는 사녀를 쓰다듬어주며, 괜찮아... 괜찮아...  언니가 옆에 있으니까 다 괜찮을거야, 다정하게 위로를 건넸다.

 

그 말 뿐으로도, 완전히 위안과 구원을 받은 듯 사녀의 표정은 희미하게 밝아졌고, 그대로 아무런 미동도 없게 되었다.

 

장녀는 조금 넓게 찢어져 있는 벽의 구멍 사이로 들어오는 주황의 햇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마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달님이 곧 올라올때 햇님이 발하는 마지막 색깔의 빛이라고 했다. 

 

 

사람의 말로는 황혼 녘.

 

황혼 녘마저 끝난다면 햇빛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삼라만상 모든 세상은 짙은 어둠에 잠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황혼이라는 단어는 어떤 일이나 인물의 거의 마지막, 끝만을 남겨둔 우울한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끝이다.

 

 

이제 잠을 자야 할 시간이었다.

 

 

장녀는 얼마 안 가 조용히 잠들었다.

 

 

-

 

 

옛날에 썼던 스크립트를 조금 다듬어봤습니다.

 

전역도 했으니 다시 활동을 재개해보려고 하는데 실장석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군요.

하지만 흥하기도 하면 망하기도 하고, 성하기도 하면 쇠하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엔 짧은 만화를 그려오겠습니다.

 

뉴턴풍의 병맛/학대물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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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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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딸기맛 | 작성시간 23.06.02 백건 그러면 운치굴은 왜 매몰된 건가요?
  • 작성자마성참치 | 작성시간 23.06.03 데뎃... 간만에 보는 명작인데스우.... !!!
  • 작성자파이어볼러 | 작성시간 23.06.07 와 이거 리멬 이전버전도 좋아햇는데
    감사합니다
  • 작성자20살 | 작성시간 23.07.08 와 이건 지린다 이런 분위기 너무 좋음
  • 작성자편식하는테츄 | 작성시간 23.08.22 읽는 동안 절망적인 분위기에 장난 아니게 몰입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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