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보 오오이도 기자에몽(희좌위문)
일본 국보로 정해진 대정호 다완 희좌위문(기자에몽)은 명품인가?
아니면 잡기인가?
一. 序.
처음 도자기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내가 찻사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지금부터 한 15년전 쯤 되는 것 같다. 그로부터 한 두해 쯤해서 일본의 小田榮一이 지은 “당물다완과 고려다완”이란 책자에서 처음으로 일본 국보로 정해진 대정호 다완을 보았다.
처음 책에 실린 사진으로 본 대정호 다완의 느낌은 당당하고 풍만하며 바깥 몸체 중앙에 나뭇잎 문양의 벗겨짐 현상과 굽 부근에 기형일 정도로 산재된 유약의 우그러짐 현상은 과연 저 기물이 일본국보로 정해진 사발인가 라는 느낌과 함께 나를 상당히 당황하고 곤혹케 했었다.
아마 그때쯤을 전후하여 야나기 무네요시가 쓴 “기자에몽 오이도를 보다”란 감상글을 보았던 것 같다.
그 당시 그 글을 읽을 때만 해도 야나기 무네요시의 유려한 문체, 기물에 대한 직관, 도자공예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압도되고 매료되어, 그의 주장대로 잡기였던 그 사발을 이름 없는 우리의 옛 선조 도공이 만들었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 기물을 천하제일의 다완의 위치에 올려 놓은 것은,
오로지 차문화를 사랑하는 옛 일본 차인들의 뛰어난 안목 쯤으로 치부하고 말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 그때 느꼈던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그 기물에 대해 글을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글쓰는데는 재주가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몇자 느낌을 적어 나열해 보기로 했다.
二. 정호다완이란 어떤 사발인가.
정호 다완은 조선 초기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당시 조선에서 사용되었던 밥사발이나 국사발로 추정되며 그 색깔은 노란색에 붉은색, 살색, 황색, 청색이 감도는 비파색의 그릇으로,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존했던 막부시대에 일본 궁정에서 중국의 화려한 천목 다완이나 청자다완을 제치고, 검소하고 소박한 작풍으로 최고의 다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찻 사발로 당시 그 가치는 미곡 몇천만석 또는 한 성과도 맞바꿀 정도라고 비견되었던 사발이였다.
아마 정호다완이 일본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선적사상을 추구하는 그 시대의 분위기나 그 기물의 특성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희소성이란 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십 만점의 그릇이 그들에게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정호다완 형태의 그릇은 그 숫자가 불과 백여점 내외일 정도 극소수였다는 점도 그 중요한 이유이다.
또한 일본내에서 다완을 사고팔때에도 정호다완 만큼은 다른 다완과는 달리 다른 운송수단을 사용치 않고, 사람이 사용하는 가마로 직접 옮겼을 정도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이 기물을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겼는지를 능히 가늠할수 있게 한다.
三. 일본국보로 정해진 대정호 희좌위문은 어떤 사연이 있는 사발인가.
우선 대정호다완이란 정호다완중에서도 그 크기가 가장 크고 당당한 비파색 찻사발로 입지름이 대략 15cm 전후의 일반그릇 형태와 유사한 정호형의 사발이다.
그리고 그 굽은 대나무마디와 흡사한 형태로 되어있는 대나무 굽 형태이며 그릇바깥 하단에는 주걱으로 힘차게 깎은 자국이 있고, 그릇바깥쪽에는 느긋하게 몸체를 도는 물레자국이 있다.
또한, 사발 안쪽으로는 든든한 찻물고임 자리가 있고, 특히 굽부근의 매화껍질 형태의 유약 우그럼짐 현상 등이 특히 볼거리가 있다는 다완을 말한다.
그중 일본국보로 정해진 희좌위문 다완은 대정호 다완중에서도 군계일학으로 꼽히는 가장 유명한 다완으로, 그 대나무 굽은 힘차고 특히 굽의 안팎에 심하게 꼽슬꼽슬한 모양은 이 찻사발을 더욱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한다.
특히, 그자태의 당당함은 모든 사람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갖게 하여 이 찻사발을 사용하는 차인으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다완이다.
이 찻사발은 옛날 오오사카 상인이였던 다케다 기자에몽이 소지했다 하여 그 명칭도 오오이도(대정호) 기자에몽(휘좌위문) 이라고 불리게 된 다완이다. 이하에서는 “휘좌위문”이라 칭하기로 한다.
특히, 이 찻사발은 이 것을 소지한 사람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연이 떠도는 사발로 “이것을 가진者는 재앙으로 종기에 걸리게 된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 사발의 마지막 소장자였던 겟탄(月澤)마저도 종기로 고생을 하게 되자 결국 1818년 마지막 소장자였던 겟탄이 교토 대덕사 고봉암에 이를 기증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천하제일의 찻사발 이다.
四. 대정호 희자위문을 만약 그림으로 비유해서 풀어 본다면 그 실체는 어떠할까?
종교철학자이며 차인이었던 야나기는 그 유명한 기물을 하나의 잡기로서 그저 천박하고 볼품없는 밥사발로 평하며 이를 폄하했다.
그러면서도 이 찻사발을 천하 최고의 명물 위치에 올려놓고 그 가치를 인정한 초대 일본 차인들의 안목에 대해서는 한없이 위대하게 칭송했다.
나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이 천하의 기물을 그림으로 풀어 비유해보면 어떨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 그래서 희좌위문 대정호에 내재되어 있는 조선사발의 고유한 정취를 그림의 기본색으로 하고
- 그리고 그 찻사발의 형태에서 풍기는 무언의 압박감과 당당한 굽의 안팎에서 풍겨나는 용틀임 하는듯한 가이라기의 강력한 인상
- 그릇바깥 중앙에 유약이 벗겨져 나뭇잎 문양을 이루고 있는 형태의 오묘한 풍정
- 끝으로 그릇 전부분에 유약이 떨어진 상태에서 오래 사용함으로써 검게 훼손된 작은 편린들을 화폭에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보기로 했다.
우선 그 기물에서 풍기는 조선의 고유한 정취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에서 풍기는 황토색 짙은 옅은 갈색을 바탕으로 화강암과 같은 질감으로 그 바탕을 그려냈다.
또 대정호에서 풍기는 무언의 압박감과 당당함은 히말라야의 장엄한 능선을 프랑스 종교화가 루오의 거칠고 절제된 검은색으로 산능선과 계곡을 간결히 표현했다.
굽 안팎에서 용틀임 하는듯한 강렬한 매화껍질의 인상은 설악산화가 김종학 화백의 강렬하고 생명력 있는 화필로 살아 움직이는 식물과 곤충을 숲과 계곡사이 중간 중간에 담아 넣었다.
또한 그릇 바깥의 유약이 벗겨진 나뭇잎 문양의 형태에서 풍기는 풍정은 그러한 결점까지도 볼거리로 볼 수 있었던 옛 차인들의 마음의 여유를 이해하기 위해,
이 우환 화백의 “조응”을 표현하듯 그림의 상단 우측 부근에 너무 둥글지도 않고 네모지지도 않은 추상적 달을 그려 넣음으로써 철학적 사유를 담을 수 있는 모양을 여백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유약이 벗겨지고 오래 사용함으로써 전 부분이 검게 변한 부분은 개구쟁이 어린애로 하여금 붓에 먹물을 뜸뿍 묻혀 화폭에 마음대로 한번에 흩뿌리도록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고 당대 최고의 미술 평론가로 하여금 이 그림에 강평을 하도록 부탁하였다고 할 경우 이 경우 평론가는 이 그림을 보고 과연 어떻게 평할지를 상상해 보자.
나로서는 이 평론가가 완성된 그림을 아주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할지 아니면 예전에 우리의 옛 이발소에 걸렸던 이름 없는 키친아트 정도로 평가할지는 잘 모르겠다.
단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평론가가 이 그림이 절대 천박하고 재능 없는 화가가 그린 흔하디 흔한 그림이라 평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당대의 최고의 감식가요 예술 평론가였던 야나기가 이 비범하고 특별한 사발을, 그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키친 아트” 처럼 취급해버린 인식의 착오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五. 야나기 무네요시가 희좌위문 대정호를 잡기의 일종으로 보았던 견해는 과연 옳은 것일까?
우선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 사발을 어느 정도의 잡기로 보았는지를 그의 글 중에서 요약해 보았다.
- 어디를 찾아봐도 이 이상 평범한 기물은 없다 아주 평범한 모습이다. 평범 그이상의 것은 아니다.
- 아주 평범하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보통 사용했던 사발이라 완전히 조잡한 것이다. 전형적인 잡기이다. 형편없이 싼 기물이다.
- 만든자는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다. 개성 등을 자랑할 곳이 없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 누구나 만들었던 것, 그 지방 어디에서나 구할수 있는 것, 유약은 화로에서 가져온 재이며, 물레는 중심이 헐렁한 것이다.
- 유약을 바르고 나서 깎은 것이다. 손은 더러운 채였다. 유약을 쏟아 굽에 흘린 것이다.
- 장인은 문맹이였다. 가마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불을 땠다. 그릇에 모래가 달라붙어있어도 그런 곳에 구애되지 않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 도자기는 비천한 인간이 하는 일로 정해져있었다. 부엌에서 막 사용되던 것이다. 대부분이 부엌에서 막 사용되던 것이다. 설거지마저 깨끗이 하지 않았다.
- 이정도로 흔한 물건은 없다. 이것이 모조품도 없는 천하명기 대명물의 정체이다.
이상의 글들이 야나기가 잡기로 평한 대정호 희좌위문 다완의 실체이다. 이러한 극한의 표현은 단순히 이 기물을 잡기로만 폄하한 것이 아니라 그 기물을 만들었던 우리 선조에 대한 전반적인 비하로까지 보여 질 정도로 그 표현이 거칠어 보였다.
당대의 최고 감식안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야나기가 이 비범하고 특별한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할리 없건만, 이토록 비하하게 만든 숨은 다른 의도는 없었는지 하는 궁금한 생각이 문득 든다.
우선은 야나기의 글 중에서도 공감되는게 사실인 부분도 있다. 그것은 이 기물이 당시 일반 서민이 사용했던 사발이였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당시 사용했던 물레는 중심이 헐렁했을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굽 바닥에는 모래가 달라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기물이고 그 기물을 제작했던 장인이 빈곤한 계층의 사람 이였을 것이라는 점 정도일 것이다.
우린 그의 글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달리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우선 사용했던 사람부터 따져보자.
- 과연 정호다완은 그 당시 가난뱅이나 천민들이 보통 사용했던 사발에 불과할까?
정호다완이 만들어졌던 시점으로 되돌아가보면 당시는 청자는 쇠퇴하고 분청에서 백자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시기였던 만큼 그 사용자는 혹시 당시 지배계층인 양반 계급에서도 사용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게 있어 보인다.
- 또한, 그 기물이 누구나 만들 수 있고 아무렇게나 만들었고 또한 유약이나 태토는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선, 이 기물이 장인으로서 충분한 재능을 가졌거나 최소한 장인으로서 기질을 가졌던 가문대대로 세습된 종사자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또한 그 태토나 유약이 전국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고 단순한 화로재 만으로 그 기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어느정도 어폐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만약, 그렇게 쉽게 그 재료를 구할 수 있는 흔한 것이였다면 전통 찻사발을 재현하기 위해 천 한 봉씨 등 초대 사기장 원로들이 전국을 떠돌 만큼 그처럼 어려운 노고를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 야나기는 그 기물에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것을 일컬어 이는 비천하고 문맹인 사람이 만든 것으로 거의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틀린주장이라고 본다.
당시 그 기물을 만든 사람이 야나기의 말대로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이 이를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비천해서 기물에 이름을 새겨 넣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대체 우리가 우리의 도자기 역사를 되집어 볼때 현존하는 옛 도자기 기물 중에 그 이름이 새겨진 기물이 얼마나 있을까 반문해 보면, 내가 기억하는 한 불과 몇점 되지 않은 것같다.
- 또한 야나기는 이 사발이 작위적이지 않고 꾸밈없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 물건이 경외를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을 가능성은 없는지가 궁금해진다.
사실은 이 사발을 만들었던 장인도 보기 좋고 사용하기 편하면서도 당당한 사발을 만들고자 하는 작위적인 마음과 미적 추구가 없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참고적으로 현재 차 도구에 정심한 도예가 분들도 정호다완이 당시 밥사발로 사용되었느냐,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느냐에 따라, 이 기물이 무작위 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고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그 기물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단지 야나기가 이 사발을 무작위하고 무심하고 사치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 것은,
그의 시각으로 본 정호 다완이 이국적이면서도 조선 기물의 특유한 향취인 가식이 없고 소박하며 활달하면서도 힘차고, 그러면서도 왠지 쓸쓸해보이는 옛 조선고유의 정취가 풍기는 것을 야나기는 무작위하고 무심하고 꾸밈이 없는 작풍으로 보았을 가능성은 없는지 궁금해진다.
이 부분은 찻사발을 만드는 장인이 아닌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 그러면 이에 대한 반증을 일본인자신들이 쓴「인간부흥의 공예」란 글에서 참고해보기로 하자.
정호 다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본질은 그것이 생겨난 배경이나 야나기가 추측한 ”평범한“ ”담담함“ ”소박함“ 같은 성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정호다완 자체에 있다.
야나기는 평범함이라는 한마디로 떼워 버렸지만,
- 사실은 그 모습이 호방하다고 할 정도로 당당하기 때문에,
- 다완이 두터우며 안쪽으로 약간 감싸는 듯한 다완의 윗부분이 입술에 부드럽게 닿아 차를 들기 적합하기 때문에,
- 비파색으로 불리는 그 색조가 말차의 녹색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 깊이 팬 다완의 안쪽 바닥에 말차가 적당히 고이기 때문에,
- 담백한 태도와 두터운 두께감으로 인해 차의 열이 적당한 온도로 손에 전해지기 때문에,
- 또한 그 조형이나 색조가 다회에 쓰이는 여러 가지 다른 기물과 반발 없이 잘 어울리기 때문에 등등
다른 다완에서는 보이지 않는 즉물적인 특성이 오이도 다완을 다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은 아니겠는가.
이점은 “오메이 부쓰”라고 불리는 오이도 다완으로 실제 몇 번인가 차를 타서 마시면서 다른 다완과 비교해볼 기회를 가졌던 필자의 체험에서 나온 느낌이다.
야나기의 “이 얼마나 평범한 물건이가”라는 평에 대해 필자의 첫인상을 말하자면 “과연 뭔가 다른 물건이군”하는 느낌이였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일본 美나 禪의 연구에서 지극히 명망이 있었던 기타가와 모모(미술사가)가 같은 종류의 대정호 다완인 三芳野를 처음보고 느꼈던 감상문을 옮겨 적어본다.
“우선 유약빛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좋다.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으며 인위적이지도 않으면서 지나치게 가라앉지도 않은 색조를 지녔다.
형태도 전체적으로 상쾌하다. 게다가 허리 부분의 곡선은 가슴이 후련해지는 듯하다.
몸체를 받치는 굽의 비례나 형태도 훌륭하며 풍요롭다.
그런 중에 보통 가이라기(매화껍질)라고 하는 불완전한 소성 때문에 생긴 몽글몽글하게 붙은 유약의 변화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그것은 타인이 아닌 나의 눈에도 독특하고 뛰어난 예술품으로 비쳤다.
이런 글을 읽다보면 대정호다완이 최소한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평범하고 조잡한 기물은 아니였던 것이 분명하다.
결국은 이글을 쓰면서 든 생각이지만 야나기 선생이 희좌위문(기자에몽) 다완 만을 염두에 두고 이를 잡기로 피력했다면 그의 견해는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의 견해가 단순히 조선인이 사용했던 사발 전체를 대상으로 피력했다면 잡기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했던 그의 논지로 보아 일응 타당하게 보았다할 여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가 천하의 희좌위문을 조잡하고 평이하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기물로 비하했을 때는 밥사발을 염두에 두고 피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 기물을 천하의 명물로 칭찬 했을때는 찻사발을 염두에 두고 견해를 피력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그가 이 기물을 평이한 잡기로 폄하한 부분은 일응 타당한 것 같아 보이면서도 숙고해본다면 이는 틀린 견해가 아닐수 없다 할 것이다.
六. 야나기 무네요시가 천하의 희좌위문을 잡기로 평가한 것은 실수 였을까. 의도적인 것이였을까? 만약 의도적 이었다면 그 저의는 무엇일까?
우선의 의도성 여부를 따지기 전 이러한 오류가 분석이나 판단의 오해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저의가 있는지를 먼저 따져보지 않을수 없다.
지금까지 이 기물에 대해 참구한 것처럼 이 기물은 절대 평범하고 흔한 기물로 보기에는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다.
만약 야나기가 차인이 아닌 일반인이 였다면 혹은 그가 차인이었다 하더라도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가진 미술사학자나 평론가가 아니였다면,
또는 그가 정호다완을 잡기로 분류할 때 그 정호다완 만을 따로 분류하지 않고 조선에서 가져간 사발 전체를 대상으로 총제적으로 판단했다면, 나 자신도 일응 그가 주장하는 잡기 이론에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나기의 논지는 이 경우 어디에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야나기가 희좌위문이 결코 평범한 기물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진실을 외면한 채 이를 평범한 잡기로 본 진정한 저의는 무엇일까?
실제로 그가 살았던 우리 역사의 암울했던 당시의 시대배경이나 지배민족 상류층의 한 일원이였던 그의 속내를 지금의 내 자신이 추측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래도 한번쯤은 그의 속내를 추정해 보는 것도 일응 흥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발칙한 추정인지는 몰라도 혹여 야나기선생에겐 그들의 선조가 천하제일의 기물로 인정한 희좌위문 대정호가 자국인인 일본인 장인이 만든 기물이 아니라 조선의 옛 장인이 만들었던 기물이라는 점에 혹시 심한 자괴감을 가졌거나 또는 그 기물에 대해 시샘을 느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내심 조선의 장인이 만든 이 기물에 대해 극심한 사랑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그에 상응한 질투심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본은 역사와 전통을 극히 중시하는 나라이다.
따라서 야나기가 당대 일본의 최고의 미술사가라 할지라도 그들의 선조가 내린 평가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려 그 미적인 위치를 절대 감소시킬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이 천하의 대명물을 미개하고 비천한 하층의 조선천민이 아무렇게나 만든 잡기로 격하 평가함으로써 그의 마음속에 깊이 내재된 자괴감이나 질투심을 그다운 방식으로 처리함으로써 해소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조선 장인이 만든 천하의 잡기가 천하의 기물로 인정 받을수 있던 것은 오로지 그들 옛 선조의 비범하고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였다라고 강변했던 것은 아닐까!
사려 깊지 못하고 생각이 미천한 나로서는 이러한 동기 이외에 그 어떤 다른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 상상이 진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한편에 드는 것은 왠지 모르겠다.....
七. 찻사발 희좌위문 대정호는 과연 명품인가? 아니면 잡기인가?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평가주체를 누구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평가의 대상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일본인의 미적관점과 우리의 미적관점이 다른데 따라 그 평가가 다소 틀려질 수도 있다고 본다.
우선 천하의 기물인 희좌위문을 평가대상으로 놓고 밥사발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천하의 명물도 잡기로 전락 할수 있고, 찻사발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때는 천하의 명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 평가의 주체를 누구로 하느냐인데 이에 대한 분류는 첫째는 차문화 생활에 문외한인 일반인이 보는 관점, 둘째 차문화 생활을 즐겨하는 차인이 보는 관점, 셋째 심미안을 가진 차인이 보는 관점에 따라 그 결론이 틀려질 것이라고 본다.
우선 일반인이 보는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나는 가끔 이 대정호 사발이 주는 느낌에 대한 평가를 알아보기 위해 차문화 생활과는 거리가 먼 직장동료들에게 이 기물의 사진을 보여주며,
만약 이 기물을 몇만원에 판다라고 하면 누가 살 사람이 있냐 라고 물어본적이 있다. 이경우 직장동료들은 모두들 시큰둥한 반응으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직후 이 사발이 일본의 국보로 정해진 사발이고 우리 옛 선조가 만든 것으로 천금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하면 그제서야 동료들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저런 그릇이 국보로 정해질 수 있는가 하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확실히 이 기물은 차와 관련 없는 일반인들에게 보여질때는 역시 별볼일 없는 잡기로 비쳐질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사발을 우리의 일반 차인에게 평가를 내리라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나는 아직 차인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 느낌을 물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두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말차를 즐겨하지 않고 일반 녹차만을 즐기는 차인이라면 아무래도 이기물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단 말차를 즐겨하는 차인의 경우, 이 기물에 말차를 담아 마셔보게 하였을 경우라면 확실한 무언가 느낌이 다른 다완이네 라고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이 기물에 대해 명품이라고 평가를 내리는 부류는 역시 차인이면서도 심미안을 갖춘 사람들만이 이를 명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 한국의 차인보다는 일본의 차인들이 더더욱 명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기물에 대한 아름다움을 보는 미감이 우리와는 틀리고 말차문화가 오랫동안 몸에 베여 설사, 깨진 사발이나 흠집이 생겨있는 찻사발의 결점까지도 이를 하나의 볼거리로 인정, 포용할 수 있는 선적사상이 그들 차문화에 바탕이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러면서도 이국적이면서도 소박하고, 당당하면서도 꾸밈이 없고, 무엇하나 거칠 것 없어 보이는 조선 기물의 기풍이 그들을 매료시 킬것임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의 차문화와는 달리 우선 말차를 애용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뿐더러 도자 기물에 대한 미적관점도 그들과 확연히 틀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경우는 설사 자유분방하고 활달하며 거칠 것 없어 보이는 분청과 같은 기물을 사랑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깨어진 그릇이나 흠이 있는 기물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민족적 기질이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선 나 자신의 경우만 해도 예전에는 깨어진 찻사발이나 흠 있는 기물에 대해 지금처럼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 거부감이나 거리감을 가졌던 것 같다.
2006. 11월경 서울일민 미술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가 그의 동료들과 수집했던 민예품 전시전에서 조선과 일본의 각종 민예품을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 전시관에는 일본에서 가져온 야마부시라는 대정호다완이 있었는데 그 찻사발은 전부터 몸통까지 오분의 일 가량이 네, 다섯조각으로 깨어져 금으로 수선한 흔적이 있었다.
예전의 우리였다면 문화 예술에 대한 상당한 이해력을 가진 지금과는달리 이처럼 깨어진 사발을 보았을때 이 그릇을 금으로 수선 보존하기 보다는 그냥 아무데나 주변에 버렸을 가능성이 훨씬 컸으리라고 본다.
이것은 불완전하기 보다는 완성된 기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우리의 기질탓 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옛차인들이 우리의 선조가 만든 옛 기물에 심취되었던 것처럼, 만약 우리의 현대 차인들에게 본인이 마음에 드는 훌륭한 찻 사발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우리 차인은 지금 우리의 사발보다 더 화려하면서 채색도 뛰어나고 단아한 자태의 굽을 지닌 일본의 라쿠다완 물데로 성형하지 않고 저화도에서 구운 일본의 찻사발을 선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는 해본다.
역시 문화는 최근의 한류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예술적 아룸다움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명품이나 잡기냐는 각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을 달리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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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매공 작성시간 10.12.17 말차를 일상으로 마시는 자가 많지 않으니, 실사구시로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것은 머리에서 나오니 아니고
야나기는 일제강점기의 통치국 일원이니, 우리 것을 판단하기엔 구별이 있고
日人이 좋다고 하니 좋다고 두고, 韓人은 우리의 그릇을 판단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눈이 오니 강아지가 뛴다고 같이 뛰는 꼴을 보지말고, 진정 우리 것을 찾아가자는 것이 少人 생각입니다. -
작성자당당하게2 작성시간 10.12.17 즐겁게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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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천지연 작성시간 10.12.17 비평은 찻그릇에대한 비평이여야 하지않을까요? 야나기님의 찻그릇에대한 이야기를 저는 논문이라고 칭하겠습니다. 그 논문이 있지 않았다 했을적에 이글을 올리신님의 찻그릇에대한 미학의 기준은? 야나기님의 논문에 영향없이 그보다 더 훌륭한 이론이 학회에 의하여 채택되였을적에, 지금 야나기님의 이론보다 더 높이 평가되였을적에 위 올리신 글이 인정받을수 있을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단지 본인의 학문적으로 정립된 이론없이 비평하는것은 봉황의 날개를 타고 같이 올라보려는것으로 비춰질수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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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치는 아헤 작성시간 11.05.25 광개토태왕 요동요서에서 우물정자 깃발휘날리며 호령하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우째서 정호가 되어버렸는지 안타까웁이 앞습니다. 일본인이 다도할때 무궁화 한송이 꺾어화병에 꽂아놓고 정호(우물정자 다관. 이도라함)에 말차 한사발 마시며 싸울애비(사무라이)들은 무슨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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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고수사랑 작성시간 17.12.10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