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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崔溥)와 표해록(漂海錄)

작성자최윤영|작성시간08.06.13|조회수63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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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8년 윤 1월 3일 최부와 그 일행 43명은 배로 제주도 별도포에서 출발, 목적지인 나주로 향하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기 시작한다. 대양(大洋)에서 표류한지 14일만에 1월 16일 태주부 임해현의 우두외양(牛頭外洋)에 표착한다. 최부일행은 중국에 체류한 135일 동안 각 지역을 경유하며 귀로에 올랐는데, 주요 경로지는 다음과 같으며, 거리로는 8,800여 리나 된다.

 

경로지:임해(臨海) 우두외양(牛頭外洋) → 도저(桃渚) → 건도(健跳)→ 월계(越溪) → 영해(寧海) → 봉화(奉化) → 영파(寧波) → 자계(慈溪) → 여요(余姚) → 상우(上虞) → 소흥(紹興) → 소산(蕭山) → 항주(杭州) → 가흥(嘉興) → 오강(吳江) → 소주(蘇州) → 상주(常州) → 진강(鎭江) → 양주(揚州) → 고우(高郵) → 회안(淮安) → 숙천(宿遷) → 비주(邳州) → 서주(徐州) → 패현(沛縣) → 제녕(濟寧) → 임청(臨淸) → 덕주(德州) → 창주(滄州) →정해(靜海)→ 천진(天津) → 통주(通州) → 북경(北京) → 옥전(玉田) → 풍윤(豊潤) → 난주(灤州) → 산해관(山海關) → 영원(寧遠) → 광녕(廣寧) → 반산(盤山) → 안산(鞍山) → 요양(遼陽) → 연산관(連山關) → 통원보(通遠堡) → 풍성(風城) → 탕산성(湯山城) → 구연성(九連城) → 압록강(鴨綠江)

 

 

500여 년전 조선의 한 젊은 관료가 일행과 함께 당시 미답(未踏)의 중국 양자강 남쪽, 절강성(浙江省) 지역에 표착(漂着)하여, 필설(筆舌)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불과 35살 나이의 이 청년이 어떠한 행동과 규범으로 처신을 하면서 42명이나 되는 수행원을 통솔하고, 중국의 민․관․군을 감복시켰을까.

개인의 이해가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가 소중히 지켜가야 할 가치를 휴지조각 버리듯 하는 이 세태를, 한 조선의 엘리트가 반세기의 시공을 훌쩍 뛰어 넘어, 그의 효사상(孝思想)과 정의관(正義觀)을 통해 준열(峻烈)하게 꼬집고 있는 것 같다.

 

최부(1454~1504)는 조선 성종 때 문신으로,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금남(錦南)이며, 나주 출생이다.

1454년에 출생하여 29세에 문과에 급제, 교서관․군자감․성균관․사헌부․홍문관 등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제주에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 당시 범법자들이 제주로 도망, 피신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별 파견관)의 직을 수행하다가, 1488년 윤 정월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수행원 42명과 함께 귀향 차, 급히 배에 오른다.

배에 오른지 5리도 채 못지나 폭풍을 만나게 된다.

이 때부터 표류가 시작되고, 얼마 후에는 선박으로서의 기능이 완전 마비된 채, 근 15일간 서해 바다를 정처 없이 떠돌면서 생존본능의 처절한 투쟁이 시작된다.

절강성 임해현의 해안에 착륙할 때까지 이러한 사투 속에서도 43명 전원이 기적같이 생존하였다.

해안에 상륙한 최부 일행은 숨돌릴 사이 없이 해안을 침범한 왜구로 혐의를 받는다.

왜구라는 누명을 벗을 때까지 언어불통의 이국땅에서 그들이 당한 고초는, 최부 자신이 한탄했듯이 차라리 해상에서 죽었으면 오히려 편했을 정도로 막심하였다. 그러나 최부는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해가며 냉정과 의연함을 잃지 않고 해박한 지식으로 그 곳의 관헌과 주민을 설득해 나간다.

최부 일행은 8,800여 리의 남․북을 관통하며, 중국에 체류한지 136일 만에 전원 무사히 환국하게 된다.

환국한 후, 최부는 임금의 명에 의해 그간의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5만여 자의 한문으로 기록하였으니, 바로 저 유명한『표해록』이다.

 

최부의『표해록』은 중국 역사상 3대 기행문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마르코폴로(1254~1324)의『동방견문록』, 일본 승려인 엔닌(圓仁:794~864)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가 나머지인데, 중국 명나라 초년과 전기(前期)의 사회상황․정치․군사․경제․문화․교통․중국의 언어학 및 시정(市井)풍정(風情) 등을 정밀하게 기록한 표해록을 문헌 등 다방면 가치로 보면 상기 두 개의 기행문보다 우월하다면서 현재까지 세상에 잘 알려지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해 북경대학 갈진가(葛振家) 교수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표해록』은 성종 임금의 명에 의하여 찬술, 조정 내부에서만 열람하다가, 1573년에 이르러서야 최부의 외손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에 의해 발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이후 근 400여 년만인 1979년, 최부의 후예인 최기홍(崔基泓)에 의해 비로소 현대 한국어로 완역, 일반인들이 표해록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이후 표해록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1769년에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 개명하여 청전군금(淸田君錦:1721~85)에 의해 번역, 당시 일본 식자층에 널리 읽혀졌으며, 1965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수인 John Meskill에 의해 영어로 번역 간행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북경대 갈진가(葛振家)교수가 표해록 본문에 표점(標點)과 주석을 붙여서, 1992년에 점주본으로 간행한 바 있다.

 

『표해록』은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행기록이 아니다. 표해록에서 표출되고 있는 최부의 가치관과 사상이 작금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지만, 전편에 흐르고 있는 최부의 효사상(孝思想)과 정의관(正義觀)은 우리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최부 동시대의 유학자들이 신봉하는 윤리사상에 비추어 보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으나, 상중(喪中)의 몸으로 생사기로라는 극한상황에 처한 최부가 이 천리(天理)를 근간으로 삼아 어떠한 처신을 했으며, 어떻게 실천하여 그 많은 부하를 설득하고, 중국 관리들을 감복시키며 위기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대목은 실로 감동적이다.

 

표해록에 기재된 몇 구절을 발췌해 보기로 한다.

 

해상에서 표류한지 며칠이 지나자, 승선한 배는 거의 난파선에 가까워,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최부는 상관(喪冠)과 상복(喪服) 갖추고 두 손을 합장하여 하늘에 빌며 천리(天理)에 호소를 한다.(표해록, 권 1, 1월 5일)

 

“신 평생 오직 충효우애(忠孝友愛)만을 근본으로 삼고, 남을 속이지 않고……군명(君命)을 받들어 봉공하는 중 부친상을 만나 분상(奔喪)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슨 죄로 이와같이 벌을 당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신의 허물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겠으나, 동승한 40여 명이 아무 죄 없이 익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이를 불쌍히 여겨 바람과 파도를 잠자게 해 주소서. 그리고 신을 재생케 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 지내게 해주시고,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케 해주소서.”

 

눈물의 기도가 끝나자, 모두 통곡하면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도움을 내리기를 빌었다.

 

최부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해안에 표착하였으나, 해적선을 만나 다시 해상에 표류한다. 다시 등륙을 시도할 때, 해안에 배 6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를 보고, 부하와 문답을 한다.(표해록, 권1, 1월 16일)

 

“저번에는 관인(官人)의 위의(威儀)를 보이지 않아, 도적을 불러들인 것 같이 되어 죽을 뻔 했는데, 오늘은 관대(冠帶)를 갖춰 위의를 보이시죠.”

“자네는 왜 의(義)를 훼손하는,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가.”

“이처럼 죽음이 코앞에 왔는데, 어찌 예의만 차립니까. 임기응변으로 살길을 찾은 후, 예의를 갖추어 치상(治喪)해도 의를 해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바로 길(吉)이기 때문에 효(孝)가 아니다. 또한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일은 진실이 아니네.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가 아니고, 진실이 아닌 처신은 못하겠네. 바르게 처신한 후, 그 다음 오는 일에 순응하겠네.”

 

최부는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느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중국 관리의 엄한 문초를 받았다.

가까스로 왜구의 혐의를 벗어나 머나먼 환국의 호송길에 오르는데, 최부의 만신창이의 몸과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한 중국의 관리가 위로하며 몸을 추스르라고 권한다.(표해록 권2, 2월 9일)

 

“막심한 고생으로 몸이 말이 아니군요.”

“내 벗겨진 피부가 회복되지 않은 것은 짠 바다 물에 찌들렸던 것이고, 맨발로 험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발이 이렇게 상했소. 신체발부(身體髮膚)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 했는데, 이처럼 상하게 했으니 나는 참으로 불효자요.”

“만부득이해 그렇게 된 것이니 너무 상심마오.”

 

최부는 환국길 여정에서 들르는 곳마다 그의 충효관, 국가관, 정의관 그리고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의 관리는 물론, 주민들을 감동케 하였다.

급기야는 당시 명나라 조정에 알려져 명 황제를 알현하고 수상을 하기에 이른다.

상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복을 입고 황제를 만나야 하는데, 최부는 상중의 몸이라 상복을 벗을 수 없다 하여 이를 완강히 거절한다.

그러나 명나라 관리의 집요한 설득과, 사세(事勢)의 핍박(逼迫)으로 최부는, 황제를 만나 수상할 때에는 길복으로 갈아입지만, 궐 밖을 나설 때는 상복으로 다시 갈아입는 다는 절충안을 제시하여 이를 관철시킨다.

 

지면의 제한으로 일부분만 소개하였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청년 최부의 원칙의 고수인가.

 

최부는 1504년 연산군 갑자사화 때, 당대의 유학거물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51세의 나이로 애절하게 참수형을 당하였다.

최부를 체포하기 전 형리(刑吏)가 최부를 애석하게 여겨, 점필재의 문하생이 아니라고 한마디, 부인만하면 모면할 수 있다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최부는,

“이 세상에 그러한 유학자가 어디 있으며, 이러한 선비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소.”라며 자신이 김종직의 문하생임을 떳떳하게 밝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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