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끔 다니는 전통찻집 여주인께서 올려놓으신 시를 퍼왔습니다.
'펄펄 떨어지는 꽃잎을 향해 손을 내미는 어린아이처럼(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구)' 매일 즐겁게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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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 가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언뜻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석회증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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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규의 답시
*** 흥이 나서 제가 즉흥적으로 지었습니다. ㅎㅎ
봄이 와서 온천지가 푸르러
거지도 얼굴펴고 사는데
성복아 너만은 힘겹겠구나
하필이면 금년에 지독히도 감미로운 봄이 와서
아스팔트 밑에 산 채로 묻힌 풀씨들이
봄비가 두드리는 소리에 흐득여 울며
이루지도 못할 꿈에 오히려 빗소리가 미운 것처럼
아니 아니
정말은 뛰쳐나가 흠뻑 젖고 싶지만 이도 저도 안돼서
지옥같은 시간을 혀깨물며 견디듯
성복아
힘겹겠구나
돼지멱따는 나른한 마을
먼지낀 유리창같은 풍경에 갇혀 질식할 것 같은 시간
오늘은 나하고 함께 세차장에 가지 않으련?
고무호스 손에 잡고 허공에 마구 흩뿌려
갈기갈기 흩어지는 물보라
길길이 날뛰며 멀리멀리 퍼뜨리고
달려들어 둘이 한번 흠뻑 젖어보게
끝나면 주차장옆 대폿집에서
안 죽을만큼 퍼마시고 쥐어뜯고 몸부림치게.
ㅎㅎ 성복아
석회에는 소주가 제격이야 팍 녹는다구.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김은희1 작성시간 08.03.06 회장님! 절대 시인으로 등단하시면 안되어요. 더 바빠지시니까... 그저 숨은 시인으로 만족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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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고영희 작성시간 08.03.07 두 분 시를 읽고 나서 저도 답례로.....낭창대는 새소리 따라 어여쁜 봄은 저 만치 오는데 시인아.. 너 만은 목이 메어 이 길을 지키고 있구나 시절 인연 따라 오고가는 봄 향기에 취해 아지랭이 가물거리는 들녁엔 이른 들풀 제 흥에 겨워 들썩이는데 두 시인이 부르는 봄 노래에 나 역시 흠뻑 젖어 봄 맞이 갈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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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용자 작성시간 08.03.08 와우,,,,여기에도 봄, 저기에도 봄...우리 전학센 카페에도 봄이 오고 있습니다. 정말 멋진 화답글을 읽어보며 미소짓습니다. 회장님 ~ 은희1샘님의 충고를 들으셨지요?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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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설재풍 작성시간 08.03.08 또미를 묻기 위해 땅을 파는데 오래도록 잊었던 흙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람 향기는 땅에서 나는 법이야. 저녁에 딸아이가 행복한 사람, 타샤튜더란 책을 얼굴에 들이민다. 그 속엔 자연과 사람, 동물이 하나 되어 멋진 세상을 만들었다. 옛날 미래소년 코난이란 에니메니션 영화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류 최후의 날에도 땅은 봄향기를 잃지 않고 새싹을 피웠으니까. 모든 문제의 근원은 우리가 땅으로부터 멀어진 까닭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은 문명을 추구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래서 회색 빛 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러나 봄은 결코 멀리 있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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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설재풍 작성시간 08.03.08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십여 년 전 광주에서 뚝방길을 거닐었던 그 순간을... 그 때 봄은 따스한 햇볕과 함께 이름 모를 꽃을 피워대었고 그 향기는 얼마나 정신을 아득하게 했던가. 나는 그 길을 거닐며 정말 나를 잊었고 행복한 기분에 젖어서 몽롱해졌었다. 그리고 재 작년인가. CA시간에 학교 뒷 동산에 올랐다. 햇살은 따스하게 내렸고 오솔길은 고즈녁하게 열려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나는 한 없는 자유와 행복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나의 어린 시절 뒷동산과 학교 길에서 맞이했던 또다른 봄이었다. 아마 나의 미래도 그런 것이리라. 봄이 익어가는 그런 곳에서 이성복 시인처럼 시를 음미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